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진주(Pearl).
“호프 윤. 내일 예심 지원자 수가 급감할 것 같아요. 이게 좋은 일이라고 봐야 할지 아님, 나쁜 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네? 제이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어제 샌프란시스코 예심 결과가 왔는데, 예심에 오기로 한 지원자가 4천 명이었는데, 2천 명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고 해요. 50%의 출석률이죠.
그전에 있었던 시애틀에선 지원자의 70%가 왔었는데, 순식간에 출석률이 20%가 줄었어요. 아마도 시애틀 예심 이후 한국 연습생들의 동영상을 선 공개했는데, 그걸 보고 지원자들의 오디션 참여가 급감한 거 같아요.”
“실력 비교가 확실히 되긴 되죠. 유튜브에 달린 댓글도 다들 이게 진짜 연습생 수준이냐며 놀라는 댓글도 많았고.”
“온라인에서 화제는 커지는데, 그 실력 차이를 본 애들은 지레 겁을 먹고 포기를 해버리니 이게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아직 알 수가 없네요.”
“오늘 예심 심사위원으로 가야 하는 저에겐 좋은 일이라고 봐야겠죠.”
오늘 예심이 열리는 곳은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이었는데, 뉴욕과 보스턴까지 아우르는 통합 예심이라 무려 5천여 명의 지원자가 올 예정이었다.
제이니의 말처럼 한국 연습생들의 실력을 보고 알아서 오지 않는 지원자가 많으면 오늘 일이 좀 편할 것도 같았다.
오늘 예심을 같이 보기로 한 심사위원 9명 중 5명은 한국에서 온 기획사 쪽 사람들이었고, 2명은 미국 뉴욕대에 속한 티시 예술대학의 교수였다.
나머지 2명은 미국 FOX사에서 섭외한 공연 전문가였다.
나와 같이 심사를 보게 된 ‘길리언’은 현대 무용 전공자라고 했는데,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탄탄한 몸매를 가진 흑인이었다.
티시 예술대학의 겸임교수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잘짜여진 근육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음.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예능 방송에는 기본적으로 악역과 선한 역을 정합니다.
이때까지 있었던 아메리칸 아이돌도 마찬가지였고요.”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굿캅 배드캅(good cop, bad cop)은 어디에나 있는 방법이니깐요.
아메리칸 아이돌에선 사이먼 코웰이 악역으로 출연진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독설을 하면, 폴라 압둘이 선한 역을 맡아서 출연자들을 다독거렸죠.
그게 아메리칸 아이돌의 가장 큰 재미이기도 했고요.”
“맞아요. 시청자들도 대부분은 이런 악역과 선한 역할을 둘이 맡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언제나 사이먼의 독설에 화를 내고, 폴라의 사랑스러운 말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죠.
물론, 오늘 저와 짝을 이루어 심사를 보기에 우리 둘도 이런 역할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아, 물론 제가 배드 캅 역할이죠.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당신 같은 아이돌은 당연히 굿캅 역을 맡아야 할 겁니다.
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전 언제나 배드 캅이 었답니다. 후후”
“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하지만, 이건 당신도 알아두세요.
방송 중엔 배드 캅이 욕을 많이 먹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배드캅이라는 걸요.
악역을 주로 했기에 졸업한 제자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기억나는 교수로 저를 지목하는 영광도 함께 하는 거죠.
굿캅은 처음 보기엔 좋지만, 그냥 쉽게 잊혀집니다.
착한 사람은 아니, 착한 척하는 사람은 주위에 너무 많으니까요. 한국에서라면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유명세를 얻고 싶다면, 본 방송에선 배드캅을 하세요. 그래야 ESP의 멤버가 아닌 본인의 이름을 미국에 알릴 수 있을 겁니다. 후후”
길리언은 악역을 하게 되어 기분 좋다는 듯이 심사장으로 들어갔지만, 길리언이 남긴 말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은채와의 스캔들 후폭풍을 피하고자 영화를 찍는 걸 선택했었고, 얼떨결에 OST를 맡으며 ESP와 같이 미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꾸기보다는 내가 운영하는 회사의 아티스트인 ESP를 띄우는 게 급했고, 과거와 달리 프로듀스99 프로그램이 미국에 진출하게 되어 그걸 돕겠다는 생각이 더 컸었다.
