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더니 방 안이 온통 햇살로 환했다. 잠깐 멍하니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다가 서규하는 뒤늦게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주방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항상 끽해야 맥주와 집에서 보내 준 김치뿐이던 공간이 온갖 먹거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서규하는 족발과 수육이 각각 담겨 있는 접시를 꺼냈다. 어제 야식으로 시켜 먹고 남은 것들이었다.
배고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세수도 안 하고 젓가락질부터 하는데도 안에서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갔다.
그러길 잠시, 이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선은 저절로 복부를 향했다.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서규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씨발.”
자신의 배 속에 애가 들어 있다니, 며칠이 지난 지금도 믿기질 않는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남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이후로 벌써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맘 같아서는 당장 지우고 싶지만, 의사가 했던 말이 발목을 붙잡았다. 앞으로 평생 임신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인데 문제는 두 번째 이유였다.
아무리 베타처럼 살고 있어도, 자신은 진짜 베타가 아니라 개인 고유번호가 알파벳 O로 시작하는 오메가였다. 페로몬 자가 조절이야 해 본 적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억제제가 들지 않는 것은 아주 큰 문제였다.
“돌겠네, 진짜.”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기가 막힌 일은 또 있었다. 이 와중에도 틈만 나면 허기가 져서, 뭐라도 먹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걱우걱, 그새 식어 버린 보쌈은 퍽퍽하기 그지없었다. 의식의 흐름 끝에 찌꺼기처럼 남은 생각은 자연히 한 곳을 향해서 기울었다.
“얌마.”
시선도 덩달아 자신의 아랫배를 향했다.
“나도 난데, 넌 대체 뭘 믿고……. 하아.”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고 말았다. 회상은 계속됐다. 멘붕의 연속이었던 질의응답 시간이 끝난 뒤에, 의사는 걱정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시 3주 이내에 술, 담배나 감기약 같은 걸 복용한 적은 없느냐고.
빌어먹게도 정답은 예스였다. 이차영이 치킨을 사 들고 집으로 찾아왔던 날에도 어김없이 하드 섹스를 했고, 컨디션이 바닥을 쳐서 며칠 내내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 겨우 살 만해졌다 싶을 무렵에는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 이어서 알바생까지 그만두는 바람에 유흥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도 그리 자주 피우는 편은 아니고, 클럽에 있거나 친구들이랑 어울릴 때만 한 번씩 물곤 했다. 그런데 최근엔 아예 간 적이 없으니 담배를 피울 일도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존나게 운도 좋아.”
배 속에 있다는 놈에게 하는 말이었다. 한 번이라도 술을 진탕 마셨거나 담배를 뻑뻑 피워 댔으면, 뒷일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당장의 결정을 내리는 데는 훌륭한 변명거리가 되어 주었을 거다.
하지만 마지막 섹스 이후로는 술 담배를 한 기억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 돋는 우연이었다. 술도 담배도 다 하는 사람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한 달 가까이 입에도 안 댈 확률이 얼마나 될까. 태어나기도 전부터 끝내주는 생명력이었다.
“하아…….”
긴 한숨이 빠져나간 자리를 보쌈이 대신했다. 우선은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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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상담(ㅇㅅ관련)
익명20XX-XX-XX 22:19:38
하룻밤 실수로 애가 생겼습니다
지우고 싶은데 재수없으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길수도 잇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존나 심각한 문제임)
어떻게 하는게 조을까요ㅜ
한마디씩만 해주고 가세여..
벌써 몇 분째 서규하는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두 다리는 초조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액정이 멋대로 어둡게 변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예 캄캄하게 꺼져 버릴 터였다.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입술을 잘근거린 끝에, 마침내 떨리는 손가락으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와 씨, 어떡하지.”
두 다리가 더더욱 격렬하게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화면이 바뀌면서 ‘등록되었습니다.’ 하는 글자가 나타났다.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는 포털 게시판. 방금 서규하는 그곳에 게시글을 등록한 참이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계속 제자리걸음이라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띠링, 띠링-
‘왔다!’
알림음을 들은 서규하는 퍼뜩 핸드폰을 켰다. 제목 옆에 (4)라는 숫자가 붙은 걸 보니 그새 댓글이 4개나 달린 모양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몹시도 빠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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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상담(ㅇㅅ관련) (4)
익명20XX-XX-XX 22:19:38
하룻밤 실수로 애가 생겼습니다
지우고 싶은데 재수없으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길수도 잇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존나 심각한 문제임)
어떻게 하는게 조을까요ㅜ
한마디씩만 해주고 가세여..
Comments
1빠 20XX-XX-XX 22:22:41
어떤 문제길래.. 심각하면 안 지우는게 나을듯함ㅇㅇ
2빠 20XX-XX-XX 22:24:04
2222
3빠 20XX-XX-XX 22:25:13
미잔거 같은데ㅉㅉ 부모속 문들어지겠네
3빠 20XX-XX-XX 22:25:57
고무끼고 하지 그랬음
익명의 3빠가 남긴 댓글을 보자마자 이마의 핏대가 울끈불끈했다.
“지랄, 어디서 궁예질이야.”
서규하는 수정 버튼을 눌러서 몇 마디를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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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상담(ㅇㅅ관련) (4)
익명20XX-XX-XX 22:19:38
하룻밤 실수로 애가 생겼습니다
지우고 싶은데 재수없으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길수도 잇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존나 심각한 문제임)
어떻게 하는게 조을까요ㅜ
한마디씩만 해주고 가세여..
