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
오랜만에 김모란한테서 연락이 왔다. 처음엔 분명 문자에 답장만 대충대충 보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약속이 잡혀 있었다.
약속 장소는 일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식당이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가기 전, 서규하는 고갤 숙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아직 겉으로 보기에는 임신한 티가 전혀 나지 않지만, 이제 곧 만나게 될 상대가 보통이 아닌 만큼 괜히 몸을 사리게 됐다.
직원이 안내해주는 대로 걸어가자 김모란이 먼저 와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김없이 태클이 날아들었다.
“매번 기다리게 하지, 응?”
“네가 일찍 온 거잖아. 맨날 시간 딱 맞춰서 오더니.”
이번에도 으레 그럴 줄 알고 무려 5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곤 핀잔뿐이니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이내 서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너별로 마련된 각종 요리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음식 담아 올게.”
스타트는 한식이었다. 접시 가득 수북하게 고기를 담아 온 서규하는 앉자마자 폭풍흡입을 시작했다. 먹다 보니 한 접시가 순삭이었다. 마지막 한 젓가락까지 야무지게 입에 밀어 넣은 뒤에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또 일어섰다.
이번에는 좀 더 행동반경을 넓혀서 중식 코너까지 섭렵했다. 어김없이 접시 가득 넘치도록 담아서 돌아오니 마침 김모란도 의자에 앉는 중이었다.
달그락하며 맞은편에 놓이는 접시를 보자마자 김모란은 눈을 크게 떴다.
“며칠 동안 굶었어?”
“아니. 아침도 먹었는데.”
굶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틈만 나면 허기가 드는 것은 지금도 여전했고, 그만큼 열심히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근데 접시가 왜 그 모양이야?”
“배고파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서규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빠른 속도로 접시를 클리어했다. 목이 막혀 주스를 마시려고 손을 뻗다가, 일순 눈에 들어오는 장면에 멈칫했다.
이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남의 접시로 타박을 줬을 땐 언제고, 김모란은 두 손으로 양갈비를 잡고 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너야말로 며칠 굶은 거 아냐?”
“먹고 살려고 돈 버는 건데 굶긴 왜 굶어.”
“나한테는 존나 뭐라 하더니…….”
“기억 안 나. 음식 더 갖고 올 거면 양갈비 하나만 더 갖다 줘. 중국에서 먹었던 거랑 맛이 완전 똑같아.”
근처 식당들이 해만 지면 문을 닫네, 맛은 형편없네 어쩌네 하면서 성질을 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순 개뻥인 모양이었다. 서규하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바라는 대로 양갈비를 담아 와서 놓아 주고, 제 몫의 접시도 넘치도록 가득 채워 왔다.
그렇게 장장 한 시간이 넘도록 식사는 계속됐다.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까지 클리어한 김모란은 세상 다시없을 우아한 자태로 입가를 닦은 다음 커피를 주문했다.
서규하는 커피 대신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잔뜩 퍼 와서 자리에 앉는데, 김모란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야.”
“어.”
“왜 깠어?”
“뭐?”
고개를 들자 웃음기 없이 담백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김모란과 눈이 마주쳤다.
“왜 깠냐고. 선보는 거.”
한마디가 더해졌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드라마 속 여배우처럼 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김모란이 툴툴댔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너희 어머니가 선 자리 제안했잖아. 근데 왜 거절했냐고.”
그제야 서규하는 김모란의 말을 이해하고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상대가 나였으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는 사람 통해서 너희 어머니한테 바람 넣어 달라고 부탁했어.”
……김모란이 엄마한테 바람을 넣었다고?
서규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정말 힘들게 찾아낸 여성체 알파라는 말을 듣긴 했었다. 김모란도 알파니까 조건은 맞는데……. 그렇다는 건 김모란도 내가…….
“이해했나 보네.”
“……!”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서규하는 흠칫하며 고갤 들었다.
김모란의 시선은 계속해서 서규하를 향하고 있었다.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조금 더 진중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 알고 있었어.”
“…….”
“……네가 오메가인 거.”
이번에야말로 서규하는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김모란이 픽 웃음을 흘렸다.
“지금 존나 못생겨 보여.”
평소였으면 대번에 반박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라는 단어만이 둥둥 떠다녔다.
표정만 봐도 지금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는 듯 김모란이 말을 이었다.
“예전에 백화점에서 네 지갑 주운 적 있잖아. 그때 신분증 보고 알았어.”
당시에는 김모란도 적잖이 놀랐다. 지갑의 주인이 서규하인 걸 알았을 때는 기막힌 우연에 피식 웃음을 흘렸지만, 이름 밑에 적힌 고유번호를 본 순간 천천히 표정이 변했다. B로 시작되어야 마땅할 자리에 알파벳 O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서규하가 오메가라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금 신분증을 확인했지만, 사진과 이름은 틀림없이 제가 아는 그 서규하가 맞았다.
