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갈라쇼 (1).
“그래서 김 감독님과 김충익 과장님도 다 비상이야. 원효성 소속사에서는 대신할 수 있는 주연급 배우를 보내주겠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그 회사에서는 원효성 건으로 위약금 안 물려고 그렇게 이야길 하는 거네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출연계약이 깨지면 위약금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계약서상으로는 위약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쉽지가 않을 거야.
김충익 과장님께 들으니, 위약금 받아 내려면 원효성 소속사인 심팩토리와 법정 다툼을 해야 하는데, 이 바닥에서 평생 안 볼 사이도 아니다 보니 법적으로 강하게 나가기가 부담스러울 거야.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넓은 나라도 아니고, 좁은 뮤지컬 판에서 법적 다툼을 벌이면 둘 다 손해니깐.
그리고, 우리나라 법원은 상고하면 2~3년은 기본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도 문제고.”
“햐, 그놈 인성이 안 좋더니 이렇게 사고를 치네요.
그런데, 이렇게 초연 한달 전에 펑크내고 도망친 거 알려지면 처신 문제로 다른 공연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어 질 건데, 도대체 왜 안 나온다던가요?”
“그건 나도 모르지. 뭐, 우리가 알아서 기면서 대우를 안 해줘서 삐졌을 수도 있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가 너나 태수에게 밀려버리니깐 자신감이 떨어졌는지도 모르지.”
“근데, 성웅이 형 우리 배역 확정되었다고 보도자료는 아직 안 뿌렸죠?”
“안 뿌린 게 아니라 못 뿌린 거지. 투자자들에게 태수를 보여주고 설득이 되면 초연 보도자료를 뿌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갈라쇼 전에 똥을 싸고 도망간 걸 고마워해야 하려나. 어휴.”
“불행 중 다행이네요. 일단 저도 위에 좀 올라가 볼게요.”
**
“아니, 대신 보내주겠다는 배우도 없으면서 그게 말이 됩니까? 한 달 뒤에 보내준다는 말은 그냥 깨자는 말이지. 심팩토리 좋게 봤는데, 진짜 실망입니다.
그리고, 그쪽에선 원효성과 연락이 안 된다고 하지만, 연락 다 되는 거 압니다.
원효성이 보고 직접 와서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초연이 한 달도 안 남은 상황에서 무단 계약파기 한 걸 소문낼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회사 사무실에서는 김켈리 감독이 원효성의 소속사와 통화를 하며 씩씩거리고 있었고, 김충익 과장과 다른 직원들은 뭔갈 정리하고 있었다.
“일단, 비중 있는 조연 이상급으로 연기경력 있는 배우들 리스트입니다.
두 달 정도 다른 작업 계약 없는 사람들로 뽑았는데, 다시 섭외하고 하다 보면 한 달도 빠듯합니다.”
“원효성이 이 쌍놈, 위아래 모르고 성격 더러운 건 알았지만, 이렇게 경우 없이 뒤통수를 후려갈길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일단, 리스트에 있는 배우들 전화 다 돌려서 출연 가능성 타진해봐. 일정이 된다는 애들만 따로 한번 추려서 줘.”
“그럼, 갈라쇼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취소해야 할까요?”
“갈라쇼..그래..갈라쇼가 문제네. 일단 소원이와 태수 두 명으로 어떻게든 가보자. 원래 갈라쇼 자체도 실력검증을 위해서 준비한 것이니 그렇게 일단 가보자.
나머지 한 명은 새로 결정이 나면 그때 따로 자리를 만든다고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어. 별수가 없다. 휴.”
“아마도, 갑자기 나가버린 원효성과의 문제를 투자자들이 물고 늘어질 겁니다. 아예 갈라쇼 날짜를 미루거나 해서 새로운 배우가 충원되면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미 정해둔 홍보, 마케팅등 모든 게 다 어그러져 버려. 날짜를 미루어서 갈라쇼를 다시 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저, 감독님, 과장님 그냥 트리플 캐스팅으로 성웅이 형을 세우면 안 될까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도망친 원효성 대신에 성웅이 형을 올리는 게 어떨까 해서요.
