Chapter 11.
***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움찔대다가 이내 눈이 떠졌다. 흐릿한 시야에 젖은 모래사장과 넘실대며 밀려오는 파도가 보였다.
서규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로 옆 비치 베드에서 책을 읽고 있던 최성열이 기척을 느끼고 옆을 쳐다봤다.
“일어나셨어요?”
서규하는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한 뒤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저물어 가는 석양과 그 빛을 품고 넘실대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잠이 솔솔 와서 그대로 눈을 붙였던 게 기억났다.
“몇 시나 됐어?”
“곧 있으면 6시입니다. 안 그래도 슬슬 깨울 생각이었는데 먼저 일어나셨네요.”
“엄청 많이 잤네.”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해변으로 나왔으니 무려 세 시간이나 낮잠을 잔 셈이었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슥슥 정리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다.
“싸요! 싸요! 강원도 찰옥수수 1개 2천 원! 2달라! 언니 한 번 먹어 봐~ 5개 남았어!”
홀린 듯 그쪽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딱 봐도 현지인인 남자가 한 손에 하나씩 옥수수를 든 채 목청을 높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현지인이 저렇게 유창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강원도 찰옥수수’나 ‘조개로 만든 커플 팔찌’ 등을 외치는 모습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이내 서규하는 옆을 돌아보며 최성열에게 물었다.
“안 사 줄 거지?”
“당연하죠.”
안경을 밀어 올리는 모습에 엄격함이 가득했다.
다시 생각해도 최 비서는 어머니의 수하가 분명했다. 본래 이런 곳에 오면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온갖 먹거리들을 섭렵해 줘야 하는데, 대체 어머니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길거리 음식에는 눈길조차 주지 못하게 했다. 행여나 탈이 나면 큰일이라는 게 이유였다.
맞는 말이긴 한데,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던 먹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질 못하니 아쉽긴 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따돌릴 수도 없었다. 여권에 용돈까지 볼모로 잡힌 데다가 귀찮다고 핸드폰도 집에 놔두고 온 바람에 꼼짝없이 계속 같이 있어야만 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포기가 빠른 성격인 게 이럴 땐 도움이 됐다. 먹음직스러운 가판대 위의 음식을 애써 외면하며 걷는 동안 최성열은 핸드폰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3일 내내 발 도장을 찍고 있는 식당에서 오늘 저녁도 해결할 예정이었다.
밤이 되어도 후텁지근한 날씨는 여전했다. 포만감 넘치는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마주 오는 사람들을 피해서 걷다가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밥을 먹었으면 당연히 후식으로 남은 배를 채워 줘야 했다.
호출을 받고 몸을 일으킨 최성열이 트레이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테이블 위에 놓이는 음료를 본 서규하는 설핏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것만 마시면 안 질려?”
최성열은 제 몫의 잔을 들면서 눈도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녁마다 같은 식당을 찾는 도련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야 처음부터 크림새우 때문에 여기로 온 거고. 녹차라떼는 아무 데서나 마실 수 있잖아.”
게다가 이 더운 날씨에 뜨거운 음료라니,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 일이었다.
서규하가 시킨 메뉴는 망고빙수였다. 한 손에 각각 빙수 그릇과 스푼을 들고, 의자에 몸을 묻다시피 한 채로 느긋한 디저트 타임을 가졌다.
핫 플레이스에 있는 카페답게 많은 사람들이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매장엔 신나는 템포의 음악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한 숟갈씩 먹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드러났다. 빈 그릇을 내려놓고 통유리창 너머의 야경을 바라보는데 문득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시선을 거두며 정면을 바라보자 최성열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배에 손을 올리고 계셔서요.”
“터질 거 같아서 그래. 많이 먹어서.”
조이는 고무 밴드를 슬쩍 끌어 내린 다음 부른 배를 문지른 것뿐인데, 불필요한 오해를 사 버린 듯했다.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이내 최성열은 손끝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좌우로 목을 꺾는 모습이 꽤나 피곤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말 그대로 놀고먹기만 하는 자신과 달리 최성열은 틈틈이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보다 일찍 자거나 늦게 일어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애꿎은 뒷목을 손바닥으로 슥슥 쓸다가 서규하는 큰맘 먹고 입을 열었다.
“형.”
“네.”
“미안. 나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와서.”
뜬금없는 사과에 최성열은 멈칫했다. 이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하기는요. 덕분에 이른 휴가를 왔는데 저야 좋죠.”
“퍽이나 좋겠다.”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해외까지 나와서 다 큰 새끼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데 좋을 리가 없었다.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다. 평소라면 입 밖에 내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불현듯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형은 결혼 안 해?”
뜬금없는 질문에도 최성열은 당황하지 않고, 준비한 사람 같은 멘트를 입에 담았다.
“좋은 사람만 있으면 언제라도 할 생각이 있긴 합니다.”
“그래? 꼰대 말로는 형한테 눈독 들이는 사원들이 많다던데.”
“도련님만 할까요.”
“나한테는 립 서비스 안 해도 돼.”
서규하는 거듭 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낮잠도 실컷 잤고, 리조트로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으니 여기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잠시 후, 바로 등 뒤에서 드르륵하고 의자 빼는 소리에 이어 한국어가 들렸다.
“뭐 마실래?”
“딸기스무디 큰 거.”
그러든 말든 서규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닷가뿐만이 아니라 어딜 가도 한국 사람들은 꼭 있었다.