덕분에 김모란은 드물게 업무 외적인 일로 깊은 고민에 잠겼다. 며칠 뒤, 지갑을 돌려주려고 서규하를 만났던 날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려다가 직전에 마음을 바꿨다. 만일 서규하가 정말로 오메가라면, 슬슬 정략혼을 들먹이기 시작하는 집안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본인도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모란은 친구로서 서규하를 꽤나 좋아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아홉 번째 생일날, 그 무렵 이미 세기의 라이벌이었던 이차영이 ‘내 친구도 같이 왔다’면서 누군가를 데리고 생일 파티에 참석했는데, 그 친구가 바로 서규하였다.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은 ‘웃기는 새끼’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헤 벌리길래 ‘저 새끼도 내가 알파라서 그렇구나.’ 생각하고 주먹을 그러쥐었는데……. 웬걸,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서규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얼빠 기질이 충만해서 자기 눈에 예쁜 사람에게 몹시도 약했다. 이차영과 함께 있으면 입으로는 계속 툴툴대면서도, 틈만 나면 몰래 얼굴을 힐끔대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그때부터 제 안의 서규하는 ‘웃기는 꼬맹이’로 자리 잡았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편안하고 허물없는 친구’로 격상됐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은 ‘생각보다 꽤 괜찮은 남자’라고 누구에게든 말할 수 있었다.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친구로 지낸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 상상이 잘 안 가긴 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집안 어른들이 밀고 있는, 누군지도 모르는 개뼈다귀 같은 남자 오메가를 데리고 살 바에야, 서규하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나았다.
“…….”
줄곧 아래를 보고 있던 서규하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넋 나간 멍청이처럼 앉아 있더니 이제야 정신이 좀 돌아온 모양이었다.
“……김모란아.”
“왜, 서규하야.”
“네 뒤통수 한 대만 세게 후려쳐도 될까?”
뜬금없는 말에 김모란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금세 이해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꿈 깨. 네가 오메가인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 까먹을 거거든. 아예 두개골에 새겨 버릴까?”
“하아…….”
긴 한숨과 함께 서규하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김모란의 표정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생각보다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이미 씨가 말라 사라진 줄 알았던 양심의 가책이 깃털만큼 느껴졌다. 하지만 이쪽도 결코 어쭙잖은 마음으로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식어 버린 커피로 목을 축인 뒤에 김모란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조바심은 감추고, 이성적으로 제안하는 척하는 목소리였다.
“지금이라도 마음 바꿀 생각은 없어?”
“뭐?”
“상대가 나인 거 알았잖아. 나 정도면 너희 부모님도 좋아하실 텐데.”
재수 없긴 해도 맞는 말이었다. 상대가 김모란이었다고 생각하니,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며 호들갑을 떤 것도 이해가 갔다.
“……좋아하시겠지. 근데 안 돼.”
“왜?”
왜긴. 배 속에 애가 있으니까.
입이 찢어져도 밝힐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자한테는 관심이 없다는 말로 에둘러 거절하려는데, 김모란이 한발 더 빨랐다.
“쇼윈도 부부라도 상관없어. 섹스리스 부부도 괜찮고.”
연속으로 날아드는 직구에 서규하는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야, 그게 지금 여기서 할 말이야?”
“못 할 건 또 뭐야? 성욕이나 식욕이나 한 끗 차인데.”
서규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도로 다물고 말았다.
원래도 여자한테는 면역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김모란은 그중에서도 탑 오브 탑이었다. 다들 우아하게 식사를 즐기는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섹스리스 어쩌고 하는 말을 입에 담는 애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진짜 생각 없어?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 이쪽을 향했다. 그에 서규하도 장난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미안.”
“진짜 싫다는 거지?”
“어.”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소용없는데, 그래도?”
“어.”
“이혼하면 엄청난 재산을 거저먹을 수 있는데, 그래도?”
“어.”
더는 꼬드길 명분이 없었다. 김모란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야.”
“왜.”
“뒤통수 한 대만 때려도 돼? 존나 세게.”
어느덧 은근한 장난기가 떠오른 표정이었다. 서규하도 덩달아 픽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안 되지. 오늘 네가 나한테 작업 건 거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까먹어. 아예 뇌 주름에 새겨 버릴까?”
“뒤질래?”
마지막엔 늘 그렇듯 티격태격하며 밖으로 나왔다.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김모란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갔다 와.”
