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식후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을 누리고 있는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간 직원들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앞장서서 들어온 최 팀장이 개처럼 머리를 털어 대는 모습을 보고 이차영이 그에게 물었다.
“밖에 비 오나 봐요.”
“말도 마. 갑자기 막 퍼붓는데 뛰어오느라 혼났어.”
“차영 씨, 혹시 비 올 줄 알고 같이 안 나간 거 아냐?”
가끔 유치한 시비를 거는 박홍준이었다. 대꾸해 줄 가치가 없는 말에도 이차영은 준수한 얼굴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손수건 빌려 드릴까요?”
“됐거든요.”
질색한 박홍준이 담뱃갑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골인시킨 뒤에 이차영도 몸을 일으켰다. 칫솔과 핸드폰을 들고 나가려는데 최 팀장이 갑자기 그를 호출했다.
“차영 씨, 잠깐만 이쪽으로 와 봐.”
순순히 걸음을 옮기자 최 팀장이 의자를 돌리고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 한산한 사무실을 둘러보더니 속닥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혹시 라 플랫 좋아해?”
“라 플랫이면……. 이번에 프로모션 진행하는 그 밴드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나한테까지 티켓이 내려왔는데, 이런 데는 관심이 전혀 없어서 말이야. 혹시 차영 씨 좋아하면 가져가. 기획안 성사시킨 1등 공신이잖아.”
“그럼 따님 드리세요. 지금은 구하기도 힘들다던데.”
“안 그래도 어제 물어봤는데, 이게 뭐냐면서 코웃음만 치더라고. 암튼 필요하면 가져가.”
최 팀장은 은근히 속이 좁고 소심한 구석이 있었다. 말이 좋아서 ‘필요하면 가져가’지, 정말로 사양하면 오랫동안 꽁해 있을 게 뻔했다. 그럼 피곤해지는 사람은 이쪽이었다.
“감사합니다.”
이차영은 생긋이 웃으며 티켓을 건네받았다. 얼른 안 보이는 데 넣으라는 최 팀장의 재촉에, 바지 뒷주머니에 티켓을 밀어 넣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양치질을 하고 돌아오자 그새 자리가 제법 채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본래라면 곧바로 업무를 시작하겠지만, 한 달 가까이 붙잡고 있던 새 기획안을 좀 전에 메일로 보낸 참이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유용한 정보는 거의 없지만, 킬링타임으로 오랜만에 경제 뉴스나 훑어볼 생각이었다.
옆자리 직원은 통화 삼매경이었다. 주말 약속 운운하는 말이 귀에 들렸고, 덕분에 이차영은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뉴스 앱을 종료한 그는 곧장 메시지 창을 열었다.
[뭐해?]
잠깐 기다렸지만 상대의 답장은 없었다. 제가 아는 서규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답장을 미루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단순한 만큼 즉흥적이고 성격도 급한 편이었다. 그렇다면…….
‘자나 보네.’
아직도 정신 못 차려서 걱정이라던 서창식의 말이 생각났다. 이차영은 픽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꽤 오래 울리던 신호음이 끊기며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 왜.
단 한 마디에도 짜증이 듬뿍 묻어났다. 그와 달리 이차영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예상대로 자다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어디서 볼까?”
- ……갑자기 뭔 소리야.
“금요일이잖아 오늘. 집으로 올래?”
대답 대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덜 깼는지 뭉개진 발음이었는데, 대충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쯤으로 말한 것 같았다.
발정 난 개새끼. 참으로 적절한 비유였다. 옴찔대며 조이는 구멍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안 볼 거야?”
- 누가 안 본대? ……있어 봐. 정신 차리고 다시 연락할게.
“알았어. 밥 챙겨 먹어.”
통화를 끝내고 다시금 뉴스 앱을 켜려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근처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사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연배가 제일 높은 이미희 부팀장이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차영 씨, 혹시 애인 생겼어?”
느닷없는 말에 이차영은 웃으면서 되물었다.
“갑자기요?”
“아니, 전화하는 표정이 너무 좋아 보이더라고. 진짜 생긴 거야?”
“아뇨. 친구랑 통화했어요.”
그러자 이미희는 짓궂은 표정으로 떠보는 듯한 질문을 이어 갔다.
“진짜 친구 맞아? 목소리도 그냥 녹아내릴 거 같던데.”
“진짜 친구 맞아요.”
남자라는 말을 덧붙이자 이미희는 그제야 시선을 돌리고 또다시 수다를 이어 갔다.
이차영의 얼굴에 언뜻 피곤한 기색이 떠올랐다. 일 잘하고 유능한 상사인 것은 맞지만, 부하 직원의 사생활에도 관심을 보이는 행동은 아직 적응이 되질 않았다.
잠시 후 이차영은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가 온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8시까지갈게]
서규하였다. 시간을 확인한 이차영은 키보드 위에 올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집중했다. 모처럼 퇴근 시간이 기다려지는 오후였다.
***
“응, 흑, 아, 흐읏!”
맞닿은 아래에서 살 부딪치는 소리가 끝없이 울렸다. 서규하의 몸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단단한 기둥이 파고들 때마다 눈앞에서 빛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깊이 박힌 순간, 요도구가 팽창하며 정액이 터져 나왔다.
싸고 있는 걸 알면서도 이차영은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밑동을 틀어쥔 채 난잡스럽게 허리를 튕기다가, 마지막으로 크게 찔러 넣으면서 정액을 내뿜었다.
“하아, 하아….”
뒤를 채우던 것이 빠져나가자마자 서규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복근이 잘 잡힌 아랫배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늘어진 채로 호흡을 고르는데, 가운을 걸쳐 입고 다가온 이차영이 생수병을 내밀었다.
“마실래?”
서규하는 상체만 겨우 세워서 병을 건네받았다. 꿀꺽, 꿀꺽,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훑고 내려가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다시금 널브러지듯 누웠다가 눈동자만 굴려서 이차영을 쳐다봤다.
“몇 시야?”