미자 아님ㅡㅡ 28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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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빠 20XX-XX-XX 22:22:41
어떤 문제길래.. 심각하면 안 지우는게 나을듯함ㅇㅇ
2빠 20XX-XX-XX 22:24:04
2222
3빠 20XX-XX-XX 22:25:13
미잔거 같은데ㅉㅉ 부모속 문들어지겠네
3빠 20XX-XX-XX 22:25:57
고무끼고 하지 그랬음
잠시 후에 또다시 띠링,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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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상담(ㅇㅅ관련) (8)
익명20XX-XX-XX 22:19:38
하룻밤 실수로 애가 생겼습니다
지우고 싶은데 재수없으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길수도 잇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존나 심각한 문제임)
어떻게 하는게 조을까요ㅜ
한마디씩만 해주고 가세여..
미자 아님ㅡㅡ 28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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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빠 20XX-XX-XX 22:22:41
어떤 문제길래.. 심각하면 안 지우는게 나을듯함ㅇㅇ
2빠 20XX-XX-XX 22:24:04
2222
3빠 20XX-XX-XX 22:25:13
미잔거 같은데ㅉㅉ 부모속 문들어지겠네
3빠 20XX-XX-XX 22:25:57
고무끼고 하지 그랬음
3빠 20XX-XX-XX 22:29:17
그럼 나아서 키워야지짘 애지우면 벌받음
4빠 20XX-XX-XX 22:30:37
하룻밤 실수라잖아요. 애 낳는게 그리 쉬운 줄 아심?
3빠 20XX-XX-XX 22:32:03
누가 쉽댓음? 어른이면 자기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5빠 20XX-XX-XX 22:32:59
애아빠랑 상의는 해보셨어요?
썩은 표정으로 댓글을 쭉 읽다가,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애아빠랑 상의는 해보셨어요?’
그럴 리가. 연락이 올 때마다 화들짝 놀라서 피하기에 급급했지, 상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민하던 서규하는 5빠의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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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상담(ㅇㅅ관련) (8)
익명20XX-XX-XX 22:19:38
하룻밤 실수로 애가 생겼습니다
지우고 싶은데 재수없으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길수도 잇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존나 심각한 문제임)
어떻게 하는게 조을까요ㅜ
한마디씩만 해주고 가세여..
미자 아님ㅡㅡ 28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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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빠 20XX-XX-XX 22:22:41
어떤 문제길래.. 심각하면 안 지우는게 나을듯함ㅇㅇ
2빠 20XX-XX-XX 22:24:04
2222
3빠 20XX-XX-XX 22:25:13
미잔거 같은데ㅉㅉ 부모속 문들어지겠네
3빠 20XX-XX-XX 22:25:57
고무끼고 하지 그랬음
3빠 20XX-XX-XX 22:29:17
그럼 나아서 키워야지짘 애지우면 벌받음
4빠 20XX-XX-XX 22:30:37
하룻밤 실수라잖아요. 애 낳는게 그리 쉬운 줄 아심?
3빠 20XX-XX-XX 22:32:03
누가 쉽댓음? 어른이면 자기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5빠 20XX-XX-XX 22:32:59
애아빠랑 상의는 해보셨어요?
┗ ㄱㅆ : 아직 못했는데 해야될까여
┗ 5빠 : 당연하죠. 님 혼자 그런게 아니라 둘이 같이 사고친건데... 일단 얘기부터 해보세여
┗ 3빠 : 애아빠한테도 말 안한걸 여기에 먼저 올린거임?
“이 개 3빠 새끼가…….”
으득, 이를 갈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면상 한 대만 후려갈기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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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상담(ㅇㅅ관련) (9)
익명20XX-XX-XX 22:19:38
하룻밤 실수로 애가 생겼습니다
지우고 싶은데 재수없으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길수도 잇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존나 심각한 문제임)
어떻게 하는게 조을까요ㅜ
한마디씩만 해주고 가세여..
미자 아님ㅡㅡ 28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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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빠 20XX-XX-XX 22:22:41
어떤 문제길래.. 심각하면 안 지우는게 나을듯함ㅇㅇ
2빠 20XX-XX-XX 22:24:04
2222
3빠 20XX-XX-XX 22:25:13
미잔거 같은데ㅉㅉ 부모속 문들어지겠네
3빠 20XX-XX-XX 22:25:57
고무끼고 하지 그랬음
3빠 20XX-XX-XX 22:29:17
그럼 나아서 키워야지짘 애지우면 벌받음
4빠 20XX-XX-XX 22:30:37
하룻밤 실수라잖아요. 애 낳는게 그리 쉬운 줄 아심?
3빠 20XX-XX-XX 22:32:03
누가 쉽댓음? 어른이면 자기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5빠 20XX-XX-XX 22:32:59
애아빠랑 상의는 해보셨어요?
┗ ㄱㅆ : 아직 못했는데 해야될까여
┗ 5빠 : 당연하죠. 님 혼자 그런게 아니라 둘이 같이 사고친건데... 일단 얘기부터 해보세여
┗ 3빠 : 애아빠한테도 말 안한걸 여기에 먼저 올린거임?
6빠 20XX-XX-XX 22:37:01
3빠 꼰대짓 그만......
┗ 3빠 : 내 말중에 뭐 틀린 거 잇음?
┗ 6빠 : 님 존재 자체가 틀려 먹은듯
더 읽어 봤자 열불만 날 것 같아서 결국 게시글을 삭제했다. 핸드폰을 탁자에 던지듯 내려 둔 뒤에 서규하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미간은 한껏 구겨진 채였다.
