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웃음이 나옵니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갤 돌려보니, 전설의 배우가 내 뒤에 서 있었다.
‘헐, 진짜 양재경이다.’
가깝게는 와호장룡에서의 액션 연기로 북미권에 강한 인상을 남겼고, 젊은 시절 찍었던 홍콩영화는 한국, 일본은 물론 전 세계인이 아는 액션 여배우로 이름이 높았다. 훗날 전설로 남을 중국 배우 중 한 명이었다.
“물을 묻혀서 머리 스타일을 올백으로 해봐. 아니 내가 직접 해주지.”
내 동의도 없이 양손을 물컵에 집어넣곤 흠뻑 젖은 손으로 내 머리 스타일을 올백 스타일로 바꾸었는데, 이걸 연기로 받아쳐야 할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있어야 할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흠. 내가 직접 올백 머리까지 해줘도 안 되겠네.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부자 같은 고급스러움도 묻어 있고 모델처럼 스타일도 좋은데, 문제는 너무 어려 보여.
원작에서 주인공인 필립 골드의 나이가 31살이었지?”
“네. 30대로 결혼 적령기의 건장한 남자인데, 이 친구의 느낌과는 좀 거리가 있죠.”
나를 중간에 두곤 양재경과 감독인 존 추가 서로 이야길 하기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그냥 팔짱을 끼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스크는 꽤나 마음에 들어. 싱가폴 화교 그룹의 자손이라는 느낌도 살짝 묻어나고. 하지만, 나이가 아쉽네.”
“네. 일단 원작의 주인공과는 너무 다르니 어쩔 수 없죠. 그런데, ‘헨리’는 정말 오지 않는다고 하던가요?”
“그래, 결국 오지 않을 것 같아. ‘마크’가 다시 설득한다고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데 아마 힘들 것 같아.
그래서 난 헨리 대신에 이 친구도 주연으로 생각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안 될 것 같아 배우 선정부터 너무 피곤하게 만드네.”
양재경은 피곤하다며 내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뺏어선 자기가 쓰고 의자에 기대듯이 앉아 버렸다. 테이블 위에 있던 선글라스가 아마도 양재경의 선글라스였던 것 같았다.
문젠, 이들이 말하는 마크가 내가 알고 있는 그 마크가 맞는지 궁금했다.
‘리치 아시안 웨딩’의 원작자가 ‘마크 콴’이었기에 소설 원작자가 배우를 설득하기 위해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리치 아시안 웨딩에 양재경이 주인공의 어머니 배역이었다는 것과 원작자인 마크 콴이 적은 소설 3편 모두 영화화되었다는 것밖에 없었다.
주연이었던 남자, 여자 배우의 얼굴은 알지만 이름을 모르다 보니, 캐스팅이 안 되고 있다는 말에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가 맡을 미국에서 가수를 준비하는 사촌 역할 자체가 없었는데, 생겨 버렸고, 당연히 시나리오의 내용도 달라졌을 터였다.
거기에 캐스팅돼야 했을 주연배우도 달라지게 된다면 영화가 히트하지 못하고, 망해버릴지도 몰랐다.
“헨리라는 배우를 제가 알지 못해서 그러는데, 사진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캐스팅이 안되는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요?”
“아 몰라 몰라! 그딴 녀석 모르겠어. 배우도 아닌 사람에게 꽂혀버린 마크도 짜증 나고, 다 귀찮아! 존과 이야길 해.”
양재경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앉아서 잠자듯이 고개를 숙여 버렸고, 그걸 보던 존 추 감독이 웃으며 핸드폰으로 인스타 사진을 보여주고 대답을 대신 해줬다. 사진을 보니 다행히 내가 기억하는 그 주연배우가 맞았다.
아마도, 캐스팅이 되긴 되었겠지만, 뭔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 같았다.
“헨리는 배우가 아니야. 싱가폴 방송국의 리포터 겸 아나운서인데, 원작자인 마크가 SNS에서 헨리를 보곤 주인공에 가장 어울린다고 꽂혀 버렸어.
그래서, 주인공으로 캐스팅을 하고 싶다고 DM도 넣고 방송국에 전화해서 오늘 보자고 했는데, 오지 않은 거지.
투자 문제가 해결되니 이젠 주연배우 캐스팅이 애를 먹이고, 뭔가 계속 막히는 것 같아. 휴.”
