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꿈속에서 정은희는 한적한 오솔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나무마다 곱디고운 단풍이 물들어 있고, 작은 새들은 예쁘게 지저귀며 청아한 목소리를 자랑했다. 감성이 풍부한 정은희는 아름다운 풍경을 눈과 마음으로 즐기면서 산책을 계속했다.
“응?”
그러다 어딘가에 시선이 닿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눈부시게 빛나는 무언가가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저게 뭐지?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내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은 주먹만 한 금덩어리였다.
“아니, 이게 왜 여기 있어? 누가 흘리고 갔나?”
고갤 들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곱게 물든 단풍잎만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시선이 거듭 아래를 향했다. 진한 색깔, 특유의 광택. 땅에 떨어진 것은 금덩어리가 틀림없었다. 현찰 대신 금괴를 모을 만큼 금붙이에 관심이 많은 그녀가 순금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홀린 듯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잠깐 망설이던 정은희는 천천히 손을 뻗었고, 머잖아 한층 더 크게 눈을 뜨고 말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던 금덩어리가, 손이 닿은 곳부터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했다.
“엄마야!”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서둘러 자신의 손을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길바닥에 놓인 황금은 그새 원래의 빛깔로 돌아와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지금 헛걸 봤나? 뚫어져라 황금을 쳐다보던 정은희는 다시 한 번 조심조심 손을 뻗었다.
“아씨, 깜짝이야.”
놀라서 후다닥 손을 뗐다. 헛걸 본 게 아니었다. 분명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는데, 손이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새카만 덩어리로 변했다.
“여기서 뭐 해요?”
그때였다.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막내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정은희는 곧장 하소연하듯이 말을 꺼냈다.
“이것 좀 봐, 규하야. 누가 봐도 금인데 손만 댔다 하면 까맣게 변해.”
조심조심 두 번째 손가락 끝을 갖다 대자, 아니나 다를까 빠르게 변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서규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엄마 손에 뭐 묻은 거 아냐?”
“아냐, 깨끗해. 설령 뭐가 묻었다 해도 손을 대자마자 색깔이 변하는 게 말이 되니?”
아들에게 내밀어 보인 손바닥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여전히 시큰둥한 아들을 향해서 정은희가 재촉했다.
“아들, 네가 한 번 잡아 볼래?”
“싫어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잡아 봐. 응?”
“싫다니까요. 거지도 아니고.”
“……지금 엄마한테 거지라는 거야?”
확연하게 온도 차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서규하는 아차 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변명처럼 중얼거리다가, 옅은 한숨을 흘리며 마지못해 몸을 숙였다. 엄마를 화나게 하거나 서운하게 하면 고달파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
이내 정은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들의 손이 닿았는데도 금덩어리는 그대로였다. 그대로이다 못해 후광 같은 빛이 아들의 손가락 사이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규하 네가 잡으니까 그대로네?”
“그러게요.”
영혼 없이 대답하며 손을 떼자 곧바로 빛이 약해졌다. 정은희는 곧 비장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봤다.
“아들.”
“왜요.”
“얼른 챙겨.”
“……뭐?”
“얼른 챙기라고. 아무래도 네가 주인인가 봐.”
그 말에 서규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길바닥에 이런 게 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찝찝하고 수상했다.
“갖고 싶으면 엄마나 가져요.”
“엄마가 손대니까 까매지는 거 못 봤어?”
“그럼 걍 놔두고 가든가.”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들의 태도에 정은희는 조바심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금붙이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품위를 갖춘 사람이었다.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떨어져 있었다 해도, 관심은 보였을지언정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금덩어리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손을 대면 마법처럼 색깔이 달라지는 게 그 증거였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금덩어리의 주인은 막내아들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자꾸만 들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본 뒤에 정은희는 한 번 더 재촉했다.
“그러지 말고 엄마 말 들어.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 떡 얻어먹는 거야.”
“자다가 떡 먹으면 목에 걸려서 뒈질 수도 있, 아야! 아파!”
“오랜만에 또 매를 벌지? 어?”
찰싹 하는 소리가 찰지게도 울렸다. 팔뚝을 비비며 아프다고 난리를 피우는 틈을 타서, 정은희는 낚아채듯 주운 금덩어리를 아들의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아, 진짜. 싫다니까. 요샌 돈도 함부로 주우면 안 되는 거 몰라?”
“얼씨구. 큰형 용돈 들고 몰래 슈퍼로 달려간 건 기억도 안 나지?”
“와, 그게 언제적 일인데 들먹이고 그래?”
“언제적이긴. 너 유치원 다닐 때지. 내가 그 일 때문에 수명이 10년은 더 줄었어.”
몇 번이나 우려먹은 하소연에 이어서, 정은희는 걱정할 것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여기 네 할아버지 선산이라서 문제 될 거 없어.”
“선산이 뭔데.”
“…….”
“산 이름이야?”
“신선이 사는 산이다, 산.”
“아, 왜 또 때려!”
약간의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결국 이긴 사람은 정은희였다. 아들의 불룩한 바지 주머니를 보면서 뿌듯하게 웃은 것도 잠시, 더욱 놀라운 광경이 정은희의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저것 좀 봐 봐, 규하야!”
오솔길을 따라 심겨 있는 나무의 잎들이 어느새 전부 황금으로 변해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쏟아졌다.
눈을 비볐다 다시 봐도 보이는 것은 변함없었다. 실로 경이롭고도 놀라운 풍경이었다.
***
세안을 마친 서창식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와이셔츠를 입고 단추를 채우는데, 오랜만에 따라 들어온 아내가 직접 넥타이를 골라 주었다.
“오늘은 이걸로 해요, 여보. 내가 해 줄게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정은희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중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서창식은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러자 대번에 정은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여보, 내가 어제 무슨 꿈을 꿨는지 알아요?”
“왜. 무슨 꿈을 꿨는데.”
“황금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어요. 처음엔 작은 덩어리를 주워서 규하한테 줬는데, 나중에 보니까 산의 나뭇잎이 죄다 금으로 변해서 빛나더라니까요?”