계속 창밖만 보고 있는데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매장 바로 앞을 지나갔다. 순간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여자의 배가 풍선처럼 부른 것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
그 순간, 잊고 있던 현실이 거대한 형체가 되어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며 서규하는 어두워진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잘 키울 수 있을까?”
“네?”
“아니, 그 전에 멀쩡하게 낳을 수 있을까? 재수 없으면 애 낳다가 죽을 수도 있다던데.”
말 속에 담긴 불안함을 감지한 최성열은 서둘러 서규하를 안심시켰다.
“제가 알아보니 남자 오메가들도 보통은 무탈하게 출산하고, 또 도련님은 건강체 그 자체니까 더더욱 괜찮을 겁니다. 예정일까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그러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때 애 엄마인 알파가 도련님 옆에 있으면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큰 버팀목이 되어 줄 텐데.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막내 도련님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최성열도 적잖이 놀랐다. 남성체 오메가 자체가 드문 데다가 아이까지 갖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사모님으로부터 여행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최성열은 숙소와 비행기 예약뿐만 아니라 현지의 의료 시스템 및 종합병원 번호까지 미리 알아 두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동안 서규하는 굳은 얼굴로 애꿎은 테이블만 노려봤다. 방금 봤던 임산부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직은 딱히 티가 나질 않지만, 이제 곧 그런 식으로 배가 불러 올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그냥 애 낳을 때까지 여기 있을까?”
충동적으로 꺼낸 말인 것을 알기에, 최성열은 쓸데없는 대답으로 언짢음을 더하는 대신 현명하게 말을 돌렸다.
“슬슬 숙소로 돌아갈까요?”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당연히 다른 누군가를 부르는 줄 알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뒤에서 후다닥 튀어나온 누군가가 앞을 막아서다시피 했다.
‘뭐야?’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그와 달리 상대는 몹시도 반가워하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맞네요. 뒷모습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노랗게 탈색한 개털 같은 머리카락에 검은 뿔테 안경, 자그마하고 아담한 체구. 얼굴을 봐도 전혀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서규하는 짜증스러움을 숨기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람 잘못 봤어요.”
하지만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더욱 활짝 웃었다.
“잘못 보긴요. 저 제이예요.”
퍽 자신 있는 투로 하는 말이 이어졌지만 다시 봐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신종 사기꾼 아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또 한 번 앞을 막아서더니 안경을 휙 벗으며 앞머리를 슥슥 내렸다.
“아 진짜, 이래도 모르시겠어요?”
“……아.”
그제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서규하는 여전히 미간을 구긴 채로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이런 꼴로 있어?”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놈은 한때 클럽에서 공을 들이던 그 꽃돌이였다. 야릇한 색기를 풍겨 대는 용모는 어디로 가고, 샛노랗게 탈색한 머리카락에 거저 줘도 안 입을 알로하 셔츠 따위를 걸치고 있으니 알아보는 게 이상할 일이었다.
더는 용건도 없겠다, 그대로 곁을 지나치려고 하는데 또 한 번 붙잡는 말이 이어졌다.
“잠깐만요.”
“또 왜.”
대놓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서규하와 달리 꽃돌이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암만 봐도 아는 사람 같아서 계속 뒷모습을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생각도 못 한 말이 들리더라고요.”
“……!”
쿵, 일순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최성열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빠르게 끼어들었다. 서규하의 어깨를 감싸며 돌아서는 순간, 꽃돌이의 입술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당연히 베타인 줄 알았는데……. 오메가였나 봐요. 그것도 임신까지 한.”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무슨 개소리냐며 잡아떼야 되는데, 언어 회로가 마비된 사람처럼 입술조차 달싹일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나선 사람은 최성열이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서규하를 본 그는 “가시죠.” 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걷는다는 자각도 없이 이끌리듯 발을 떼는데, 등 뒤에서 외치듯 하는 말이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입 무겁거든요.”
***
침대에 걸터앉은 서규하의 두 다리가 초조하게 떨렸다. 객실 바닥 무늬를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돌겠네…….”
입에서는 당연한 듯이 욕이 흘러나왔다. 좀 전에 카페에서 봤던, 빙글빙글 웃어 대던 꽃돌이의 면상이 머릿속에서 가실 줄을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놀린 게 화근이었다. 어쨌거나 외국인데 설마하니 아는 사람이, 그것도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 같은 카페 바로 뒤쪽 테이블에 앉아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순전히 제 잘못이기에 다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연거푸 한숨을 내쉬다가, 서규하는 고갤 돌려 최성열을 바라보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의 얼굴도 심각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짜 애 낳을 때까지 여기 처박혀 있을까?”
최성열은 아까와 달리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비자 문제도 있고, 설령 가능하다 해도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을 테니 상당히 불편할 겁니다.”
“하…….”
“마음 편하게 생각하세요. 사적인 정보는 아는 게 없는 데다, 클럽이야 안 가면 그만이니까요.”
말처럼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 얼굴만 알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맞긴 하지만, 녀석이 상대하는 고객 중에 지인이 다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문은 안 낼 테니까.’
조소가 절로 흘렀다. 술안주로 입 털기에 딱 좋은 가십거리인데, 콜보이 주제에 퍽이나 입에 지퍼를 채우고 있겠다 싶었다.
“지금이라도 손쓸 방법은 없을까?”
“없지는 않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반대입니다. 설령 소문이 퍼진다 해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니까요.”
“그게 먹히겠어?”