존 추 감독도 내게 설명을 해주곤 피곤하다는 듯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누워 버렸다.
감독과 주연배우가 누워버리니 나도 그냥 뻘쭘하게 앉아 있을까 했지만, 점심 약속이었으니 일일이 양재경과 존 추에게 물어가며 같이 점심 메뉴를 주문하고 맛깔나게 챙겨 먹었다.
“내 식사는 안 시킨 거야? 아, 그쪽이 윤소원이군요. 흠. 핸썸하고 호감이 가는 이미지라서 다행이야.”
리치 아시안 웨딩의 원작자인 마크 콴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왔는데, 내가 본 느낌은 무모한 도전 멤버였던 정영돈 같았다. 물론,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작은 눈에 중국 사람 같은 느끼함이 묻어 있긴 했다.
“언제 올지 알고? 그래서 헨리는 온다던가요?”
“놉. 에휴 이젠 내 전화도 받지 않아요. 헨리가 내가 상상해 왔던 주인공 필립 골드 역에 딱 맞는 사람인데 안될 것 같아요.
캐스팅 오디션을 본다고 해도 다른 배우들이 눈에 안들어 올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렇게 그 헨리라는 사람을 캐스팅하고 싶다면 직접 얼굴을 보며 설득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캐스팅 될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응? 어떻게? 방송국으로 가자고?”
“뭐, 직접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헨리란 사람의 직업이 싱가폴 방송국 리포터라면서요? 인터뷰를 위해서 직접 오라고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싱가폴에 왔을 때는 늘 방송국이나 신문, 잡지사의 인터뷰를 10여 곳 이상 받을 정도로 인지도가 있습니다.
싱가폴에서 촬영하는 영화에 대한 인터뷰를 위해 리포터를 지정한다면 아마 헨리라는 그 사람이 직접 올 겁니다. 더구나 양재경씨가 같이 촬영을 한다고 하면 여러 방송국에서 취재진들이 올 겁니다.”
“흠. 그러고 보니 그쪽은 한국의 아이돌이라고 했지. 어쩐지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우리를 계속 보더라니.
K-POP스타의 위엄이었군. 그런데 그런 연락은 어떻게 하지?”
“제 매니저가 해줄 겁니다. 그럼, 제 오디션은 확정되었다고 보면 될까요?”
“물론! 헨리가 리포터로 오게 된다면 바로 결정하는 것으로 하지. 그런데, 영화 시나리오도 보지 않았는데도, 너무 적극적인데.”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죠 뭐.
그러면 인터뷰에 헨리가 나오게 된다면 무조건 칭찬을 해주고, 캐스팅 할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작전을 한번 짜보죠. 양재경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소문만 들었는데,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장난 아니구만.”
**
MSM의 힘이었는지 아니면 양재경과 나의 화제성 때문이었는지 다음 날 저녁 시간에 두 곳의 방송국과 인터뷰가 잡혔다.
그리고, 원작자 마크와 감독 존 추가 원했던 ‘헨리 챙’이란 리포터도 직접 오긴 왔다. 마크가 그토록 탐냈던 헨리는 쌍꺼풀이 있고 눈썹이 진해서 원작처럼 화이트 칼라의 스마트 함과 호남형의 느낌이 공존하는 얼굴이었다.
다만, 키가 170 정도로 작았다. 그래도 어깨와 덩치가 있다 보니 이상하게 커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아마도 마크도 이런 헨리의 외모에 캐스팅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헨리가 직접 오고 분위기도 좋기에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포터 헨리의 입에서 나온 질문을 듣곤 머리가 멍해졌다.
“리치 아시안 웨딩이 넷플릭스 오리지날 영화로 제작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제작되었던 넷플릭스 오리지날 SF영화 ‘혹자’가 흥행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데, 리치 아시안 웨딩은 성공을 확신하시나요?”
또다시 미래가 어긋난 것 같았다. 리치 아시안 웨딩은 할리우드의 제작사인 워너 브러더스가 투자, 제작했었다.