들뜬 기색이 만연한 아내의 얼굴에, 서창식은 픽 웃으며 농을 건넸다.
“그 꿈, 내가 살게. 나한테 팔아.”
“미안하지만 안 돼요. 자, 다 됐어요.”
넥타이를 매 준 뒤에 정은희는 남편의 옷매무시를 바로 해 주었다. 친절함은 계속되었다. 남편의 서류 가방과 코트까지 직접 챙겨서 배웅해 준 다음, 정은희는 거실로 되돌아갔다.
“참, 이럴 게 아니지.”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기던 그녀는 핸드폰으로 막내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래저래 바쁘게 살다 보니 아들의 목소리를 못 들은 지도 꽤 오래됐다. 마침 어젯밤 꿈에도 나왔겠다, 모처럼 아들과 함께 오붓하게 점심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
“……어나.”
잠결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규하는 눈을 뜨는 대신 오만상을 찌푸린 채 반대로 돌아누웠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덮고 있던 이불이 확 걷히며 재촉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얼른 일어나. 엄마 왔어.”
서규하는 그제야 부스스 눈을 떴다.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모친이 서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왜 아직 이러고 있어? 준비 다 하고 기다리라니까.”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지.”
“전화한 지가 언젠데. 얼른 씻고 나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잔소리가 쏟아졌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몸을 일으킨 서규하는 팬티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모자는 나란히 집을 나섰다. 한껏 멋을 낸 모친과 달리 서규하는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 티 모자를 뒤집어쓴 차림새였다. 식당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에도 모친의 잔소리는 계속됐다.
“옷 좀 좋은 걸로 입으라니까.”
“엄마랑 밥 먹는데 뭐 하려고, 아야! 왜 꼬집고 그래?”
“그게 엄마 앞에서 할 소리야?”
티격태격하는 동안 목적지인 설렁탕집에 도착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아직 12시가 되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음식을 주문한 뒤에, 정은희는 물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운을 뗐다.
“요즘 별일은 없어?”
“없어.”
“카페는.”
“잘 굴러가고 있어.”
얼마 전에 처음으로 남자 알바생을 뽑았는데, 매니저에게 물어보니 뽑길 잘했다면서 만족해하는 기색이었다. 다행히 이후로는 별다른 일도 없고, 매출도 계속 괜찮게 유지되는 편이었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신 뒤에 이번에는 서규하가 입을 열었다.
“다른 약속 있어?”
“응?”
“오늘따라 엄청 힘준 거 같아서.”
공들여 세팅한 게 분명한 헤어스타일에, 커다란 녹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반지가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귀걸이 또한 시상식 때 여배우들이나 할 법할 정도로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따 오랜만에 태선이랑 만나기로 했어. 참, 너 차영이랑 계속 연락하고 지낸다면서?”
순간 서규하는 뜨끔했지만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누가 그래?”
“아들들끼리 잘 지내는 것 같다고 태선이가 말하던데? 전에 너한테 전화도 왔었다면서 좋아하더라.”
그새 또 정보를 공유한 모양이었다.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서규하는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 대신 짧게 대꾸했다.
“별로 안 친해.”
“네가 같이 술 마실 정도면 친한 거지.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면서 잘 지내. 친구 중에 차영이 같은 애가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인 줄 알아?”
복은 개뿔. 지난 주말에 그 새끼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기나 해?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애꿎은 냉수만 한 잔 더 들이켰다. 잠시 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가 식탁 위에 놓였다. 뜨끈한 국물을 떠먹으면서, 정은희는 설렘이 담긴 표정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간밤에 꿨던 꿈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규하 네가 만지면 멀쩡한 거야. 진짜 신기하지 않아?”
다시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었다. 정은희는 동조를 바라는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봤지만, 무뚝뚝한 아들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밥만 먹으면서 산통 깨지는 대꾸를 했다.
“엄마 손이 똥손이라서 그런 거 아냐?”
“……아까부터 계속 매를 벌지?”
싸늘한 기색을 감지한 서규하는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행여나 또 꼬집힐세라 왼손은 슬그머니 식탁 아래로 숨겼다.
“엄마가 만질 때만 시커멓게 변했다니까 그러지.”
“그래서 너한테 줬다잖아. 네가 잡으니까 더 환하게 빛나서.”
“그러니까 엄마 손이……. 아니, 그냥 그렇다고.”
후루룩 국물을 떠먹는 아들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정은희는 거듭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차라리 남편한테 팔걸. 길몽이란 생각에 좋다고 아들을 찾아온 걸 뒤늦게 후회하면서 정은희도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밥값은 눈치껏 서규하가 냈다. 식당 밖으로 나온 뒤에 서규하는 모친을 바라보았다.
“갈게요.”
“걸어가려고? 집까지 데려다줄게.”
“약속 있다면서. 택시 타고 가면 돼.”
“그럼 그러든가. 이번 주말에는 집에 들러.”
“생각해 보고.”
모친과 헤어진 뒤에 서규하는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힐끗, 도로 쪽을 쳐다봤지만 빈 택시는 보이질 않았다. 무턱대고 기다리기가 그래서 일단은 계속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 보니 ‘매니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저예요, 점장님. 혹시 잠깐 통화 가능하세요?
“어. 무슨 일 있어?”
- 다름이 아니고요, 좀 전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는데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대요. 혼자 계시는데 연세도 많고, 저한테는 부모님보다 더 소중한 분이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3일 정도만 일을 좀 쉴 수 있을까요?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조심스러움과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매니저의 가족사를 들은 적이 있었기에, 서규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낮 타임 애들은 다 있는 거지?”
- 네.
“그럼 얼른 가 봐. 카페는 걱정하지 말고.”
그러자 본인이 말을 꺼냈으면서도 걱정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괜찮으시겠어요?
“괜찮겠지. 지금 밖에 있으니까 내가 가 볼게.”
- 그럼 점장님 오시는 거 보고 갈게요.
