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바지가 필요해. (2)
“지금은 공중파 채널의 힘이 빠져서 케이블과 종편 등 100여 개의 채널이 서로 경쟁을 하는 시대지만, 당시에는 3개 채널이 전부였어.
그리고, 각 방송사 프로그램에 나올 수 있는 건 그 방송국에 소속된 연예인만이 가능했지.
지금의 각 방송사 아나운서들을 생각하면 될 거야. 아나운서들처럼 가수와 배우, 개그맨이 모두 각 방송사에 소속되어서 그 채널에서만 활동할 수 있던 시대였어.”
민수민 회장의 말을 듣고 있으니, 마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날이야기 같이 들렸다.
“그러다 보니, 방송국 사장에게 휘둘리는 일도 많았고, 방송국 사장으로 내려오는 낙하산 사장의 입김에 따라 출연자들이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지. 뒤로 동원되어 접대를 하거나 뺨을 맞아 가며 웃길 수밖에 없었던 참 안타까운 과거였어.
그런, 형편없었던 과거로의 회귀를 CH 미디어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거야.
직접 만든 프로젝트 아이돌을 무기로 직접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며, 우리 기획사의 숨통을 조이겠다는 거지.
말 잘 듣는 직원 같은 연예인을 자회사를 통해 운영하겠다는 거야. 나 같은 1970~80년대 방송계를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그 폐해를 알기에 이렇게 걱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아이돌도 1년 혹은 2년짜리로 단기간 쓰고 버리겠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아련하게 과거를 기억하는 민수민 회장의 뒷말을 전략기획팀의 김우성 팀장이 받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만든 아이돌은 결국 여러 기획사의 인재들을 빼서 만든 임시 팀입니다. 그 계약이 끝나면 원래의 기획사로 돌아가게 되는데, 윤소원 사장님이 있었던 엔오원의 케이스를 봐서 알겠지만, 그 이후 멤버들의 활동은 대부분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팀으로 있는 1~2년 만에 모든 단물을 빨아버리니, 아 어휘가 거친 것은 이해 바랍니다.
단물이 빨릴 정도로 연예인을 굴리게 되면 결국 이미지 소모로 인해 솔로 혹은 새로운 팀으로 나왔을 때, 새로운 맛을 주기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 식상함으로 대중의 인기를 다시 받기 힘들죠.
지금 다른 엔오원 멤버들을 생각해 보시면 제 말에 동의하실 겁니다.”
김우성 부장의 말이 100%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현재 엔오원 멤버 중에서 엔오원때의 반이라도 인기를 끄는 사람은 나를 빼곤 아무도 없었다.
다들 솔로와 새로운 팀으로 데뷔를 했지만, 김우성 팀장이 말한 식상함 때문인지 아니면, 중소 기획사의 부족한 기획력 때문인지 제대로 인기를 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소원이 너처럼 특별 케이스도 있지만, 프로젝트팀의 끝은 마치, 7년 계약이 끝난 대부분의 아이돌이 맞게 되는 미래와 같아.
솔로나 새로운 팀으로 예전의 인기를 얻는 경우는 거의 없어.
한마디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발판으로 각 기획사 인재들의 단물만 빨아 먹으며 CH 미디어가 재미를 보고 있는 거야. 피해자는 그 멤버와 그 멤버로 팀을 준비하던 기획사지.”
민수민 회장이 다시 말을 받아 이야길 하는데, 그 계약 기간 동안 버는 돈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단물이 빠진다고 할 만큼 빡시게 굴리는 만큼 그 활동에 대한 경제적인 피드백이 있으니 어떻게 보면 멤버였던 사람에게는 큰 손해는 아니라고 난 생각했다.
하지만, 민수민 회장과 김우성 팀장의 말을 듣고 있으면, CH 미디어가 진짜 생 양아치 같은 방법으로 단물만 빨아먹는 것 같이 들렸다.
두 사람의 말에 100% 동의하기는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했다.
각 기획사에서 몇 년간 투자해서 키운 연습생을 거의 공짜로 데리고 와서 재미를 보고, 이미지 소모가 되어 단물이 빠지면 계약 기간에 따른 자동해체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새 아이돌을 만들면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민수민 회장의 말에 동의하긴 했다.
이런, 장점이 있기 때문에 공중파들도 서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고, 설령 인기를 끄는 데 실패하더라도 방송국에서는 크게 손해를 보는 장사가 아니었기에 지금도 계속 오디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회장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나오는 콜라보걸의 데뷔를 실패로 만들기 위해서 각 기획사의 걸 그룹들을 계속 데뷔시켜 화제를 돌리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래 맞아. 지금 여기 모인 기획사만 20곳이 넘어. 우리가 가진 인맥과 지원이라면 최대한 콜라보걸을 견제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데뷔시키는 4개의 걸그룹 중에서 한 팀이라도 빵 터지게 되면 콜라보걸이 묻히게 될 거고.”
“CH 미디어에서도 엄청나게 지원을 할 건데, 결국 서로 죽자는 거 아닙니까? 치킨게임의 끝이 어떤지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 결국 다 죽거나, 다 피해를 보는 겁니다. 제가 키우고 있는 걸그룹을 그렇게 소모시킬수는 없습니다. 아직 데뷔 준비도 다 끝나지 않았고요.”