서규하는 순순히 대답했다. 오른손은 저도 모르게 복부로 올라갔다. 뜻밖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느라 잠깐 잊고 있던 포만감이 이제야 확 밀려왔다.
‘앉을 데 없나?’
주변을 둘러보자 프런트 데스크 맞은편에 소파 몇 개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서규하는 망설임 없이 그리로 걸어가서 빈자리에 착석했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그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걸친 채 생각 없이 앞을 보고 있으니 잠시 후에 김모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여기 있어? 먼저 간 줄 알고 놀랐잖아.”
“다리 아파서.”
이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 있는 출입문으로 나가려는데, 김모란이 갑자기 “어.” 하는 소리를 내면서 서규하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저 사람, 이차개 아냐?”
뜻밖의 이름에 서규하는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김모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서규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같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러자 정말로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호텔 내 상징 같은 조형물 앞에서, 멀리서 봐도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차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놈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에는 웬 여자가 수줍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여자의 정체는 김모란의 입을 통해서 밝혀졌다.
“뭐야. 맞선 파투 났다고 들었는데, 둘이 계속 만나고 있었나 보네?”
일전의 기억이 멋대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차영이 선을 본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김모란이었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가며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서규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 사람이 이차영 맞선 상대였어?”
“맞아. 멀리서 보니까 잘 어울리긴 하네. 나연이가 백배 천배 더 아깝긴 하지만.”
서규하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꽤나 잘 어울렸다. 이상한 통증이 찾아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가슴 안쪽이 서늘한 것 같기도 하고, 뻐근하게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멋대로 움직인 손이 가슴께를 꾹 눌렀다. 혼잣말로 툴툴대던 김모란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서규하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서 훼방이라도 놓……, 야. 너 왜 이래?”
김모란은 금세 눈을 크게 뜨고 서규하의 안색을 살폈다. 그새 누가 밀가루라도 던지고 간 것처럼 창백하게 변한 얼굴이 보였다.
“어디 안 좋아?”
“……괜찮아. 나가자.”
서규하는 그대로 김모란의 손목을 붙잡고 반대편 출입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와서도 걱정 어린 잔소리는 계속됐다.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더니,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 댈 때부터 알아봤다’고 눈을 흘기는 김모란의 등을 떠밀어서 간신히 먼저 보냈다.
김모란과 헤어진 뒤에 서규하는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걸어갔다. 곧바로 출발하는 대신 한껏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이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대기 시작했다.
방금 봤던 장면이 멋대로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됐다. 조형물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이차영이 분명했다. 굳이 김모란의 말이 아니었어도,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자신이 이차영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함께 서 있던 여자도 덩달아 생각났다. 사실 얼굴은 희미하지만, 멀리서 봐도 가녀린 체격에 부티가 좔좔 흐르는 모습이었다. 이차영과 선을 볼 정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살판났네.”
비꼬며 내뱉은 혼잣말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이쪽은 술도, 담배도, 섹스도 못 하고 고자처럼 살고 있는데, 지는 호텔에서 여자나 처 만나고 다녀?’
으득, 세게 씹은 입술이 찢어지며 피 맛이 번졌다.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 낸 뒤에 서규하는 그제야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머잖아 차가 신호에 걸렸다. 그 틈을 타서 라디오를 켠 뒤에 볼륨을 한껏 높였다.
DJ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 시간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눈은 전방의 신호를 보고 있어도 머릿속에는 금세 딴생각이 차올랐다.
누가 봐도 한껏 갖춰 입은 차림새로,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
차에서 내린 이차영은 주차 전담 직원에게 키를 건넨 다음 서둘러 호텔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여유를 갖고 출발했지만,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히는 바람에 5분 정도 늦고 말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예약자 이름을 확인한 직원이 길을 안내했다. VVIP 전용 룸의 문이 열리자,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이 모두 착석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들의 얼굴을 본 최태선이 먼저 말을 건넸다.
“차영이 왔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생각보다 많이 막혔어요.”
부친의 맞은편, 빈자리에 앉은 이차영은 곧장 유리잔으로 손을 뻗었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자마자 모친의 염려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못 본 새 얼굴이 반쪽이 됐네. 일이 많이 힘들어?”
“아뇨. 살이 좀 찐 거 같아서 식단 조절하고 있어요.”
이차영은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은 살이 찌기는커녕 지난 2주간 체중이 4kg 넘게 줄었다. 눈썰미 좋은 어머니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기에, 대답할 말을 미리 생각해 둔 참이었다.
“식단 조절도 좋지만, 몸 상하지 않게 잘 챙겨 먹어. 다른 어떤 것보다 건강이 최우선이니까.”
“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직원이 웨건을 밀고 들어왔다. 이태한이 앉은 자리부터 시작해서, 각자의 자리에 첫 요리가 담긴 접시가 놓였다.