“당연히 먹히죠. 도련님은 알파나 오메가 페로몬에 휘둘리질 않으니까요. 어차피 1년 정도는 클럽 근처에도 못 가실 테고, 혹시 그때 들먹이는 사람이 있어도 무시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자신 있게 하는 말에 잠깐 귀가 솔깃했지만, 이내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재수 없는 새끼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지금 자신이 딱 그 꼴 같았다.
Trrr- Trrr-
적막을 깨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최 비서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네, 사모님.”
힐끗, 서규하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엄마가 또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네.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네. 3일 뒤에 돌아가는 걸로 예약해 뒀습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서규하는 최 비서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엄마면 나 좀 바꿔 줘.”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핸드폰이 건네졌다. 귓가로 가져가자마자 서규하는 본론을 꺼냈다.
“한 달만 더 있다 갈게.”
- 뭐?
“한 달 더 있다 가겠다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러자 예상대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 안 그래도 걱정이 돼 죽겠는데, 얘가 지금 생각이 있어 없어? 허튼소리 하지 말고 당장 들어와.
“걱정은 뭔 걱정이야. ……애 가진 게 뭔 유세라고.”
- 너, 진짜 엄마 화나게 하는 말만 자꾸 할래?
“…….”
- 절대 안 되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규하 너, 혹시 차영이랑 싸웠어?
엄마가 뭐라 하든 덤덤하게 듣고 있다가 서규하는 순간적으로 인상을 확 굳혔다.
“그 새끼 이름은 갑자기 왜 나와?”
- 며칠 전에 집으로 찾아왔었어. 너랑 다퉜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었어?
있었다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지우겠다’고 말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또다시 열불이 났다. 개새끼.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는데.
“몰라. 암튼 좀 더 있다 갈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끊어.”
잔소리 폭격이 날아들기 전에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아예 전원을 꺼 버리는 서규하를 보면서 최 비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더 있다 가신다고요?”
“……어. 그래야 될 거 같아.”
뒤늦게 밀려오는 잡생각에 두 다리가 또다시 달달 떨렸다.
‘그 새끼가 집을 찾아갔다고? 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차영은 지금도 자신을 베타로 알고 있을 테니, 지 새끼를 가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터였다. 그렇다고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리도 없…….
“씨발.”
서규하는 서둘러 핸드폰 전원을 다시 켰다. 기본 화면이 뜨자마자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성열아.
“이차영한테 말 안 했지?”
- 여보세요?
“나야. 아들 목소리도 못 알아들어? 아무튼 나 애 생긴 거, 이차영한테 말 안 했지?”
- 안 했어. 뜬금없이 그런 말을 뭐 하러 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손끝으로 눈가를 꾹 누른 뒤에 서규하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마. ……내가 오메가인 거 알면 존나 비웃고 무시할 새끼니까. 끊을게.”
어찌어찌 급한 불은 끈 것 같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카페에서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었다고 거듭 후회하면서 서규하는 굳은 표정으로 최 비서를 쳐다봤다.
“형, 나 노트북 좀 쓸게.”
“비번 풀어드릴게요.”
잠시 후에 노트북을 건네받은 서규하는 자판에 대고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색창에 친 글자는 바로 ‘해외 출산’이었다.
***
수더분한 인상의 중국 남자는 마주 보고 서 있는 장신의 남자들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차영은 웃는 얼굴로 기꺼이 그의 악수에 응했다. 남자가 먼저 자리를 떠나자, 총괄 책임자로 이번 출장을 이끌었던 진 사장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옆을 돌아봤다.
“드디어 집에 갈 일만 남았네요.”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에 이차영도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덕분에 많은 걸 보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러면 바로 공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1분 1초를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답게 진 사장은 곧장 걸음을 옮겼고, 이차영을 비롯한 일행들이 그 뒤를 따랐다.
준비된 세단에 오르자, 차는 포럼이 열린 컨벤션 센터를 빠져나가서 대로로 진입했다. 이차영은 소리 없는 한숨을 흘리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사흘 내내 아침저녁으로 몇 시간씩 대회의실에 처박혀서 연구원들이 하는 발표를 듣기만 했더니 나중에는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힘든 출장이었느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었다. 막말로 평사원일 때도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머릿수만 채우는 출장은 가 본 적이 없었다. 미리 언질을 받았던 것처럼, 출장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협력 업체 및 현지 연구소의 임원들과 얼굴을 익히기 위해서 동행한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차창만 바라보고 있는데 옆자리에 동승한 진 사장이 말을 걸었다.
“이제 곧 DS 사업부에서 볼 수 있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큽니다.”
한번 대화가 시작되니 꼬리를 물듯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말이 좋아서 대화이지, 진 사장이 화두를 띄우고 그에 대한 설명 또는 견해를 내비치면 이차영은 간간이 맞장구를 치는 것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출발과 정차를 반복하며 목적지를 향해서 착실히 나아갔다. 대형 쇼핑몰을 지나 고가도로로 접어들 무렵, 수트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차영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중요치 않은 연락이면 무시하려 했지만,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정 실장님.”
- 일전에 말씀하신 자료 준비됐습니다.
그 말에 이차영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곧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니 몇 시간만 지나면 바로 자료를 받아 볼 수 있겠지만, 안달이 나서 그 시간조차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메일로 보내세요. 원본은 파기해도 좋습니다.”
- 알겠습니다, 도련님.