“됐으니까 얼른 가. 딴 데로 안 새고 바로 갈 테니까.”
부러 농담조로 대답하자 매니저는 감사하단 말을 거듭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서규하는 곧장 방향을 틀어서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에 다가오는 빈 택시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손을 뻗었다.
***
“점장님, 머그잔 아직 멀었어요?”
“다 됐어.”
서규하는 허둥지둥 손을 움직였다. 방금 세척을 끝낸 머그잔 두 개를 마른행주로 닦아서 올려 주자 김미선이 재빨리 그에 대고 스팀 주전자를 기울였다.
“여기요, 주문할게요.”
“네. 잠시만요.”
숨 돌릴 틈도 없이 포스기 앞으로 다가갔다. 음료 명을 들은 서규하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겨우겨우 메뉴를 찾아서 생크림 추가까지 누른 뒤에, 진동 벨과 카드를 손님에게 건넸다.
“점장님, 죄송한데 설거지 마저 부탁드려요! 계속 잔이 없어요.”
“알았어.”
서규하는 허둥지둥 싱크대 앞으로 복귀했다. 고무장갑을 낄 여유도 없어서 맨손으로 수세미를 잡고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매니저를 대신해서 전선에 뛰어든 지 3일째. 별생각 없이 덜컥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서규하는 3일 내내 제대로 혼쭐이 나는 중이었다. 한가할 때는 한가한데, 바쁠 때는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알바생이 음료를 전담하고, 그 외의 업무는 전부 서규하의 몫이었다. 그래 봤자 주방에서 하는 일이라곤 설거지뿐인데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으니 몹시도 서툴렀다. 오죽했으면 첫날에는 접시를 두 개나 깨 먹기도 했다.
난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꼼꼼한 매니저는 해야 할 일들을 수첩에 메모해서 주고 갔는데, 재고를 파악하는 것도, 주문을 넣는 것도,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래도 ‘딱 3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는데……. 오늘 오후에 매니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 상태가 점점 안 좋아져서 아무래도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만일 안 되면 다른 직원을 구하셔도 된다고.
그에 대고 냉큼 알겠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이번 달 말까지 쉬는 걸로 하자고 말한 뒤에 전화를 끊었고, 끊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또 하나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몇 달간 성실히 근무하던 저녁 알바생 한 명도 개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안 좋은 일은 연달아 일어난다더니 진짜였다. 앞으로 당분간은 꼼짝없이 마감 시간까지 붙들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함이 절로 밀려왔다.
밤 9시가 넘어가자 손님들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했다. 다소 한산해진 홀을 확인한 뒤에 서규하는 근처에 있던 알바생에게 말을 붙였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네. 다녀오세요.”
문을 열고 나가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장장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꺼냈다. 건물 외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잔뜩 쌓여 있는 알림들을 확인했다.
[오늘도 우리집으로 올 거야?]
이차영의 문자를 본 서규하는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
[ㄴㄴ]
[왜? 아직 몸이 안 좋아?]
[일하는중]
[일? 무슨 일?]
[그런게있ㅇㅓ]
귀찮아서 대충 찍어 보냈더니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왜.”
- 이 시간에 일을 한다고?
“매니저가 없어서 땜빵 중이야.”
카페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용케도 알아들은 듯 곧바로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 몇 시에 마치는데?
“11시.”
바빠서 좋은 점도 있긴 했다. 오후 때만 해도 퇴근 시간이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는데, 어느덧 조금만 더 버티면 마칠 시간이었다.
- 그럼 끝나고 우리 집으로 와. 좋은 와인 들어온 거 있어.
“생각해 보고. 끊어.”
통화를 끝낸 서규하는 문자 확인을 계속 이어 갔다. 설핏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음 주에 정기 검진이 있음을 알리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귀찮게.”
예방이 최선의 치료라고는 하지만, 딱히 아픈 데도 없는데 꼬박꼬박 병원에 가는 것은 몹시도 귀찮은 일이었다. 슬슬 들어가 보려는데 마침 카페 문이 열리며 손님들이 나왔다. 교대하듯 들어간 서규하는 어질러진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10시가 지나자,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커플들도 일어나며 마침내 모든 손님이 빠졌다. 어김없이 설거지는 서규하의 몫이었다. 케이크 부스러기가 말라붙은 접시를 벅벅 닦는데 조기 퇴근 욕구가 강렬하게 밀려왔다.
‘오늘은 좀 빨리 들어갈까?’
아무래도 그게 나을 듯했다. 가서 CLOSE 팻말을 걸라고 알바생을 부르려는데, 그와 동시에 지긋지긋한 종소리가 문 쪽에서 났다.
돌아버리겠네. 욕이 절로 나왔다. 그와 달리 등 뒤의 알바생은 싹싹한 목소리로 손님을 반겼고, 이윽고 손님의 목소리도 들렸다.
“점장님 있어요?”
순간 서규하의 어깨가 흠칫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볼일 있어서 나왔다가 잠깐 들렀어.”
그때, 또 한 번 문이 열리며 손님들이 들어왔다. 조기 퇴근이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집에나 가지 여긴 뭐 하러 와?”
“커피 한 잔 하려고.”
그래 놓고 정작 알바생에게 주문한 음료는 레몬티 두 잔이었다. 서규하는 다시금 설거지에 집중했고, 다 한 뒤에 쇼케이스 뒤쪽에 있는 작은 스툴에 엉덩이를 걸쳤다. 의자 높이가 꽤 높다 보니 홀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차영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언제 봐도 얼굴 하나만큼은 제대로 난놈이었다.
이마에서 콧날로, 콧날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라인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몸이 좋다 보니 수트발도 끝내줬다. 거기에 돈을 처바른 게 분명한 손목시계와 값비싼 구두발까지 더해져서, 남의 신성한 일터에서 혼자 화보를 찍는 듯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이차영 뒤에 들어온 남자 손님들도 자꾸만 그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진동 벨이 울렸는지 이차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서규하는 퍼뜩 시선을 피했다. 핸드폰을 꺼내서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이내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이건 점장님한테 주세요.”
