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또다른 재능러. - 8권 시작
“좋은 뮤지컬 배우가 있다고 해서 경기도 오산까지 온 것까지는 이해하겠어. 그런데, 기껏 배우가 있다고 찾아온 곳이 구민 가곡대회야? 지금 장난해?”
“지금 김켈리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게 어떤 건지 압니다.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그런 생각이 잘못된 ‘오산’이라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진짜 이만한 뮤지컬 배우는 찾기 어려울 겁니다.”
“말장난도 하고, 여유는 있네. 내가 진짜 어휴!
실제 투자를 하기로 한 게 MSM이 아니라 레드샵이었다는 이야기를 안 들었다면, 지금이라도 욕을 한 바가지 하겠지만, 투자자에 대한 예의 때문에 참고 있다는 걸 알아둬.
저 구민대회에서 진짜 내가 만족할 만한 배우가 없으면 그 뒷감당도 고민해야 할 거야.”
지금 당장 짜증을 쏟아낼 것처럼 이야기하는 김켈리 교수의 말에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진짜 교수님의 마음에 딱 드는 배우일 겁니다. 아마, 나중엔 저에게 고맙다고 하실 겁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아, 남인철 실장님도 같이 바로 들어가시죠.
빨간 펀치 누나들을 알아보신 안목이면 바로 그 느낌이 오실 겁니다.”
“허허허. 우리 윤 사장님을 지켜봐 온 이래로 이런 확답을 하시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습니다. 이때까지와는 너무 다른데요.
확실히 기대해도 됩니까?”
“네. 기대해도 될 겁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내가 자신감을 내보이며 김 켈리 교수와 남인철에게 큰소리를 치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가곡대회에서 우승하는 서태수라는 23살의 남자가 미래에서 김켈리 교수가 연출했던 ‘웃는 남자’란 뮤지컬의 주연으로 활동하며 웬만한 뮤지컬 어워드의 상이란 상은 다 쓸어버리듯이 수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켈리 교수가 서태수를 캐스팅했던 일화는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고스트’와 여러 뮤지컬이 성공한 이후 인간극장이란 방송에 나와서 김 켈리 교수가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배우들 확인과 타 장르에 숨어있는 보석을 발견하기 위해 JTDC 가면싱어 시즌3을 보고 있었는데, 웬 고릴라 같이 생긴 시골 총각이 올라왔더라고요. 저도 그땐 선입견이란게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 목소리를 한번 듣고는 아~ 이런 목소리가 부르는 뮤지컬 넘버가 너무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무작정 JTDC 방송국으로 달려가서 연락처를 알아냈답니다.
그때가 밤 12시였어요. 호호호.
그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자다 일어난 태수에게 같이 일하고 싶다고 뮤지컬을 같이 하자고 하니깐, 절 미친 여자로 알더군요.
그리고, 지금 서태수 배우는 그 미친 여자와 함께 한국의 뮤지컬계를 이끌고 있습니다. 아주 웃기죠?’
그리고, 인간극장에서 서태수에 대해서 소개할 때 자신에게 노래라는 재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게, 바로 이 경기도 오산에서 했었던 구민 가곡대회라고 했었다.
그전까지는 기계공고와 전문대, 군대에서 노래는 좀 한다고 이야길 들었지만, 워낙에 외모를 중시하는 한국답게, 가수가 되거나 남들 앞에 나설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구민 가곡대회에서 대상을 타고, 진짜 자신이 노래를 잘하는지 궁금해서 JTDC 가면싱어에 출연을 한 것이었고, 그렇게 그의 인생이 달라졌었다.
“어서 오십시오. 연락은 받았지만, 정말로 유명하신 김 켈리 교수님이 이렇게 오실지는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여기 따로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매니저분께서는 죄송하지만, 저어~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구민대회였지만, 200석 규모의 구민회관에는 나름대로 대회장처럼 꾸며져 있었고, 내외빈을 위한 자리도 따로 있었다.
김켈리 교수는 지정석으로 갔고, 안경에 모자까지 쓴 나와 남인철 실장은 매니저로 오해받아 구석의 임시석에 앉아서 대회를 보게 되었다.
구청장의 환대에 김켈리 교수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지만, 출연자들이 한두 명씩 나오기 시작하고, 노래가 나오기 시작하자,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등이 굽기 시작하는 60대의 어르신이 상록수를 부르고, 가곡대회인데 밸리댄스를 추며 노래 부르는 부녀회 사람들이 나오자, 결국 전국노래자랑 같은 잔치판이 펼쳐졌다.