만약 초연에 들어간 공연 기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원효성 대신에 누가 주연자리에 설 수 있을지를 고민해봤습니다.
아마도, 공연 기간 중이었다면 언더나 커버로 연습을 같이한 다른 앙상블들이 올라갔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된 언더나 커버로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 생각난 게 성웅이 형이었습니다.
30여 편의 뮤지컬 조연 경험과 선임배우로서 이미 ‘고스트’의 모든 넘버와 안무까지 다 알고 있으니 최적의 커버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주연으로 무대에 한 번도 선적이 없다는 약점이 있지만, 성웅이 형만큼 ‘진만’역에 어울리는 사람이 현재로써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웅이 형 정도의 역량이라면 갈라쇼에 같이 나가서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웅이라..괜찮은 카드이긴 한데, 문제는 성웅이가 주연으로 서려고 할까?”
내가 성웅이 형을 추천한다고 하니, 김켈리 감독의 반응이 이상했다.
보통 실력이 부족하면 감독이 안 된다고 하거나, 단점을 들어서 그 애는 불가라고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실력은 되지만, 본인이 나설지를 걱정하는 말투였다.
“소원이 너는 모르겠지만, 성웅이가 주연으로도 섰던 경험이 있어.
물론, 그 결과가 아주 안 좋았지. 아무 반응 없는 관객들의 차디찬 눈빛을 받으며 40분 넘는 공연을 하고 나서부터는 성웅이가 주연하겠다고 나서거나 오디션에 참여했던 적이 없어.”
“헉. 그런 일이 있었어요? 도대체 무슨 공연이었기에 관객들 반응이 안 좋아서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은 거예요?”
“록키 호러쇼.”
“아!”
김켈리 감독의 짧은 말을 듣고는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공연되는 유명한 뮤지컬 중에서 한국 뮤지컬 팬들의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공연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캣츠이고 나머지 하나가 록키 호러쇼였다.
캣츠의 경우에는 세계 4대 뮤지컬로 불리며 엄청난 명작이라고 평론가들이나 하드 한 뮤지컬 팬들이 작품에 경의를 표하지만, 캣츠의 원작 자체가 시(詩)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서사적인 부분이 강해서 일반 관객들의 평가는 좋지를 못했다.
계속, 무슨 고양이가 어떻고, 무슨 고양이는 뭘 하고 하는 소개만 잔뜩 하다 보니 유명한 그리자벨라의 ‘메모리즈’ 한곡을 듣기 위해 공연을 본다는 말이 뮤지컬 팬들 사이에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록키 호러쇼의 경우에는 원래 내용 자체가 황당한 스토리고 남자가 입은 가터벨트, 코르셋, 창부처럼 보이는 짙은 화장으로 인해 그 첫인상부터 호불호가 강했다.
그리고, 록키 호러쇼의 경우 큰 극장보단 중소형의 극장에서 공연이 이루어져서 음향이 좋지 못했는데, 이럴 경우 대사전달이 좋지 못하면 거의 90% 이상의 관객은 불쾌하게 집에 가기 일쑤였다.
배우의 입장에서는 록키 호러쇼가 자신의 연기 경험에 큰 발전을 주기에 좋아했지만,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제가 한번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쓸 수 있는 사람 중에서는 최고의 배우인 것은 확실하니깐요.”
**
“록키 호러쇼에 프랭크 퍼터 역으로 주연을 한번 해 봤었지. 커버로 급하게 주연으로 무대에 올랐었는데, 이일환 배우 알지? 그 사람 커버였어.”
성웅 형을 불러내서는 형의 첫 주연 일에 관해서 물어보고 원효성 대신 ‘진만’역으로 고스트 무대에 설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니 과거 이야기가 먼저 흘러나왔다.