점장님이란 단어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금세 이차영과 눈이 마주쳤다. 빙긋이 웃어 보이더니,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기다릴게’ 하는 말을 남기고는 뒤돌아섰다.
“이거, 방금 저 손님께서 점장님 드리래요.”
서규하의 시선이 알바생의 손을 향했다. 머그잔 가득 담겨 있는 레몬티를 바라보다가, 못 이기는 척 손을 뻗어서 건네받았다. 괜히 머쓱한 기분에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댔다.
“계산 제대로 한 거 맞지?”
“그럼요.”
“잘했어. 윤서 너도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마셔.”
“와, 그럼 저 밀크티 한 잔만 마셔도 될까요?”
“당연하지. 가서 팻말도 걸고 와. 저 손님들만 나가면 집에 가자.”
“네!”
희희낙락한 알바생이 주방을 나가고, 서규하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뒤늦게 입으로 가져갔다. 대자마자 너무 뜨거워서 화들짝 놀랐다.
‘와 씨, 깜짝이야.’
놀라서 안 쏟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얼얼한 입술을 손등으로 식힌 뒤에, 이번에는 후후 불며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가끔 카페에 올 때면 항상 커피만 마셨지 레몬티는 처음이었다. 존나게 뜨겁긴 해도, 향긋한 향도 그렇고 새콤달콤한 맛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그러다 불시에 이차영과 눈이 마주쳤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표정으로 협박하는 불량배처럼 미간을 구긴 채로 서규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뭘 봐?’
뭐라고 대꾸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판독이 불가했다. 이차영은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좀 전의 뻘짓은 못 봤기를 바라면서 서규하는 의자를 돌려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손님 때문에 결국 카페를 나선 건 11시가 넘어서였다. 문 앞에서 알바생과 헤어진 뒤에 서규하는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던 차 키를 꺼냈다. 락을 해제하는데, 옆에 서 있던 이차영이 물었다.
“우리 집으로 갈 거지?”
“아직 고민 중이야.”
“고민할 게 뭐 있어. 키, 나한테 넘겨. 내가 운전할 테니까.”
“네 차는 어쩌고.”
“내일 찾으러 오면 돼.”
서규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차 키를 넘겨주었다. 안 그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는데, 자처해서 대리운전을 해 주겠다고 하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불금이라 그런지 차도 많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차영이 묻는 말이 들렸다.
“매니저는 왜 안 나온 거야?”
“할머니가 아프셔서.”
“많이 편찮으신가 보네. 내일은 쉬지?”
“아니. 계속 나가야 돼.”
사실 카페에 있어 봤자 큰 도움은 안 되지만, 매니저가 부재중이니 자신이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원래 매니저가 하던 일을 다른 알바생에게 맡기기도 그랬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일어나. 어깨를 흔들며 깨우는 손길에 서규하는 부스스 눈을 떴다. 앞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피곤한가 봐.”
“안 하다 하니까 죽을 거 같아.”
길게 기지개를 켠 뒤에 차에서 내렸다. 연거푸 하품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잠은 금세 깼는데, 그 자리를 대신하듯 배고픔이 밀려왔다.
이 또한 근래 자주 있는 일이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돌아서면 배가 고플 때가 종종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서규하는 홀쭉한 배를 문지르면서 물었다.
“집에 먹을 거 있어?”
“치즈랑 와인 있어.”
“장난해? 그딴 걸로 어떻게 배를 채워.”
“저녁 안 먹었어?”
“바빠서 대충 먹었어.”
앉은 자리에서 김밥 두 줄을 클리어하고, 쫄면까지 먹어 치운 기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차영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딱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보고는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배달 음식이라도 시켜.”
“음식 냄새 난다고 지랄 안 하면.”
“안 해. 나는 뭐 집에서 밥도 안 해 먹는 줄 알아?”
그 말에 서규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밥도 해 먹어?”
“가끔. 누구랑 다르게.”
“잘 있다가 왜 또 시비야, 새끼야.”
티격태격하면서 두 사람은 집으로 들어갔다. 제집처럼 소파에 털썩 앉은 서규하는 곧장 배달 앱을 켰다.
메뉴를 확인하는 표정이 몹시도 진지했다. 머릿속에서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걸 시키자니 저것도 맛있어 보이고, 저걸 시키자니 그 옆에 있는 것도 맛있어 보이고. 한동안 고민하던 서규하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잠시 후 이차영이 거실로 나왔다. 와인 병과 글라스, 치즈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다음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뭐 시켰어?”
“치킨.”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이차영은 신기하단 표정으로 서규하를 쳐다봤다.
“진짜 좋아하네. 그렇게 먹으면 안 질려?”
“안 질려. 질릴 만큼 자주 먹는 편도 아니고.”
“내가 보는 것만 벌써 세 번짼데? 오늘까지 합쳐서.”
덤덤하게 지적하는 사실에 서규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좋은 건 알고 있지만, 남이 치킨 먹은 횟수까지 기억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할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딴 건 뭐 하러 기억해? 머리 쓸 데가 그렇게 없어?”
이차영은 재미있다는 듯 거듭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나라도 네가 뭘 먹었는지는 일일이 기억 못 해. 단지, 네가 내 앞에서 치킨을 먹었을 때마다 곧바로 페팅이나 섹스까지 한 거. 그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야.”
금세 ‘그랬나?’ 싶은 표정을 짓는 서규하를 보면서 이차영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와인 마실 거지?”
“줘 봐.”
꼴꼴꼴 하는 소리를 내며 와인 잔이 채워졌다. 서로의 잔을 가볍게 부딪친 뒤에 서규하는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모처럼 차분하게 잔을 기울인 것이 무색하게, 입술에 닿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다시 떼고 말았다.
“입에 안 맞아?”
“존나 써.”
상상하던 그런 맛이 아니었다. 거의 혀끝만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시큼털털한 맛이 훅 풍겼다.