목이 따끔하며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규하는 인상을 구긴 채로 목을 매만졌다. 박히면서 소리를 내는 게 싫어서 참으려 해도, 막상 섹스가 시작되면 신음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두어 번 그러다 깨끗이 포기해서 마음은 편하지만, 따가운 목이 후유증처럼 남았다.
“11시 좀 넘었어.”
8시에 도착했으니 무려 세 시간이 넘도록 뒹굴었단 뜻이었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면서 서규하는 뒤늦게 침대를 벗어났다.
“씻는다.”
“같이 씻을까?”
“꺼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드러났지만 서규하는 거리낌 없이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밑에 서서 찬물을 틀었다. 하도 처박혀서 그런지 속이 살짝 울렁거리는 탓이었다.
잠시 그대로 물을 맞고 서 있었다. 뒤늦게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어김없이 부은 채로 벌어진 게 느껴졌다.
그날, 섹파 제안을 받은 이후로 서규하는 주말마다 이차영과 뒹굴었다. 놈의 말은 사실이었다. 몸을 섞을 때 이차영은 종마나 다름없었다. 온갖 저질스러운 말을 늘어놓으면서 교미에 미친 짐승처럼 박아 대는데, 웃기게도 상대의 쾌락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덕분에 섹스가 끝나고 나면 알주머니가 쪼그라들어서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다른 놈과는 해 본 적 없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저런 탑을 또 만나기는 어려울 터였다.
놈과 하는 섹스가 좋은 이유는 또 있었다. 언제부턴가 몸을 겹칠 때마다 피부가 찌릿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페로몬을 방출하는 것 같은데, 이건 좀 의아한 일이었다.
일전에 이차영은 ‘페로몬으로 휘두르는 섹스가 시시하다’는 이유로 베타인 바텀을 선호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서규하도 베타인 남자들만 안았다. 같은 오메가는 아무래도 좀 거북하고, 제정신인 알파라면 깔려 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차영이 자신과 있을 때 페로몬을 흘리는 게 의외이긴 했다. 하지만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놈은 지금도 자신을 베타로 알고 있는데, 그런 걸 물어봤다간 단번에 의문을 품을 게 뻔했다. 베타는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니까.
씻고 왔더니 이차영은 팔자 좋게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시선이 고정됐다. 자연스럽게 내린 머리카락에 우뚝한 콧날, 가운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까지. 하여튼 껍질만큼은 다시 봐도 제 취향이었다. 잠깐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이자 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자연스럽게 눈을 피하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허리를 숙이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팬티에 발을 끼우는데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고 가. 시간도 늦었는데.”
서규하는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미쳤어? 내가 왜 너랑 같이 자.”
“누가 같이 잔대?”
그제야 고개를 들자 빙긋이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손님방 있으니까 거기서 자라는 뜻이었어.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시발, 그럼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원하면 같이 자도 되고.”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에 서규하는 묵묵히 옷만 껴입었다. 속으로는 살짝 갈등이 일었다. 오늘따라 어찌나 힘껏 박아 대던지 아직도 아래가 얼얼했다. 이런 날에는 운전대를 잡는 것도 귀찮았다.
“참, 혹시 아직도 라 플랫 좋아해?”
익숙한 이름에 서규하의 시선이 다시금 옆을 향했다.
“영국 록 밴드?”
“맞아.”
“당연히 좋아하지.”
중딩 때였나. 박찬웅이 좋다고 난리를 쳐서 반쯤 어거지로 콘서트 영상을 같이 본 적이 있었는데, 5분 남짓한 영상이 끝난 뒤에 서규하도 그대로 팬이 됐다. 객석을 꽉 채운 수만 관중들, 그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화려한 무대 매너를 선보이는 모습이 어린 눈에 존나 근사하게 보였다.
“잘됐네. 콘서트 티켓이 생겼는데, 필요하면 줄게.”
“진짜야?”
내내 찌뿌둥하던 서규하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티켓을 예매하려고 심기일전해서 사이트에 접속했지만, 순식간에 매진되는 바람에 실패를 맛봐야만 했다. 이 형님의 현란한 손기술만 믿으라면서 으스대던 박찬웅도 허탕을 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암표라도 구해 볼 생각이었는데, 티켓이 있다고 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몇 장 있어?”
두 장이면 박찬웅과 다녀오면 딱일 것 같았다. 티켓을 빌미로 비싼 밥을 얻어먹고, 목에 힘주고 다닐 걸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다.
“한 장뿐이야.”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자 갔다 오고, 곰 새끼한테는 약 올리는 걸로 만족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럼 그거라도 줘.”
“잠깐만.”
몸을 일으킨 이차영이 거실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서규하가 그토록 열망하던 티켓이 들려 있었다. 손이 절로 움직였다. 하지만 붙잡기 직전에 휙 하고 위로 올라갔다.
“뭐야?”
“맨입으로는 안 되지. 암표를 100만 원 이상으로 파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그럼 그렇지. 웬일로 도움이 되나 했다.
방금 박찬웅을 벗겨 먹으려 했던 것은 깡그리 잊은 채, 서규하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말했다.
“우리 사이에 야박하게 왜 이래.”
“우리가 무슨 사인데?”
사근사근하게 웃는 낯짝을 보고 있자니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매주 붙어먹는 사이인데 그 정도도 그냥 못 줘?”
“그거랑 이거는 별개지.”
아무래도 그냥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후, 들으란 듯 한숨을 내뱉은 뒤에 서규하는 삐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해 주면 되는데? 입으로 해 줘?”
“그건 평소에도 한 번씩 하잖아.”
맞는 말이었다. 뼛속부터 게이의 피가 흐르기라도 하는지, 서규하는 상대의 페니스를 만지거나 입으로 빨아 주는 것도 꽤 좋아했다. 시선을 내리깐 채 고민하는 듯하던 이차영이 다시금 서규하를 쳐다봤다.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는데……. 나중에 말해도 돼?”
“말도 안 되는 거기만 해 봐.”