전화를 끊은 이차영은 거듭 차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더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차는 공항에 도착했고, 이차영은 수속을 끝내자마자 라운지로 향했다.
노트북을 열고 서둘러 전원을 켰다. 로그인해서 메일함을 누르자 새로 온 메일이 몇 통 있었다. 이차영은 다른 메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 실장이 보낸 메일을 서둘러 클릭했다. 첨부 파일을 연 그는 빠른 속도로 보고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분량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행적도 예상했던 것에 비해 훨씬 단순했다. 대부분 집과 카페만을 오가는 가운데, 한 번씩 종합병원에 들른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최근 기록에는 변화가 있는 게 보였다. 일주일 전쯤 부모님 집으로 갔고, 며칠 뒤에 호텔에서 김모란을 만났다는 기록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으로 찾아가서 만났던 서규하 어머니의 말처럼, 최 비서와 함께 출국했다는 문장이 보고서에 적힌 마지막 기록이었다.
“…….”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읽은 뒤에 이차영은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러길 잠시, 다시금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와 만난 기록이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을 가지고 만난 것으로 이름이 나와 있는 여자는 김모란이 유일했다. 기대에 부합하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자연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뜬금없이 임신 이야기를 꺼냈던 거나, 지울 거라는 말에 불같이 화를 냈던 태도로 봐서 서규하가 사고를 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만난 기록이 없을까. 전화 통화로만 이야기가 오갔나? 아니면 벌써 수습을 끝낸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 지금 떠올린 가정들은 말 그대로 자신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니면…….
‘그럴 리가 없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서둘러 머릿속 생각을 지워 냈다. 김모란이 여자인 것은 맞지만, 여자인 동시에 알파였다. 설령 두 사람 사이에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알파가 베타의 아이를 가지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한껏 굳은 얼굴로, 이차영은 답답하게 목을 조이는 듯한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엉망인 가운데 문득 김모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는 핸드폰을 꺼내서 김모란의 번호를 찾았다.
불과 불처럼 서로 이기려 들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았다. 마침 며칠 전에 만났다고 하니, 어쩌면 자신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손에 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Trrr- Trrr-
통화 연결음은 꽤 오래 지속됐다. 톡, 톡, 습관처럼 검지 끝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는 동작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괜히 핸드폰을 떼서 액정을 쳐다보는데, 마침내 김모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왜.
단 한 마디만으로도 못마땅함이 팍팍 묻어났지만 이차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잠깐 통화 가능해?”
- 가능하니까 받았지. 갑자기 웬 전화질이야.
“저녁에 잠깐 만나자. 할 말이 있어.”
- 나한테? 난 들을 말 없는데?
“급한 일이야.”
지금은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시간 많이 안 뺏을 테니까 장소만 정해 줘.”
- ……오늘까지 처리해야 되는 일이 있어서 바빠.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알았어. 늦게라도 괜찮으니까 꼭 연락 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쉬운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전화를 끊은 이차영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말없이 숨만 내쉬고 있다가 한 번 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이토록 더디게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끔찍했다.
***
결국 그날 이차영은 김모란을 만나지 못했다. 귀국하자마자 회사 근처로 찾아가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1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김모란은 곧장 전화를 받았지만, 건설 현장에 중대한 문제가 생겨서 급하게 창원으로 내려가는 중이라는 말을 듣게 됐다. 올라가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고, 이후로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굳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차영은 며칠째 저조한 기분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계속해서 무언가가 미묘하게 예상을 비켜 가며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번 주 금요일까지 각자 메일로 기획안 제출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팀장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마침내 회의가 끝났다. 기다렸다는 듯 일어서는 팀원들을 따라서 이차영도 서류철을 손에 든 채 사무실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출장 때문에 자리를 비웠더니 어김없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다. 집중해서 자료를 정리하는데 옆자리의 곽민섭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차영 씨.”
“네.”
“죄송한데, 경하물산 윤 과장님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분명히 저장해 놨는데 안 보이네요.”
“잠시만요.”
핸드폰을 켠 이차영은 어렵지 않게 연락처를 찾아냈다. 메모지를 꺼내려고 서랍을 열었다가, 이내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잠시 후에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곽민섭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혹시 제가 없는 동안 제 자리에 다녀간 사람이 있습니까?”
“글쎄요. 딱히 기억나는 건 없는데,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아닙니다.”
이차영은 다시금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을 바라보는 표정은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방금 메모지를 꺼내려고 책상 서랍을 열었을 때, 안에 넣어 둔 물건들이 미묘하게 흐트러진 것을 발견했다. 열고 닫아서 자연스럽게 움직인 게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안쪽에 똑바로 넣어 둔 포스트잇이 뒤집혀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손을 댄 흔적은 또 있었다. 연필꽂이에 꽂혀 있어야 할 펜도 보이질 않았다.
유력한 용의자는 뻔했다. 달칵거리며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결국 이차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홍준의 책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역시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수기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는 박홍준의 손에 몹시 익숙한 펜이 들려 있었다.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채 이차영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홍준 씨.”
박홍준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띠꺼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요.”
“지금 쓰고 있는 그 펜, 제 거 아닙니까?”
박홍준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했다가 다시금 위로 움직였다. 한결 더 짜증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메모할 일이 있어서 잠깐 빌려 썼어요. 자요.”
“…….”
“가져가세요.”
건들건들 한 손으로 볼펜을 내미는 태도에, 결국 이차영의 표정이 변했다.