“썩은 거 아냐?”
신랄한 비판 속에서 이차영도 뒤늦게 입으로 잔을 가져갔다. 가볍게 한 모금 머금자마자 이차영의 표정도 살짝 변했다.
와인을 선물해 준 사람은 여동생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와인 자체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은 제로였다. 와인 수집이 취미인 녀석인 데다, 저장고에 있던 걸 꺼내서 방금 개봉했으니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입맛에도 향이 유달리 묵직하고 진하긴 했다.
“괜히 입만 버렸네. 치즈나 좀 줘 봐.”
달라는 말과 달리 서규하는 직접 손을 뻗었다. 하얀 접시를 제 앞으로 끌어와서는 포크에 꽂혀 있는 치즈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나마 이건 먹을 만하네.”
좀 느끼하긴 해도 치즈 특유의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이차영도 접시를 향해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질세라 한 조각 더 찍어서 입으로 밀어 넣는데, 옆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고갤 돌려 보니 이차영이 한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있었다.
“왜 그래?”
“……아냐.”
짧게 대답한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척척척 빠르게 걸어가더니 금세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왜 저래?”
혼잣말처럼 물어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잠깐 이차영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가 서규하는 포크로 치즈 한 조각을 더 찍었다. 입에 넣은 것을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차영이 나왔다. 역시나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려다보면서 묻는 말이 들렸다.
“넌 괜찮아?”
“? 뭐가.”
“치즈 냄새가 너무 역해서. 꺼낼 때도 좀 그렇긴 했는데…….”
서규하도 덩달아 표정을 구긴 채로 물었다.
“날짜 지난 거 아냐?”
“그건 아니야. 며칠 전에 백화점에서 샀고, 유통 기한도 제대로 확인했어.”
서규하는 접시를 들고 냄새를 킁킁 맡아 본 뒤에 한 조각 더 입에 넣었다. 꼬릿꼬릿한 냄새야 원래 그런 거고, 계속 먹어서 느끼하긴 해도 역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괜찮은데.”
“그래? 그럼 내 입에만 안 맞는 건가 보네.”
“유난 떨기는.”
결국 남은 치즈는 전부 서규하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포크를 내려놓기 무섭게 이차영이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러든 말든 서규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왜 이렇게 안 와?”
치즈 몇 조각으로 배고픔이 가실 리가 없었다. 다리를 달달 떨면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으니 마침내 인터폰 소리가 울렸다.
“맛있게 드세요.”
묵직한 무게감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서규하는 곧장 주방으로 직행했다. 서둘러 의자에 앉아서 치킨 박스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제거했고, 뚜껑을 열자마자 환장할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탁, 새 컵을 식탁 위에 놓아 준 뒤에 이차영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서규하는 허둥지둥 나무젓가락을 떼서 닭 다리를 집어 들었다. 크게 입을 벌렸다가, 선심 썼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차영을 쳐다봤다.
“먹어.”
이차영은 포갠 두 손을 식탁 위에 올린 채 웃음 띤 얼굴로 되물었다.
“진짜 먹어도 돼? 배 많이 고파 보이는데.”
“싫으면 말고.”
이윽고 서규하는 본격적으로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이차영은 젓가락을 드는 대신 서규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원래 야식은 거의 안 먹는 편이기도 하고, 치즈 때문인지 속이 느끼해서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맛있어?”
“존나 맛있어.”
“……그런 것 같네.”
정말로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로 앞에 사람이 있는데, 심지어 대놓고 쳐다보고 있는데도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치킨만 먹을 리가 없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성질머리만 여전한 게 아니라 호불호가 확실한 것도 여전해 보였다.
어릴 때 이모가 숟가락에 나물 반찬이라도 올려 주면 난리를 칠 정도로 편식이 심한데, 마음에 드는 반찬은 보는 사람이 군침을 삼킬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에 자극받아서 덩달아 밥공기를 싹싹 비우기도 했다.
딩동-
그때였다. 또 한 번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서규하는 절대 놓지 않을 것 같았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다.”
후다닥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왔다고? 대체 뭐가? 덩달아 일어설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서규하가 다시 나타났다. 갈 때와 달리 묵직해 보이는 흰색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였다.
“그건 뭐야?”
“해장국.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
뚜껑을 열자마자 어김없이 음식 냄새가 훅 풍겼다. 살짝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금세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이차영은 스쳐 가는 투로 물었다.
“내 거도 시켰어?”
“하나는 배달 안 해 줘. 먹고 싶으면 먹든가.”
“…….”
실소를 닮은 웃음이 뒤늦게 나왔다. 보통 이럴 땐 그냥 그렇다고 할 텐데.
새삼 서규하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획부에 녀석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진짜로 웃음이 터졌다. 부하 직원들로부터 아부와 아첨을 받는 게 삶의 낙인 게 분명한 윤 부장과 붙으면, 돈 주고도 못 볼 빅 매치가 매일같이 성사될 것이 분명했다.
“왜 갑자기 웃어? 기분 나쁘게.”
“……그냥. 근데 다 먹을 수 있겠어? 양이 많아 보이는데.”
“다 먹을 거야.”
“배, 너무 불러도 섹스할 때 버거울 텐데.”
일순 서규하는 흠칫했다가, 수저로 국물을 휘저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해. 뻘소리 하지 말고 빈 그릇이나 줘 봐.”
부탁치곤 불손한 어조였지만 이차영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수납장에 든 그릇을 꺼내는데, 거실 쪽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전화 좀 받고 올게.”
그러든 말든 서규하는 계속해서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상호명도 제대로 보지 않고 아무 데나 막 시켰는데 그런 것치곤 완전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먹어 댔다. 식사를 마치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포만감 가득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 배부르다.”
국물까지 거의 다 마셨더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대충 뒷정리를 한 뒤에, 가득 찬 배를 문지르면서 거실로 나갔다.