하지만, 길리언의 이야길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프로듀스99란 프로그램을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기획사들을 뭉치게 만들고, 프로듀스99로 K-POP을 세계화 시킨다고 해도 나에겐 그냥 그뿐이었다.
아마도, 관련된 몇 사람에게서 고생했다는 인사말을 듣는 게 내가 가질 수 있는 전부일 터였다.
그리고, 내가 대중들에게 기억되는 건 그저 그런 K-POP스타이자 프로듀스99의 멘토 정도일 거였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원래 기억과는 달라진 게 프로듀스99이기에 이 프로그램을 돕고 싶었고, 미국에서 히트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내가 이 프로그램으로 뭔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게 바보 같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나에게 앞서가던 길리언이 빨리 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일단은 길리언의 악역 론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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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타깝게도 불합격입니다. 좀 더 연습을 하면 좋아 질 거에요. 죄송합니다.”
댄스 기본기가 많이 부족한 지원자에게 내가 불합격을 알렸다.
“여기까지 온 것도 기념이니 입구에 있는 기념 굿즈를 챙겨가고, 패스트푸드 쿠폰도 꼭 챙겨가세요. 다음 지원자 들어오세요!”
길리언은 불합격을 통보받아 울 것 같은 소녀에게 냉정하게 기념품과 쿠폰을 챙겨가라고 했는데, 한국 같았다면 심사위원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윤. 잘 생각해봐. 방금 지원자는 버몬트 주의 벌링턴이란 촌 동네에서 여기까지 왔어. 아마도 어젯밤에 부모와 함께 차로 출발했거나, 오늘 새벽에 출발했겠지.
220마일(약 350km)을 달려왔을 거라고 그런데, 5분 정도의 심사로 불합격을 받았어.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거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은 기념품이나 쿠폰을 가져가라고 하는 게 전부야.
진행요원이 챙겨 주는 거보다는 우리가 챙겨가라고 하는 게 더 기분 좋을 거야.
뭐, 이런 것도 문화 차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일단 나를 신기하게 관찰하듯이 쳐다보는 건 그만둬주길 바라네.
난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심각하게 말하는 길리언의 말에 알았다고 대답을 하는 내 머리엔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츤.데.레’ 길리언은 츤데레 캐릭터였다.
본인 입으로는 악역인 배드캅을 맞는 게 좋다고 했지만, 단순한 악역이 아닌 츤데레 역이었다.
그러고 보니 길리언이 대학교수이니 매년 수십 혹은 수백 명의 입시생 실기를 보았을 테고, 졸업생들의 졸업 안무도 보았을 터였다.
거기서 츤데레로 독설을 하지만, 결국 좋은 방향으로 지도를 했을 터였다.
우리 같은 방송인이나 예능인이 가지지 못한 경쟁시험에서 발휘할 수 있는 본인만의 츤데레 방법이 있을 터였다.
길리언은 자신을 관찰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의 그런 츤데레 노하우를 나는 배워야 했다.
“한국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와서 부르지 말라는 그런 노래 없어?”
100명이 넘게 심사를 보니 쉬는 시간이 있었고, 길리언이 말을 걸어왔다.
“당연히 있죠. 한국에선 절대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그 둘 만큼 노래를 잘 부르면 이미 이런 오디션에 나올 필요가 없다고요. 그 정도 부르면 이미 미국에 진출했을 거기 때문에 그 둘만큼 부르지 못하면 아예 선곡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둘이 잘 부르긴 하지만, 너무 오래되지 않았을까?
요즘 10대 애들은 그 둘의 음악을 들어보지도 못했을걸.
이젠 아델(Adele)의 시대야.
미국 오디션 금지곡은 아델의 노래들이지.”
“하긴 아델 만큼만 불러도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았을 테지요.”
“하지만, 오늘 예심 보는 보컬들의 30%는 아델 노래를 선곡했어.
어느 정도 가창력을 뽐낼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오디션에서는 아리아나나 카밀라의 곡을 선곡해서 안무까지 같이하는 게 더 이득이었을 거야.
그게 가능성을 더 알아보기 쉬우니깐.
어느 정도 되는 보컬이나 댄서는 미국에도 발에 차일 만큼 많아.
한국의 연습생들처럼 일정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자신만의 색이 들어간 무대를 해야 하는데, 다들 아델을 따라하고 있지.