“……!”
그와 동시에 이차영은 굳은 표정으로 숨을 참았다. 고개는 저도 모르게 옆을 향했다. ‘맛있겠다’며 좋아하던 이예영이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오빠?”
“……아냐.”
말과 달리 표정은 더 딱딱하게 굳었다. 참았던 숨을 내뱉고 마신 순간, 접시에서 올라오는 시큼한 소스 향이 코를 훅 찔렀다.
“먹자꾸나.”
이태한의 주도하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전채 요리를 우아하게 한 입 맛본 최태선은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이 까다로운 이예영도 맛있다면서 부지런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오직 한 사람, 이차영만이 전채 요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곁들여 나온 빵으로 배를 채웠다.
“뭐 해, 아들?”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모친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계속 저염식으로 먹었더니 맛이 좀 강하게 느껴지네요.”
“그래? 엄마 입에는 괜찮은 거 같은데……. 안 맞으면 억지로 먹지는 말고.”
결국 이차영은 랍스터 냉채에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접시를 반납했다. 이후로도 원인 모를 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소스가 끼얹어진 스테이크에서는 육류 특유의 냄새가 심하게 났고, 해산물 모둠은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
하지만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계속 멀뚱히 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마지못해 입 안으로 욱여넣은 다음 숨을 참은 채로 재빨리 삼키기를 반복했다.
‘차라리 체했다고 할걸.’
후회를 거듭하면서 곤욕이나 다름없는 식사를 이어 갔다. 이태한이 와인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맞은편의 아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거의 그대로인 접시를 보고는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음식이 영 별로인가 보구나.”
“아뇨, 잘 먹고 있습니다.”
말과 달리 이차영은 더 이상 식기를 들지 않았다. 어서 빨리 다른 가족들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데 부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만간 임원 인사가 있을 예정이야.”
“네.”
어느 계열사든 수장인 사장단 인사부터 확정한 뒤에 임원 및 사원 인사 조정이 차례로 시행되었고, 전자 계열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친이 드는 빈 유리잔을 본 이예영이 서둘러 두 손으로 와인 병을 잡았다. 한 번 더 목을 축인 뒤에 이태한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인사이동 때 DS 총괄상무로 가게 될 테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어조는 부드러워도 명백한 통보가 깃든 말이었다. 모두의 놀란 얼굴이 이태한을 향했다. 웬만한 일에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이차영도 이번만큼은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CE가 아니라 DS라고요?”
이태한은 홀로 평이한 어조로 아들의 말에 대답했다.
“정 부사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냈어. 그리고 몇 년 만에 대규모 승진 인사가 있을 예정인데, 지금 네가 하는 걸 보니 이참에 자리를 빨리 잡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하니 말이다.”
이차영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회사 전체 실적의 3/4에 육박하는 영업 실적을 올리는 분야인 만큼,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DS 부문의 임원직을 반드시 거친 뒤에 총괄 대표 이사직까지 오르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다소 갑작스럽긴 해도, 부친의 말대로 시일이 당겨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이어진 말이었다.
“내일부터 심천에서 반도체 포럼이 열린다더구나. 뻔한 자리이긴 해도, 눈도장을 찍기에는 적합하니 같이 다녀와. 임원 회의 때 미리 언급해 뒀으니 진 사장이 알아서 잘해 줄 거다.”
“내일이라고요?”
“갑작스럽긴 하지. 그래도 때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다 생각하고, 이번만큼은 내 말대로 해. 사흘 일정이라 하니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대답이 정해져 있는 일이었기에, 굳은 표정을 하고도 부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
“하아…….”
이차영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세면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습관처럼 짓는 미소는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찌푸린 미간에 날카롭고 예민한 눈빛을 한 남자가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식사를 했더니 기어이 속에서 탈이 났다. 말이 좋아 식사이지 먹은 게 거의 없다 보니 올라오는 것도 없었다. 헛구역질만 지겹도록 해 대다가, 그나마 속이 좀 진정된 상태였다.
티슈페이퍼를 신경질적으로 버린 뒤에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또 한 번 인상이 구겨졌다. 기껏 토기를 가라앉히고 나왔는데, 호텔 로비에 가득한 시그니처 향 때문에 또다시 속이 메슥거렸다.
한껏 굳은 표정으로 출입문을 향해서 빠르게 걷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앞을 막아서다시피 하면서 이름을 불렀다.
“차영 씨?”
기억에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맞선 이야기가 오갔던 송나연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수줍은 듯 말을 거는 사람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이차영은 마지못해 표정을 풀고 그녀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볼일이 있어서 오셨나 봐요. 식사는 하셨어요?”