뭐한 알파 같았으면 본능적으로 상대방을 겁박하는 페로몬을 내뿜고도 남았을 법한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충동이 들었지만, 장소를 상기하고는 이성으로 내리눌렀다. 하지만 언짢음마저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닙니까?”
“……뭐라고요?”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고 물었습니다. 내 물건을 남이 함부로 쓰는 게 싫다고 일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겁니까, 아니면 이해력이 달리는 겁니까?”
어느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느닷없는 언어 공격에 박홍준은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고, 모욕감에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잘하면 한 대 칠 기세네요.”
“…….”
“여기 있으니까 가져가시라고요. ……씨발,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들으란 듯 중얼거리며 박홍준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바쁜 척하며 쓸데없는 표를 그려 대고 있으니, 잠시 후에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후우.’
아닌 척하면서 한껏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박홍준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존심 때문에 계속 긁어 댔지만, 내심 정말로 주먹이 날아들까 봐 긴장하던 차였다.
뻑적지근한 뒷목을 주무르면서 박홍준은 옆자리 직원에게 냉큼 말을 걸었다.
“방금 표정 봤어요? 진짜 한 대 칠 기세던데.”
대꾸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마침 근처의 부하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부팀장이 한숨을 내쉬고는 박홍준을 나무랐다.
“왜 싫다는 짓을 계속해?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 말에 박홍준은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볼펜 좀 빌려 쓴 게 그렇게 잘못한 겁니까?”
“차영 씨 말 귓등으로 들었어? 볼펜이 문제가 아니라, 말도 안 하고 멋대로 자기 물건 쓰는 게 싫다잖아. 그리고…….”
잠깐 말을 멈췄다가 부팀장은 다시 입을 움직였다.
“난 홍준 씨가 무슨 배짱으로 차영 씨한테 이러는지 모르겠어. 혹시 이직할 계획이 있기라도 해?”
“절대 아니죠. 어떻게 들어온 회산데. 근데 갑자기 이직은 왜…….”
“그게 아니면 차기 사장님한테 이렇게 행동할 이유가 없잖아. 관심 끌고 싶어서 뺨 때리는 전략도 아니고.”
순간 박홍준은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되묻는 말이 튀어나왔다.
“차기 사장님이요? 누가요, 설마 이차영이요?”
그 말에 부팀장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또 누가 있겠어? 소신껏 행동하는 건 좋은데, 직위를 떠나서 남한테 피해 주는 짓은 안 해야지. 팀 분위기도 좀 생각하고.”
부탁을 빙자한 충고를 남긴 뒤에 부팀장은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굳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다가, 박홍준은 다급하게 옆자리 직원의 팔을 붙잡았다.
“방금 부팀장님이 하신 말씀 알아들었어요?”
“네?”
“차영 씨가 차기 사장 어쩌고 한 말 있잖아요.”
“말 그대로죠. 이태한 사장님 아들이니까, 착착 엘리트 코스 밟고 올라가서 언젠가는 사장 명함 달겠죠. 듣자 하니 경쟁자도 없다는 거 같던데.”
이차영이 사장 아들이라고?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박홍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말 좀 해 주지 그랬어요. 씨발, 다들 어떻게 알고…….”
옆자리 직원의 손이 멈칫했다. 이내 경멸스러움이 담긴 표정이 박홍준을 향했다.
“진짜 남 탓 오지시네요.”
“네?”
“신입 사원들 첫 출근 했을 때 부장님이 먼저 선수 쳐서 알려주신 거 기억 안 나세요? 본인 기억력이 뭣 같아서 까먹은 걸, 지금 어디다 대고 화풀이를 하는 겁니까?”
그 말에 박홍준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신입 사원들 첫 출근 했을 때라고? 왜 난 그때 못 들었지?
“아.”
그러다 뒤늦게 생각난 사실이 있었다. 그날 박홍준은 월차를 썼고,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어서야 기획부에 들어온 신입 사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 씨발….”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만 비볐으면 탄탄대로가 펼쳐질 수도 있었는데……. 바로 옆에 있던 황금 동아줄을 못 알아보고, 썩은 동아줄 취급했던 자신을 패 죽여 버리고 싶었다.
***
“뭐 해. 안 마셔?”
“마셔야지.”
친구의 재촉에 이차영은 들고 있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소문난 주당들답게 독한 술을 스트레이트로 들이켜는 친구들과 달리 이차영은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시금 잔을 내려놓았다. 절친한 친구의 생일이라서 모임에 나오긴 했지만, 술자리를 즐길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와 달리 파티의 주인공인 김성한은 반쯤 취해 홍조를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비러 갈 사람?”
“부르면 되지 뭘 또 내려가.”
“오늘은 일반인 애들이 땡겨서. 내려갈 사람 없어?”
“가자, 가.”
몇 명이 문을 열고 나가고, 룸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됐다. 맞은편에서 술을 홀짝이던 윤재혁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없어.”
“말해 봐. 들어 줄 테니까.”
“진짜 없어.”
주기적으로 모여서 어울리긴 해도, 술잔을 기울이며 가십이나 주고받을 뿐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유대감은 찾아볼 수 없는 관계였다. 비단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 멤버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평소였으면 술을 마시는 재미라도 있겠지만 오늘은 전혀 당기질 않았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오는 증상은 지금도 여전했다. 가뜩이나 계속 일이 꼬여서 신경도 날카로운데, 빈속에 술까지 마셨다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애들 부를까?”
“그러든가.”
“둘?”