애 아빠라…….
이차영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깐 그렇게 누워 있다가 다시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생각하면 할수록 4빠인가 5빠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노콘인 걸 알고 나서도 계속한 자신의 잘못도 물론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면 이차영의 잘못도 만만치 않았다.
“개새끼, 안에다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후회를 하면서 서규하는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둘이 같이 사고를 친 게 맞으니, 일단 말은 꺼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메시지 앱을 켠 그는 빠른 손길로 문자를 보냈다.
[오늘시간됨? 할말이있어]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후우, 거듭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애는 고사하고 연애할 생각도 없다면서 큰소리를 뻥뻥 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임신으로 전전긍긍하는 일이 제 인생에서 벌어지다니, 머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했다. 폰 게임을 하다가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아서 확인해 보니 고작 3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영혼 없이 계속 게임을 하는데 마침내 이차영한테서 문자가 왔다.
[카페 앞이야. 들어갈게]
서규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 문을 연 채로 기다리고 있으니, 뚜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이차영이 계단을 올라왔다.
이윽고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무슨 일이야? 계속 바쁘다더니.”
말투에 답지 않은 까칠함이 묻어났다. 일견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서규하는 단숨에 캐치해 냈다.
심기가 불편할 만도 했다. 애가 생겼단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서규하는 티 나게 이차영의 연락을 피했다. 전화가 걸려 오면 수신 거부 버튼을 누르기 바빴고, 한 번씩 받아서도 아무 말 대잔치 같은 핑계를 대면서 서둘러 끊어 버리기 일쑤였다. 아직 태연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을 알기에, 서규하는 타박을 주거나 맞받아치는 대신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얼굴이 왜 그래? 점심 안 먹었어?”
반반한 낯짝은 여전하지만, 귓불에서 턱 끝으로 이어지는 얼굴 라인이 오늘따라 두드러지게 날렵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느낌이 들고, 피곤한 기색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이내 픽 웃고 말았다. 피곤이라니, 사흘 내내 그 짓거리를 해도 끄떡없는 녀석에게 붙일 만한 단어는 절대 아니었다.
“먹었어. 왜 보자고 한 거야?”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서규하는 멈칫했다.
시선이 멋대로 방황하기 시작했다. 임신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불렀는데, 막상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선뜻 입이 열리질 않았다.
제 배 속에 애가 생겼다니. 다시 생각해도 현실감이 없었다. 이차영에게 ‘피곤’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연습은 이미 몇 번이나 했다. 어색함 없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스쳐 가는 식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마음을 굳힌 서규하는 눈을 들어 이차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열심히 생각한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야.”
“왜.”
“누가 네 애를 가졌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이차영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뭐? 하고 되묻는 말에, 서규하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누가 네 애를 가졌다면서 갑자기 찾아오면 어쩔 거냐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은근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서규하는 눈을 피하지 않고 이차영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차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하는 걸 보니 대답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쿵, 쿵, 심장 박동이 멋대로 조금씩 빨라졌다. 생각 정리를 끝낸 듯 이차영이 픽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명제부터가 잘못됐어.”
“뭐?”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피임은 확실하게 하니까.”
확신에 찬 어조였다. 덤덤하게 찻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서규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확실하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잖아. 만약 몰라?”
목소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만만치 않은 성질머리에 말발로는 이길 수가 없는 녀석이라서, 떠보는 것도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굳건하게 벽을 치는 태도에 조바심이 절로 일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다른 대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직구를 날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서규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이차영의 입술이 열린 것이 먼저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
“지워야지.”
동요라곤 담겨 있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뭐?”
저도 모르게 반문이 새어 나갔다. 몸은 멋대로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생각이 멈춘 것처럼 머릿속이 멍하고, 손끝이 차갑게 변했다.
그러든 말든 이차영은 냉담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질문에 대답해야 하냐는 듯, 일견 피로함이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분쟁은 질색이야. 그런 실수는 하지도 않겠지만, 내 동의 없이 멋대로 애를 가진 거라면 당연히 지워야지.”
“…….”
“돈이 목적일 게 뻔하니까.”
서규하는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형체 없는 차가움이 먹물처럼 스멀스멀 번져 갔다. 머리 위에서부터 찬물을 뒤집어써도 지금처럼 소름이 돋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쾅-!
움켜쥔 두 주먹이 거칠게 핸들을 내리쳤다. 쿵! 쿵! 부숴 버릴 기세로 연거푸 내리쳤지만, 터질 것 같은 울분은 가실 줄을 몰랐다.
“씨발 새끼, 뭐가 어쩌고 저째?”
처음엔 화가 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일시에 모든 생각이 멈췄다는 게 정답이었다.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이차영을 쳐다보고 있다가, 실소와 함께 중얼거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진짜 개새끼네.’
그대로 일어서서 먼저 사무실을 나왔다. 분노는 뒤늦게 밀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카페를 나설 때쯤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주차된 차 앞에 도착했을 때 완전히 폭발했다.
“하아…….”
한동안 미친놈처럼 발광하다가 쓰러지듯 핸들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사실 이런 상황도 예상해 보긴 했다. 결혼은 비즈니스 어쩌고에 불과해도, 2세만큼은 와이프를 통해서 볼 거라는 말을 본인의 입으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어떤 일을 막연히 상상만 하는 것과 그걸 실제로 겪는 것은 체감 온도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바로 코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히 애를 지우게 할 거라는 말을 듣게 되니 생각보다 훨씬 충격이 컸다.
