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성인의 무게. - 7권 시작.
“엄마! 나 약속 있어서 나가요. 이제 애들이 다들 술 먹어도 된다고 술 한잔하재요.”
“그래, 오랜만에 부산 왔으니 친구들이랑 만나야지.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너무 눈에 띄면 안 되다 보니 대충 눈에 안 띄게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고 방에서 나왔는데 거실에서 티비를 보던 동생이 뛰어왔다.
“오빠 그렇게 츄리닝 입고 나가는 거야? 머리도 안 감고 모자 쓰고?”
“어 왜?”
“진짜 오빠 자각이 없네. 자 삼단논법으로 생각해봐.
오랜만에 부산에 온 스타가 된 친구와 만나는 자리야. 친구들은 오랜만에 봐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을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인터넷에 사진 올라갈지도 모르니 옷 챙겨 입고 나가라고?”
“그래, 너무 눈에 띄는 옷이면 안 되니 시선 안 끌게 운동복에 모자 쓴다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니까. 적당하게 꾸민 듯 안 꾸민 듯 입고 나가야 해. 일단 사진이 올라가면 무조건 욕은 달리게 되어 있어.
편하게 입으면 편하게 입었다고 욕먹고, 꾸미고 나가도 친구들 만나는데 꾸미고 나왔다고 욕먹을 거야.
이왕 들을 욕이면 조금이라도 꾸미고 나가.”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어.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건 불가능하거든. 어디나 불편한 사람이 있어서 욕을 달아 줄 거야. 그러니 운동복 대신 청바지 입고, 가장 20살 답게 입고가. 그래야 적당해.”
지혜의 말을 듣고 보니 눈에 안 띄려고 모자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려던 생각을 버리고 청바지에 셔츠, 패딩으로 갈아 입고 나왔다.
“그리고, 오빠. 술은 딱 한 잔만 해. 술이 사람을 실수하게 만들어. 연예인은 실수하면 끝인거 알지?
면허도 없고 차도 없으니 음주운전은 안 하겠지만, 혹시라도 음주 운전자 옆에도 절대 타지말고, 술을 억지로 먹었으면 바로 집으로 전화하곤 걸어오고. 알았지? 그리고 술은....”
“어어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만해.”
방문 입구에서 지켜보는 엄마보다 동생인 지혜가 더 술먹고 하면 안되는 일에 대해서 잔소리를 쏟아내며 강조했다.
지혜의 입을 다물게 하기위해 지갑에서 오만원 짜리 두장을 꺼내어 줬다.
“네, 오빠님아! 재미있게 놀고 오십시오~! 헤헷”
목적이 이거였던 듯, 돈을 받더니 바로 나에게 큰절을 하며 다녀오라고 했다.
“이걸로 숙취해소제를 사두고 상시 대기하겠습니다. 오늘도 저희 부산집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더니, 10만 원에 잔소리꾼이 바로 아첨꾼이 되었다.
**
애들이랑은 아파트 상가 건물에 있는 갈비집에서 보기로 했는데, 그냥 걸어서 가 도 되는 거리였다. 길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있어도 팬이라고 따라붙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눈에 안 띄게 옷 입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야, 소원이 왔다. 이야~ 역시 연예인 포스~ 형광등 100개같은 후광이 있는거 같은데.”
각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있는 고기집에서 경태가 날 보고 지르는 경박한 말투를 들으니 진짜 친구들과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이제 미영이만 오면 되는 거야? 일단 고기부터 굽자.”
보통 20살이 되었을때 술을 먹자고 하면 호프집이나 포차 같은 집으로 가는데, 갈비집에서 20살들이 술을 먹자고 모였으니 엉뚱하면서 재미있었다.
“일반 술집에서 술 먹으면 소원이랑 애린이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어서 갈비집으로 온거니깐, 다들 궁시렁 대지말고 먹어!”
겉으로는 힙합을 한다고 껄렁해 보이는 경태 였지만, 이런걸 보면 확실히 생각이 깊었고, 배려심이 있는 녀석이었다.