자신이 진짜 노래를 부르면 아델만큼 잘 부른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불합격된다면 우리가 그런 자신을 몰라봤다고 이야기하겠죠.”
“맞아. 그래서 현실적으로 바로 지적을 해줘야 해.
네가 가진 어중간한 재능으로는 뭘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현실을 알려줘야 포기를 하거나, 아니면 더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어 내겠지.
그리고, 성공했다면 나중에 네 개 와서 ‘교수님이 못 알아 본 겁니다.’ 하며 나에게 욕을 하겠지.
뭐, 그러면 둘 다 좋은 거지.”
“하지만, 교수님의 평판이나 그런 게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뭐, 내가 보았던 애들 중에서 어중간한 재능으로 대성공을 한 케이스를 본적이 없으니 아직까진 내가 앞서가고 있다고. 하하하.”
길리언 교수는 유쾌하게 웃었지만, 뭔가 맑은 웃음이 아니었다.
“요즘 애들은 다들 성장할 때 부모나 선생님들에게 ‘넌 특별한 아이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란다.’라고 유니크한 세뇌를 당하며 크고 있거든.
그러다 보니 진짜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진짜 특별한 사람은 몇 없어. 대부분이 어중간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 그 어중간한 재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때가 더 많아.
가능성이 어렴풋이 보이기에 쉽게 포기하지 못하거든.
그런, 자신만의 두꺼운 커튼을 냉정하게 걷어 줄 사람이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해.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의 삶은 경제적으로 처참하다는 것을 내가 알려주고 싶지만, 그 정도를 알려주면 다들 울어 버릴걸. 하하.”
자조적인 말을 하는 길리언 교수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가 악역을 좋아하고, 냉정한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지.
어중간한 재능의 삶을 바로 그가 살아왔었기에 현실적으로 아픈지만 냉정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거였다.
어중간한 재능으로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이야길 하는 그의 츤데레 방식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런 교훈을 주기 위해 악역이 좋다는 그가 나는 좋아졌다.
“자, 다시 심사를 보러 가자고. 이젠 좀 더 타이트하게 심사를 봐야 할 거야.
슬슬 정신적으로 지치기 시작할 거라서 빨리 심사를 보려는 심리가 작용할거거든.”
그렇게 온종일 한국 걸그룹들의 노래와 아델과 켈리 클락슨의 노래를 들었고, 가끔 레이디 가가와 아리아나의 노래와 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600명에 달하는 지원자 중 단 40명만 1차 예심에 합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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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유~ 길리언교수와 윤소원씨의 심사 조는 너무 빡빡한데요.
합격률 10% 미만은 이때까지 열렸던 예심 중에 유일합니다.
소원씨 왜 이렇게 빡빡하게 심사를 보신 거죠?”
예심을 카메라에 담는 현장 진행자가 내게 질문을 했다.
“음. 오늘 예심에 3천 명이 조금 넘게 왔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이 3천 명 중에서 1~2명 만이 방송 본선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무도 데뷔멤버로 선발되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쇼 비즈니스의 냉정함이죠. 그게 현실입니다.”
“워우 무서운데요. 냉정한 심사위원이라니 제가 다 무섭군요.
이번 순서는 10분의 심사위원분들이 모여서 다 같이 영상을 보고 아쉽게 떨어진 지원자를 부활시키는 순서더라고요.
그럼 윤소원씨는 아쉽게 떨어진 지원자 중에서 마음에 드는 지원자가 있을 경우에도 와일드 카드를 냉정하게 쓰지 않으실 건가요?”
“음. 아쉽게 떨어졌다면 아마도, 두 명의 심사위원들에게 합격, 불합격을 한 표씩 받았을 테고, 두 심사위원을 만족하게 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두 명의 심사위원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대중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겠죠.
때문에, 저는 아마도 와일드 카드를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길리언 교수님께 질문할게요.”
인터뷰하는 길리언 교수를 두고 먼저 부활전 심사장으로 들어가니 막 부활전 심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영상이 큰 화면 가득히 나오고 있었는데, 음정이 불안한 소녀가 비욘세(Beyonce)의 리슨(Listen) 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심사위원이 불합격 팻말을 드는 게 보였다.
“어? 어? 이러면 아..안되는데...저 와일드 카드 쓰겠습니다!
제가 와일드 카드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