김켈리 교수가 나를 돌아보면서 주먹을 쥐며, 뭐라고 한 거 같은데 뭐라고 한지는 모르겠지만, 죽이겠다는 단어와 비슷하게 느껴지긴 했다.
“네, 반도보라아파트 부녀회의 화려한 무대였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보실 무대는 ‘선구자’를 부를 서태수씨입니다.”
한때는 독립의 열망을 담은 선구자란 의미로 자주 불렸던 가곡이었지만, 역사 바르게 알기로 곡을 만든 두 사람이 친일했고, 이 선구자란 의미 자체도 독립을 위한 독립의 선구자가 아닌, 친일을 위한 선구자라는 게 밝혀져서 요즘은 거의 부르는 사람이 없는 불운한 가곡이었다.
하지만, 음이 단순해서 그런지 여전히 가곡을 처음 부르는 사람들은 연습곡으로 많이 부르는 곡이었다.
“응? 진짜 서태수 맞나?”
사회자의 소개에 무대에 오르는 이는 내가 전생의 TV나 뮤지컬 무대, 포스터에서 익히 아는 그 얼굴이 아니었다.
진짜 김켈리 교수가 이야기했듯이 고릴라 같이 생긴 덩치 큰 시골 총각이 나왔는데, 왠지 어디서 본듯한 친근감이 가는 외모였다.
“윤 사장님. 저 친구 슬램덩크의 채치수 안 닮았습니까?”
남인철 실장의 말에 내 무릎을 쳤다.
“오~ 맞아요. 진짜 채치수 같은 얼굴인데요. 하하하.”
아마도, 내 기억의 서태수는 관리를 받아서 외모가 훈남으로 바뀐 서태수 였기에 지금의 채치수와는 너무 달라서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야, 저 곱슬머리를 스트레이트로 해서 2:8 가르마로 포마드를 올리고, 눈썹 정리하고 미백 관리받아야 내가 아는 서태수가 될 것 같구나.
뭐, 지금 저 상태라면 슬램덩크 뮤지컬 채치수로는 바로 캐스팅될 수는 있겠다.’
남인철 실장과 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시각적인 부분에 큰 의미를 두기에 서태수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는 대부분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이~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이 평범하고 단순한 가곡이 구민회관에 울려 퍼지자, 나는 물론이고 방금까지 흥겹게 밸리댄스를 즐기며 흥이 남아 있던 동네 어르신들까지도 노래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짧은 노래였지만, 구분상 3절까지 있는 노래였는데, 노래가 끝이 나서도 다들 이 가곡에 녹여있는 감성에 다들 눌려진 것인지 조용했다.
“짝.짝.짝.” “와아! 멋지다! 짝짝짝”
뒤늦게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그제야 다들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물론, 서태수의 뒤를 이어 나온 다른 출연자들의 노래에 그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
“자! 그럼, 오늘의 대상을 발표하겠습니다.
특별히, 대상의 수여는 국민 음악감독으로 이름 높으신 김켈리 감독님과 구청장님이 수여해주시겠습니다.
그럼! 영예의 대상은...아 이분이군요.
선구자를 부른 참가번호 4번 서태수씨 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디 있나요? 네 어서 앞으로 나오세요. 어서요. 축하드립니다!”
사회자의 독려에 큰 덩치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앞으로 나오는데, 저 모습이 진짜 내가 알던 서태수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무대 밑에서 상을 받고 하는 걸 보니 김 켈리 교수가 뭐라고 귓말을 하는 거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감독님 어때요? 보석을 하나 주운 거 같지 않습니까? 경기도 오산까지 오시길 잘한 거 같지 않습니까?”
무대에서 내려온 김켈리 감독에게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이야길 했다.
“가사의 행간을 파악하는 능력이나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무게감 있는 음성, 감정에 집중시키는 호소력 짙은 음색...진짜 보석을 주운 것 같아.
진짜 천부적인 재능이야. 아까 물어보니, 음악 교육을 아예 받아본 적도 없다고 하는데, 내가 이제껏 천재니 영재니 하는 많은 배우 지망생들을 봐왔지만, 이런 재능은 또 처음 본다. 진짜 타고 났어.