“네.”
평소였으면 인사치레로 같은 질문을 되돌려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금세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송나연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듣기 좋은 말도 반복되면 질리기 마련인데, 만나는 사람마다 안색을 지적하니 좋을 리가 없었다. 눈치 빠른 송나연은 지나가던 사람을 굳이 붙잡은 이유를 빠르게 입에 담았다.
“그땐 정말 감사했어요. 차영 씨가 먼저 거절해 주신 덕분에 잘 넘어갈 수 있었어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식사라도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요.”
이차영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송나연을 바라보았다. 일전에도 잠깐 했던 생각이지만, 다혈질적이고 괴팍하기로 소문난 송 사장에게 이런 딸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행여나 송 사장님 귀에라도 들어가면 서로 곤란해질 겁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서로 잊는 걸로 하죠. 저 또한 전혀 미련 없는 자리였으니, 미안하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송나연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네. 정말 감사해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남긴 뒤에 이차영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답답하게 목을 조이던 넥타이 매듭부터 헐겁게 끌어 내렸다. 폐부 가득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자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익숙한 세단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직원들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교대하듯 운전석에 오른 이차영은 곧바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차창에 비치는 얼굴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하며 가다가 광장 앞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렸다. 주말이라 그런지 유동 인구는 상당했다.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웬 꼬맹이가 엄마 손을 잡은 채로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 아이를 따라서 눈길이 움직였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아이의 왼손에 들려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에 시선이 꽂혔다.
“…….”
꼴깍,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정작 본인은 울대가 움직인 것도 모르고 계속 그 꼬맹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뒤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액셀을 밟으며 다시 출발했다. 머릿속에 잡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착실하게 운전을 하는 와중에 느닷없이 하얀 아이스크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실 이차영은 디저트류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코스 요리로 나오면 가볍게 맛을 보거나, 업무 중 환기가 필요할 때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마시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방금 그 꼬맹이가 먹던 아이스크림이 머릿속에서 가실 줄을 몰랐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은은하게 달콤한 맛을 떠올리니 입 안에 군침이 확 돌았다. 며칠간 종적을 감췄던 식욕마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이차영은 비장한 표정으로 깜빡이를 넣고 차선을 변경했다. 급작스럽게 목적지를 변경한 그의 차는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이차영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금세 연결음이 끊기며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은밀한 곳에서 조력자가 되어 주는 정 실장이었다.
- 네, 도련님.
“사람 좀 찾아 줬으면 합니다.”
- 네. 말씀하십시오.
“이름은 서규하, 나이는 28살입니다. 집 주소랑 핸드폰 번호는 문자로 넣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만났던 여자들도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한 달 내에 만난 여자가 있으면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얼마나 오래 같이 있었는지 자세한 보고 부탁합니다.”
-네.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차영은 한 가지 요구사항을 더 덧붙였다.
“알려 주는 집의 대문과 거실 창문이 잡히게끔 카메라 설치하세요.”
참고 기다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어제까지 3일 연속으로 퇴근하자마자 서규하의 집을 찾아갔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여자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쾌감이 뒤섞인 초조함이 확 밀려왔다.
더는 여유를 부릴 겨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행방을 찾아내서 어떻게 해서든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카메라는 제 핸드폰으로 연결하면 됩니다.”
- 네, 도련님.
어떤 요구나 명령을 해도 토를 다는 법이 없는 사람답게 충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전화를 끊은 이차영은 식품관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정 실장에게서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메시지가 온 것은 그로부터 대략 30분이 지난 뒤였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규하는 지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슬금슬금 움직인 오른손이 복부로 향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올 때부터 아랫배가 뻐근하더니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불만 있으면 말로 해, 인마.”
배를 내려다보며 말했지만 대답이 들릴 리가 없었다. 그대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서규하는 깍지 낀 두 손을 베개 삼아 벤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오랜만에 김모란을 만났고, 무슨 별이 세 개라는 호텔 뷔페에서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맛있는 걸 먹고 왔으니 응당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게 맞는데,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한숨을 내쉬며 모로 돌아누웠다. 이유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호텔에서 우연찮게 목격했던, 이차영이 맞선 상대였다는 여자와 함께 있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개 쌍놈의 새끼.”
분노 섞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분하고 화가 났다. 만나면 부어라 마셔라 할 게 뻔해서 이쪽은 친구놈들 연락도 피하고 있는데, 똑같이 사고를 친 이차영은 주말에 호텔에서 여자나 만나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Trrr- Trrr-
정적을 깨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더듬더듬 찾아서 액정을 보니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서규하는 미련 없이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본래도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는 잘 받지 않을뿐더러, 지금은 모든 게 귀찮기만 했다.