“난 빼 줘. 금방 갈 거야.”
“밤새 달리는 거 아니었어?”
“오늘은 생각 없어.”
무성의하게 대답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다 뜻밖의 부재중 기록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 좀 하고 올게.”
방음재로 된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고막을 후벼 팠다. 이차영은 표정을 구긴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휴게실을 빙자한 흡연실로 들어간 그는 문을 닫은 다음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차영아.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이차영은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전화 주신 걸 이제 봤어요. 규하한테 연락 왔어요?”
-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내가 먼저 해 봤어.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한 달 정도 더 있다가 오겠다고 하네.
“하…….”
탄식 같은 한숨이 마른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지금도 하루가 1년처럼 길게만 느껴지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간 더 있다 오겠다는 말을 들으니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한 달……이요?”
털썩, 벽에 등을 기대며 맥빠진 음성으로 되묻자 정은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빨리 들어오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 그리고 차영이 네가 찾아왔다고 말했는데, 귀국하면 따로 연락하겠다고 하네.
소리 없는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서규하가 퍽이나 그런 말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애꿎은 머리카락을 헝클고는 한껏 인상을 구긴 채 돌아서는데, 휴게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 안녕하세요!”
대뜸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이 이차영의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에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누군지 알아챘다. 한때 서규하와 함께 쓰리썸을 즐겼던, 제이인가 뭔가 하는 바텀이었다.
다른 때였으면 인사 정도는 받아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대꾸 없이 지나치려는데, 맹랑한 놈이 앞을 가로막다시피 하며 말을 붙였다.
“혼자 오셨어요? 파트너 없으시면…….”
“비켜.”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을 자르며 이차영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또 한 번 앞이 가로막혔다.
순식간에 굳어지는 표정을 보면서도 제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대 피우고 싶어서 몰래 들어왔는데, 돌아서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잔챙이들과는 급이 다른 최상급 고객을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지 마시고, 파트너 없으시면 저랑 같이 가요. 저 끝내주게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교태롭게 웃으며 유혹했지만 조각처럼 완벽한 남자의 얼굴에는 불쾌감만이 가득했다. 그 탓에 제이는 애가 탔다.
‘룸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몇십이 그냥 떨어지는데……. 어떻게 구슬리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제이는 서둘러 남자의 팔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죠? 오메가 친구분도 저한테 푹 빠져서 계속 찾으셨던 거요. 저 오늘 한 번도 안 해서,”
“오메가 친구?”
말이 잘렸지만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외려 ‘걸렸다.’ 싶은 생각에 제이는 활짝 웃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끔 쓰리썸 같이 했던 그분 있잖아요. 글렌드로냑 좋아하시고, 귀에 피어싱 많이 하신 분이요. 오메가인 거 알고 완전 놀랐는데, 아무튼…….”
“……잠깐.”
“네?”
“잠깐 닥치고 있어 봐.”
눈앞의 남자는 몹시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구른 사람답게 제이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그럼 지뢰 밟은 건데.
속으로 초조해하며 눈치를 살피는 동안에도 이차영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가끔 쓰리썸 같이 했던 그분 있잖아요. 글렌드로냑 좋아하시고, 귀에 피어싱 많이 하신 분이요.’
눈앞의 바텀이 언급한 사람은 서규하였다. 같이 쓰리피를 즐기고, 클럽에 올 때마다 글렌드로냑을 즐겨 마시는 사람은 서규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바텀이 한 다른 말이었다.
‘아시죠? 오메가 친구분도 저한테 푹 빠져서 계속 찾으시던 거요.’
‘오메가인 거 알고 완전 놀랐어요.’
……오메가라고? 서규하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서 개소리야.”
“네?”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던 바텀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정수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차영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방금 네 입으로 그랬잖아. 서규하가…….”
“…….”
“오메가라고.”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을 내뱉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박 수가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굳어 버린 듯이 멍했다. 흡사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해답을 내려 주길 바라는 것처럼 눈앞의 놈만 바라보고 있으니, 마침내 조심스럽게 하는 대답이 이어졌다.
“네. 그, 우연히 알게 됐는데, 저 그런 거에 편견 하나도 없어요. 알파면 어떻고 베타면 또 어떻,”
“우연히 알게 됐다고?”
“……네.”
대답하면서도 제이는 죽을 맛이었다. 입 싸게 떠벌린 것도 아니었다. 막말로 베타를 가운데 두고 박아 대는 변태는 자기들이면서, 어떻게든 손님을 꼬셔 보려고 슬쩍 흘린 게 그토록 큰 잘못인가 싶었다.
남자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굳은 정도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선득할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운 기운이 숨통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이가 눈앞의 남자와의 잠자리를 선호하는 이유는 끝내주는 테크닉과 팁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계를 가질 때 손을 올리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처음으로 그게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다는 것을 눈치로 깨닫고는, 어떻게든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자 조심하며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제가 친구랑 여행을 갔다 왔거든요. 거기서 우연히 그분을 뵀는데, 다른 분이랑 대화하는 걸 듣게 됐어요.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변명은 됐으니까 본론만 말해.”
뱀 앞의 개구리 같은 기분을 온몸으로 느끼며 제이는 하얗게 질린 채로 말을 이었다.
“진짜 우연히 들은 게 다예요. 제가 아는 그분이 맞는 것 같아서 보고 있었는데, 그, 아무튼 그러고 나서 바로 헤어졌어요.”
“…….”
