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갈라쇼 (2).
“대본하고 노래들 봤는데, 그 정도로 땡기는 맛은 없던데.
내용도 병원의 병자들과 이야길 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을 보여주는 게 전부던데, 뭐에 꽂힌 거지?”
“그래, 사실 나도 김 켈리 감독 보고 돈 넣은 거지, 내용 보니 흥겨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파나 사랑 이야기로 눈물 뽑는 것도 아니고, 영 어중간하던데. 뭘 보고 혼자서 투자금의 절반 이상을 넣은 거지? 돈이 썩어 남으면 나나 좀 주지.”
“그러는 김 사장도 돈이 남아서 투자했잖아. 자기 돈 자기가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창작 뮤지컬의 주연이 하고 싶었나 보지 뭐. 아, 노래 끝났네.”
“사실 오늘 이 자리를 만들게 된 이유가 이 서태수란 젊은 배우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윤소원, 원효성과 함께 트리플로 캐스팅되었기에, 각 배우의 개성을 투자자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자 했.었.습.니.다.
네. 과거형이죠.”
김켈리 감독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나와 오늘 연회와 미니 갈라쇼에 관해 이야길 했는데, 말의 뒷부분부터는 마치 뮤지컬의 독백처럼 말투가 변해갔다.
“이야~ 갈라쇼라고, 김감독도 한자리 끼어드는 거야?”
“허허. 음악 감독만 했지, 따로 넘버를 부르는 건 처음 보는데. 재미있는 쇼구만.”
“하긴 젊을 때는 ‘시카고’의 록시도 했었으니 뭐. 그 실력이 어디 가겠어?”
“원효성 배우가 일정상 빠짐으로써 오늘 이 갈라쇼의 성격도 처음의 의도와는 많은 게 달라졌답니다.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죠. 바로 돈! 머니~!
그리고 투자를 해준 윤소원은 부자라는 거죠!”
김켈리 감독의 부자라는 말과 함께 내가 서 있는 위치로 핀조명이 비추자 내가 안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머리 위로 마구 뿌리고, 왼손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차고 있는 금빛이 번쩍이는 시계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졸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줬다.
“와, 미친 이런 연출이 갈라쇼에서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뭐, 윤소원에게 투자를 받아 돈이 쌓이기 시작하자, 저는 다른 욕심이 생기더군요.
아! 물론, 돈에 대한 욕심이 아니랍니다. 후후.
바로, 앞으로 뮤지컬의 미래를 짊어지고 하드캐리해 줄 뛰어난 남자 배우를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었답니다.
그런 제 욕심을 채워줄 기대주 서태수입니다.”
나에게 비추어지던 핀조명이 꺼지고, 서태수에게 조명이 쏟아지자 서태수는 무릎을 꿇으며 입고 있던 와이셔츠를 찢어 버릴 듯이 좌우로 힘차게 벌렸다.
강한 힘에 뜯어진 셔츠 사이로 시골 남자의 구릿빛으로 그을린 든든한 상체가 보이자 여자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아니, 김 감독의 욕심이 돈이 아니라, 그 욕심이야? 후후후”
“썬텐한 갈색 피부에 선 굵게 생긴 얼굴이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데. 신인답지 않잖아.”
“뭐, 소원이의 재력, 태수의 빛나는 재능도 중요하지만, 이 둘을 더더욱 빛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겠죠?
뭘까요? 바로, 기본기! 그리고, 그 기본에 가장 충실한 배우가 우리에겐 있답니다.”
서태수에게 쏟아지던 조명이 다시 김성웅을 비추자 성웅이 형은 마치 마이클 잭슨의 뒤꿈치 들기 포즈를 취하는 듯하더니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추던 탭댄스가 태수 형과 나를 지나 김켈리 감독 앞까지 움직이더니, 탭 댄스에 전염된 듯 김켈리 감독도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그리곤, 다시 우리 세 명의 중간에 위치하자 김감독은 탭 댄스 신발을 벗어 던지며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네.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뮤지컬 ‘고스트’는 무릎이 아파 은퇴한 저에게 탭댄스까지 추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말이죠. 물론, 저만 절박한 게 아닙니다. 윤소원은 아이돌로서 입지를 굳혔지만, 아이돌 그 이상이 되길 원하고 있죠.