동창회라고 했지만, 실제 중학교 동창은 경태, 진욱, 애린, 나까지 4명이었고, 미영이는 고등학교 친구였다.
애린이는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고, 미영이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사실 엄밀히 말하면 동창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연예인을 목표로 뭉쳐서 만났기에 그냥 동창이라고 뭉뚱그려 이야길 했다.
그리고, 늦게 온 미영이는 연예인인 애린이 보다도 더 화려하게 꾸미고 왔는데, 가죽 미니스커트에 타이트한 브라우스로 몸매가 부각되었다. 킬힐 구두에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퍼(fur)코트까지 입고 있으니 연예인 저리 가라였다. 더불어, 진한 화장때문인지 20살로 보이지 않고 농염한 여성미가 흘렀다.
“이야, 이거 무대 의상 아니야? 고기 먹고 바로 방송가는 거야?”
“빠숀이 어마어마한데! 너 가슴에 뽕도 너무 큰거 넣었네. 그 정도면 사기아니냐?”
다들 짓궂게 미영이를 놀렸지만, 미영이는 당당했다. 그리고, 예전에 수술을 한다고 하더니 눈 모양은 물론이고 미묘하게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나중에 고기 먹고 단체 사진 찍어 올릴 때, 도대체 이 예쁜 미녀는 누구냐고 화제 될 수도 있잖아! 그러다 데뷔 할수도 있는거고.”
“야! 꿈도 야무지다! 야무져! 우우~!”
미영이는 확실히 이뻐졌지만, 친구 사이에는 역시 서로서로, 까고 디스하는 재미가 있었다.
고기를 먹으며 다들 근황을 묻고, 이야길 하는데 역시나 나이가 나이다 보니 진로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난 군대나 가려고, 의경으로 입영 신청했어. 힘들게 들어간 힙합씬 회사에서는 제대로 지원해주는 것도 없고, 프로듀스99가 끝나고 5개월 정도는 그래도 불러주는곳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것도 없어. 뭘 하려고 해도 어쩔수가 없더라.
그래서, 일단 군대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경태는 그래도 래퍼로 끝까지 승부하기 위해 음악의 길은 포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너희들처럼 프로듀스108에 나가보려고. 이번에는 여자편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원서를 냈어.”
“에? 진짜?”
미영이의 말에 다들 놀랬다.
“너 실용음악과 간다고 안 했냐?”
“대학교는 당연히 가지. 그런데, 소원이랑 너희들 보니깐 기획사를 통하는 것보다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좀 더 좋은 방법같아서 나도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가려고. 프로듀스는 소속사가 없어도 다 받아 주잖아. 지금처럼 아이돌 포화상태에 소규모 기획사가 많은 시기에는 정석적인 방법 보다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데뷔하는게 가장 빠른 방법 같아.”
학교나 기획사 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걸 더 크게 생각하는 미영이의 말을 들으니 걱정이 되었다.
내가 데뷔한 프로듀스99 이후 만들어졌던 공중파의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들과 케이블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만들어낸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끈임없이 오디션 방송은 만들어 졌다. 방송자체의 콘텐츠와 방송이후 만들어지는 아이돌 그룹의 편성, 출연, 운영에 방송사의 입김을 넣을수도 있었고, 일단 뜨기만 하면 방송국에까지 큰 이득이 돌아오다 보니, 성공할수 있는 가능성이 적어도 계속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만들어 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생에서 시즌 6까지 만들어지며 승승장구했던 프로듀서 시리즈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미영이의 판단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는 말은 그만큼 인재들이 몰린다는 말이었고, 대형기획사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할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기회를 잡아 미영이가 데뷔를 하거나, 지명도를 얻어서 데뷔까지 이어진다면 좋을 테지만, 내가 기억하는 시즌 6까지에서 소속사 없이 나와서 데뷔를 했던 케이스가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레드샵에 연습생으로 받기에는 친구 사이라 애매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뜨고 싶다는 야망이 있었던 애라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프로듀스99로 데뷔를 할 수 있게 해주었던 변환점을 만들어준 친구라 그냥 모른척 하기에는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난 그냥 모델 쪽으로 가려고. 아이돌은 포기했다. 프듀 나가보니 재능있는 애들이 너무 많아. 그냥 내 장점인 큰키로 할수 있는 일 하련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진욱이는 아이돌에 대한 꿈을 접었는지 전생과 같은 모델로 진로를 잡은 것 같았다.
