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장르화를 논하다.
“같은 회사 선배인 YAM분들이 후배인 나인피치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특집으로 일본에서 열리는 SBC의 ‘최신가요’ 리허설을 하고 내려오니 우리 YAM 멤버들을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만 아는 전문 방송 리포터가 마이크를 잡곤 우리와 나인피치 사이에서 웃고 있지만,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우릴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분량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인피치 애들만으로는 제대로 분량을 뽑지 못해서 우릴 부른 것 같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나인피치 외에도 다른 그룹들이 많았는데도 분량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느껴질 얼굴이라 어느 정도 느낌이 왔다.
보통 해외에서 진행하는 공중파 음악방송의 경우에는 콘서트보단 이벤트 성격이다 보니 관련 연예프로그램도 같이 따라와서 방송 촬영을 하는데, 거기에 우리 소속사인 MSM의 입김이 좀 들어갔을 터였다.
우리 회사가 국내에서 요즘 하락세인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에선 MSM 소속 연예인이 인기가 많다는 걸 연예프로그램에서 보여주고 싶었을 거 같았다.
“자 카메라 앵글 잘나오게, 나인피치 애들 뒤에서 까치발로 서서 자리잡아봐.”
제일이 형도 눈치를 챘는지 제대로 인터뷰 하기위해 애들 뒤로 우리들을 세웠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은채 뒤에 찰싹 붙어서는 친한 듯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데뷔전 연습생 때부터 보았던 동생들인데, 노래도 잘하고, 다 예쁘고 최고인 것 같아요. 올해 신인상은 당연히 우리 나인피치죠. 피치! 피치! 나인피치!”
시키지도 않은 나인피치 응원 구호까지 외치며 분위기를 띄울 때 혹시 몰라 적어왔던 쪽지를 꺼내 은채의 손에 쥐여줬다. 그리고 은채의 손을 꽉 잡았다.
몇 개월 만에 만져보는 은채의 따뜻한 손이었다.
은채의 손도 나처럼 힘이 들어갔고 그렇게 한참이나 은채의 허리 뒤로 손을 잡고 있었다. 평상시엔 말 많다고 핀잔을 했던 제일이 형이었지만, 오늘따라 주절주절하는 제일 형의 인터뷰가 참 짧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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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최신가요’ 무대 끝나고 그날 밤에 바로 귀국하는데, 소원이 넌 아사이 TV 방송 협의 때문에 일본에 남게 되는 거지?
그런데, 토모랑 같이 출연한다면서 토모는 안 남아도 되는 거야? 같이 협의해야 하는 거 아냐?”
제일형의 물음에 토모가 나보다 대답을 먼저 했다.
“아, 내일 남는 소원이형 일본 스케줄은 방송스케줄이 아니라, 레드샵과 일본 ‘업프론 레코드’와의 프로듀서 협의 때문이래요.”
“업프론 레코드? 거긴 또 뭐 하는 곳이냐?”
“형 ‘모닝 무스’라는 일본 걸 그룹 알아요? 그 걸그룹 소속사인데, 곡이나 프로듀싱 관련 협의를 하기로 했어요.”
“아, 모닝 무스. 알 것 같다. 그런데, 거긴 또 어떻게 알게 된거냐? 참, 프로듀싱 계약이라고? 그거, 전에 중국에서 재미 본 그 계약 맞지?”
제일이 형은 중국에서 재미 본 계약 이야기를 할 때 중국 멤버들의 눈치를 힐끔 봤지만, 궁금했는지 이야길 끝까지 했다.
“네. 중국에서는 금한령 때문에 전 돈을 쉽게 벌었죠. 음반이나 곡 단위로 계약하지 않고, 2년으로 연간 프로듀싱 계약을 해서 일도 하지 않고, 날짜가 지나다 보니 그냥 돈을 벌었어요.
그 계약 기간이 그냥 지나버리다 보니 연간 계약이 신의 한 수였어요. 그때 하든 말든 배짱으로 먼저 선입금 안 하면 안 한다고 한 게 주효했죠.”
이야길 하며 엄지와 검지를 비비는 돈 세는 제스처를 취해주자, 제일이 형은 ‘캬~’ 하는 감탄사까지 뱉어낼 정도였다.
“야, 그럼 이번 일본 일에 나도 프로듀서로 좀 끼워주면 안 되냐?”
“형! 저도요. 저도 저작권료 + a 한번 받아 보고 싶어요.”