이차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화 받는다더니, 아직 통화 중인가? 멀뚱히 있기도 그래서 서규하는 소파에 앉으며 TV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앉아 있던 몸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기울었다. 쿠션을 끌어와서 머리 밑에 넣고는 계속 리모컨을 눌렀다. 휙휙 바뀌던 화면이 홈쇼핑 채널에서 멈췄다. 여행 상품을 광고하는 문구와 함께, 풀 샷으로 고급 리조트를 촬영한 영상이 화면 가득 나왔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안 간 지도 꽤 오래됐다. 짐을 쌌다 푸는 게 귀찮기도 하고,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 좀이 쑤셔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중 제일 싫은 것은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이 가격에 이런 구성은 어디에서도 만나 볼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보여 주는 먹거리와 즐길 거리가 시청자들을 유혹했다. 계속 보고 있으니 마음이 절로 동했다. 매니저가 복귀하면 친구 놈들과 시간을 맞춰서 한 번 다녀와도 좋을 것 같았다.
“하암…….”
멍하니 누워 있으니 하품이 나왔다. 장장 12시간이 넘는 노동을 한 데다가 배까지 잔뜩 채웠더니 졸음이 절로 밀려왔다.
깜빡, 깜빡, 눈꺼풀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TV를 보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눈이 감겼다.
“네. 그럼 편하게 쉬세요.”
- 그래. 차영이 너도 푹 쉬어.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이차영은 귀에서 핸드폰을 뗐다.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장장 20분이 넘도록 통화를 했더니 귓가와 뺨이 뜨끈뜨끈했다.
발신자는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모였다. 행여나 바쁜 손주들에게 방해가 될세라 연락을 해도 철저하게 주말 오후에만 하시는 분인데, 오늘은 어쩐 일로 밤늦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식후에 잠깐 오수를 즐겼는데, 그 짧은 시간에 ‘차영이 네가 나오는 꿈을 꿨다’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손을 대면 금이 시커멓게 변하는데, 차영이 네가 만지면 멀쩡한 거야. 나중에는 ginkgo leaf? 그것도 전부 금색으로 변해서 반짝이는데……. 얼마나 황홀했는지 몰라.’
이차영은 꿈을 거의 꾸지 않는 편이었다. 해몽에는 관심이 없고 아는 바도 없지만, 사방팔방에 금이 가득했다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나쁜 꿈은 아닐 듯했다. 더군다나 제가 만지면 더욱 밝게 빛나기까지 했다니까.
“복권이나 사 볼까.”
실없는 생각에 픽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거실로 나가자마자 TV 소리가 들리고, 서규하가 소파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눈이 감겨 있었다. 얼굴만 봐도 한잠이 든 듯해서 이차영은 소파에 걸터앉으며 녀석을 깨웠다.
“일어나.”
“…….”
“일어나, 서규하.”
“…….”
하지만 서규하는 요지부동이었다. 허벅지 위에 걸치고 있던 손을 움직여 녀석의 얼굴로 가져갔다. 콕, 검지로 볼을 찔렀지만 여전히 꿈쩍도 하질 않았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거듭 입술을 움직였다.
“안 일어나면 내 마음대로 한다?”
“…….”
그 순간, 귀신같이 서규하의 미간이 꿈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깨울까 말까 고민하던 이차영은 결국 깨우는 대신 두 팔로 조용히 서규하를 안아 들었다. 이제 주말의 시작이니 급할 건 없었다. 매니저 없이 고군분투하느라 고생한 듯하니 오늘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해 줄 생각이었다.
***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잠이 깼다.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잤어?”
이차영이었다. 긴 다리를 자랑하듯 쭉 뻗은 녀석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럭저럭.”
몸을 일으킨 서규하는 앉은 채로 기지개를 쭉 켰다. 모처럼 몸이 가벼웠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또렷하고 개운한 걸 보니 밤새 제대로 꿀잠을 잔 느낌이었다.
“몇 시야 지금?”
“8시 좀 넘었어.”
존나 일찍 일어났네. 속으로 생각하는데, 문득 허리께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차영의 손이 옷자락을 들치고 있었다. 서규하는 재빨리 그 손을 붙잡으며 인상을 구겼다.
“뭐야?”
“어제 못 한 거 해야지.”
어렵지 않게 그 손을 다시 붙잡은 이차영이 자신의 고간으로 이끌었다. 설핏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발기한 성기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밥 먹고 해. 배고파.”
“가볍게 한 번만 하자. 밤새 너 깨우고 싶은 거 엄청 참았어.”
이차영은 그렇게 말하며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줄 수도 있었지만, 서규하는 얄짤없이 이차영의 얼굴을 밀어냈다. 식욕과 성욕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코 식욕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밥부터 먹자니까. 배고파 죽을 거 같아.”
“어제 야식 많이 먹었잖아.”
“미친,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겠냐?”
시기적절하게 배 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차영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말이 좋아서 야식이지, 한 끼 식사에 버금갈 정도로 먹은 데다가 곧바로 잠이 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눈 뜨자마자 공복을 호소하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소화력이었다.
“배 속에…….”
“뭐?”
“아냐.”
절로 생각난 말이 있었지만, 해봤자 싸움만 날 게 뻔해서 조용히 삼켰다. 옅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토스트 괜찮아?”
나쁘진 않지만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서규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차영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생각난 메뉴가 있었다.
“야.”
“왜.”
“근처에 랍스터 잘하는 집 있어?”
“……랍스터?”
되묻는 이차영의 표정이 묘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반문하는 얼굴이었다.
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찾을 만한 음식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먹지 말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탱글탱글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있어, 없어?”
이번에는 선뜻 대답하는 대신 이차영은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식성이 좋은 거야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침부터 떠올릴 법한 메뉴는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가 절로 생각나서 속이 메슥거렸다.
“아침부터 그걸 먹겠다고?”
“어.”
“이 시간에 랍스터 요리를 내놓는 레스토랑은 없을 것 같은데.”
“식당이 몇 갠데, 하나쯤은 있겠지. 아님 너 아는 사람 중에 요리사는 없어?”