더불어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뭐가 어쩌고 저째? 어차피 돈이 목적이라고?
“개 씨발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쓰레기 새끼.”
죽빵이나 한 대 날리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이를 사리물고 울분을 토하는데, 바지 뒷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이차개-
액정을 보자마자 혈압이 올랐다. 그대로 전원을 꺼 버리려다가, 생각을 바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가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가 터져 나갔다.
“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개새끼야. 눈에 띄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침을 튀기며 퍼붓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서규하는 이번에야말로 전원을 끈 뒤에 조수석으로 던져 버렸다.
쿵-
핸들에 거듭 머리를 박았다. 거친 숨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온갖 생각이 뒤섞여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후, 오기로 점철된 시선이 아랫배를 향했다.
“야.”
듣는 사람도 없는데 비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누군가가 있긴 했다. 눈코입이나 제대로 갖췄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은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서규하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 앞날은 나도 몰라. 나도 모르는데, 내가 억지로 떼지는 않을 테니까…….”
꽈악, 핸들을 붙잡은 손아귀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갈 데까지 한번 같이 가 보자.”
인생 최대의 난제였던 고민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
같은 시각, 이차영은 황당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들은 서규하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개새끼야. 눈에 띄면 죽여 버릴 줄 알아.’
반듯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야말로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길 걷는 중에 갑자기 누군가에게 따귀를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화를 낼 사람은 자신이었다. 또 며칠간 연락이 잘 안 되고, 기껏 전화를 받아서도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에 불만을 느꼈지만 그래도 바라는 대로 오늘 카페를 찾아왔고, 얼토당토않은 질문에도 충실하게 대답해줬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어처구니 짝이 없는 냉대뿐이었다.
“…….”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이차영은 한 번 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기대하던 목소리 대신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기계음이 들릴 뿐이었다.
“하아…….”
긴 한숨을 흘리며 눈가를 꾹 눌렀다.
말도 없이 나가 버리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뭔가 또 혼자서 열이 받은 모양인데, 뭐 때문에 그러는지 당장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가기엔 찝찝해서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편이긴 해도, 대화 중에 다짜고짜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이유도 없이 화를 낼 녀석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차영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로 좀 전에 서규하와 나눴던 대화를 회상했다.
밥은 먹었냐고 묻더니, 녀석은 그야말로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누가 네 애를 가졌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언짢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이 있다 보니, 이차영은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예는 멀리 있지 않았다. 중독 수준으로 색을 밝히는 백부에게는 배다른 자식만 네 명이었고, 자식 농사마저 제대로 말아먹으면서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자식들이 친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가 하면, 그들의 모친 중에는 본가까지 찾아와서 악다구니를 쓰며 자살 소동을 벌인 이들도 있었다. 어디서 뭘 주워들었는지, 그룹 계열사 중에서도 대표적인 우량주인 전자 쪽의 지분을 요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차영도 헛웃음을 흘렸을 정도였다.
비단 백부뿐만이 아니었다. 엇비슷한 배경을 지닌 친구들이 만나는 모임에 가끔 얼굴을 내비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온갖 더러운 이야기들이 들려오곤 했다.
그렇다 보니 ‘분쟁의 소지가 있을 법한 일은 싹을 틔우기 전에 일찌감치 정리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략결혼을 하더라도 2세는 배우자를 통해서만 낳을 거라고 결심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밑도 끝도 없이 ‘누가 네 애를 가졌다고 하면 어쩔 거냐’고 계속 물어보니 좋은 대답이 나갈 리가 없었다. 누차 말했다시피 그런 실수는 하지도 않겠지만, 서규하의 말마따나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지우는 게 당연했다.
자신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친구 놈들은 물론이고 서규하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가뜩이나 성가신 일은 질색하는데, 하물며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가 생겼단 말을 듣게 된다면 틀림없이 지우라고 할 게 뻔… 한…….
‘잠깐만.’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진짜로 녀석이 사고 친 건가?
생각과 동시에 표정이 확 굳었다. 허벅지 위에 놓여 있던 손가락은 멋대로 까딱까딱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로 누군가가 서규하의 애를 가졌다며 찾아왔다면? 그래서 그런 질문을 했던 거라면? 전전긍긍하다가 말을 꺼낸 거라면……?
“하.”
탄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는 일인데, 좀 전엔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는지 정말 뜬금없이 시비조로 묻는 물음인 줄로만 알았다.
“대체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으득, 이가 절로 갈렸다.
다른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서규하를 안기 시작한 이후로는 원나잇은커녕 클럽조차 출입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녀석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거의 매주 만났으니까. 그때마다 버거워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몸을 겹쳤으니까. 다음 날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들어 보일 만큼, 다른 사람과의 잠자리는 생각도 못 할 만큼 격렬하고도 뜨거운 밤을 계속 보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자신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 녀석의 애를 가졌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황당했다. 요 며칠간 연락이 뜸했던 것도 임신 때문에 전전긍긍하느라 그랬다고 생각하니, 배신감을 닮은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침묵을 깨며 핸드폰이 진동했다. 서규하인가 싶어서 퍼뜩 액정을 내려다봤지만, 눈에 들어온 글자는 ‘어머니’였다.
굳은 인상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짤막한 한숨을 흘린 뒤에 이차영은 귓가로 핸드폰을 가져갔다.
“예, 어머니.”
- 여보세요? 퇴근은 했니?
