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카메라 On/Off.
구르듯이 대기실로 들어온 남자는 대기실의 어색했던 공기를 한방에 날려 버릴 정도로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었는데, 아마도 이용민 실장에게 들은 개그맨 멤버가 이 사람인 것 같았다.
“오라 오라 이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군요. 분위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저 야기가 없었다면 재미가 없는 프로그램이 될뻔했잖습니까?
저기 보세요. 카메라씨도 하품을 할 것 같은 표정이잖아요. 하하하.
자 다카미씨, 제임스씨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가시죠.
거기 두 친구도 어서 짐을 챙기고 따라 나오라고.”
“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이 안 되는데, 야기란 개그맨은 학교 선생님처럼 방 안에 있던 4명을 이끌고는 건물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이 어이, 카메라씨 이 차를 찍으라고.
1963년에 만들어진 오리지날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라고. 소장하고 있던 자동차 매니아에게 도게자(どげざ)까지 하면서 빌려온 차란 말이야.”
야기란 개그맨은 파란색과 흰색의 투톤으로 칠해져 있는 작은 미니버스 앞에서 온갖 거드름을 피웠는데,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는 미니 승합차를 빌려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야기군 그런데, 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 건가?”
“네. 다카미씨 음악을 사랑하는 히피라면 당연히 이 마이크로 버스 아니겠습니까?”
“이봐, 그건 1960~70년대지. 지금은 전혀 아냐. 이차는 에어컨이나 히터가 없다고. 핸들도 파워핸들이 아니야.”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임스씨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기억하십니까? 미국 전역에서 뉴욕 베델평원으로 몰려들었던 그때를 기억해야지요.
그때 모든 히피들의 로망이자 최고의 교통수단은 바로 이 폭스바겐 미니버스였습니다.
우리 ‘Be together’ 밴드의 목표가 바로 그런 공연문화의 부활인 겁니다.
그래서, 이 미니버스를 상징적인 의미로 타고 다녀야 하는 거지요.”
“그런 상징적인 건 잘 알겠는데, 이 차 정말 불편해.
그리고, 야기 넌 1975년생이잖아. 우드스탁 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 그때는 아마 아버지의 고추에 있었을걸.”
“야기, 우드스탁은 우리 세대가 겪은 혁명이지 너희들의 음악적 혁명이 아니라고. 야기 네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비틀즈는 해체한 이후라고.”
“아, 비틀즈가 해체했습니까? 도대체 언제 해체한거죠? 전 이제 비틀즈 노래 듣기 시작했다고요. 설마 멤버들이 벌써 죽은 건 아니겠죠?”
“진지하게 진짜 몰랐다는 듯이 그런 이야기 하지 마, 이 자식아!”
주차장에 주차된 미니버스와 우드스탁 이야기만으로 서로 아웅다웅하며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었는데, 진행자를 별도로 두지 않았음에도 서로 상황을 만들어가는 게 대단했다.
그리고, 치렁치렁하게 기른 머리와 주름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두껍게 화장을 한 다카미라는 기타리스트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
60이 넘었다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 개그맨 야기에 못지않은 입담을 뽐냈는데, 둘이 주고받으며 진행하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도, 제가 정말 도게자(どげざ)까지 하며 겨우 빌려온 거예요. 교토까진 이걸로 이동해야 합니다. 기름도 이미 다 넣었으니깐 어서 타세요.
자, 거기 토모, 소원? 어서 빨리 올라타. 그래야 카메라씨들도 빨리 찍고 이동을 위해 움직이지.”
야기의 말에 우리도 미니버스에 올라탔고, 불편하다며 구시렁거리던 타카미와 제임스도 차에 올라탔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제가 만들어온 야기 믹싱 No.3 테이프를 들려드리죠.”
특별히 만들어 왔다는 믹싱 테이프가 들어가자 진짜 스피커도 오리지날 그래도 인지 지직거리며 ‘Eric Clapton의 Layla’가 흘러나왔다.
“야기 이 녀석, 제대로 70년대를 아는구나.”
“물론이죠. 괜히 제가 ‘Be together’ 밴드의 리더이자 드럼으로 뽑힌 게 아닙니다.”
“무슨 헛소리야? 누가 너 따위 녀석이 리더라는 걸 동의 해줬냐? 리더는 음악적인 소양이나 인기를 봐서 나 다카미가 당연히 해야 하지.”