이차영의 시선은 여전히 눈앞의 놈에게 박혀 있었다. 잠깐 굳어 있던 머리가 그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
널리고 널린 여행지 중에서 안면이 있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하물며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를 당사자 몰래 엿들을 가능성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찝찝함이 들었다.
몇 번 같이 뒹군 적이 있으니 서규하의 성질머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눈치가 빠삭해 보이는 놈이, 당장 돈 몇 푼 벌려고 감당도 못 할 거짓말을 늘어놓지는 않을 터였다. 설령 그렇다 해도 하필이면 ‘형질’을 언급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그것도 누가 봐도 베타인 녀석을 오메가라고 말하는 짓은 뜬금없이 지어낼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대충이나마 생각을 정리한 이차영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딴에는 잘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눈에 띄게 걸리던 부분이 있었다.
“말해.”
“네?”
“갑자기 말 돌렸잖아. 원래 하려던 말, 계속해 보라고.”
“그런 적 없어요. 방금 말씀드린 게 전부인, 크흑!”
제이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 깜짝할 새에 떠밀려 벽에 부딪힌 등에서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다. 발뒤꿈치가 들릴 정도로 멱살을 틀어쥔 채 이차영은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말해.”
“지, 진짜 이게 다예요. 잠깐 멈춘 거는 침 삼키느라 그랬, 으윽!”
급기야 두 발이 완전히 땅에서 떨어졌다. 호흡이 차단되며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 살려……!”
멱살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지그시 목을 조이는 손아귀 힘에 이제는 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에 비해 이차영은 소름 끼칠 정도로 태연했다. 제 손을 떼어 내려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어떠한 동요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잠시 후, 이차영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말할 생각 있으면 고개 끄덕여.”
여전히 숨통이 틀어막혀 있으면서도 제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목을 옥죄던 힘이 사라짐과 동시에 작은 몸뚱이가 추락하듯 널브러졌다.
“쿨럭, 쿨럭! 큽! 하아, 하아….”
눈물 콧물, 기침이 한데 뒤섞여 마구 터져 나왔다. 죽을 것처럼 괴롭지만, 와중에도 살고자 하는 본능이 우선이었다. 입을 크게 벌린 채 숨을 마셨다 내뱉기를 반복하다가, 제이는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라며 벽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바로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놀라니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치아가 멋대로 따닥따닥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도 생각만 그러할 뿐이었다. 도망을 치기는커녕, 얼어붙은 몸뚱이로는 손가락 하나 제 뜻대로 까딱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상대하는 손님들 중에서 가장 매너가 좋고 젠틀한 알파인데, 그래서 오늘도 꼬시려고 했던 건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크흡…!”
또 한 번 숨통을 틀어막는 악력이 느껴졌다. 아니, 물리적으로 가하는 힘이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운 것은 맞지만 제 몸 어디에도 남자는 닿아 있지 않았다.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있으니,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리는 명령이 이어졌다.
“말해.”
“하, 할게요.”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자칫하면 정말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제이는 보라색으로 질린 입술을 한 채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분, 이, 임신하신 것 같았어요.”
남자는 몇 초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반응을 보였다.
“임신?”
이번에야말로 제이는 울고 싶어졌다. 무감정한 시선을 보내다가, 느닷없이 피식 웃으며 되묻는 모습이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무서웠다.
좋다고 말을 걸었던 몇 분 전의 행동을 미치도록 후회하면서 제이는 그때 들었던 말을 필사적으로 떠올려서 실토했다.
“애, 애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을 확실하게 들었어요. 낳을 때까지 계속 있고 싶다는 말도 했고요.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시길래, 얼른 쫓아가서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어요.”
“…….”
“지, 진짜 이게 다예요.”
살얼음판 위에 앉아 있어도 이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숨조차 마음대로 못 쉬고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잠시 후에 거듭 시선을 마주하며 묻는 말이 이어졌다.
“……서규하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
제발 믿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인데 착각했을 가능성은?”
“절대 없어요. 얼굴도 그렇고 눈에 띄는 피어싱도 그렇고, 무엇보다 저를 알아보셔서 대화까지 했는데 다른 사람일 리가 없어요.”
“…….”
“저, 정말이에요.”
그때, 달칵하는 소리를 내며 휴게실 문이 열렸다. 제이는 이끌리듯 고개를 돌렸고, 웬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절로 화색이 돌았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다음 눈동자만 돌려 앞을 봤다. 죽일 것 같은 기세로 겁박하던 남자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해 보였다. 이때가 기회다 싶은 생각에, 제이는 눈치를 살피며 앉은 채로 슬금슬금 문을 향해서 몸을 움직였다. 어느 정도 안전거리가 확보되었을 때, 다급하게 팔을 뻗어 문을 열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든 말든 이차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콜보이로 하여금 억지로 내뱉게 했던 말들이 엉망으로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서규하가 오메가라고? ……임신까지 했다고?’
몇 번을 곱씹어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릴 적, 차를 마시던 어머니들 사이에서 형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서규하의 모친이 ‘자신의 막내아들은 베타’라고 했었던 것이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해도 서규하는 오메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균을 웃도는 키와 다부진 체격은 결코 오메가의 그것이라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또 있었다. 섹파가 된 이후로 관계를 맺을 때 은연중에 페로몬을 흘린 적이 몇 번 있는데, 서규하는 단 한 번도 오메가다운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러트 사이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섞는 내내 힘들어하는 기색을 느끼긴 했지만, 지나친 쾌감 때문이지 페로몬 탓은 아니었다. 반대로 자신이 서규하의 페로몬을 감지한 적도 없었다.
