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아이돌의 연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채를 보니, 빛이 났다.
‘별빛이 내린다~♬ 샤라랄라~ 랄라라~’ 하는 노래가 자동으로 내 머릿속에서 재생이 되는 것 같았다. 음악이 깔리고, 빛이 나는 은채가 나를 보며 웃으며 오는데, 시간까지도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은채가 가까이 와서야 은채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내가 알아챌 정도로 은채의 모습에 빠져있었다.
같은 나인피치 그룹의 멤버인 성희가 옆에 붙어 있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은채 언니가 나갈 일이 있다고 해서 저도 같이 나왔어요.”
“어..어 그래.”
성희의 인사말로는 나와 은채가 사귀는 걸 알고 있는지, 아닌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서먹하게 인사를 할 뿐이었다.
“성희도 따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으니깐 금방 갈 거야. 걱정 마.”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아챘는지 은채가 먼저 이야길 꺼냈다.
“아, 마침 저기 오네.”
은채의 말에 고갤 돌려보니 JBT그룹의 ‘이혁’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헐.” 이란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성희와 이혁이도 우리처럼 고등학교 동창이래. 한성예고.”
오늘의 만남이 예정이 없던 만남이었는지 가게로 들어온 이혁도 나와 은채를 보곤 머뭇거렸다.
그냥 머쓱하게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하니 이혁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언니, 저 가요. 나중에 봐요.”
마치 자석처럼 이혁에게 달라붙어 버린 성희는 금세 가게를 나가 버렸다.
“이야, 연예계가 야생의 연애천국이라고 하더니, 이런 걸 다 보게 되네.
은채야 쟤들은 언제부터 사귄 거야?”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 아마 한, 두 달 정도 될걸. JBT는 우리랑 활동 시기가 같아서 방송국 복도나 대기실 앞에서 자주 마주쳤거든.
우리가 만나는 걸 숨기고 싶었는데, 호텔 밖으로 혼자 못 나가게 매니저 언니가 막아서 어쩔 수 없이 성희랑 같이 나올 수밖에 없었어.
우리도 저쪽 커플 사귀는 거 아니깐 서로 입 다무는 거지.”
“입을 다문다고 하지만, 그러다 결국 소문이 퍼지는 거지 뭐. 커피 마실래?”
“응”
24시간 패밀리 레스토랑 특성상 커피는 셀프였기에 커피를 들고 원래 내 자리가 아닌 은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앗, 왜 옆에 앉아? 앞에 앉아. 그래야 걸려도 곡 작업이나 상담을 하고 있었다고 핑계라도 될 수 있지.”
“뭐 걸리면 공개연애 선언하는 거지 뭐.
그리고, 여긴 일본이잖아. 아무도 모를 거야.
일부러 레스토랑 구석에 앉았고, 거기다 따로 들고 온 모자도 썼잖아. 우릴 못 알아볼 거야.
같이 왔던 기자들도 어제 다 돌아간 거 봤잖아. 걱정하지마.
그럼 오랜만에 우리 손부터 시작을 해볼까. 손 이리 내놔봐. 한번 만져보자.”
“아이 진짜.”
손을 잡아서 깍지를 끼려는 사람과 그냥 피하려는 사람 간의 투닥거림이 있었고, 손을 잡고 빼고, 손바닥을 때리며 연인들만이 할 수 있는 스킨쉽을 시작했다.
“아, 거긴 안된다니깐. 빨리 손 빼!”
“쳇 오랜만에 보는데, 이것도 안 되냐? 옆구리 살 좀 만질게. 그러다 엉덩이도 좀 만지고. 모자 때문에 뽀뽀도 제대로 못 하는데 좀 만지자.”
“사람 많잖아. 안돼. 일단 안 돼!”
“구석에 일부러 자리 잡아서 안보인 다니깐 내 손이 어디 있는지 사람들은 안 보여요. 헤헤헤. 따뜻하다.”
“어휴. 너네 컴백 활동 끝날 때와 우리 신곡 낼 때 텀이 있으니깐 그때 따로 만나든지 뭘 하든 하자. 일단 이손 빼. 시간 봐. 벌써 11시야. 들어갈 준비 하자. 성희랑 11시에 만나서 같이 들어가기로 했단 말이야.
얜 또 안 오는 거야.”
“그럼 막판 스퍼트로 배 좀 만지자! 몰락이 급이라니까.”
“아 진짜 안된다고. 나 화낸다.”
안된다고 하며 화난 듯이 양손을 옆구리에 올리고 새침하게 표정 짓는 것도 내 눈에는 너무 예뻤다.
“언니 우리 왔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가요.”
한 번 더 안아 주려고 했는데, 눈치 없이 시간 맞춰 나타난 성희 커플에게 속으로 욕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은채와 성희를 먼저 보내고, 50m 정도 떨어져서 JBT의 이혁과 같이 걸었다.