“있기야 하지.”
“그럼 인맥 자랑할 기회 줄 테니까 힘 좀 써 봐. 난 편의점에 좀 갔다 올 테니까.”
“편의점?”
“아이스크림이 땡기는데 너네 집엔 없을 거 아냐. 갔다 올게.”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서규하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하.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된 이차영의 입에서 뒤늦은 실소가 나왔다. 뜬금없는 랍스터 타령도 어이가 없는데, 이번에는 공복에 아이스크림이라니. 자신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세기의 난제를 떠맡은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길 잠시, 이차영은 협탁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누르자 무미건조한 연결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맥 자랑할 기회 줄 테니까 힘 좀 써 봐.’
정말로 먹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전화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물론 톡톡히 받아 낼 생각이었다.
***
- 이번 주말에는 시간 꼭 비워 둬.
“알았어.”
- 대답만 하지 말고, 인마. 또 안 오면 존나 카페로 찾아가서 진상 짓 할 거야.
“알았다고. 끊어, 병원에 도착했어.”
통화를 끝낸 서규하는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검진 때문에 잠깐 짬을 내서 병원으로 향하는데 박찬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러다 얼굴 까먹겠다는 하소연을 시작으로, 궁금하지도 않은 지인들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툴툴대며 통화를 끝내긴 했지만 내심 전화가 걸려 와서 반갑긴 했다.
매니저의 빈자리는 여전했고, 혼자서 괜히 바쁜 것도 여전했다. 덕분에 근래 서규하는 본의 아니게 더없이 성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전에는 시간 맞춰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밤에 퇴근하고 집에 가면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덕분에 클럽이나 바는 고사하고 술 한 방울 입에 댈 틈도 없었다.
병원은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환자들로 붐볐다. 수납부터 마친 서규하는 거침없이 왼쪽으로 걸어갔다. 십여 년째 꾸준히 들락거리다 보니 발이 알아서 움직였다.
내분비과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직원이 나타나서 이름을 불렀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늘 그렇듯 무테안경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는 오태석이 보였다. 환자용 의자에 앉자마자 오태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약은 새로 처방받았어?”
“당연하지. 그때가 언젠데.”
“잘했어.”
오태석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컴퓨터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달칵, 달칵하며 손을 움직인 것도 잠시, 이내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뭐야. 이게 왜 이래?”
그 말에 서규하는 애먼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을 옮겼다.
“왜 그래?”
오태석은 대답이 없었다. 계속해서 마우스 소리만 달칵거리며 내더니, 모니터 하단에 있던 그래프를 커다랗게 확대해서 화면에 띄웠다.
서규하도 모니터를 쳐다봤지만 그래프 선이 뭘 나타내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시선이 다시금 앞을 향했다.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오태석의 옆얼굴이 자못 심각한 것처럼 보였다. 서규하는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
그제야 오태석이 의자를 돌렸다. 난감함이 철철 묻어나는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시선을 마주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뭔데 그래?”
그럼에도 오태석은 좀처럼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덜컥 불안함이 밀려왔다. 못 참고 한 번 더 닦달하려는 찰나, 다시금 오태석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 말이야.”
“어.”
“혹시 알파랑 성관계한 적 있어?”
“뭐?”
저도 모르게 되묻는 말이 튀어 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당황해서 그런 거였지만, 오태석은 구겨진 표정을 다르게 해석하고 서둘러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알아. 아닌 거라는 거 아는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게 아니면 이런 수치가 나올 리가 없어서……. 아니다. 오류가 난 걸 수도 있으니까 한 번 더 검사해 보자.”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재검부터 먼저 말하는 거였는데.
눈앞의 녀석이 오메가인 것은 맞지만, 오메가도 오메가 나름이었다. 절친한 친구의 동생에다 어릴 때부터 계속 봐 온 탓에 오태석은 서규하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한테는 아예 관심이 없고, 남자는 저보다 작고 여리여리한 상대들만 만난다고 했다. 그런 녀석이 남녀를 막론하고 ‘알파’와 성적인 접촉을 하거나 뒤를 허락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무방했다. 하물며 임신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그런데 어째 서규하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며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곤란한 표정으로 뒷목을 주무르는 것이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에 오태석은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물었다.
“한 적 있어?”
서규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에둘러 질문했다.
“꼭 말해야 돼?”
오태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렇게 되묻는 일 자체가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해. 눈짓으로 종용하는 표정에, 서규하는 마지못해 입술을 달싹였다.
“취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데?”
금세 띠꺼운 표정으로 묻는 말에 오태석은 저도 모르게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 뭐,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것도 아니고. 심경을 대변한 묵직한 한숨을 흘린 뒤에 오태석은 굳은 표정으로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이거 보여? 보통 10 미만으로 기록되는데, 지금 90이 넘는 걸로 나왔어.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임산부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수치야.”
오태석이 입을 다물자 침묵이 흘렀다. 서규하는 머릿속으로 방금 들은 말을 반추했다. 제대로 듣긴 했는데,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임산부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수치라고?
“……그런 게 왜 나한테서 나오는데?”
오태석은 거듭 긴 한숨을 흘린 뒤에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말했다.
“결과가 잘못 나온 걸 수도 있으니까 바로 재검부터 해 보자.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 번 더 검사실에 다녀오라는 말을 뒤로한 채 서규하는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몇 걸음 걷지 않아서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잠잠하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들은 말이 멋대로 반복 재생됐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임산부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수치야.’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2차 성징이 시작되자마자 페로몬 분비를 억제하는 시술을 받았고, 약도 꾸준히 복용해서 지금 자신의 몸 상태는 베타와 크게 다르지 않…….
‘잠깐.’
그 순간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에, 서규하는 돌진하는 뿔소처럼 되돌아가서 진료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태석은 물론이고 맞은편의 환자도 화들짝 놀란 모습이었지만, 서규하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약, 뭐야?”
“뭐?”
“씨발, 그 돌팔이가 처방했던 그 약이 대체 뭐냐고!”