“형 저도 곡 많이 적어둔 거 있어요.”
제일이 형의 끼워 달라는 말에 멀리 떨어져 있던 다른 멤버들도 뛰어와서는 한 다리 끼고 싶다고 입을 털어대기 시작했다.
자작곡에 관심이 원래 없었던 가빈이나 중국에서 이미 큰 돈을 벌고 있는 중국멤버들을 빼곤 모두 다 내 주위로 몰렸다.
“그런데, 일본은 중국처럼 그렇게 큰돈이 안될 거야. 일본 기획사들이 얼마나 돈 안 쓰는지 다들 알잖아?
소속 연습생이나 가수들에게 댄스 강습도 안 시키는 곳이 많다는 거 다들 알잖아. 당연히 곡비도 중국처럼 많이 주지 않을 거고, 프로듀싱 비용도 큰돈을 생각하면 실망할 거야.”
“그래도 시작을 해보는 게 좋은 거잖아. 한국에선 MSM 소속이다 보니 자작곡을 팔기도 어렵잖아. 그리고 저렴하게 했더라도 저작권료는 제대로 정리해주는 곳이 일본이니깐 경험도 쌓고, 돈도 벌 겸 하는 거지.”
“흠. 알았어요. 그럼 만나서 공동 프로듀서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요. 잘되어서 제작자로 우리 YAM 멤버들이 투잡 할수도 있는거니깐요.”
“오케이. 그런데, 들리는 말로 너희 회사에 백인들로 이루어진 남자 아이돌 그룹 만든다는 말이 있던데, 진짜냐?”
“헐, 소원이형 진짜에요? 그럼 바로 미국 공략을 하는 거예요?”
“와! 한국보다 미국에서 먼저 데뷔하는 거예요?”
“어? 그러면 한국 기획사 최초 아니야? 한국에서 만든 보이 그룹을 미국에서 먼저 데뷔시키는 케이스가 있었나?”
“진짜 K-POP의 미국 본토침공이네. 코리아 인베이전~!”
애들이 떠들어 대니, 아까까지 별 관심이 없던 가빈이나 중국 멤버들은 물론이고 이용민 실장과 다른 매니저들도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미국에서 먼저 데뷔는 아니고, 한국에서 데뷔한 이후 미국 진출은 일단 생각하고 있어. 장기적인 목표지.”
“에? 전원 백인인 외국인이라면서요? 한국에서 그렇게 데뷔시킨다고요?”
규일이가 백인들만으로 만들어진 그룹이 한국에서 데뷔한다는 말에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길 했다.
그 말에 다들 동조하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좀 잘못 났네. 백인 3명에 히스패닉 1명, 네이티브 아메리칸 인디언 1명 해서 5명이야.”
“이야. 다 백인은 아니지만, 다 외국인인 건 맞네. 그럼 영어로 노래를 부를 거야? 그러면 한국 데뷔가 의미 없지 않을까?”
“네. 제일이 형 말대로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한국에 데뷔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죠. 한국어로 노래를 부를 겁니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노래하고 이후에 자리 좀 잡으면 그때 미국으로 진출시키려고요.”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어 노래를 부르면 발음 때문에 안될 건데. 진짜 한국인 한 명도 없이 가는 거야?”
“일단, 지금은 그런데 나중에 실제 데뷔 때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한국인 없이 데뷔하면 그 팀은 K-POP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한국 멤버 없이 한국인이 프로듀싱 하면 그걸 한국 한류로 봐야 하는 건가?”
이용민 실장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는데 다 들렸다.
“그런데, 이미 K-POP은 한국인이 만들고, 한국인들만 부르는 노래가 아닌지 오래되었습니다. 유튜브 보시면 그게 바로 와 닿잖아요.”
“그건 그렇지. 우리 회사에도 외국 프로듀서들도 이미 많이 들어와 있고, 그들이 만든 노래도 K-POP에 한류니깐.”
“네. K-POP은 이제 한국인이 만들고 한국인이 부르는 노래를 지칭하지 않는 단계가 되어 버렸어요. 이젠 하나의 장르 화가 되어 버렸죠.
힙합이 처음 나왔을 때와 같다고 하는 말도 있잖아요.
랩으로 궁시렁거리는 말들이 노래가 되고 힙합이란 장르가 되어 지금처럼 전 세계를 씹어 먹을 줄을 그때 누가 알았겠어요?