“이일환 잘 알죠. 팬덤도 크고, 실력도 좋아서 지금은 남자 배우 TOP 5안에 드는 배우잖아요.”
“그래, 그 이일환이 3년 차일 때였어. 그때나 지금이나 잘나가는 배우들은 록키 호러쇼를 자신의 ‘스테이지 퍼포먼스’에 넣기 원하잖아.
문제는 그 전날 공연에서 넘어지며 발목 인대가 늘어나서 무대에 설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야. 보통은 더블, 트리플 캐스팅의 다른 배우들이 뛰어 주지만, 당시에는 더블 캐스팅이었고, 다른 주연배우는 일정이 안 되었던 거야.
그래서 커버로 급하게 내가 투입되었었어, 문제는 당일 오전에 커버로 내가 오른다고 알려져서 이일환의 팬들은 이일환을 본다고 기대를 안고 왔다가 듣보잡이었던 내가 올라오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겠지.
뭐, 그래서 그때 이후로 아예 주연배우 오디션 자체를 보지 않았어. 그렇다고 뮤지컬계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고.
계속, 언더나 커버를 하게 되면 다시 땜빵으로 주연배우를 대신해 무대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라서 이후로는 선임으로 후배들을 가르치는 역을 내가 맡은 거야.”
“그럼 형, 다시 무대에 주연으로 서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때의 그 기분 나쁜 무대를 만회하고 싶은 그런 생각요.”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무대에 서서 주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내며 찬사를 듣고, 관객의 박수를 받는 게 주연배우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지.
하지만, 무대에 홀로 서서 받아야 하는 관객들의 질시 어린 차가운 눈빛을 한번 겪어 봤기에 쉽게 무대에 주연으로 서는 걸 결정하지 못하겠다.”
늘 자신감 있게 연기 지도를 하며 믿음직스러웠던 성웅이 형이 패배자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안타까웠다.
나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팬덤이 없는 평범한 외모와 평범한 실력의 배우들은 대부분 처음 주연으로 서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성장통 같은 것이긴 했다.
싸게는 3만 원대 비싸게는 25만 원까지 뮤지컬 티켓을 구매해서 오는 관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배우가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지 검증되지 않은 신인배우나 커버 배우들이 무대에 서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백안시로 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실수를 해도 신인, 커버 배우들은 더 욕을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조연 때부터 자신만의 팬들을 만들기 위해 배우들이 따로 관객들에게 DM도 보내주고, 맞팔로우를 해주며 개인 팬 만들기를 하는 이유였다.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이나 주연으로 서게 되었을 때 그런 팬들이 와서 환호를 보내줘야 무대에 선 배우도 마음이 놓여서 준비했던 것들이 제대로 나올 수 있었다.
아이돌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콘서트나 뮤지컬을 할 때 비싼 티켓을 구매하고 와서 환호를 보내주는 이유였다.
우리 오빠 기 안 죽게 해주기 위해 관객석을 채워주고, 환호와 사랑을 보내서 준비한 걸 다 보여줄 수 있게 배려해 주는 거였다. 그게 아이돌의 티켓파워였다.
아마도, 성웅이 형은 이런 애정이 듬뿍 담긴 환호와 사랑을 받아서 마음이 안정되어야 주연으로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형, 일단 갈라쇼에는 서주세요. 원효성까지 3명이 함께 연습했던 갈라쇼 퍼포먼스에서 한 명이 없으면 갈라쇼 자체가 안 되잖아요.
갈라쇼만 어떻게든 되면, 공연 초연 때까지 다른 배우를 섭외할게요.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뮤지컬 넘버를 부르게 되는 태수를 위해서라도 갈라쇼에서 합을 좀 같이 맞춰 주세요.”
“그래, 갈라쇼는 그래도 다 관계자들이고 하니 안면이 있어서 괜찮겠지. 내 마음 편하자고 태수의 첫 공연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좀 그렇지.
알았다. 갈라쇼에는 우리 세 명이 서자.”
“네 형님 그럼 그렇게 진행하는 거로 이야기하고 올게요.”