“네.”
- 저녁은.
“먹었어요. 무슨 일이세요?”
- 네 아버지가 오랜만에 가족 모임을 갖자고 하셔서 전화했어. 토요일 점심때 시간 괜찮아?
이차영은 스케줄을 떠올려 본 뒤에 대답했다.
“……괜찮을 거 같아요. 혹시 변동 사항 있으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 알았어. 되도록이면 약속 잡지 말고.
통화는 금방 끝났다. 이차영은 핸드폰 화면을 끄는 대신 한 번 더 서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는 지금 드물게 흥분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서규하를 만나 봤자 또다시 대화가 엇나가거나 언성이 높아질 소지가 다분했다. 머리를 좀 식힌 다음,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앞으로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중대한 결심을 했지만, 세상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침이 되니 해가 뜨고, 해가 뜨니 눈이 떠지고, 눈을 뜨니 허기가 밀려오는 일상이 반복됐다.
배가 부르면 잠이 오는 것도 여전했다. 한숨 거하게 자고 일어난 서규하는 시간을 확인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부인과 정기 검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후드 티 대신 캡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어딜 둘러봐도 여자들뿐인 곳에서 주목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행여나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곤란했다.
“저기…….”
어김없이 구석에 앉아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저도 모르게 마스크를 좀 더 끌어 올리며 옆을 쳐다봤다. 나이깨나 있어 보이는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일순 서규하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설마 이 아저씨도…….
“혹시 임신해서 왔어요?”
속삭이듯 묻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규하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역으로 되물었다.
“아저씨는요.”
그러자 남자는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주책맞게도 이 나이에 늦둥이가 생겼지 뭡니까. 오늘은 남자들이 아무도 없어서 머쓱했는데, 총각이 들어오는 걸 보니까 괜히 반갑더라고요. 참, 총각이라 하면 안 되지. 하하.”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인과라고는 해도 설마 임신한 남자 오메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잠깐 망설이다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남자의 아랫배 쪽을 바라봤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 배 속에 애가 있다는 사실은 조금씩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고 있지만, 부른 배를 보는 것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핸드폰 게임을 다시 켰지만 영 집중이 되질 않았다. 힐끗, 시선이 옆을 향했다. 잠깐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서규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얼마나 됐어요?”
불확실한 문장이었지만 남자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이제 7주 차예요. 총각은?”
밝게 웃으며 하는 질문에 서규하는 뜸을 들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5주 차요.”
“아이고, 그럼 곧 아기 심장 소리 듣겠네요!”
억지로 웃는데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난번에 의사로부터도 그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맞대고 있는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서규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안 무서워요?”
“예?”
“안 무섭냐고요. ……애 낳는 거.”
“음, 당연히 무섭죠.”
“……!”
예상을 비켜 가는 대답에 서규하는 멈칫했다.
“총각도 알고 있겠지만, 남자 오메가 자체가 별로 없는 데다 아기까지 낳는 경우는 더욱 드물잖아요. 처음엔 부끄러워서 병원에도 제대로 못 갔어요. 근데 그러다가…… 첫째 애한테 작은 문제가 있는 걸 뒤늦게 알게 돼서…….”
일순 남자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닥친 시련에 서규하는 몹시 당황했다. 못하는 게 많지만, 그중 특히나 위로에는 소질이 전혀 없었다.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 설마…….”
“다행히 약물치료가 가능한 질환이라서 바로 완치됐어요. 이제 내년이면 중학생입니다. 하하.”
“씨…….”
발, 하고 올라오려는 욕을 간신히 삼켰다. 잘못됐다는 줄 알고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했었다.
나이가 드니 주책맞게 눈물이 자꾸 나온다면서 눈가를 훔친 남자는 다시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총각 말대로 처음엔 무섭기도 무섭고 걱정도 많았어요. 그런데 낳고 나서 처음으로 내 품에 안았을 때,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그간의 고생들이 눈 녹듯이 전부 사라지더라고요. 마음이 뭉클하고, 우리 부부한테 찾아와 줘서 마냥 고맙고……. 그런 기쁨과 감격이 없었으면 셋째까지 낳을 생각은 못 했겠지요. 하하.”
이윽고 간호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손을 번쩍 들며 대답한 남자는 이내 옆을 돌아보며 그럼 먼저 가 보겠다는 살가운 인사를 남긴 뒤에 자리를 떠났다.
먼지처럼 부유하는 정적이 찾아왔다. 홀로 남게 된 서규하는 가만히 캡 모자 끝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엔 무섭기도 무섭고 걱정도 많았어요. 그런데 낳고 나서 처음으로 내 품에 안았을 때,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그간의 고생들이 눈 녹듯이 전부 사라지더라고요.’
방금 들었던 남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애가 생겨서 좋다거나 낳은 뒤의 기쁨 같은 건 아직 상상도 되지 않지만, 환하게 웃던 남자의 미소는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
검진이 끝난 뒤에 서규하는 오랜만에 본가로 차를 몰았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거나 하는 기특한 이유는 물론 아니었다. 어제 어머니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고, 솔직하게 말하면 집밥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던 참이었다.
현관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니, 웬일로 어머니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올 거면 미리 전화라도 주지 그랬어.”
“밖에 나온 김에 잠깐 들렀어요.”
“점심은?”
“주세요.”
“시간이 몇 신데 아직 밥도 안 먹었어.”
‘아침은 진작 먹었다’고 대답할 틈도 없이, 정은희는 서둘러 목소리를 높여 가사 도우미를 불렀다.