빨리 이 애를 가르쳐서 무대에 올려보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애였어. 그런데, 이 애를 윤사장은 어떻게 안 거지?”
어느새 김켈리 감독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윤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아, 그건 제가 레드샵을 차릴 때, 주위에 혹시 재능있는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렇게 추천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도 영상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저도 놀랄 수밖에 없는 목소리네요.
그리고, 다행스럽네요. 김켈리 교수님이 이렇게 좋아하시니, 잘된 거 같네요.”
“그거야말로, 경기도 오산이지. 일단 저 애와 계약을 해야 하는 거지.”
“이미 남인철 실장님을 뒤로 보냈습니다. 남인철 실장도 대어를 낚았다고 먼저 뛰어가시더군요.”
“아냐, 우리도 가보지.”
**
“진짜, 가수로 계약하자는 거 맞나요?”
짧은 스포츠머리에 부리부리한 눈을 흘기며 보는 서태수의 눈에는 강한 불신이 내비치고 있었다.
“진짜입니다. 설마, 계약을 하게 될지 몰라서 계약서나 캐스팅 안내서 같은 걸 들고 오진 못했지만, 그쪽 아니 서태수씨와 정식으로 매니지먼트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진짜 제가 노래 잘 부르는 게 맞나요?
다른 노래를 부르는 것도 들어보지도 않고, 가곡 한 곡만 들어보고 이렇게 계약을 하자고 하는 게 왠지 사짜 같아요. 더구나, 서울도 아니고, 이런 작은 대회까지 스카우트가 온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고요.”
“감동을 줄수 있는 노래 한 곡이면 충분합니다. 서태수씨의 노래에는 삶의 무게감이랄까, 한국인의 한(恨)의 정서랄까 그런 감정이 담겨져 있는 목소리입니다.
쉽게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매니지먼트 계약을 믿지 못하시니,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남인철 실장은 MSM 엔터의 하부 레이블인 레드샵에서 왔고 매니지먼트를 맺고 싶다고 했음에도 사기꾼으로 자기를 보는 서태수를 설득하기 위해 핸드폰에 저장된 가수들과 같이 찍은 사진들을 일일이 보여줬다.
“이게 더 사기꾼 냄새 같은데요. 유명인에 기대어 자신의 신분을 포장하는 거 아닙니까?
대통령 통치 자금 세탁한다고 전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 보여주는 사기꾼이랑 같잖아요.”
남인철은 서태수의 말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터넷에 보니깐 김켈리 감독님은 켈리네 라는 회사이고, 그쪽은 명함에 레드샵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분명 같은 회사도 아닌데, 김켈리 감독님과 같이 왔다고 하니 못 믿겠어요. 김 켈리감독님 불러주세요. 확인해 보게.”
“그건 믿어도 될거 같아요. 진짜 같이 왔으니깐요.”
“아~ 감독님!”
나와 김켈리 감독이 무대 뒤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둘의 곁으로 가자, 서태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아까 무대에서는 정말 생각도 못 해서 제대로 악수도 못 했습니다. 영광입니다. 감독님. 저기 사인 아니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서태수의 말에 내가 핸드폰을 받아서 사진을 찍어줬다.
“이야 감사합니다. 감독님 잠시만요. 아까 김켈리 감독님께 상 받았다고 하니깐 가족들이 김켈리 감독님이 여기에 왜 오냐고 도저히 안 믿길래, 사진 좀 보내고요.”
“아니, 아까는 내가 사진 보여주니깐 사짜라고 안 믿는다며?”
“아아, 그건 신뢰가 다르잖아요.”
“그러면, 저랑도 사진 한 장 찍으시죠.”
내가 모자와 안경을 벗고 얼굴을 보여줬다.
“응? 누구시죠?”
“햐하하 소원아 너 더 열심히 활동해야 되겠다.”
윤 사장에서 다시 소원이로 호칭이 격하되며 옆에서 김켈리 교수는 웃기 바빴다.
“소원이면? 헉 설마 ‘늦은밤에’ 부른 윤소원?”
“네, YAM의 윤소원입니다. 오늘 선구자 노래 잘 들었습니다.
오늘 이 대회에 김켈리 감독님을 모시고 온 게 저입니다. 서태수씨와 계약을 하고, 그 첫 활동으로 김켈리 감독님이 하는 뮤지컬에 같이 했으면 합니다.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