살짝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거절하기엔 당장 눈앞의 유혹이 너무나 컸다. 잠시 후 티켓은 서규하의 손으로 넘어갔다.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티켓엔 무려 VIP석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이건 진짜 돈 주고도 구할 수가 없는 거였다.
“자고 갈 거지?”
“어.”
“같이 잘까?”
“꺼져.”
이차영은 픽 웃으며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침실을 나섰다. 뒤따르는 발걸음이 몹시도 가벼웠다. 오늘은 존나 행복한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핸드폰 카메라를 켠 서규하는 이리저리 앵글을 조절해서 공연장 외벽을 렌즈에 담았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결과물이 나타났다. 이어서 그는 방금 찍은 사진을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가득했다. 부르르 폰이 진동하며 금세 답장이 왔다.
[시발왜염장질이야ㅜ]
[얼굴이라도보라곸ㅋㅋㅋ]
[ㅗㅗㅗㅗ내가갔어야되는데]
멤버들의 얼굴이 커다랗게 프린팅된 현수막을 찍어 보냈으니, 골수팬인 박찬웅이 지랄 발광을 할 만도 했다. 이때가 기회라는 생각에 서규하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깐족깐족 약을 올렸다.
“입장하실게요!”
앞쪽에서 마침내 큰 소리로 외치는 스태프의 말이 들렸다. 이제 곧 최애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답지 않은 설렘이 차올랐다.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움직이는데 손에 든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보니 ‘이차개’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왜.”
- 어디야?
“공연 보러 왔어. 왜 전화했어?”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 들어왔어?
“아직. 줄 서서 기다리는 중이야.”
- 그럼 바로 스태프한테 가서 티켓 보여 줘. 대기 없이 입장 가능한데, 말한다는 걸 깜빡했어.
“깜빡할 게 따로 있지.”
버릇처럼 툴툴대도 반갑긴 했다. 곧바로 줄에서 빠져나오는데 뒤늦게 어떤 생각이 들었다.
“너도 왔어?”
- 아까부터 와 있었어. 들어오면 출입문 기준으로 제일 왼쪽에 있는 계단 앞으로 와. 같이 갈 데가 있어.
“알았어. 끊어.”
전화를 끊은 서규하는 성큼성큼 앞쪽으로 걸어갔다. 반신반의하며 티켓을 보여 줬더니 스태프는 반대편 입구로 들어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 줬다. 공연장 규모가 커서 그런지 반대편 문까지 오지게도 멀었다. 인내심은 금방 바닥났다. ‘차라리 기다렸다 들어갈걸.’ 하는 후회가 드는 찰나, 마침내 또 다른 출입문이 나타났다.
티켓을 보여 주자 이차영의 말대로 프리 패스 입장이 가능했다. 안으로 들어선 서규하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이차영이 계단 근처에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먼저 아는 척을 한다.
“왔어?”
서규하의 얼굴에 금세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청바지에 후드 티를 걸친 자신과 달리 이차영은 베스트까지 갖춘 쓰리피스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의류업체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근사하긴 하지만, 이런 곳에는 맞지 않은 드레스 코드였다.
“퇴근하고 바로 왔어?”
“그런 것도 있고, 업무차 온 거라서. 올라가자.”
계단을 오르려는 것을 보고 서규하는 급하게 말을 꺼냈다.
“어디 가는데?”
“네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내가 좋아하는 사람?
미간을 찌푸린 채 쳐다보던 것도 잠시, 이내 설마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토니는 아니지?”
“맞는데.”
웃으면서 짤막하게 대답한 뒤에 이차영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가자.”
“잠깐만! 그게 가능해?”
서규하의 얼굴에 불신의 기색이 떠올랐다. 공연이 끝난 뒤에 멤버들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받을 수 있긴 해도 추첨에 뽑힌 일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다. 하물며 개인적으로 그들을 만나는 것은 어지간한 빽이나 연줄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능해. 우리 회사 주최로 성사된 거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집안끼리 친분이 있는 덕분에 이차영이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이런 공연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너네 회사에서 이런 일도 해?”
“이벤트성 행사로 기획한 건데, 시간 없으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게. 일단 가자.”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한 이차영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서규하는 여전한 의문과 얼떨떨함을 품은 채로 그 뒤를 따랐다.
***
내민 유리잔에 상대의 잔이 다가와서 부딪쳤다. 건배한 뒤에 서규하는 곧바로 잔을 들이켰다. 소주는 딱히 취향이 아닌데도 오늘따라 입에 착착 감기는 기분이었다.
그와 달리 이차영은 차분히 실내를 둘러봤다. 의외라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맞은편의 서규하에게 물었다.
“이런 데도 와?”
“곰 새끼 때문에 알게 된 데야.”
“곰 새끼?”
“박찬웅이.”
짧게 대답한 뒤에 서규하는 안주로 시킨 골뱅이무침을 입에 넣었다.
콘서트는 앵콜에 앵콜을 거듭하며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공연 내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방방 뛰면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 댄 탓일까. 밖으로 나오자마자 허기가 들어서 근처에 있는 실내 포차로 이동한 참이었다.
일찌감치 잔을 비운 서규하와 달리 이차영의 잔은 거의 그대로였다. 안주로 시킨 음식들이 전부 나왔지만 젓가락을 드는 일도 없었다.
“안 마셔?”
“마셔야지.”
스스럼없이 대답한 것치곤 결과가 시원찮았다.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고 서규하는 핀잔을 줬다.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강도가 약했다.
“귀한 입에 소주는 못 넣겠다 이거야?”
“그건 아니고. 알코올 냄새가 강한 술은 잘 안 맞아서.”
“그게 그거지, 인마. 아님 맥주라도 마시든가.”
채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서규하는 손을 번쩍 들고 “여기 맥주 한 병 추가요!” 하는 말을 외쳤다. 곧바로 부지런히 배를 채우는 모습을 보면서 이차영은 웃음을 흘렸다.