“윤소원 사장님, 지금 이 회의실에 모이신 분들을 한번 천천히 살펴보시겠습니까?”
김우성 팀장의 말을 듣고는 회의실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평소에 일을 하며 자주 보던 각 기획사의 실장이나 부장이 아닌, 젊으면 50대, 늙으면 70, 80대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기획사의 대표로 앉아 있었다.
뭔가 실버맨 클럽 같은 느낌이었다.
“눈치채셨겠지만, 여기 모이신 기획사 사장님들은 다들 70~80년대를 몸으로 겪으신 분들입니다.
방송국의 갑질과 폐해를 다 견디어낸 분들이지요.
이런 분들이 몇 년간 투자해서 키운 걸그룹을 치킨게임 같은 견제를 위해서 데뷔 시키겠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은 작은 걸그룹을 소모시키는 것으로 끝이지만, 나중에 방송국과 언론 재벌이 편법으로 매니지먼트를 하게 되면 아예 지금의 회사들 절반이 날아 갈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를 위해 지금 소를 희생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김우성 팀장의 말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워온 걸그룹을 소모하면서도 CH 미디어의 매니지먼트 진출의 포석이 되는 콜라보원을 방해하겠다는 기획사 사장들의 사고방식이 소름 끼쳤다.
결국 소모품으로 던져두고, 히트를 치면 계속 가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콜라보원을 방해하는 사석(捨石)으로 쓰고 소모시켜 버리겠다는 논리가 무서웠다.
미디어 재벌이 매니지먼트 업계에 들어와서 자신들이 일구어낸 회사가 죽을 수 있다는 걸 겁내며 싫어하지만, 아이돌이란 꿈을 위해 인생을 걸고 있는 아이들은 소모품으로 쓰고 버려도 된다는 저런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들이 기획사의 사장들이라는 현실이 씁쓸했다.
“윤소원 사장님의 표정을 보니, 아마도 키우고 있는 걸 그룹이 소모품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 하시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같은 걸그룹 홍수 시대에 20여 개의 기획사에서 대 놓고 밀어주는 서포터입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데뷔하기보다는 다른 기획사에서 도와줄 때 데뷔를 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SYG, JYG도 대 놓고 찬성하지는 않지만, 결국 영역을 침범해 오는 미디어 그룹에 함께 대항하기로 했습니다. 그쪽 그룹에서는 남자 아이돌 4팀이 데뷔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보기엔 그냥 밥그릇 싸움, 기획사 간의 이권 다툼일 뿐이었는데, 기획사 사장들의 입장에서는 CH 미디어를 생태계 교란종으로 보는 것 같았다. 같이 살게 되면 토종들을 죽이거나 말살시키는 그런 무서운 존재로 두려워하다 보니 공생이라는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교란종을 견제하기 위해 중견급 기획사의 남녀 8팀이 거의 같은 시기에 데뷔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갑갑했다.
그만큼 미디어 재벌의 업계진출을 무섭게 본다는 말인데, 직접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왜 이렇게 출혈을 강요하며 대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일방적인 통보와 다름없는 말을 하는 민수민 회장의 말을 거부하기는 힘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1시간 가까이 CH 미디어의 매니지먼트 진입에 대한 대응 방안이 나왔고, 자리가 파할 때는 김우성 팀장에게서 걸그룹 데뷔 일정에 대해서 핸들링을 하는 책임자를 정해서 통보해달라고 했다.
내일까지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회의실을 나오는 지금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본사와 다른 기획사 사장단들이 원하는 대로 하늘소녀를 데뷔시킬지, 무대책으로 그냥 거부해버릴지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상의할만한 사람을 떠올려보니 한 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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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윤사장 이거 너무하잖아. 내일 아침 일찍 시장가야 하는 사람을 깨우고 말이야.”
“김일규 부장님, 이런 일을 물어보고 상의할 사람이 부장님밖에 없어서요. 조카인 제이 문제도 되기에 새벽이지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 듣고 보니, 심각하긴 하네. 그래도, 늙은이들이 나이가 들더니 다들 겨울철 불알처럼 간도 쭈그러들었는지 너무 겁을 내는 구만.
CH 미디어는 사실 이미 몇 년 전부터 이 바닥에 들어와 있었거든. 신규로 차린 회사도 있지만, 투자와 인수로 CH 미디어 밑으로 만든 회사만 7개야.”
“벌써, 7개나 자회사 격인 기획사가 있는 겁니까? 그럼 그때 처음 들어올 때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왜 갑자기 이러는 겁니까? ”
“이전에는 그 회사들도 일반 기획사처럼 매니지먼트를 했거든, 그러다 프로듀스99 이후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으로 재미 보는 법을 알아챈 거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을 접하다 보니 이게 정답이구나 하고 생각을 한 거야. 내가 키우지도 않은 연습생을 방송 프로젝트로 데리고 와서 돈을 만들어 내고,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팀으로 갈아타기도 좋으니 최고의 정답인 거지.