서태수는 이제 이 세계에 들어와 자신이 가진 역량을 보이고 싶어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성웅은 늘 꿈꾸던 환호를 받으며 웃을 수 있는 무대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김켈리 감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주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응? 이거 레미제라블의 I Dreamed a Dream 전주 아냐?”
“맞아. 판틴(Fantine)의 노래 맞아.”
뮤지컬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니만큼 유명한 곡은 전주만으로도 바로 알아채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거 여자가 부르는 솔로 독창일 건데. 남자 세 명이 이걸 부른다고? 원곡파괴인 건가?”
“일단 한번 들어보자고.”
[사랑이 전부이던 때가 있었어요
There was a time when love was blind
세상은 하나의 노래였고,
and the world was a song
그 노래는 나를 설레게 했죠...
and the song was exciting...]
“야, 이 노래는 뭔데, 왜 이리 구슬프냐? 원래 이런 거야?”
오늘의 갈라쇼가 뮤지컬 ‘고스트’에 투자한 투자자와 여러 뮤지컬계 인맥들을 초대한 자리이긴 했지만, 언론홍보를 위해 초대한 기자들은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를 몰랐고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뮤지컬 갈라쇼에 초대받았다고 뮤지컬을 좋아하는 여자친구와 같이 온 게 다행이었다.
“이 노래는 엄청 슬프면서 아름다운 곡인데, 이렇게 남자 세 명이 부르는 건 나도 처음 봐.
이 노래를 ‘판틴’이 부르는 상황이 가난 때문에 머리카락 잘라서 팔고, 이빨도 뽑아 팔고, 몸도 팔고 하지만 결국 죽게 되는데, 그전에 부르는 노래야.”
“한마디로 캐릭터가 죽기 전에 부르는 단발마 같은 노래야?”
“어 맞아 비슷해. 나도 한때는 꿈이 있었지...라면서 부르는 절규에 가까운 노래야.
죽기 직전에 나도 어릴 때는 꿈많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노래야.
모든 걸 다 잃고 바람이 불면 꺼질 것 같은 가냘픈 촛불과 같은 상황에서 죽기 직전에 떠오른다는 주마등같이 과거를 회상하며 울부짖듯이 부르는 곡이야.
여자가 아닌 남자 세 명이 부르기에 원곡의 처연한 느낌은 좀 없어져 버렸지만, 원곡의 훼손까지도 각오하고 부르는 거로 봐서는 이 남자 배우들도 그만큼 힘든 상황에 있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선곡한 것 같아.”
“음. 그럴 만하네. 나오기로 했던 뮤지컬계의 스타 배우는 중간에 출연을 번복해 버렸고, 김켈리 감독도 처음 제작했던 뮤지컬이 망해서 이번에 투자자를 모으는 것에 애를 먹었다고 했거든.
아마, 윤소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뮤지컬을 올리지도 못했겠지.
그리고, 다른 두 배우는 신인이거나 주연으로 서본 적이 없는 배우들이다 보니 주연으로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겠지.
그런 것들을 나타내기 위한 선곡이라고 보면 되는 거야?
남자들의 울부짖음이라.. 기사 타이틀로 좋은데.”
“그리고, 이 노래가 감정적으로 미친듯한 절망에 빠져서 불러야 하는 어려운 노래라서 웬만한 배우들은 부르기를 꺼려해. 아니 욕을 들을까 봐 두려워할 정도야. 그런데도 이 곡을 불렀다는 건 이 정도는 충분히 각오했다는 거겠지.”
호텔 연회장을 울려 퍼지는 노래가 끝이 나자, 노래의 여운을 즐기듯이 순간의 적막이 찾아왔다.