전화는 두 번 걸려 오지 않았다. 그대로 숨만 내쉬며 누워 있는데 불현듯 어떤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나 갔다 올까?’
예전부터 한번 다녀오고 싶기도 했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서규하는 반동을 이용해서 곧바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생각난 김에 바로 준비해서 떠나고 싶었다.
1층으로 이어지는 층계참을 돌자 마침 모친이 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서규하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서 가까이 다가갔다.
“엄마, 나 여행 좀 갔다 올게.”
“여행?”
뜬금없이 들리는 말을 되물었다가, 이내 정은희는 엄한 표정으로 아들의 아랫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안 돼. 임신 초기에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
“배 속에 잘 붙어 있는데 뭘.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싶어.”
“그럼 근처 공원에 갔다 와. 얼마 전에 가 보니까 국화꽃이 완전 예쁘게 피었더라.”
그 말에 서규하는 불만스럽게 머리를 헝클었다.
“그런 거 말고. 일주일 정도 푹 쉬면서 맛있는 거 먹고, 놀다 오고 싶어.”
자고로 여행은 온갖 곳을 싸돌아다니며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기는 것이 제맛이지만, 그것도 컨디션이 따라 줄 때 말이었다. 이번에는 풍경 좋은 해변에서 얌전히 바닷바람이나 쐬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탁 트인 바다 보고 싶어서 그래. 답답해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서규하는 열심히 엄마를 설득했다. 스트레스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말을 묵묵히 들어 주던 정은희는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정 그러면, 병원에 전화해서 가도 되는지 먼저 물어봐. 의사가 된다고 하면 허락해 줄게.”
안 될 걸 확신하고 한 말이었다. 아마도 그 사실을 모를 아들은 귀찮아하는 기색을 팍팍 풍기면서도 알겠다고 대답했고, 혹시 모를 노파심에 정은희는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했다.
“그리고 혼자 가는 건 절대 안 돼. 큰형이나 작은형이랑 같이 가든가, 아니면 성열이라도 데리고 가.”
그 말에 서규하는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미쳤어? 형들이랑 여행을 왜 가?”
“너 혼자는 불안해서 마음이 안 놓여. 그리고 네가 아직 자각이 없나 본데, 임신하면 적어도 3개월 정도는 절대 안정하고 조심해야 돼. 아니면, 엄마랑 같이 갈까?”
부릅뜬 눈을 보니 여차하면 정말로 따라붙을 기세였다. 아 씨, 돌겠네 진짜.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한숨을 흘리다가 서규하는 마지못해 한 사람을 골랐다.
“성열이 형이랑 갔다 올게.”
“그렇게 해, 그럼. 성열이한테는 엄마가 얘기할게.”
뭐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절반의 승리를 안고 뒤돌아서는데, 문득 떠올랐다는 투로 모친이 묻는 말이 들렸다.
“아기 태명은 지었어?”
멈칫, 발걸음이 멋대로 굳었다. 얼굴엔 곤란한 표정이 떠올랐다. 태명이라니, 임신이나 입덧 못지않게 낯선 단어였다.
“……태명은 무슨 태명이야. 부를 일도 없을 텐데.”
“어머, 얘 좀 봐.”
정은희는 대번에 아들 앞으로 다가가면서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당연히 지어 줘야지. 부르면서 태교도 해야 되고, 또 나중에 애가 알면 얼마나 서운하겠어? 아무튼, 네가 안 지었을 거 같아서 엄마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반짝이’는 어때?”
“……반짝이?”
떨떠름하게 되묻는 말에 정은희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전에 엄마가 너한테 꿈 이야기 해 준 적 있지? 금덩이 떨어진 걸 엄마가 잡으면 까맣게 변하는데, 규하 네가 잡으면 더 밝게 빛나던 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게 태몽이었던 것 같은데, 꿈에 금덩이가 나왔으니까 반짝이가 딱이겠더라고.”
서규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즉각 퇴짜를 놓았다.
“싫어. 존나 촌스러워.”
가차 없는 평가에 정은희는 울컥했지만, 화를 내는 대신 애써 웃는 표정을 고수했다. 아들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그녀는 가능하면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원래 태명은 이렇게 짓는 거야. 그리고 반짝이가 어때서 그래? 태몽이랑도 찰떡이고,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로 크라는 뜻도 담겨 있으니까 좋잖아.”
“안 좋아. 그냥…….”
“그냥 뭐?”
“아냐. 생각 좀 해 볼게.”
서규하는 미련 없이 먼저 뒤돌아섰다. 그냥 ‘야’ 또는 ‘얌마’로 계속 부르면 안 되냐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매를 벌 것 같아서 조용히 입을 다무는 편을 선택했다.