억제제로 차단하거나 갈무리를 한다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우성 알파인 자신만 해도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자연스레 페로몬을 흘리는데, 서규하의 집은 물론이고 본가에 있는 녀석의 방에 들어갔을 때도 오메가 페로몬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는데…….
“…….”
이내 이차영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서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랄 만큼 흉흉한 기세로 걸어가면서 이차영은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진위 여부를 파악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지하 주차장은 조용했다. 간혹 차들이 드나드는 가운데 이차영은 운전석에 앉은 채로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한껏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침묵을 깨며 벨 소리가 울렸고, 잠깐 액정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 부탁하신 것들 알아봤습니다.
“보고하세요.”
태연한 척 입을 열었지만, 또다시 멋대로 빨라지는 심장 박동은 막을 길이 없었다. 숨죽인 채 귀 기울이고 있으니 사무적으로 하는 말이 이어졌다.
-서규하 님은 법적으로 오메가로 등록된 것이 맞으며, 17세 때 페로몬 분비 억제술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됐습니다.”
가까스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던 것도 잠시, 고장 난 것처럼 뛰어 대는 심장 부근을 내리누르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확실하냐는 물음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합법과 불법을 아우르는 루트는 물론이고, 정부 부처의 윗선에도 연줄이 닿아 있는 정 실장의 정보수집력을 생각하면 진위 여부를 되묻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다.
‘서규하 님은 법적으로 오메가로 등록된 것이 맞으며, 17세 때 페로몬 분비 억제술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하…….”
머릿속이 먹물처럼 검게 변해 버리는 순간이었다.
정 실장에게 전화를 걸 때만 해도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손님이 재산이나 다름없는 콜보이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지어낼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서규하가 오메가라고? 그 서규하가……?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그에 부합하는 정황 증거는 이미 곳곳에 있었다. 베타치고는 놀랄 만큼 뒤가 잘 젖던 것도, 박을 때마다 황홀할 정도로 달라붙던 내벽도, 러트 사이클이 온 알파를 사흘 내내 받아 낸 것도.
우스울 정도로 훤히 보이는 일인데, 녀석이 베타라는 편견에 갇혀서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눈에 보이는 일은 또 있었다.
서규하가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성을 내고 자신의 연락을 씹기 시작한 것은 그날부터였다. 자신이라면 아이를 지우게 할 거라고 대답했던, 바로 그날부터.
깨닫자마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만일 콜보이의 말도 사실이라면, 서규하가 임신한 것이 맞다면,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일 확률이 백 퍼센트였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만큼 이차영은 서규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녀석의 성격상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우선 에둘러서 말을 꺼냈을 텐데……. 그런 녀석에게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캄캄한 시야만큼이나 머릿속도 온통 새카맸다. 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속으로 신음만 삼키고 있는 그때, 오늘 들었던 또 다른 말이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뚫고 번개처럼 스쳐 갔다.
‘애 낳을 때까지 계속 있고 싶다고 했어요.’
감고 있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어느새 심장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애를 낳을 때까지 계속 있고 싶다’는 말은, ‘애를 낳는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침착하자. 제발.’
도저히 침착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날뛰려는 감정을 잠재우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간 생각이 마침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일단은 서규하를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행여나 녀석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 버리기 전에, 지금 당장.
이차영은 곧바로 핸드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끝에 마침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통화 상대는 바로 서규하의 어머니였다.
- 여보세요?
“이모, 저 차영이예요. 늦은 시간에 다시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 늦기는.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근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질문을 듣자마자 기다린 것처럼 대답했다.
“혹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부탁? 나한테?
“네. ……지금 규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른 휴가를 받게 됐는데, 더 늦기 전에 겸사겸사 만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운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사실은 이런 거짓말이 아니라 ‘규하가 임신한 것을 이제 알게 됐고, 자신의 아이가 틀림없다’는 말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성의 힘으로 간신히 참아 냈다. 아들의 임신 여부를 정은희가 알고 있으면 일이 수월하겠지만, 혹시라도 모르고 있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됐든 지금 당장 1순위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서규하를 찾아서 얼굴을 보고,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다.
- 어디에 묵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는데……. 잠깐만 기다려 봐. 성열이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
“네. 아, 그리고 제가 찾아갈 거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서프라이즈로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거든요.”
- 알았어. ……그런데 말이야.
“네.”
- 저번에 다퉜다고 했던 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 혹시 우리 규하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건 없어?
“전혀 없어요. 백 퍼센트 제가 잘못한 일이라서……. 가서 사과하고, 규하랑 같이 들어올게요.”
그러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이 담긴 말이었다. 어찌어찌 만난다 쳐도 과연 서규하가 순순히 자신과 함께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 그래. 그럼 이모는 고맙지. ……사실 규하가 몸이 안 좋아서 조심해야 되거든. 혹시 성질부리고 그래도 차영이 네가 이해 좀 해줘. 부탁할게.
임신 때문에 그러냐는 물음이 절로 떠올랐지만, 이차영은 이번에도 용케 참아 내고 뒤늦게 대답했다.
“네. 그럼 바로 부탁 좀 드릴게요.”
- 그래. 들어가.
공손한 척 전화를 끊자마자 눈빛이 달라졌다. 시동을 건 이차영은 곧바로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당장 여권을 챙겨서 공항으로 갈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