뒷좌석에 앉은 나와 토모에게 리더는 본인이라고 확인받고 싶다는 눈빛을 보냈는데, 우리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전을 하는 야기의 목을 조를 듯이 손을 가져가자 야기가 리더자리를 다카미에게 넘겨준다고 맹세를 해버렸다.
“그런데, 이거 너무 하잖아. 아무리 우드스탁의 낭만이라고 하지만, 자동차 시트는 좀 푹신한 거로 바꿔야 하는 거잖아.
스피커도 그렇고 너무 오리지날 그대로잖아. 엉덩이가 배긴다고.”
“네 리더, 가장 가까운 휴게소까지 가면 아주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이 자식 휴게소에서 리더인 나를 칼로 찔러 편하게 해주겠다는 말이냐?”
“앗, 벌써 눈치를”
거의 30분 가까이 달리는 차에서 유치한 만담과 70년대 히트 팝송들을 듣고 있으니 진짜 옛날 우드스탁에 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던 히피들이 된 것 같았다.
휴게소에 도착해서는 일본에서 유명한 메론 빵으로 야기씨와 다카미씨가 또 서로 주고받으며 진행을 했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어이, 야기! 출발!”
다시 미니버스 뒷좌석에 앉았는데, 다카미씨가 출발을 하자고 했지만, 버스는 조금 움직이더니 멈추어 섰다.
“어이 카메라씨 다 찍었지?”
“네, 야기씨 휴게소 이후 다시 차를 몰고 이동하는 건 충분합니다. 교토에서 가장 가까운 휴게소에서 다시 한번 상황을 찍고, 다시 이 차를 몰면 될 겁니다.”
“그래 수고했어. 다카미씨 이제 내리셔도 됩니다.”
“그럴까? 진짜 이차 불편하다니깐, 그 당시에는 어떻게 이걸 타고 며칠씩 돌아다녔는지 상상이 안 간다니깐.”
“시트도 시트지만, 운전이 너무 힘들어요. 파워핸들도 아니고, 일단 버스로 가시죠. 그리고, 아까 메론빵 먹을 때 머리 때리신 거 정말 아팠어요.”
“아, 미안 미안. 상황극은 참 어렵단 말이야.”
뒷자리에 앉은 토모와 난 동공에 지진이 난 것처럼 확 달라진 두 사람의 이야길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이 거기 젊은이들도 어서 내려. 진짜 이거 타고 갈 거야? 젊더라도 허리디스크 온다니깐. 어서 버스로 옮겨 타.”
허겁지겁 미니버스에서 내리니, 방송 스탭이 올라타 운전을 해서 휴게소를 떠나버렸다.
“나는 괜찮지만, 다카미씨나 제임스씨는 이제 나이가 있어서 저런 버스를 타고 몇 시간씩 이동하게 되면 공연 전에 병원부터 가야 할걸.
교토로 가는 마지막 휴게소까진 버스로 이동이야. 모든 걸 다 리얼리티로 갈 수는 없는 거지.”
매니저로는 베타벡스에서 나온 사람밖에 없었는데, 야기씨가 친절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 해주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리고 너희 둘 말이야. 웃음이 생길 것 같은 상황에서는 치고 들어와야지, 그냥 관람객처럼 뒤에서 웃다가 그냥 갈 거야?
한국에서 바다 건너 외국에 왔으면 그만큼의 성과는 만들고 가야지. 망설이지 말고 상황에 끼어들라고.”
나와 토모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버스에 올라가는 야기씨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키 작고, 검은 피부에 원숭이 같은 웃긴 이미지의 사람에게서 진정한 방송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야기뿐만이 아니었다. 야기와 아웅다웅하던 다카미나 제임스도 카메라가 돌 때와는 다르게, 조용히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바로 숙면모드에 들어가 버렸다.
“소원형. 저게 진짜 일본식 방송 프로의 모습인 것 같아요.
카메라가 돌 때는 시청자들에게 보이는 이미지의 캐릭터가 되고, 카메라가 꺼지면 다시 본인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확실히 다르네요.”
“그러고 보니 연기 선생님인 김영민 선생님에게 들은 게 기억이 난다.
새로운 배역을 맡으면 그 배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배역이 실제로 되어야 한다고. 그게 연기에 극한된다고 생각했는데, 예능도 마찬가지였어.