방으로 돌아간 서규하는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어디로 여행을 가면 좋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적당히 바다가 예쁘고, 쾌적하고, 음식만 입에 맞으면 되는데……. 아니면 거기에 한 번 더 갔다 올까?’
정확히 어느 나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남아 휴양지 중에 음식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 지역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놀러 갔을 때 박찬웅이 ‘이 집이 그렇게 끝내주는 맛집’이라면서 데려갔던 곳인데, 빈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어서 3일 내내 저녁마다 그 식당으로 갔었다.
“거기가 어디였더라…….”
음식이 존나 맛있었던 건 기억하는데, 바다는 거기서 거기다 보니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국 서규하는 박찬웅에게 SOS를 보냈다.
[거기어디야? 우리3일내내크림새우먹엇던데]
월루 중인지 곧바로 답장이 왔다.
[살아있었네? 내번호 지운거 아니엇음?]
[차단했다풀었음ㅇㅇ거기어느나라였지?]
한 번 더 물었더니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 왔다. 월급 루팡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서규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 왜? 왜애? 만나자 해도 존나 씹더니, 왜애?
“말했잖아. 카페 일 때문에 바빴다고.”
매니저가 복귀한 뒤로는 발길을 뚝 끊었지만,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술자리를 피하려고 바쁜 척했다는 말은 더더욱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거기 어디야? 메뉴별로 다 시켜서 배 터지게 먹었던 곳 있잖아.”
- 여행 가게?
“어.”
- 시발, 존나 부럽다. 나도 좀 데려가라.
“사표 던지고 따라붙든가.”
왈왈대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기다리니, 잠시 후에 박찬웅이 장소를 알려 줬다. 원하는 정보를 얻어낸 서규하는 누가 들어도 영혼 없는 말투로 고맙다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최근 통화 기록에 있는 ‘성열이 형’이라는 이름을 눌러서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표만 있으면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떠날 생각이었다.
***
샤워기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던 물줄기가 뚝 멈췄다. 흠뻑 젖은 머리칼의 물기를 대충 털어 낸 뒤에 이차영은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
거실 시계는 저녁 8시를 살짝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방으로 직행한 이차영은 시원하게 물 한 컵을 들이켰다. 탁, 빈 잔을 개수대에 담그고 돌아서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이내 뒤돌아서 냉장고로 다가간 그는 냉동실 문을 열고 그 안에 든 무언가를 꺼냈다. 아까 백화점 식품관에서 사 온 유기농 아이스크림이었다.
주방과 거실의 경계에 있는 미니 바 스툴에 엉덩이를 걸쳤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한 스푼 가득 뜬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갔다.
“…….”
문득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이유도 모르는 섭식 장애를 겪고 있으면서, 평소 입에도 대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오늘만 벌써 세 개째 먹고 있는 제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주먹보다 작은 통을 비운 것은 금방이었다. 스푼째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오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이차영은 곧장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거실 테이블 위에서 울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자,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네, 정 실장님.”
- 아까 말씀하셨던 분의 소재를 파악했습니다.
“……!”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눈치 빠른 정 실장은 신뢰감을 주는 음성으로 알아서 재빨리 말을 이었다.
- 계속 전화를 안 받아서 추적에 애를 먹었는데, 좀 전에 어머니라는 사람이 받아서 신호를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차영은 핸드폰을 고쳐 잡으면서 되물었다.
“어머니라고요?”
- 네. 신호가 잡힐 때까지 적당한 거짓말로 시간을 끌었는데, 현재 집에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신호가 잡힌 곳은 서초동 남부터미널 일대입니다.
듣자마자 짚이는 곳이 있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는 것도 그렇고, 서규하의 부모님 댁이 서초동에 있었다.
“하.”
실소를 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차영은 핸드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3일이나 집에 안 들어와서 당연히 그 여자와 함께 있거나 다른 친구들 집에 있을 줄 알았지, 본가에 있을 가능성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 그리고 최근의 행적을 밝히는 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리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계속 잘 부탁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이차영은 드레스 룸으로 직행했다.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고,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든 니트 셔츠와 바지를 빠르게 입었다. 잠시 후에 이차영은 차 키와 핸드폰만 챙겨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서규하의 부모님 댁이었다. 부재중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핸드폰이 집에 있는 걸로 봐서는 금방 귀가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조급함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여봐란듯이 다른 곳으로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까닭이었다.
***
무드 등을 켜고 암 체어에 앉은 정은희는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펼쳤다. 저녁 식사 후에는 보통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보지만, 가끔은 책을 읽으면서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이번에 산 책은 여러 작가의 인생과 철학이 담겨 있는 에세이집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며 집중해서 책장을 넘기는데 정적을 깨트리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모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이라고?