핀잔도 주는 둥 마는 둥 하고, 자진해서 맥주까지 시켜 주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긴. 콘서트장에서 봤던 모습을 생각하면 단순히 기분이 좋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공연 내내 서규하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VVIP석에 앉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사뭇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왜 실실 웃어?”
“그냥. 안 버리고 챙겨 두길 잘했다 싶어서.”
“뭘?”
“콘서트 티켓.”
서규하의 얼굴에 금세 경악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미친놈이네. 그 귀한 걸 왜 버려?”
“그래서 안 버리고 너 줬잖아.”
“버렸으면 죽었지.”
안주를 집어 먹는데 저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지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공연 시작 전, 이차영을 따라간 대기실에서 서규하는 정말로 라 플랫 멤버들의 실물을 영접했다.
현실감 없는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차영이 메인 보컬인 토니에게 영어로 뭐라뭐라 씨불였더니 그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일어나면서 악수를 청했다. 땡큐, 라는 한마디만 간신히 알아들었지만 통역을 자처해 준 이차영 덕분에 의사소통에는 무리가 없었다. 매너 좋은 토니는 사진 요청에도 기꺼이 응해 줬다. 덕분에 둘이서 찍고, 멤버들과도 같이 찍고, 마지막에는 이벤트용이라는 사인 CD까지 선물로 받았다.
팬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걷는데,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재수 없는 엄마 친구 아들, 아니, 엄마 친구의 재수 없는 아들 그 어딘가쯤에 머물러 있던 녀석이 처음으로 새롭게 보인 순간이었다.
“참, 아까 그 말은 뭐야?”
“어?”
“너네 회사에서 주최했다면서.”
“아아.”
뭘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이차영이 웃었다.
“말 그대로야. CE(Consumer Electronics)쪽은 시즌마다 프로모션을 크게 하는데, 저번 회의 때 내가 아이디어를 냈어.”
“전자제품 만드는 회사가 그런 회의도 해?”
“CE든 IM이든 결국은 많이 파는 게 목적이니까. 쉽게 말하면 마케팅의 일환이야. 기업 차원에서 문화 공연을 후원하고, 대대적인 광고도 하고, VIP 고객들 중 추첨해서 티켓도 보내 주고.”
“그럼 손해가 너무 크지 않아? 초청비만 해도 장난 아니었을 텐데.”
연차가 있는 만큼 인기가 예전만은 못 하지만, 그래도 라 플랫은 아직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밴드였다. 그러니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많은 돈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예산 비중으로 따지면 그렇게 비용이 센 건 아냐. 이런저런 파급 효과를 따져 보면 이득이 더 크고. 비슷한 예로 세계 대회나 스포츠 선수들한테 후원하는 것도 기업 이미지 메이킹 때문에 하는 거지,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거든.”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머리 아파.”
“자기가 먼저 물어봐 놓고는.”
픽 웃으며 내미는 잔을 보고 서규하는 제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소주는 여전히 달짝지근하게 입에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이차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도 우리 집에 갈 거지?”
“아니, 오늘은 패스.”
“왜. 약속 있어?”
“컨디션이 안 좋아서.”
줄곧 느긋하던 이차영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가 떠올랐다.
공연 내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면서 소리를 질러 대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봤건만……. 다른 이유도 아니고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니 살짝 어이가 없었다.
“너무 성의 없는 거짓말 아냐?”
“진짜야.”
엄밀히 말하면 곧 안 좋아질 예정이었다. 앞으로 20여 분만 더 지나면 망할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는 30일이었다. 인위적으로 억제하고 있긴 해도 생체 리듬에서 비롯되는 기복은 어쩔 수가 없었다. 콘서트 덕분에 아직은 기분이 좋지만, 집에 가서 발 닦고 눕는 순간 귀신같이 축축 처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최악이겠지.
“진짜 안 할 거야?”
“안 해. 주말에도 안 돼.”
솔직히 말하면 이쪽도 아쉬웠다. 이차영과 하는 섹스는 여전히 좋았다. 언제부턴가 어서 빨리 금요일이 되기를 기다리는가 하면, 이쪽에서 먼저 문자를 보낼 때도 있었다.
또 한 잔의 소주로 아쉬움을 달래는데 대뜸 하는 말이 귀에 닿았다.
“가슴 잔뜩 빨아 줄게.”
“……!”
하마터면 입 안에 든 술을 내뱉을 뻔했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행히 이쪽에 시선을 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친 뒤에 서규하는 으르렁대는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위든 아래든 빨아 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님 네가 할래? 내 자지 빠는 것도 좋,”
“아, 닥쳐. 좀.”
거칠게 내려놓은 잔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순간 ‘저 새끼가 취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밑 빠진 항아리 같은 놈이 꼴랑 맥주 한 병으로 취할 리가 없었다.
“오늘은 진짜 생각 없어. 정 하고 싶으면 클럽에나 가든가.”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만 한 구멍은 없을 거 같아.”
서규하는 곧장 말뜻을 깨닫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뒤질래?”
“왜. 칭찬인데.”
“칭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잠깐이나마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던 게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서규하는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로 소주를 홀짝였다. 어차피 내일은 아무것도 못 할 테니, 실컷 마시고 집에 가서 뻗을 생각이었다.
***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물먹은 솜처럼 온몸이 축축 늘어졌다. 의욕도 흔적을 감췄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억지로 계속 잠을 청했더니 어느 순간 더는 잠도 오질 않았다. 그래도 서규하가 침대 밖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감고 있는데 침묵을 깨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다시금 눈을 감으며 전화를 받았다.
“왜.”
- 여보세요? 잤어?
“그냥 누워 있어.”
- 왤케 다 죽어 가는 목소리야? 어제 혼자 신나게 처놀고 왔으면서.
“혼자 신나게 처놀고 와서 그런다, 왜.”
방정맞게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을 귀 위에 올려놓은 채로 서규하는 입을 열었다.
“왜 전화했어?”
- 오늘 병철이 새끼 생일이라서 모이기로 했잖아. 백퍼 까먹었을 거 같아서 전화했어.