시청자들에게 보이는 재미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가 되어야 하는 거였어.”
“일단 버스에 올라가서 고민하죠.”
오래된 미니버스의 딱딱한 의자와는 천지 차이인 고급 리무진 버스의 푹신한 의자에 앉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돌이든 연기자든 결국 연예인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직업이다.
그리고,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를 너무 많이 보여주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식상하게 되어 그 연예인에 대한 궁금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될 때가 있는데, 그때가 연예인의 은퇴 시기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식상함을 상쇄시킬 만큼의 노력과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연예계에서 버틸 수가 있는데, 사실 20년 이상 배우가 아닌 연예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자체가 거의 없었다.
배우들도 작품과 작품 사이 휴식기가 있기에 20년 가까이 활동을 할 수 있었지 1년에 10개월 이상 몇 년째 활동하며 10년 이상 활동을 해온 연예인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직접 본 다카미씨를 보고, TV에서 본 산마라는 개그맨과 90년대부터 최고의 인기 아이돌이라는 기무라를 생각해 보면, 어떻게 20~30년 가까이 롱런을 해왔는지 그 비밀을 알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카메라 앞에 서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르다면 이중적이라고 씹기 바쁘겠지만, 이미지 소모를 막고 최대한 오랫동안 활동을 하려면 카메라가 꺼져있을 때와 켜져 있을 때가 다른 것이 이미지 소모에는 더 좋은 방법 같았다.
그리고, 일본에선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내가 나서더라도 변화된 미래가 일본에 한정될 테니 호언장담을 하는 적극적인 캐릭터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늘 원래는 없었던 일들이 어떤 영향을 만들어 낼지 고민했지만, 여기선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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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야기씨 만큼은 아니지만, 오래된 수동 스틱 차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야기씨가 여기까지 운전해 온다고 고생하셨는데, 이제 교토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제가 운전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들 편안하게 버스를 타고 왔지만, 내가 ‘Be together’란 프로그램에 제대로 캐릭터로 끼어 들었다는걸 알려주기 위해서 운전을 하겠다고 먼저 나섰다.
“이봐. 한국과 일본은 운전석이 반대라구. 진짜 할 수 있는 거야?”
야기가 뭐라고 하든 간에 운전석에 먼저 올라, 기어도 넣어보고 했는데, 왼손으로 스틱을 조정하다 보니 제대로 기어가 안 들어가긴 했다.
“설마, 이 자식 라밤바의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처럼 사고사로 우릴 죽이려는 거 아냐? 한국에서 온 암살자냐?
이 다카미님이 합류한 Be together 밴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밴드란 말이다.”
“그게 아니죠. 전설의 게닌 드래머 히소치 야기가 있기 때문에 전설이 되는거죠. X-japan을 보세요. 드럼이 밴드의 실세인 겁니다.”
“무슨 소리!”
뒤에서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겨우 미니버스를 출발할 수 있었고, 한번 적응이 되니 차체도 높고, 운전은 할 만했다.
“그런데, 정말 여기에서 B-station 공연하는 게 맞나요? 여긴 넓긴 하지만, 요요기처럼 공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허허벌판인데요. 지나 다니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게 산보하는 사람도 없는데. B-station 직원씨! 진짜 여기가 맞는 거야?”
야기의 고함에 앞에서 우릴 선도하던 차량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와서 여기가 맞다고 확인을 해주었다.
“교토에는 큰 공연장이 없고, 시내에도 공연할만한 넓은 부지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천 하류에서 B-station 공연이 이루어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기서 메인 무대를 짖고 있는 게 보이시죠?”
“야기 이 멍청이가 우드스탁 우드스탁 하니깐 진짜 허허벌판에서 우드스탁처럼 공연을 하게 되었잖아.
B-station때는 사람들이 오겠지만, 그 전에 분위기 띄우는 공연에는 주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야지. 여긴 죄짓고 밀려나는 귀향지잖아.”
다들 난감해하는데, 멀리서 차가 한 대 다가오더니, 50대의 셀러리맨 같은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오, 이제야 기획PD인 츠기모토가 왔구만. 이봐 츠기모토! 진짜 여기서 우릴 공연시킬 거야?”
“네, 30년 전 제가 Afeel의 다카미씨와 만났을 때 같지 않습니까?”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