얼굴에 금세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시간에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서재 문을 열자, 도우미가 곧바로 방문객의 정체를 알렸다.
“이차영 님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이차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정은희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은 들이라고 대답했다.
거실로 나가서 기다리니 잠시 후에 정말로 이차영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정은희는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깜짝 놀랐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규하한테 급하게 할 말이 있는데 전화가 안 되더라고요. 요즘 계속 여기에 있다고 들었는데, 집에…….”
들어왔냐고 물으려다가 급하게 말을 삼켰다. 전화가 안 된다고 방금 말했으면서, 하마터면 녀석이 부재중인 걸 이미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할 뻔했다.
“집에 있으면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초조함을 감추고 오랜만에 미소 띤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뒤늦게 빈손인 것을 깨닫고 속으로 혀를 찼다. 평소였으면 뭐라도 사 들고 왔을 텐데, 오늘은 마음이 급해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쨌든, 아직 집에 안 왔다는 말을 들으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대답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예상을 완전히 비켜 갔다.
“어떡하지? 규하, 오늘 여행 가서 집에 없어. 그러지 말고 들어와서 얘기해.”
“괜찮습니다. 금방 갈 거라서요.”
애써 웃으며 대답하고는 초조함을 숨기듯 입가를 매만졌다.
겨우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갔다고?
“카페 일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어째 시간이 있었나 보네요.”
“어휴, 말도 마. 한 며칠 집에 잘 붙어 있는다 싶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금 당장 갈 거라고 노래를 불러 대더라고. 대체 그 몸으로…….”
이번에는 정은희가 서둘러 말을 멈췄다.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근데 어째 차영이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네. 저녁은 먹었어?”
“네, 먹었어요. 그럼 규하는 언제 귀국합니까?”
“일주일 정도 있다가 올 거야.”
일주일이라니, 벌써부터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키면서 이차영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규하 오면 저한테 연락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꼭 해야 할 말이 있거든요.”
“그래? 급한 일이면 지금 성열이한테 전화해 볼까?”
듣자마자 이차영은 상황을 파악했다.
“최 비서님이랑 같이 갔어요?”
“맞아. 혼자는 영 불안해서 같이 보냈어. 지금 전화해서 바꿔 줘?”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속으로 꾹 내리눌렀다.
계속 전화를 안 받는 걸 보니 아직도 마음이 안 풀린 모양인데, 과연 바꿔 준다고 통화가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사과를 하든 대화를 나누든 직접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실 저 때문에 규하가 조금 화난 일이 있어서……. 다음에 얼굴 보면서 말할게요.”
그 말에 정은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규하가 차영이 너 때문에 화난 일이 있다고?”
“네. 죄송해요, 이모.”
“아냐.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 친구끼리 좀 다툴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규하 오면 이모가 바로 전화할게.”
“감사합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이차영은 고개까지 꾸벅 숙이며 부탁했다. 그 모습을 본 정은희의 얼굴에 뒤늦은 걱정이 떠올랐다.
‘진중하고 배려심도 깊은 애가 대체 무슨 일로 아들을 화나게 한 걸까?’
기분 나쁘거나 화나는 일이 있어도,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어 버리는 녀석이 바로 제 막내아들이었다. 그런데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니 걱정 아닌 걱정이 들었다.
이내 정은희는 이차영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참, 온 김에 만두 좀 싸 줄까? 규하가 먹고 싶대서 어제 새로 빚었는데, 차영이 너도 좋아하잖아.”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갖고 올게.”
붙잡을 틈도 없이 정은희는 부랴부랴 발걸음을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는 커다란 찬합을 두 손으로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것저것 조금씩 담았어. 얼굴 살이 쏙 빠졌는데, 귀찮더라도 잘 챙겨 먹어. 응?”
“네. 감사합니다.”
실례가 많았다는 말을 끝으로 이차영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 세워 둔 차에 오르자마자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그랬으면 얼굴이라도 봤을 텐데.
지금이라도 행방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앞으로 일주일을 꼬박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고, 격렬하게 서로를 갈구하고, 지쳐서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 등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섹스를 안 한 지도 꽤 오래됐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아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서규하를 찾는 데 혈안이 돼서, 신경이 온통 녀석에게만 쏠려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게 정답이었다.
“하아…….”
거듭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독한 현실주의자답게 허무맹랑한 가정 따윈 하는 법이 없지만, ‘서규하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로 되돌아갔으면’ 하는 우스운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서규하는 더 이상 단순한 친구나 섹스 파트너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이 녀석의 애를 가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고작 며칠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함을 느낄 리가 없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할 말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이차영은 뒤늦게 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