박찬웅의 짐작은 정확했다. 이제 곧 생일이라면서 윤병철이 노래를 불러 댔지만, 한 귀로 듣고 흘린 탓에 오늘인 줄 몰랐다.
- 올 거지?
“봐서.”
대답은 이렇게 해도 갈 확률이 99퍼센트였다. 떡 벌어진 체구와 과묵한 면상에 어울리지 않게 윤병철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속이 좁은 새끼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생일 모임에 빠지면 앞으로 몇 달간은 우려먹을 게 뻔했다.
- 윤병철이 무섭긴 한가 보네.
“지랄. 똥이 무서워서 피하지 더러워서 피해?”
- 그니까 무서운 거 맞잖아.
“더러워서 피한다니까.”
- 이놈 이거 정신 줄 가출했네. 잠 덜 깼어?
“닥치고 시간이랑 장소나 말해.”
원하는 정보를 획득한 서규하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가, 슬쩍 뜨고는 핸드폰 알람을 맞췄다. 8시까지라고 했으니 10시쯤에 가서 얼굴만 비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머잖아 또다시 벨 소리가 울렸다. 보나 마나 박찬웅일 게 뻔해서 속으로 툴툴대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새끼, 한 번에 말하면 될 걸 귀찮게 꼭……. 어?’
액정을 본 순간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곰새끼가 아니라 이차개였다. 이왕 폰을 집어 든 김에 선심 써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 여보세요? 뭐 하고 있어?
“자는 중.”
그러자 놈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웃음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재주 좋네. 자면서 전화도 다 받고.
컨디션이 좋으면 받아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옆으로 누워 있던 자세를 똑바로 하면서 서규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전화했어?”
- 진짜 컨디션이 안 좋아졌는지 궁금해서. 근데 목소리가 좀 가라앉긴 했네.
종일 입 다물고 있어서 그렇다는 말은 해 줄 필요가 없었다. 용건 없으면 끊으라고 말하려는데 녀석의 목소리가 먼저 이어졌다.
- 진짜 어디 안 좋아?
“안 좋다니까. 속고만 살았어?”
- 병원은.
“그 정도는 아냐. 할 말 없으면 끊어.”
서규하는 그대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차영이 전화를 건 속셈은 뻔했다. 저녁이 다가오니 슬금슬금 섹스 생각이 나는 모양인데, 그러든 말든 제 알 바 아니었다. 의욕이 제대로 가출한 지금 상태로는 떡을 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문득 들리는 초인종 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다. 서규하는 살짝 실눈을 떴다가, 이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개새끼들, 하고 웅얼거렸다.
가끔 ‘좋은 소식을 전해 주러 왔다’면서 짝을 지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부류인 듯했다. 아니면 허락도 없이 집까지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조용하면 가겠지.’
하지만 서규하의 예상은 빗나갔다. 초인종을 못 눌러서 한이 맺히기라도 했는지, 딩동- 딩동- 하는 소리가 약간의 텀을 두고 계속 울렸다. 하필 방문이 열려 있는 탓에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음 공해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서규하는 이불을 뻥 걷어차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미쳤……!”
성을 내면서 벌컥 문을 열었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예상했던 사람들 대신 전혀 다른 인물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잤어?”
이차영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에, 입 안 가득 장착했던 쌍욕 대신 얼떨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볼일이 있어서 나왔다가 잠깐 들렀어. 들어가도 돼?”
어버버 하는 사이에 본의 아니게 길을 터 주게 됐다. 이윽고 거실로 들어선 이차영이 시선을 마주 하고 물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죽 사 왔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이차영은 늘 보던 정장 차림 대신 브이넥 니트에 편안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자신의 집 거실에 서 있는 모습이 몹시도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서규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안 거야?”
“이모한테 전화해서 물어봤어. 넌 안 가르쳐 줄 거 같아서.”
이내 이차영은 죽이 담긴 종이 가방을 살짝 들어 보였다.
“식탁에서 먹을래?”
“됐어. 생각 없어.”
“사 온 성의를 봐서라도 조금만 먹어. 너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을 거라고 이모가 걱정하시더라.”
“아, 진짜 뭐 하러…….”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길에 짜증이 묻어났다. 월말마다 이러는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이틀 정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생해졌다. 어머니도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옳다구나 하고 집 주소를 알려 준 모양이었다.
“아니면 침실로 갖다 줄게. 주방 좀 빌려도 되지?”
대답하기도 전에 이차영은 알아서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듯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오래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사이가 좋은 어머니들 때문에 어렸을 땐 제법 자주 만나서 같이 놀긴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녀석이 해외로 유학을 간 뒤로는 10년 넘게 서로 연락 한 번 없었고, 귀국했단 말을 듣긴 했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재회한 것도 우연의 산물이었다. 어쩌다 보니 거의 매주 만나고 있긴 하지만, 굳이 이차영이 아니라도 누군가와는 했을 일이었다. 한마디로 눈앞의 놈은 ‘잘 맞는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녀석 또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몸이 안 좋다는 말에 집까지 찾아온 걸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성욕이 왕성한 놈이니 상황을 봐서 그 짓을 하려고 왔을 가능성이 높지만……. 나가서 서 있기만 해도 꽃향기에 홀려 모여드는 나비처럼 다가오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굳이 죽까지 사 들고 온 걸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미간을 구긴 채로 서 있다가 서규하는 뒤늦게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해 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야.”
짤막한 부름에 뒤를 돌아보는 이차영과 눈이 마주쳤다. 서규하는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나한테 딴 맘 있는 건 아니지?”
“딴 맘?”
금세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이차영은 “아아.” 하면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친구 이상의 호감이나 애정이 있냐고 묻는 거면, 대답은 No야.”
“그럼 지금 집에까지 찾아온 건 뭐야?”
“말했잖아. 콘서트장에서 날뛰던 녀석이 내일부터 아플 예정이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전화해 본 거라고. 근데 진짜 목소리가 안 좋길래 잠깐 들른 거야.”