그냥 얼굴만 아는 남자 둘이 아무 말도 없이 호텔까지 왔고, 서로 뻘쭘해 하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우린 다른 의미로 말이 필요 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부터 우릴 따라 나온 여고생으로 보이는 3명이 있었다.
“저거 분명히 윤소원 맞지? YAM에.”
“어 맞아. 같이 있던 여자는 나인피치에 정은채고. 이렇게 둘이 사귀는지는 몰랐네.”
“대박. 나인피치 년들 미친 거 아냐? 우리 혁이 오빠랑 성희 저게 붙어먹고, 은채 저년은 윤소원이랑 붙어 먹는 거야?”
“시발, 걸레그룹 년들이네. 막 대주고 다니네. 쌍년들.”
“야, 아까 레스토랑 안에서 사진 찍은 거 있어?”
“어, 있어 둘이 손잡고 있는 거랑 몇 장 찍었어. 왜? 인터넷에 올리게?”
“그래 시발 그거 풀자, 혁이 오빠랑 성희 저년이 사귀는 사진 풀면 JBT 그룹에 피해가 생기지만, 윤소원이랑 정은채 사진을 풀면 JBT에는 피해가 없을 거 아냐.
나인피치와 YAM이 터져나가겠지만, 우리 JBT만 아니면 되지 뭐.”
“그래, 그러면 되겠네. 나인피치 박살 나면 자연스레 혁이 오빠랑 성희 저년이 멀어질 수밖에 없을 거야.”
“인터넷에 올리는 날짜도 맞춰서 올려야 해.”
“날짜? 날짜는 왜? 언제 올리려고?”
“3월 마지막 30일 오후에 사진을 올려야 타격이 클 거야.”
“왜? 그때 올리면 다음 날이 만우절이라 우리 사진을 거짓말로 볼 수도 있잖아.”
“아니, 그 반대지. 30일 오후 늦게 올리면 인터넷에서 퍼질 거고 그러다 보면 4월 1일 만우절이 되겠지. 그럼 만우절에 MSM에서 사귀든 아니든 언론 발표하고 대응할 거잖아.
만우절에 발표하는 그 대응이 과연 신뢰가 갈까?
둘이 사귀든, 안 사귄다고 하든 그날 발표되는 공식 입장 자체를 믿을 수 없게 될 거야. 그거 때문에 4월 2일 날 공식 견해를 밝히게 되면 4월 1일 하루 동안은 미치도록 까이게 되겠지.”
“와, 개 소름. 너란 년 악마 년이네.”
“난 오빠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나인피치 년들 박살 내 버릴 거야.”
**
<쾅!>
다음 주 4월 5일 컴백을 위해 안무를 맞춰보고 있는데, 이용민 실장이 연습실 문을 박살 내듯이 열어젖히곤 들어왔다.
“윤소원 이거 뭐야?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이거!!”
영문도 모른 채 집어 던지듯이 건넨 핸드폰 화면을 봤다. 내가 은채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사진이 액정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너 정은채와 연애하는 거야? 지금 커뮤니티마다 다 올라와서 난리잖아.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시끄럽게 떠드는 이용민 실장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저 4장의 사진과 사진들을 이어서 만든 움직이는 움짤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SBC 최신가요 일본 특집방송보고 다음 날 일본에서 오므라이스 맛집으로 소문난 패밀리 레스토랑을 갔는데, YAM의 윤소원이랑 나인피치의 정은채가 같이 앉아 있더라. 우린 밥 다 먹고 나오는 중이라 급하게 몇 장 찍었는데, 같은 쇼파에 앉아 있고, 둘이 손잡고 있는 거 보면 사귀는 거 같지 않냐?
반응 좋으면 내가 일본 가서 본 다른 연예인 사진도 올림.]
-와 이 자게이 디스패치 급이네.
└알고 보면 디스패치 기자 아님? 정보 듣고 잠복해서 찍은 거 같은데.
└그럴지도, 공개하려는데 MSM에서 방해해서 일반인 인척 올리는 것인지도 모름.
- 내가 윤소원, 이 새끼 이럴 줄 알았다. 전에 매의 눈으로 정은채 몸매 훑어보는 사진 보고 느낌이 딱 왔다니깐.
└어떤 사진 말하는거임?
└레드샵 공식 인스타에 올라와 있는 사진 말하는 듯. 내가 링크 준다. Http://redshop.ins..
└진짜네. 거긴 이미 성지 글 되었네. 시험 걸리게 해달라고 댓글 달리고 난리다. 시발 존나 웃기네.
└인스타 관리자가 이미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알고 엿 되 보라고 저 사진 올린 거 아님? 진짜 모르고 올린 거라면 인스타 관리자는 신내림 받은 거임.