“브라비~”, “브라보~”
박수보다도 먼저 환호가 터져 나왔고, 그제야 여기저기서 열렬한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간의 적막에 굳어 있던 김켈리 감독이 그제야 웃으며 우리들 손을 잡고 감사 인사를 했다.
“성웅이 형 어때요?”
“뭐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주연으로 앞에 서는 느낌요.
짜릿하지 않아요?”
“짜릿함?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나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내 속에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주연으로 섰을 때, 혹평과 차가운 눈빛을 받는 걸 두려워한 게 아니라, 이런 환호를 받지 못할까 봐 겁이 났었던 거야.”
“그럼 되었네요. 누군가의 언더나 커버가 아니라 진짜 주연으로 무대에 서게 된다면 커튼콜에선 언제나 이런 환호를 받게 될 겁니다.
그럼, 같이 하실 거죠?”
“그래 인마. 근데, 짜식이 누가 널 스무 살로 보겠냐? 큰 그림 그리는 게 아주 늙은 영감이야.
가진 게 다른 서태수나 너처럼 슈퍼스타는 못되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세 명이 같이 한번 가보자.”
성웅이 형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김켈리 감독은 투자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서태수를 정식으로 소개해주기 바빴다.
투자자들도 이 바닥에서는 빠꿈이로 소문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서태수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서로 얼굴을 트기 위해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아무런 경력이 없던, 신인 서태수가 주연으로 무대에 서는 것에 모두가 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개인적으로 레미제라블의 팬으로서 다음 한국 공연에 서태수가 출연진의 포함이 되었으면 좋겠어. 윤소원도 잘하지만, 서태수가 장난 아니야.
기사는 서태수 위주로 쓰면 될 거야. 스타탄생이라고.”
“그 정도야? 난 둘 다 비슷한 거 같던데. 비주얼로는 소원이가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둘은 음색이 달라, 서태수의 음색은 뮤지컬 라이브에 최적화된 음색이야. 대중가요에 어울리는 윤소원의 음색과는 가지고 있는 색 자체가 달라.
넌 잘 몰라도 기사를 그렇게 쓰면 뮤지컬 좀 본다는 사람들은 다 알아들을 거야.”
“네에. 네에. 그렇게 인터넷판에 올려 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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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아, 공홈에 소원이 오빠 관련 공지 올라왔삼. 그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뮤지컬 소식임.
└나도 봄. 주연으로 나온다고 해서 기쁨 2배~ 이렇게 되면 이제 뮤지컬도 티켓 전쟁 터지는 것임?
└아마도, 그럴 듯. 그런데, 공연장이 200석 규모로 소극장이네.
└내가 뮤지컬 좀 보는데, 이번이 처음으로 올라가는 창작 뮤지컬임. 그래서 큰 공연장에서 못하는 거 같음.
-평일 1회 공연에 주말 2회 공연이네. 소원 오빠는 일요일 2번만 공연하네.
└그럼 주말인 금, 토요일은 누가 나오는 거야?
└여기 링크 준다. 보니깐, 서태수랑, 김성웅이라는 배우라는데, 전문 뮤지컬 배우인가 봐.
└오빠 나오는거 일요일 티켓 못 구하면 다른 배우들 것 봐야 하는 건가? 이거 며칠까지 하는지 알아?
-일단 3달 동안이라는데, 그러면 한 달에 오빠가 10번이고, 3달 하면 30번이고. 200석 규모면 6천 명은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초연이라서 인기 없으면 한 달 만에도 공연이 없어지기도 함.
└그러면 티켓 전쟁 각이네. 한 달 안에 애들 다 본다고 피 튀길 듯.
└왜 재미없다고 생각하냐? 오빠가 나오는 거면 재밌다고 마인드 콘트롤해!
-예매 실패하면 전문 뮤지컬 배우들이 하는 날짜라도 봐야겠다.