“……그럼 다른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거지?”
“없어. 죽 사 온 거는 이모가 부탁해서 그런 거고.”
이어서 이차영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장담하는데,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야. 아직 연애할 생각은 없고, 결혼은 당연히 오메가랑 할 거니까.”
그에 서규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결혼도 하려고?”
“때가 되면 하겠지. 이왕이면 생각이 같은 사람이랑.”
“무슨 뜻이야?”
“평생 한 사람한테만 매여 살 마음은 없거든.”
서규하의 미간이 점차 일그러졌다. 보통 집안이 아닌 만큼 정략결혼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는 말을 들으니 새삼 뻔뻔하고 낯짝도 두꺼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도 네가 이런 새끼라는 걸 알아야 되는데.”
“이모 앞에서는 절대 이런 말 안 하지.”
씩 웃는 모습에 주책맞게도 심장이 반응을 보였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시선을 거두는데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이는 말이 이어졌다.
“죽 다 식었겠다. 방으로 가져갈까?”
“알아서 먹을 테니까 놔두고 가.”
“안 먹을 거 뻔한데 그렇게는 못 하지. 차려서 가져갈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뒷모습을 보면서 서규하는 거듭 한숨을 흘렸다. 저 새끼 면상이 취존 한복판에서 조금만 비켜 갔어도……. 하등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침실로 돌아갔다.
헤드에 기대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길 잠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서규하는 멈칫했다.
“시발.”
이내 튕기듯 일어나서 침실을 뛰쳐나갔다. 기척을 느낀 이차영이 뒤를 돌아봤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나타난 서규하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그러든 말든 서규하는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어디다 뒀더라? 저 새끼가 봤으면 안 되는데…….
‘저기 있다!’
마구 배회하던 시선이 식탁 위에서 멈췄다. 서규하는 냉큼 팔을 뻗어 뭔가를 재빠르게 낚아챘고, 도망치듯 방으로 되돌아갔다.
초조하게 방 안을 둘러보다가 협탁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 안에 무언가를 넣었다. 탁, 서랍을 닫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이차영은 없었고, 서규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찰나에 어찌나 당황했는지 등에 진땀이 날 정도였다. 다시금 침대로 올라가서 폰 게임에 열중하는데 잠시 후 열린 문에 대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갈게.”
이차영의 손에는 꽃무늬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집주인인 자신도 처음 보는 거였다.
“먹어.”
받고 보니 플라스틱 통 대신 하얀 사기그릇에 죽이 담겨 있었다. 반찬도 그렇고, 수저도 집에서 쓰는 걸 꺼낸 듯했다.
“그냥 가져오지 뭘 이렇게 해 왔어?”
“이러는 편이 더 정성스럽게 보이잖아.”
“정성은 개뿔.”
툴툴대면서 죽을 휘적거리다가 한 숟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간이 딱 맞는 데다 해물이 잔뜩 들어 있어서 입이 심심하지도 않았다. 언제 튕겼냐는 듯 열심히 먹는데, 이차영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면서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식탁에 뭐 이상한 거라도 놔뒀어?”
“쿨럭…!”
입 안에 들어 있던 죽이 튀어나왔다. 아오, 썅. 서규하는 입가에 묻은 걸 손등으로 닦아 낸 뒤에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티슈는 보이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차영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고, 어디서 찾았는지 물티슈 통을 들고 돌아왔다.
“닦아. 옷에도 묻었어.”
고개를 숙여 보니 정말로 옷에도 죽이 묻어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벅벅 닦아 내는데, 이차영이 거듭 침대 위에 앉으면서 시선을 보냈다.
“진짜 뭐 있나 본데?”
“있긴 뭐가 있어.”
짜증스럽게 대답했지만 이차영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외려 느긋하게 팔짱을 끼면서 더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더 수상해. 자위 기구 같은 거라도 올려놨어?”
서규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돌았어? 식탁에 그딴 걸 왜 올려놔.”
“없다고 안 하는 거 보니까 있긴 한 모양이네.”
순간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뗐다.
“없어, 새끼야.”
버릇처럼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 보니 때마침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았다. 트레이를 내려놓고 일어서는데 이차영이 급하게 팔을 붙잡았다.
“놀려서 화났어?”
“헛다리 짚지 마. 약속 있어서 나가 봐야 돼.”
방금 본 시간은 7시 2분이었다. 원래는 느긋하게 갈 생각이었지만, 차라리 빨리 집을 나서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몸도 안 좋다면서 나가려고?”
“신경 끄고 그만 가 봐. 다음 주에는 시간 비워 둘 테니까.”
“데려다줄까?”
“나도 차 있어, 새꺄. 얼른 가.”
잡힌 팔을 빼내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잠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죽 잘 먹었어. 그리고 앞으로 집에는 찾아오지 마.”
타악, 욕실 문을 닫고 들어간 서규하는 훌렁훌렁 옷을 벗고 샤워기 밑에 섰다.
조금 전에 허둥지둥 가져와서 숨긴 것은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약통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생김새에 ‘오메가’ 혹은 ‘페로몬 억제’라는 글자가 쓰여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었다. 특히 이차영은 쓸데없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만큼, 혹시라도 약 이름을 눈여겨봤다가 검색이라도 해 보면 그야말로 좆 되는 거였다.
‘그러게 왜 갑자기 찾아와서는…….’
혀를 차면서 샤워기 꼭지로 손을 뻗었다. 이내 머리 위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
밤의 번화가는 유흥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흐느적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차에서 내린 서규하는 빠른 걸음으로 클럽을 향해 걸어갔다. 컨디션이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피부에 닿는 공기가 다소 선득하게 느껴졌다.
늘 그렇듯 프리 패스로 입구를 통과하자 어두침침한 복도가 나타났다. 고막이 터질 듯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 현란하게 돌아가는 조명, 정신없이 흔들어 대는 사람들. 익숙한 풍경들을 지나쳐서 룸 앞에 도착한 서규하는 문을 벌컥 열었다. 테이블에는 벌써부터 온갖 술병이 한가득이었다.