잠시 후에 서규하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먹는 집밥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주머니의 손맛에 길이 든 데다, 배 속에 블랙홀 같은 존재까지 있다 보니 앉은자리에서 밥 두 공기를 해치웠다.
“잘 먹었습니다.”
집에서 만들었다는 식혜까지 한 컵 가득 마셨더니 배가 터질 것처럼 불렀다. 거실로 나가 보니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서규하는 슬리퍼를 끌며 2층 방으로 올라갔다.
포갠 베개에 등을 기대며 핸드폰을 켰다. 아쉽게도 자신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차영이 연락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날 바로 수신 차단을 해 버려서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부재중 기록이나 문자가 보이지 않으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화가 날 것 같았다.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잡은 서규하는 심심할 때마다 하는 게임 앱을 터치했다.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뿅- 뿅뿅- 현란한 스킬을 발휘하며 게임에 집중하는데,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엄마야. 잠깐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간 정은희는 침대에 앉아 있는 아들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좋아서 앉아 있는 것이지 거의 눕기 일보 직전이었다.
“밥 먹고 바로 눕지 마. 몸에 그렇게 안 좋다더라.”
“아까 먹었는데 뭘.”
“아까는 무슨. 10분도 안 됐어.”
잔소리를 하며 다가간 정은희는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쳤다. 오늘 집으로 아들을 호출한 이유는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긴히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핸드폰 그만하고 엄마 좀 봐 봐.”
“…….”
힐끗, 모친을 바라보는 얼굴에 경계심이 서렸다. 엄마가 뜬금없이 저렇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낼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뭔가를 부탁하려거나 혹은 꼬드기려 하거나.
“규하 너, 아직도 사귀는 사람 없어?”
“없어.”
“그러면 엄마가 소개해 주는 사람 한번 만나 봐.”
역시나 예상을 비켜 가지 않는 말에, 서규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즉각 거절했다.
“싫어. 나 그런 데 관심 없는 거 몰라?”
“관심이야 만들면 되지. 알파 아가씬데 유학파라서 학벌도 좋고 직장도 빵빵하고, 나이도 너랑 같아. 얼굴도 연예인 뺨치게 예뻐.”
들뜬 모친과 달리 서규하는 조소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여자가 날 왜 만나?”
“왜 만나긴, 남자 오메가니까 만나 보려는 거지. 그리고 네가 어디가 뭐 어때서 그래? 엄마 친구들이 너 볼 때마다 인물 훤칠하고 잘생겼다고 얼마나 칭찬하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두더지인가 뭔가도 자기 새끼는 예뻐한다더니, 이럴 때 보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서규하는 그런 자리에 나가는 것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다시금 게임을 켜려는데, 불쑥 뻗어 나온 손이 어림도 없다는 듯 핸드폰을 가져갔다.
“진짜 괜찮은 아가씨인데, 남자 오메가가 워낙 없다 보니 애를 먹고 있다나 봐. 집안 어른들이 소개해 주는 사람은 죽어도 싫다는 것 같고. ‘이것도 인연이다’ 생각하고, 그냥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해 봐. 응?”
언젠가 꿨던 황금 꿈을 정은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길몽이 분명해서 조만간 아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내심 하고 있었는데, 선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거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남자 오메가가 드문 만큼 여자 알파도 몹시 귀했다. 망아지처럼 자유분방한 막내아들의 성미를 익히 아는 만큼 결혼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니, 강요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알지만, 기회가 있으면 잡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아닌 척해도 막내아들이 은근히 엄마에게 약하다는 사실도 정은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만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아들은 고개도 들지 않고 딱 잘라 거절했다.
“싫다고. 괜한 시간 낭비하기 싫어.”
시간 낭비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정은희는 눈을 치켜떴지만, 욱한 마음을 내리누르며 한 번 더 구슬리듯 말했다.
“알파 아가씨 찾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리고 당장 연애하거나 결혼하라는 게 아니잖아.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것도 어찌 보면 인연이니까,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하라는 거야.”
후우, 서규하는 한숨을 내쉬며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단호함이 깃든 표정만 봐도 이번에는 제대로 벼르고 말을 꺼낸 느낌이었다.
하지만 서규하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거듭 한숨을 흘린 뒤에 삐딱한 눈으로 모친을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요. 앞으로도 선 같은 건 절대 볼 생각 없으니까, 괜한 헛수고하지 마.”
정은희의 미간이 꿈틀했다. 이윽고 치켜 올라간 손이 아들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뭐? 헛수고?”
“아야, 왜 또 때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하여튼 곧 죽어도 엄마 말은 안 듣지? 어?”
오늘따라 손맛이 매웠다. 보통 땐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면 ‘내가 못 산다’고 하면서도 금방 손을 거두는데 오늘은 경쾌한 타격음이 꽤 오래 지속됐다.
문득 서러움이 밀려왔다. 요즘 안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기분이 꿀꿀한데, 바라지도 않는 일을 밀어붙이며 강요하니 짜증이 났다.
“아 씨, 진짜…….”
인상을 쓴 채 중얼거리며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근육이 뭉치는 것처럼 뻐근하면서도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늘 만났던 의사의 말로는, 태아가 착상하고 아기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통증이라고 했다.
괜히 집에 왔다는 후회가 절로 드는데, 모친 옆에 있던 핸드폰이 띠링 하고 울렸다.