그리고, EDM은 또 어떻고요? 그냥 술 먹고 테이프 이어 붙이기 같은 잡기술이 믹싱이 되고 지금의 EDM 이란 장르가 만들어졌지 않습니까?
아마, K-POP도 그렇게 될 겁니다. 한국인의 K-POP이 아닌 장르로서의 K-POP화 가요.”
이용민 실장이나 우리 멤버들은 이미 회사에 외국인 프로듀서들이 많은 걸 알기 때문에 이 K-POP의 장르 화 같은 개념을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었다.
물론, K-POP이란 한국 사람만의 고유문화를 전 세계 외국인들에게 빼앗겨 버린듯한 그런 느낌이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 다른 BIG4 기획사보다 과도하게 많은 외국인 프로듀서들로 인해 더 빠르게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 특유의 맛이 나는 음악이 나오지 않다 보니 요즘 MSM이 히트곡을 못 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K-POP이 장르화 될수록 우리가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빌보드에 진입하기 위해 미국행 했듯이 이젠 전 세계 애들이 한국으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오게 될 거라고. 난 그 준비를 먼저 하는 거야.”
내 말에 제일이 형과 멤버들은 물론이고, 이용민 실장까지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는 게 느껴졌다.
“장르화와 세계화...미국...”
중국 멤버인 소혁이까지 중얼중얼 거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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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이타마 아레나에서 열린 SBC ‘최신가요’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국내 일정 문제도 그날 밤 비행기로 대부분의 가수들이 돌아갔지만, 나인피치처럼 일본 내 홍보를 위한 활동 스케줄이 있는 팀들은 일본에 남았다.
그리고, 예정에 없던 제일이 형도 남아서 나와 같이 츠기모토와 만나기로 했다.
“이야, 나인피치 애들은 조식 먹을 때도 완벽 메이크업을 하네.”
“제일형 저기 JYG의 ‘잇지업’ 애들이 있잖아요. 서로 일본 홍보 일정도 겹치니 조식 먹을 때도 지기 싫은 거겠죠.”
물론, 난 은채의 예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땡큐였다.
그리고, 호텔에 남은 MSM 사람들이 몇 없다 보니 조식도 같은 테이블에서 어울릴 수 있었고, 난 은채가 내 쪽지에 대한 답으로 눈인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했다.
“그런데, 윤사장네 진유화 영화 들어가기로 했다며? 오현석 감독이 제작자로 들어가고 김호재 감독이 메가폰 잡는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이용민 실장과 입사 동기인 김용호 실장이 조식을 먹으며 말을 걸어왔다. 평상시 MSM의 배우들을 관리하는 실장이다 보니 안면만 겨우 있었다.
“네? 아직 영화는 미정입니다. 이제 미팅 일정 잡았고, 결정이 나지도 않았어요. 직접 만나보고 조건을 들어보지도 않았는데, 그쪽에서 설레발을 치는거 같네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김호재 감독은 알지?”
“사실 방금 실장님 통해서 처음 들었습니다. 대표작이 어떤 건가요?”
“음. ‘꼬리표와 이름표’ 라는 액션 영화 알아? 아님, ‘날 찾아가’ 라는 영화는?”
“죄송한데, 둘 다 처음 들어보는데요.”
“아 난 알겠어. ‘꼬리표와 이름표’란 영화는 권동식이 주연했던 영화 아니었어요? 여름 액션대작이라고 했다가 망했던 영화요.”
제일이 형이 아는 척을 했는데, 망한 영화의 감독이라니 좀 걸렸다.
“그래, 제일이는 잘 아네. 김호재 감독의 대표작인 그 두 영화도 사실 100만 명도 못 들었어. 독립영화 아니야. 나름 액션 블록버스터라고 여름시장을 겨냥한 대작이었어.
그런데, ‘꼬리표와 이름표’가 60만 명인가 들었고, 사실상 50만 명 든 영화도 없는 감독이야.”
“네? 그런데, 어떻게 또 영화 메가폰을 잡은 거예요? 보통은 상업영화 감독으로 한두 편 망하면 이후로는 감독을 못 하는 거 아닌가요?
아, 집이 부자인거 아니에요?”
“상업영화가 한두 푼이야? 집이 재벌쯤 되면 모르겠지만, 그냥 집이 부자라고 되는 게 아닌 거 같은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제일이 형의 말에 김용호 실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망작 감독이 어떻게 계속 감독을 할 수 있는지 윤사장은 알아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