“이야, 드디어 왔네.”
“말만 하고 안 올 줄 알았는데.”
“오늘 모임 잊은 거 진짜야?”
저마다의 방식으로 환대가 이어졌다. 그중 윤병철의 얼굴에는 예상대로 서운한 기색이 가득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서규하는 달랑달랑 손에 들고 온 무언가를 윤병철에게 건넸다. 오는 길에 급하게 산 생일 선물이었다.
“받아.”
“나, 이런 걸로 넘어가는 쉬운 남자 아니야.”
“싫으면 버리고.”
“성의를 봐서 받아 줄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행여나 뺏길세라 윤병철은 부랴부랴 쇼핑백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상자 뚜껑을 연 것도 잠시, 윤병철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와 달리 나머지 두 놈은 폭소를 터뜨렸다.
“봤지? 저 새끼랑 나는 영혼까지 단짝이라니까.”
“어, 인정.”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서규하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박찬웅에게 물었다.
“나랑 같은 걸로 샀어?”
“두말하면 좆 아프지.”
이내 서규하의 입에서도 피식 하는 웃음이 나왔다. 곰 새끼 말마따나 이럴 때 보면 손발이 척척 잘도 맞았다.
감탄을 빙자한 놀림은 금방 멈추지 않았다. 김강산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웃음기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안목은 규하가 더 나은 거 같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내 건 앞트임이라서 지퍼만 내리면 할 수 있는데.”
말과 달리 서운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반응이었다. 서규하는 셀프로 술잔을 채우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더했다.
“제일 취향인 걸로 입어 보기 콜? 사 준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오랜만에 나랑 함 뜨고 싶나 보네.”
“정중히 사양할게.”
아무리 생각이 없다 해도, 각종 운동으로 다져진 몸에 복싱까지 섭렵한 알파 새끼와 1:1로 붙을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이후로는 늘 그렇듯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주로 떠드는 사람은 박찬웅과 김강산이었다. 특히 초딩 때부터 촉새로 명성이 자자했던 박찬웅은 커서도 사기꾼 같은 화려한 언변을 자랑했다. 덕분에 넷이 모였다 하면 대화가 끊기는 법이 없었다. 공통된 지인들과 관련된 소식이나 소문을 알게 되는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동안 쉼 없이 이어지던 이야깃거리는 양주가 동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더 마실 거지?”
윤병철의 질문에 박찬웅이 시계를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직 12시도 안 됐네.”
이내 그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서규하를 향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삐리해?”
“뭔 말이야?”
“평소보다 영 못 마시는 거 같아서.”
쉬지 않고 나불대면서도 그걸 또 본 모양이었다. 놈의 지적대로 서규하는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으면서 평소 주량의 절반도 마시지 않았다. 컨디션이 별로이다 보니 딱히 술이 당기질 않는 탓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차영에게 살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속을 안 채웠으면 이 정도도 못 마셨을 거다. 아니면 일단 마시고 내일 지옥을 맛보거나.
잠시 후에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거 시켜라, 저거 시켜라, 진상을 떨어 대는 놈들의 요청대로 추가 주문을 한 다음, 윤병철이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중대 발표 할 게 있어.”
“뭔데 분위기 잡고 그래?”
먼저 반응한 김강산에 이어 박찬웅이 술을 따르면서 깐족댔다.
“치질 나았어?”
“그건 진작 나았고.”
“아님 자지 리모델링이라도 했어? 강해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건 서규하고.”
“뭔 개소리야. 나 아니고 김강산이야.”
“잘하는 의사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또 한 차례 실없는 농담이 오간 뒤에 윤병철이 말을 이었다. 답지 않게 살짝 상기된 듯한 모습이었다.
“결혼식 날짜 잡혔어.”
“결혼식? 누구 결혼식.”
“나.”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던 박찬웅이 금세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
“백퍼 진심.”
“헐, 진짠가 보네.”
서규하도 내심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알파인 윤병철은 저 못지않게 난봉꾼 기질이 다분한 놈이었다. 본인이 껄떡댄다기보다는 주변에서 가만두질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보통 형질이지만 몸이 워낙 좋은 데다가 입 다물고 있으면 상판도 어디 가서 빠지질 않는 덕분이었다.
어쨌거나 좀 뜬금없기는 했다. 소개팅을 했단 말을 들은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결혼이라니. 김강산 또한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전에 소개팅했다는 사람이랑?”
“어.”
“존나 마음에 들었나 보네. 사진 좀 보자.”
“없어.”
“없기는 개뿔. 폰 바탕화면으로 해 놨다에 내 손모가지를 건다.”
십년지기답게 척하면 척이었다.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을 슬그머니 내리는 윤병철을 보면서 박찬웅도 질문을 이어 갔다.
“잠자리는 어때? 알파나 오메가들은 페로몬 상성도 중요하다던데.”
반은 짓궂은 장난으로, 반은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물음이었다. 베타인 그에게 페로몬이니 유니크한 체향이니 하는 것들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잘 맞아. 처음부터 끌렸는데, 바로 각인했어.”
윤병철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서규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각인한 건 어떻게 알아?”
“그냥 느낌이 와. 결정적으로는 다른 오메가들의 페로몬이 더 이상 안 느껴져.”
존나 신기하다고 대꾸한 박찬웅이 이내 초치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밖에서 애 낳아 올 일은 없겠, 악!”
퍽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박찬웅의 뒤통수를 후려친 윤병철이 눈썹을 꿈틀대며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아주 그냥 악담을 퍼부어라, 퍼부어.”
“진짜 해 줘?”
“눈알 튀어나올 정도로 맞고 싶으면 해 보든가.”
“벌써 반쯤 나온 거 같아.”
술을 홀짝이던 김강산이 깐족거리며 끼어들었다.
“마빡 한 대 맞으면 다시 들어가겠네.”
“굿 아이디어.”