옳다구나 싶은 생각에 잽싸게 핸드폰을 낚아챘다. 이내 한층 더 인상이 구겨졌다. 오늘 검진은 잘 받으셨냐는 물음과 함께 다음 부인과 검진일을 알려 주는 문자가 보였다.
그래도 덕분에 자리를 피할 구실이 생겨서 서규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잠깐 나갔다 올게.”
“누군데?”
“곰 새끼.”
만만한 게 박찬웅이었다. 행여나 모친에게 붙잡힐세라 서규하는 부랴부랴 옷장 문을 열었다. 올 때 입었던 후드 집업을 걸치는데, 무언가가 팔락하며 침대 쪽으로 떨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린 것도 잠시, 바닥에 떨어진 걸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까 진료실에서 받아 온 태아 초음파 사진이었다.
“뭐 떨어졌어.”
얼른 주우려고 했지만 정은희가 조금 더 빨랐다. 간발의 차로 먼저 사진을 주운 정은희가 손에 든 것을 내려다봤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아들을 향했다. 놀란 기색이 완연한 표정이었다.
“이게 뭐야?”
“……아, 진짜.”
서규하는 한껏 인상을 구긴 채로 혀를 찼다.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에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모친의 놀란 시선은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지못해 입술을 달싹였다.
“이래서 안 돼.”
“뭐?”
“이래서 안 된다고. 배 속에 애가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 누굴 만나라고.”
거듭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편으로는 될 대로 되라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을 테니 말이다.
“……규하 너, 방금 뭐라 그랬어?”
뒤늦게 들리는 모친의 목소리에 서규하는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충격에 휩싸인 듯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배 속에 애가 있다고?”
“……보면 몰라? 딱 봐도 애 사진이잖아.”
동전보다 작은 아기집만 간신히 보이는 수준이지만, 삼 형제를 낳아 키운 어머니가 임신 초음파 사진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서규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기검진 받으면서 찍은 게 아니라……. 임신을 했다고?”
“…….”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충격과 혼돈이 뒤섞인 가운데, 한 단어가 서규하의 뇌리를 스쳐 갔다.
아, 좆 됐다.
***
“그러니까.”
평정을 유지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정은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룻밤 실수로 애가 생겼다고?”
“맞아.”
서규하는 짧게 대답했다. 나란히 걸터앉은 침대 가장자리가 가시방석보다 더 따갑게 느껴졌다.
“세상에…….”
정은희는 탄식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아들의 이야기는 간단명료했다. 하지만 그 무게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째 한동안 탈 없이 조용하다 했더니, 이런 사고를 덜컥 칠 줄이야.
땅이 꺼질 정도로 깊은 한숨이 연거푸 흘러나왔다. 그새 초췌해진 얼굴로 고갤 돌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애 엄마는 누구야? 애가 생긴 건 알고 있어?”
“…….”
서규하는 곤란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유감스럽지만 모친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여자 알파와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상대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하물며 이차영이라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거짓말뿐이었다.
“몰라.”
“애 생긴 거 몰라?”
“아니. 애 엄마가 누군지 모른다고.”
“…….”
“기억이 안 나.”
“하.”
기가 막힌 듯 내뱉는 신음에 서규하는 움찔했다. 두 손을 천천히 움직여 가드를 올렸다. 맞기 전에 도망치는 게 최고지만, 이번만큼은 끝까지 쫓아오고도 남을 것 같다는 암울한 예감이 들었다.
“대체 밖에서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애 엄마가 누군지도 몰라! 어? 내가 너 이러라고 독립시켜 준 줄 알아?”
예상대로 경쾌한 매타작이 시작됐다. 따끔거리는 감각에 서규하는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꼬면서도 피하지 않고 맞아 주었다. 결국 먼저 지친 사람은 정은희였다.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면서 두 손으로 거듭 이마를 짚고 말았다.
“내가 미쳐, 진짜……. 아이고 내 팔자야.”
잠시 후에 정은희는 고개만 돌려 아들을 쳐다봤다.
“이제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낳아야지.”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부부가 합심해서 키워도 어려운데, 너 혼자 애를 낳아서 키우겠다고?”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 아야!”
기어코 한 번 더 찰싹하는 소리가 울렸다. 또다시 격해진 숨을 고른 뒤에, 정은희는 머뭇거리며 아들의 복부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의 심경만큼이나 복잡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진짜 임신한 거는 맞아?”
“맞아. 사진 봤잖아.”
또 한 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됐는데.”
“5주 차래.”
덤덤하게 전하는 아들의 말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언제 한바탕 난리가 났었냐는 듯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손끝을 서로 맞댄 채로 서규하는 애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태선이 이모한테도.”
혹시라도 이차영의 귀에 말이 들어갈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은희는 단순히 ‘친한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한숨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걘 너 오메가인 것도 몰라.”
막내아들의 형질을 아는 사람은 가족들과 최 비서, 그리고 주치의뿐이었다. 남편의 당부가 있기도 했고, 정은희 역시 막내아들이 갓 태어났을 무렵에 연일 매스컴을 뜨겁게 달궜던, 남자 오메가 학생이 극심한 따돌림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때문에 ‘베타처럼 키우자’던 남편의 말을 따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짜 못 살아, 내가.”
“미안.”
“…….”
“고마워.”
맞잡은 두 손에 이마를 대고 있던 정은희는 그 말에 힐끗 옆을 쳐다봤다.
“이럴 때만 미안하고 고맙지? 어?”
“아니야. 항상 그래.”
“……말이나 못 하면. 몸은 어떤데.”
“괜찮은 거 같아.”