할리우드의 완벽한 시스템 아래에서 제작되었기에 영화의 퀼리티가 보장되었었고, 홍보 마케팅이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 말처럼 넷플릭스에서 제작하게 된다면 내가 기억하는 영화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리 넷플릭스가 대단하다고 해도 극장에서 벌어들일 1억 8천만 불의 흥행수익을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물론입니다. ‘혹자’ 와는 장르 자체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특히, 아시아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결혼과 시댁과의 문제가 주된 내용입니다. ‘혹자’처럼 호불호라는 게 없는 내용이죠.
넷플릭스 최고의 성공작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측도 그런 것을 확신하기에 3500만 불의 제작비를 투자하기로 했으며, 다음 달 중으로 촬영에 들어갈 겁니다.
물론, 헨리 챙 당신이 주연인 ‘필립 골드’역을 맡아줘야 하겠지요.”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와는 다르게 원작자인 마크와 양재경, 존 추는 헨리에게 배역을 맡아 달라고 공개적인 구애를 하고 있었다.
“그래, 헨리 넌 리포터보다는 배우가 어울려. 한번 해봐.”
“리포터로 남기엔 아깝다고 늘 생각하긴 했었지.”
방송국에서 같이 나온 동료들도 응원을 해주는 분위기가 되자 다른 방송국에서는 아예 주연배우를 이렇게 캐스팅한다고 다시 재 인터뷰를 하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띄어주고 세계적인 배우인 양재경이 재능이 보인다고 이야기까지 해주자 헨리도 넘어와 버렸다.
사실, 홍콩영화의 전성기 활동과 할리우드에서도 와호장룡으로 인지도가 있는 양재경이 재능이 있다고 같이 일하자고 했을 때 거부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단지, 원작자 마크가 인스타로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며 캐스팅을 하려 했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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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남자 주인공인 헨리의 캐스팅도 완료가 되었고, 상대역인 콘 실라 역엔 ‘레이첼 우’를 캐스팅 하는 거로 하죠.
헨리의 키가 170은 넘을 것 같았는데, 168이라 키 높이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것 빼곤 모든 게 완벽합니다.
이로써 비중 있는 주, 조연 캐스팅은 끝이 났으니 다시 한고비를 넘겼네요.”
“그럼 투자 제작 건에 관해서 이야길 해도 될까요?”
존 추의 한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듣곤 내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보면 여기 모인 사람 중에서 유튜브와 넷플릭스와 관련된 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저 일 겁니다.
직접 제작한 유튜브 오리지날 뮤직드라마가 있고, 회사에서 단체로 출연했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도 있으니깐요.”
“그렇군. 넷플릭스에선 전권을 우리에게 준다고 했고, 주 타겟이 될 아시아에선 넷플릭스의 영향력이 크니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뭐지?”
“넷플릭스라서 문제가 있는 겁니다. 물론, 유튜브도 문제가 있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양날의 검 같은 장단점이 있습니다. 먼저 확장성이 없습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와의 계약을 하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만 영화를 보게 될 겁니다.
한마디로 영화가 아무리 성공해도 찻잔 속의 폭풍일 뿐입니다.
작품성, 흥미성, 오락성이 있다고 해도 대중은 모를 겁니다.
기본적으로 넷플릭스는 온라인, 오프라인 동시 상영을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극장주들과 멀티 플렉스영화관에서는 이익문제로 상영이 제한될 겁니다.
한국에서도 대형 영화관에서는 ‘혹자’를 아예 상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약점 때문에 제작비를 넷플릭스에서 넉넉하게 주는 거지. 500만 불 이상 제작비 차이가 나다 보니 우리로선 할리우드의 제작 배급사보단 넷플릭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더불어, 넷플릭스도 오프라인 상영 후 수익 배분을 해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그럼, 할리우드 제작사와 차이나는 투자금 500만 불을 제가 투자하도록 하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투자라니?”
존 추 감독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500만 불을 내가 투자하겠다는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이제 22살인 내가 무슨 돈이 있냐는 듯한 미소였다.
원작자인 마크 콴도 내 허세가 유머러스 했는지 웃었다.
“감독님이나 마크는 웃으시면 안 되죠. 시나리오에도 나오잖아요.
백인 호텔리어에게 무시 받곤 전화 한 통으로 호텔을 사버리는 거요.
그만큼은 없더라도 전화 한 통으로 500만 불쯤은 저도 바로 투자할 수 있죠.”
내가 바로 한국으로 전화를 걸자 그제야 존 추 감독이나 원작자인 마크 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