CH 미디어에서도 그 정답을 깨닫고는 최대한 활용하기 시작한 거고, 그 정답이라는 방법의 영향력을 민수민 사장이나 노인네들은 경험으로 알기에 겁을 내는 거야.
지금은 가수, 아이돌 한정이지만, 이게 예능인, 배우로까지 확대가 될 수 있거든.
민회장의 말처럼 옛날 방송국 소속만 활동하는 시대로의 회귀는 좀 오바지만, 자회사 소속의 연예인들만 출연시켜도 방송이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시대가 될 것 같기도 하거든.”
“흠. 하긴 7개나 되는 기획사에 소속된 연예인들 100여 명이면 채널 1~2개의 모든 프로그램은 다 커버 되겠네요.
출연료를 타 방송같이 준다고 해도, 그 돈의 일정 부분은 자회사로 들어가게 되는 거니, CH 미디어에선 이왕이면 자회사 소속연예인을 쓰는 게 이득일 테니깐요.”
“맞아. 그래서 노인네들이 겁을 내는 거야. 미디어 재벌이 채널과 기획사까지 다 가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기획사들은 수익이 줄어들게 될 테니까.
윤 사장도 어쩔 수 없이 CH 미디어와는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을 거야.”
“에휴. 마트가 골목 구멍가게 죽일 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미디어 재벌의 시장 장악을 겪을 줄 몰랐네요. 재벌과 싸움이라니.”
“그러면, 아예 양다리를 걸쳐. 박쥐처럼 이리저리 붙어서 살아야지. 그래야 생존확률이 올라가지.”
“양다리요? CH 미디어 쪽에도 줄을 대라는 말인가요? 레드샵이 MSM 자회사인 걸 아는데, 어떻게 그게 됩니까?”
“MSM과는 상관없는 다른 회사를 하나 차리면 되지. 그러면서 CH 미디어에 투자를 받아. 이미 하부에 7개 기획사가 있는데, 8번째 기획사로 들어가고 싶다고 하면 그쪽에서는 땡큐지.”
“아! 그런 방식으로 양다리라...화려하게 양쪽에서 욕 엄청나게 듣고, 괘씸죄까지 걸려 MSM과 YAM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겠네요. 멋진 방법인데요. 하하하.”
“에헤이, 윤사장이 차리면 안 되지. 바지사장을 세워야지.”
바지사장을 세우라고 이야길 하면서 씨익 웃는 김일규 부장을 보니, 마치 자신이 최적의 바지사장이니 어서 픽하라는 그런 얼굴이었다.
“가게는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 설마 날 스카웃하는거야? 뭐 하긴 나만 한 사람도 없긴 없지.”
의뭉스럽게 자신을 스카우트할 거냐고 물어보는 김일규 부장이 참 얄미웠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인맥 중에서는 기획사 사장을 맡길만한 사람이 없긴 없었다.
중국 투자로 사고를 친 게 있었지만, 그것도 중국에서 대박을 터트리려고 하다 금한령으로 인해 틀어진 일이라 어느 정도 참작하면 최적의 인선이긴 했다.
“뭐 가게가 이젠 오픈한지 몇 달 되었기도 하고, 동생이랑 마누라가 같이 잘하고 있으니깐 남자 아르바이트생을 뽑아두면 괜찮을 거야.”
“그럼, 우선으로 하늘소녀 애들이 늦게 데뷔하는 거로 김우성 팀장과 협의를 좀 해주십시오.
이 주씩 데뷔한다면 8주가 걸릴 건데, 그 정도 시간이면 콜라보걸이 성공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서 콜라보걸의 행보를 방해하기 위해 데뷔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판단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전략적 데뷔가 흐지부지될 수도 있으니 최대한 하늘소녀가 데뷔하는 걸 늦춰 주십시오.”
사실, 달라진 전생의 내 기억에는 콜라보걸이라는 프로듀스108의 결과물은 없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서 봤듯이 CH 미디어의 적극적인 서포터와 방송에서 만들어진 팬들로 인해 시즌 5까지 최고의 아이돌 팀들을 만들어서 성공적으로 데뷔시키고 활동을 이어 갔었다.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곤 해도 내 과거의 기억처럼 CH 미디어에서 밀어주는 콜라보걸은 성공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데뷔를 미루어서 CH 미디어와의 전면전에 나서지 않을 수 있게 날짜를 미루고 싶었다.
“오케이 일단, 내가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깐 김우성 팀장에게도 그렇게 말해. 인력 부족으로 담당하는 사람이 없다면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니깐.”
“네. 일단 시간 끌어 보고, MSM의 우산과 CH 미디어의 우산 아래에서 비나 눈을 피할 수 있게 양다리를 최대한 걸쳐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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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소녀는 6주 후에 3번째로 데뷔하는 거로 잡혔어. 더는 무리더라.
대신에 유튜브 오리지날 컨텐츠 만드는 조건을 받아왔으니깐, 그걸로 위안 삼아 보자고. 한국에서 실패하더라도, 유튜브 오리지날 컨텐츠로 어느 정도 호응이 있으면 동남아나 남미에서 수익을 챙길 수는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