└난 주일에는 교회 가야 해서 못가기 때문에 평일 공연 볼 듯. 평일 날 공연보고 소원오빠 나온 거로 봤다고 세뇌해야지. ㅜㅠ
**
“소원아, 너 모레 시간 비워둬야 하는 거 알지?”
“네 시타형.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근 1년 8개월 만에 엔오원이 다 같이 모이는 날인데, 잘 기억하고 있죠. 대현 형이랑 같이 시간 비워 뒀습니다.”
“그래, 루이스랑 진율이는 강원도로 직접 가서 민호 형 나오는 거 환영해주고, 같이 서울로 온다고 하더라. 그리고, 서울에 오면 팬 미팅도 바로 같이하기로 했다고 하니깐 방송국 카메라도 아마 있을 거야.”
“에? 제대하는 날에 바로 팬 미팅을 한다고요?”
“그래, 민호 형 말년휴가 나왔을 때 말은 안 해도, 엄청 불안해 했거든.
프로듀스 99로 뽑히고서 1년 활동하고 바로 군대에 갔으니, 실제 활동 기간보다 군대에 있었던 기간이 더 길잖아. 그래서 벌써 엔오원의 김민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게 아닌지 걱정하더라.
회사에서도 그게 걱정되는지 바로 팬 미팅을 잡은 거고.”
“팬 미팅 규모는요?”
“밀레니엄 공연장에서 한다고 했으니 천명 정도 되려나.
무료 팬 미팅이긴 하지만, 이만큼 모인 것도 다행이야. 이젠 추억 속의 엔오원이지만, 우리 아직 안 죽었어. 하하하.”
전화 너머로 시타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좋은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시타형과의 통화 이후로 ‘고스트’ 배우팀을 불러 모았고, 엔오원의 팬클럽인 ‘퓨퓨’의 운영진들에게도 따로 연락을 했다.
**
“이야, 우리 소원이 사회 물 많이 먹었다고, 팬미팅에도 정장을 입고 오네.
시타나 대현이도 좀 배워라.”
두 달 전 휴가 때 봤을 때도 같은 말을 했던 민호 형은 예비군 마크 외에는 달라진 게 없는 군복 차림이었다.
“민호형, 이제 제대했는데, 군복 안 갈아입어요? 군복 입고 팬 미팅 할거에요?”
“그럼, 당연하지 나도 당장 벗고 싶은데, 일부러 입고 있는 거야.
팬 미팅에서 충성 경례 한번 해주고 벗어야지.
이때까지 기다려준 팬들을 위해서라도 충성 경례는 무조건 해줘야 하는 게 맞지. 그리고, 너희들이 커튼 들고 가려주면 내가 바로 사복으로 갈아입으마.
이런, 환복(換服) 이벤트라도 있어야지. 아, 팬들은 환복이란 말을 모르려나 하하하.”
민호 형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는 걸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팬 미팅 무대에 올라, 기다려준 팬들에게 경례를 하며 제대를 신고하자 눈물을 보이는 팬들도 있었고, 그런 팬들을 위해 엔오원 멤버들이 어깨 밑으로 가려주는 커튼 가림막을 들어주자, 진짜 팬미팅 무대에서 민호 형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커튼 밖으로 군복을 벗어서 던지는데, 살짝 보이는 맨살에 팬들이 반응했다.
“꺄! 오빠, 근육 멋져요!”
살짝살짝 보이는 어깨 근육에 팬들이 소리치자, 민호 형은 한술 더 떠서 상체를 대 놓고 보여주는 서비스도 해주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옷을 다 갈아입자 무대에서 큰절을 하며 기다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군에서 써온 편지도 읽어주고, 팬들이 써온 엽서도 읽으며 팬 미팅이 진행되었다.
“자 그럼, 다음 순서로 엔오원 멤버들의 축하 말이 있겠습니다.
돌아온 리더를 위한 특별한 사랑을 듬뿍 담아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막내인 윤소원 씨부터 부탁드립니다.”
미리 이야기된 장내 MC가 마이크를 나에게 넘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