“입덧은 안 해?”
아직 낯설고도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에, 서규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로 대답했다.
“먹는 입덧인가, 그거 하는 중이야.”
“……그냥 입덧보단 낫네.”
아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임신 그 자체로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먹는 것까지 제대로 못 먹으면 얼마나 성질을 부릴지 눈에 훤했다.
거듭 한숨이 흘러나왔다. 막내아들이 임신이라니. 천둥벌거숭이 애가 애를 가진 격이라 곱씹을수록 황당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줌마한테 해 달라고 해. 아니지, 당분간은 집에 있어.”
“싫어. 꼰대 잔소리 어떻게 감당하라고.”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나마 엄마니까 이 정도로 끝난 거지, 똑같은 말을 아버지에게 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다리몽둥이가 부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그게 문제야? 네 아빠도 알아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아빠가 준비할 게 뭐 있어? 대신 낳아 줄 것도 아닌데.”
“얘가 진짜!”
“아무튼, 아직은 말할 생각 없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나직하게 덧붙이는 말에, 정은희는 달싹이던 입술을 도로 다물고 말았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아들은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단 알았으니까 쉬어. 그 몸으로 밖에 나갈 생각 하지 말고.”
아들의 복부를 일별한 뒤에 정은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청심환이 있나?’
계단 난간을 잡고 한 걸음씩 내려가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뒤늦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두 눈을 감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일단은 자신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 긴히 필요할 것 같았다.
***
식후에 마시는 커피는 직장인들에게 필수 덕목이었다. 테이크아웃 전용 컵을 하나씩 들고 회사로 돌아가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최 팀장이 말을 걸었다.
“차영 씨 괜찮아?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유일하게 빈손인 이차영은 습관처럼 웃어 보였지만, 최 팀장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속이 안 좋다며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하던 모습을 코앞에서 목격한 까닭이었다.
“계속 안 좋다 싶으면 얼른 병원에 다녀와. 아픈데 버티는 것만큼 미련한 게 없어.”
“네.”
이차영은 순순히 대답했지만, 병원이라면 이미 일찌감치 다녀온 터였다.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은 며칠 전부터였다. 때가 되어도 입맛이 없고, 가끔 누군가가 위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어쩔 땐 체한 사람처럼 종종 헛구역질이 날 때도 있었다.
몸이 가장 큰 재산이고 아프면 곧바로 병원을 찾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만큼, 이차영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자마자 곧바로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깨끗했다. 의사의 권유로 이곳저곳 정밀 검사까지 받았지만 이상이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환자와 아무 문제 없는 깨끗한 차트를 번갈아 보다가, 주치의는 조심스럽게 소견을 내놓았다.
‘이런 경우 정신적인 스트레스 또는 압박감이 원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근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거나 힘든 일이 있지는 않습니까?’
듣자마자 서규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서규하에게 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폭탄 같은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지한 이후로, 이차영은 틈만 나면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차올랐다. 처음에 섹파 제안을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깊이 빠져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여느 때처럼, 흥미가 식으면 자연스레 이 관계도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저도 모르게 생각이 달라졌다. 만날수록 질리기는커녕 점점 더 좋아졌고, 당연한 듯이 다음을 기약했다.
서규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속 바텀 포지션을 자처하면서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할 리가 없었다.
그랬는데…….
여자한테는 관심도 없다고 제 입으로 말했던 놈이, 섹스로 모자라 임신까지 시켰다고 생각하니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눈앞에 있으면 멱살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감한 일은 또 있었다. 혼자 고민하다가, 딴에는 친구랍시고 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모양인데……. 전후 사정도 모르고 한 ‘지우겠다’는 대답에 상처 아닌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속해서 자신의 연락을 피할 리가 없었다.
“어흐, 춥다. 얼른 들어가자고.”
걷다 보니 회사가 코앞이었다. 일행들과 몇 발자국 떨어져서 로비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그날 이후로 벌써 일주일 가까이 지났고, 서규하는 자신의 연락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중이었다. 더 늦기 전에, 이번에는 자신이 굽히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
타악-
조용한 골목길에 차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차에서 내린 이차영은 눈에 익은 대문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전화부터 먼저 걸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서규하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고, 이차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곧장 초인종을 눌렀다. 퇴근 직후에 전화를 걸었을 때도 폰이 꺼져 있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딩동-
긴 손가락으로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인터폰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세라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작은 잡음조차 들리질 않았다.
“…….”
한 번 더 초인종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창문마다 캄캄하게 불이 꺼진 것을 보고는 조용히 내렸다.
차오르려는 조바심을 억누르면서 이성적인 생각을 이어 갔다. 저녁 시간대니 밥을 먹으러 나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약속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차영은 다시금 운전석에 올랐다. 천천히 후진한 그는 맞은편 골목 한 귀퉁이에 차를 세웠다. 서규하가 사는 집이, 정확히는 대문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좌석을 뒤로 젖히고,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한 곳을 주시했다. 언제 귀가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더 늦기 전에 수습할 것을 작정하고 찾아온 참이었다.
침묵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대체 누가 서규하의 애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우는 게 최선일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혹시라도 아이를 낳겠다고 하면, 한 발 더 나아가서 그 여자랑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
여전히 같은 곳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밤바다처럼 검게 가라앉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오늘 서규하를 만나면, 가장 마지막에 할 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난 너랑 이대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하지만 이차영의 계획은 무참하게 어그러졌다. 밤과 새벽을 지나 동이 터 오를 때까지 서규하는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