“……아.”
오태석의 안색이 변하는 것이 슬로 모션처럼 서규하의 망막에 맺혔다. 당황한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오태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규하 앞으로 다가갔다. 머릿속이 몹시도 혼란스러웠지만, 일단은 흥분한 녀석을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쩌면 그 약 때문에 수치가 높게 나온 걸 수도 있어. 형이 지금 바로 다시 예약 잡아줄 테니까…….”
“장난해?”
서규하의 입에서 시니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존나 옛날에, 그것도 두 번인가 먹다가 때려치운 약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다고?”
예리한 지적에 오태석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문득 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금 자리로 돌아가서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기대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상단에 떠 있는 환자 이름은 서규하가 틀림없었다.
뒷목을 매만지며 당황스러움을 표출하다가, 오태석은 거듭 서규하의 눈을 마주 했다.
솔직히 말하면 검사 결과가 잘못 나왔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정말 만에 하나라도 일시적으로 수치가 높게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정확한 검사를 해 보는 것이 맞았다.
“검사부터 다시 해보자. 형이 지금 바로 예약 잡아 줄게.”
“무슨 검사?”
“……임신 여부부터 알아봐야지. 알파랑 관계한 적이 있다고 하니까.”
바로 그 사실이 문제였다. 오태석은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 내선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내분비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인과 접수처였다.
***
“엄마, 저 사람은 누구야?”
“엄마도 몰라. 태호 꼬북마을 동영상 볼래?”
젊은 여인은 서둘러 핸드폰 동영상을 켜서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아이는 금세 활짝 웃으며 두 다리를 기분 좋게 동동 굴렀다. 덕분에 손쉽게 아이의 주의를 사로잡은 여자는 힐끗 눈동자만 움직여서 대기실 구석진 곳을 쳐다봤다.
그곳엔 아까부터 누군가가 서 있었다. 후드 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잘근잘근 입술을 씹어대는 모습이 한눈에도 범상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아들이 자꾸만 그쪽을 쳐다보는 게 불안해서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틀어 줬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당사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후드 티의 주인공은 서규하였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푹 찔러넣은 채,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제 입술을 씹어댔다. 불안함이나 초조함을 느낄 때 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몇 분 전.
부인과 운운하는 오태석의 말을 들었을 때, 서규하는 기가 막혀 실소를 흘렸다.
‘지금 나랑 장난해?’
하지만 오태석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지난번과 확연히 다른 결과가 나왔으니 원인을 찾는 것이 마땅하고, 임신 여부 확인은 그 원인을 찾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라며 서규하를 설득했다.
결국 백기를 든 사람은 서규하였다. 만에 하나 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닌 게 틀림없을 테니까. 다만 이대로 돌아가면 존나 찝찝하고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아서,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검사에 응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검사를 하고 나니 영문 모를 초조함이 찾아왔다. 씨발, 지금이라도 그냥 갈까?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결심하고 걸음을 떼려는 순간, 차트를 든 간호사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서규하 님! 7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서규하 님?”
이런 엿같은…….
툭 터진 입술에서 짭조름한 피 맛이 느껴졌다. 후드 모자 끝을 붙잡은 채로 서규하는 도망치듯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규하 님?”
“네.”
다시 대면하게 된 의사는 상냥한 미소로 환자를 맞았다. 그리고 거대한 폭탄을 터뜨렸다.
“결과가 나왔는데, 임신한 게 맞으세요. 축하드려요.”
정말로 축하한다는 표정이었다. 그와 달리 서규하의 얼굴은 무섭게 굳었다. 그러잖아도 은근한 긴장감이 서려 있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사의 얼굴에도 조금씩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뇌를 통째로 도둑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한 상태에서 서규하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임신이라고요?”
“네.”
“제가요?”
“네. 지금 4주 차 정도 됐고, 며칠 더 있으면 초음파로 태낭 확인이 가능하세요. 그리고…….”
사근사근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억지로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 애가 생겼다고요?”
“네.”
거듭되는 질문에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의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파일에 꽂혀 있던 종이를 한 장 꺼내서 서규하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이 구간 보이시죠? 서규하 님 hCG가 170으로 나왔는데, 이게 평균적으로 임신 4주 1일 차에 해당되는 수치예요.”
조금 더 전문적인 설명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임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페로몬 방출을 아예 막아 놨는데 어떻게 애가…….”
“억제술과 피임술은 완전히 다른 분야예요. 쉽게 말하면 인위적으로 페로몬 분비를 억제하고 있을 뿐이지 기관 자체가 퇴화한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일반적인 관계로도 임신이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아요. 히트나 러트일 때는 말할 필요가 없고요.”
눈앞이 절로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페로몬을 막아놨으니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임신이 가능한 상태였다고? 그리고 애가 생겼다고?
이제껏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에 폭탄이 떨어져도 이보다 더 혼란스러울 것 같진 않았다. 7번 연속으로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서규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바짝 마른 입술로 의사에게 물었다.
“……지울 수 있죠?”
불편한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후에 의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가능하진 않죠. 하지만 의사로서 제 견해부터 말씀드리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시길 권유드리고 싶어요. 진료 기록을 보니까 미성년일 때 억제술을 받으셨던데, 그 때문에 발달도 자연적으로 멈추면서 포궁이 상당히 약한 상태예요. 그런데 중절 수술을 하게 되면 앞으로 영구 불임이 될 가능성이 아주 커요.”
“……그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알려 주는 부작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유는 또 있어요. 마찬가지로 서규하 님의 건강과 관련된 문제인데요. 촉진제 복용으로 신체 기능이 갑자기 활발해진 상태라서, 또 한 번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기면 몸이 적응을 못 하고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요. 페로몬 자가 조절이 불가능하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약물로도 컨트롤이 안 될 수도 있고요.”
“그러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 하기가 무척 힘들어지죠.”
“…….”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규하 님 건강을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출산하시는 쪽으로 생각해 보시길 권유드리고 싶어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