다시 사무실에 올라가 성웅이 형이 갈라쇼에 원효성 대신에 나온다고 이야길 하자, 갈라쇼는 어떻게든 넘기게 되었다고 한숨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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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급작스레 출연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시내 호텔 연회실에서 연린 갈라쇼에 참석한 관계자들은 대부분 다 알고 있었지만, 마치 지금 들었다는 듯이 웅성웅성 거렸다.
“그래서 다들 아시는 김성웅 선임배우가 커버 배우로서 갈라쇼에 참여를 해주었습니다.”
“김성웅? 누구지?”
“그 김켈리 감독이 선임으로 데리고 다니는 배우 있잖아. 서른 살 좀 넘었는데 커버랑 언더 전문으로 하는 배우.”
“아, 누군지 알겠다. 만년 스윙 김성웅 맞지?”
“그럼 그 친구가 원효성 대타로 ‘진만’역을 맡는 거야?”
“모르지, 갈라쇼만 커버하는지 아니면 전체적인 공연에서 커버 배우로 다 마무리하는지 알 수 없지. 아, 불 꺼진다.”
연회실 앞 단상에 놓여 있는 의자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서태수가 뚜벅뚜벅 걸어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찬양하라 내 이름!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
양손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외치는 강한 인상에 다들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갈라쇼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도 없이, 그냥 성량을 다해 크게 외치는 한 소절의 노래에 투자자들은 압도되었다.
준비된 의자에 태수 형이 앉자 내가 앞으로 나가며 노래를 불렀다.
[검은 태양! 땀과 눈물, 영혼까지 모두 불태워라.
우린 그들의 검은 그림자. 족쇄를 차고, 등을 굽힌 채, 배에 실려 끌려왔지.
형제들의 비명소리여~!]
[우~~ 에요~~~ 우~~ 아~~~ 인간은 다 같아. 우리도 똑같아.]
성웅이 형이 내 뒤를 받치며, 저음으로 따라와 주었다.
“박 사장, 이 노래 인간은(Tous les homes) 이지?”
“그래, ‘아이언 마스크’의 루이왕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노예장의 노래라. 보통의 갈라쇼에서는 보기 힘든 조합인데.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의자에 앉아 있던 서태수가 일어나자 좌우로 나와 성웅이 형이 나란히 서서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슬을 끊어 증오를 떨쳐내
인간은 다 같아, 우리도 똑같아
우린,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을 뿐.
우~ 형제들아~ 우~ 자신을 봐~
우리 땅은 어디에 있나? 우린 그들의 검은 그림자
에오~ 우~ 등을 굽혀~ 삶을 굽혀~
인간은 다 같아, 우리도 똑같아~]
“의외인데, 난 원효성이 도망갔다고 하길래. 개판 날 거로 생각했는데 완전 반대인데.”
“그러게, 서태수가 완전 초짜라고 하더니, 아닌데, 목소리에 힘이 있고, 느낌이 있어. 어디서 저런 애를 잡아 온 거지?”
“김 감독이 원효성 없이도 갈라쇼 강행한다고 하길래 뭐지 싶었는데, 배짱 부릴 만한데. 얼굴이 좀 아쉽지만, 저 정도면 개성파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전달력이 있는 음색이네. 유니크해.”
“초짜인 서태수를 받쳐주는 윤소원과 김성웅이 잘하는 거야. 유니크한 목소리를 받쳐주면서 방해 없이 더 올라가게 만들어 주잖아.
김성웅이야 선임배우니깐 평균은 된다 치겠지만, 그와 비슷하게 받쳐주고 있는 윤소원은 기대 이상인데.
자기가 투자금 내고 주연으로 올라탔다고 하길래, 얼마나 실력이 없으면 자기 돈 올리고 하냐고 생각했는데, 이건 오히려 그 반대인데.”
“이 뮤지컬이 될 것 같으니깐 자기 돈까지 태워가면서 올라탄 거라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