금세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돌아왔다. 사과와 화해의 뜻을 담아서 내민 잔에 윤병철은 군말 없이 제 잔을 부딪쳤다. 반쯤 들이켠 다음 박찬웅이 물었다.
“그래도 우리 모임엔 안 빠질 거지?”
“봐서.”
예상과 다른 대답에 박찬웅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이게 미쳤나?’ 하는 표정이 떠오르긴 마찬가지였다.
“와. 사랑 때문에 친구 배신하는 새끼가 여기 있었네.”
“알아서들 생각해.”
윤병철 혼자만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잠자코 있던 김강산이 품속 주머니에서 작은 약통을 꺼냈다. 발광을 해 대는 박찬웅의 손에 말없이 캡슐 한 알을 쥐여 준 다음 서규하에게도 물었다.
“줄까?”
“뭔데.”
“뿅 가는 거.”
그 말에 서규하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약 안 하는 거 알잖아.”
딱히 모럴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수능이 끝난 직후였나.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으면서도 남들 못지않은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매일같이 클럽을 드나들었을 때, ‘한 방이면 천국이 펼쳐진다’는 누군가의 말에 혹해서 팔뚝에 주사를 놓은 적이 있었다.
결과는 정말로 천국 문턱까지 갔다 왔다. 복용하던 억제제와 상충해서 쇼크 반응이 왔고, 말 그대로 반쯤 죽다가 살아났다. 이후로 서규하는 그런 류의 약은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
“이건 뒤탈 없이 깔끔한 거야. 설마 내가 너한테 이상한 걸 주겠어?”
동그란 캡슐 하나가 여봐란듯이 술잔 안으로 떨어졌다. 기포를 발생시키며 빠르게 녹더니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나 먹어.”
“좋은 거라 해도 말을 안 듣네.”
“저 새끼 원래 은근히 몸 사리잖아. 난 이것만 마시고 흔들러 간다.”
마찬가지로 약을 탄 술잔을 빙글빙글 돌려 대던 박찬웅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후로는 각개전투식으로 마실 사람은 계속 마시고, 놀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다.
***
“……님.”
“…….”
“손님!”
문득 들리는 소리에 서규하는 눈을 떴다. 덜 깬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대리를 부르는 것도 귀찮아서 택시를 잡아탔는데 오는 동안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내리고 보니 집 앞이 아니라 큰길가였다. 시발, 확인해 보고 내릴걸.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택시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새벽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느릿하게 걸어가길 잠시, 이내 서규하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늘은 딱히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지끈거리는 두통이 느껴졌다. 지금 이러면 내일 아침엔 어떨지 뻔했다. 예정된 재앙을 피하려면 지금이라도 술 깨는 약을 먹는 게 나을 듯했다.
하지만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문을 연 약국은 없었다. 괜히 왔다고 툴툴대며 뒤돌아서는데, 마침 도로 맞은편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편의점 간판을 확인한 서규하는 아쉬운 대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그의 손에는 검은색 봉지가 들려 있었다. 걸을 때마다 봉지 안에 든 숙취해소제가 털렁대며 무릎에 부딪혔다. 새벽녘 주택가는 무척 조용했다. 발을 뗄 때마다 길바닥에 부딪치는 신발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또 다른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서규하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무념무상으로 걸어갔다.
“…….”
이상함을 느낀 것은 잠시 후였다. 기분 탓인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서규하는 걸음을 멈추고 힐끗 뒤를 돌아봤다.
착각이 아니었다. 캡 모자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남자가 몇 걸음 뒤에 서 있었다. 가로등이 있긴 하지만 역광이라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덩달아 재수 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저번 모임 때 ‘홍 사장이 뺑이치기인가 뭔가를 당했다’면서 박찬웅이 꺼낸 말에 다들 신랄하게 비웃었던 기억이 하필이면 지금 떠올랐다. 그때 서규하도 물론 피식대면서 웃었었다.
“……썅.”
상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저 가서 시비를 걸기도 뭣하고.
인상을 구긴 채 서 있다가 다시금 뒤돌아섰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제 갈 길을 가던 것뿐인데 앞서가던 사람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니 놀라서 굳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몇 걸음 더 걸어갔을 때,
“우웁!”
달려드는 기척과 함께 무언가가 입을 한껏 틀어막았다.
“씨발, 꽉 붙잡아!”
“존나, 큭, 버둥대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일은 또 있었다. 입과 코를 틀어막은 천이 기분 나쁘게 축축했다. 서규하는 버둥거리며 상대의 팔을 끌어당겼지만, 온 힘을 다해서 압박하고 있는 탓에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불시에 틀어 막힌 숨이 점점 가빠졌다.
‘시발…….’
이대로 있다간 금세 정신을 놓게 될 게 뻔했다. 당장 무슨 짓을 당할지도 문제이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박찬웅 패거리들이 이 일을 알게 됐다간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게 뻔했다.
그렇게는 못 하지.
으득, 정신을 차리려고 볼 안쪽 살을 힘껏 깨문 뒤에 서규하는 오른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온 힘을 가해서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억!”
다행히 제대로 먹혔다. 엎어치기를 당한 상대의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 직후 서규하는 곧장 무자비한 발길질을 가했다.
“개새끼야, 사람 잘못 골랐어.”
발길질에 분노가 묻어났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바닥에 처박힌 놈 말고도 한 놈이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새끼가!”
고성에 뒤를 돌아보자마자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방어하듯 팔을 올림과 동시에 뻑,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거듭 무식하게 휘두르는 흉기를 피해서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그사이 나머지 한 놈도 비틀대며 일어섰다. 뒤늦게 확 밀려오는 통증에 서규하는 한껏 인상을 구긴 채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걸로 봐서 프로는 아니었다. 퉤, 침을 뱉은 서규하는 각목을 들고 있는 놈을 향해서 먼저 달려들었다. 고딩 때 이후로 주먹질은 해 본 적이 없지만, 피라미 같은 놈들을 상대할 자신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