└관리자 말대로 일단 슬렌더인 진유화는 진짜 아니었네.ㅎㅎ
└새끼 글래머 취향 확실하네. 남자다잉 ㅋㅋㅋ
- 그런데, 움짤이라서 정확하진 않은데, 정은채가 안 돼. 라고 말하는 거 같지 않냐?
└그렇게 보면 또 그렇게 보이네. 4월 5일 YAM 컴백이라고 하던데, 똥칠하게 되네. 윤소원 팬들 다 떨어져 나가는 거 아냐?
나인피치는 아직 팬이 별로 없으니깐 타격이 안 클 거 같고.
└팀을 위해서 탈퇴하든지 아니면 이번 앨범 활동에서 빠지든지 해야지.
게시글에 달린 댓글들을 봐도 긍정적인 글은 없었다.
연습 때문에 무음으로 가방에 넣어둔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 80여 통에 문자가 50여 통이 와 있었다. 카톡은 지금도 계속 숫자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해야 했다.
나는 물론이고 은채도 상처받지 않는 결정을 해야 했다. 둘이 몰래 만날 때마다 만약 걸리게 되면 공개연애를 선언하기로 미리 어느 정도는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그걸 내가 해야 했다.
“전상일 본부장님이랑 같이 이야기하죠.”
“너 인마. 진짜 사귀는 거야? 이거 골때리는 놈이네. 어휴.”
“그리고 다들 미안한데, 이번 활동이 같이 못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깐. 일단 안무 맞춰보는 것도 중지해야 할 것 같아.
제일이형 미안해요.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새끼. 뭐 그럴 수도 있지. 네가 나쁜 짓 했냐? 연애한 게 무슨 죄라고. 일단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본부장님이랑 이야기하고 와.”
YAM 멤버들을 뒤로하고 연습실을 나와 본부장실로 향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나 매니저들은 이미 나를 불가촉천민처럼 보며 알아서 피해갔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곤 알아서 피했다.
“아니 있어 봐. 나도 지금 확인중이야.
그래. 김실장에게 이제 일어서려는 나인피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그래. 일단 지금 윤소원이 왔으니깐 이야기해 보고 바로 연락해줄 테니까 우선 오늘 스케줄은 다 마무리해. 내일 스케줄은 은채를 빼던가 해서 진행하고. 그래. 수고해.”
전화를 끊은 전상일 본부장은 나를 보곤 한숨부터 쉬었다.
“그래, 언젠가는 네가 사고를 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컴백 일주일 전에 열애설로 사고 칠 줄은 몰랐다.
뭐, 음주운전이나 폭행 같은 사고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날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둘 사이에 무슨 감정이 오갔고, 뭐가 있든 다 상관하지 않아.
말 빙빙 돌리는거 나도 싫어하니깐 바로 말할게. 이제 은채랑 다시는 만나지 마. 사진은 그냥 고등학교 동창으로 밥 먹고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공식 대응할 테니까.”
“선배들의 사례도 있고, 공개연애하게 해주십시오. 진심입니다.”
“공개연애? 햐 기도 안 차네. 우리 회사에서 공개연애해서 좋게 끝난 경우가 있었어? 언제나 둘 다 팬 다 떨어지고 날아오를 수 있는 애들도 날아오르지 못하고 끝이 났어.
4년 만에 데뷔시킨 걸그룹이 나인피치야. 거기다 금한령으로 난리통에 데뷔를 해서 2집인데도 겨우 10위 언저리야.
지금 이제 겨우 탄력받아서 올라가려는데, 이렇게 망치려고 들어?”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공개연애하게 해주십시오.”
“미친놈. 너 연예인이야. 아이돌이라고. 이성에게 연심을 품게 만드는 우상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런 아이돌이 다른 아이돌과 공개연애를 한다고 해봐. 누가 너에게, 은채에게 연심을 품겠냐? 뭐, NTR 성향의 변태들은 너희 둘 좋아하겠지.
공개연애를 하는 아이돌은 아이돌로서 실격이야. 자격 자체가 안된다고.
사랑에 미쳐,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너나 은채나 인생 끝나는 거야. 아이돌 인생 끝이라고.
그래, 너는 이미 돈을 많이 벌었고, 인기도 있으니 모르겠지만, 은채는 데뷔를 위해 몇 년간의 연습생 생활을 버텼어. 그리고, 슈퍼스타가 될 기회를 아직 가지고 있다고, 그런데 너로 인해서 그런 기회를 다 날려야 할 거야. 그래도 되겠어?”
“둘이 미리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런 걸 다 감수하기로요.”
“너희 이제 22살이야. 앞길이 창창한 아이돌이야. 22살의 판단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어? 공개연애하다 헤어지면 어떡할 건데?
여긴 잡아먹느냐, 잡아 먹히느냐의 연예계야. 너 은채 인생 책임 질 수 있겠어? 책임 질 수 있다면 아예 기자회견 해서 결혼 발표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