어쩌면 전생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유일한 친구였다.
“애린이는 기사 보니깐 대학교 안 간다고 했다던데 왜? 연예인 수시전형 있잖아?”
“응. 사실 고등학생 때도 활동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못갔는데, 대학교 간다고 해서 과연 내가 제대로 학교를 다닐수 있을까 생각해보니깐, 제대로 못갈봐에는 안가는게 맞을 것 같아서.”
“왜? 연예인 수시전형으로 연영과나 실용음악과 쉽게 갈 수 있잖아? 일단 간판을 따는게 좋을 것 같은데, 학연도 무시 못하고. 관련학과로 가면 그래도 조금은 도움될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가게 되면 진짜 그 과로 가고 싶어 했던 일반 수험생 한명이 떨어져야 하는거잖아.
연영과나 실용음악과가 미달인것도 아니고, 결국 경쟁률이 있는데 내가 연예인 전형으로 대학을 가면 다른 한명이 목표한걸 못하게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학교도 제대로 못나가는 내가 대학교를 가는게 좀 아닌 것 같더라고. 나중에 진짜 학교다닐 여건이 되면 그때나 가면되지 뭐.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 팀 언니들도 몇 명 빼고는 아예 대학교를 안갔어.”
“이야, 애린이 인성이 되었네. 이제 1위만 찍으면 된다. 넌 성공 할거야!”
경태와 진욱이가 애린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연예인 전형이나 마찬가지인 수시로 연영과 간 내가 양아치구나. 흑흑”
“아..아니. 아니야. 넌 남자잖아. 군대 때문에 연기하는 거니깐 어쩔수가 없지. 난 대학교를 안가도 손해를 안보는데, 넌 대학교를 안가면 군대를 가야 하니깐 어쩔수 없는거지.”
“그래도 네 말 들으니깐 뭔가 미안함이 생긴다야. 학교 열심히 다녀야겠다.”
애린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티비에서 마냥 애로 보이던 애린이가 이렇게 속이 깊은 친구였다는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생각해서 친구들도 20살이라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거나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들 본인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고 어떻게 삶을 만들어 가야 할지 고뇌를 하고 있었다.
아니, 모두가 그렇게 사는데, 과거의 쓰레기였던 내가 인생을 막살았던 것 같았다. 이제라도 그걸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지금만 봐도 5명이서 동창회 겸 술을 먹자고 모였지만, 소주 1병으로 한 잔씩만 하며 과음이라는걸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물론이고 경태, 진욱이도 담배조차 피지 않으니, 이런 건전한 모임이 또 없었다.
이런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게 축복이었다.
고기를 다 먹고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서는 인스타에 올렸다. 다들 나와 애린이와 모임을 했다는걸 자랑하고 싶어 했다.
집이 다 해운대 아파트 단지에 있어서 추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애린이와 미영이를 집까지 배웅해서 보내주고, 모두 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애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뭔가 덩치가 커지고, 겉모습만 어른이 된 철없는 애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다들 성인으로서 삶이 가지는 사회적 무게를 지고 있었다.
나만 성장한 게 아니라, 기억 속의 친구들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나이에 맞게 다들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이고~ 우리 오빠님아~ 이제 오셨습니까~ 친구들 만났는데, 계산은 오빠님아가 하셨습니까요?”
집에 들어오니 지혜가 페브리즈를 뿌려주며, 옷을 받아주고 신발을 정리했다.
“어흠 그래, 당연하지. 애들 다 학생인데, 돈 버는 내가 쏴야지.
그런데, 우리 윤지혜 비서는 이제 고2인데, 진학상담은 했습니까? 직업고는 2학년때 전공을 정한다는데, 전공은 뭐입니까?”
“말투 재미없다. 나, 웹전공이야. 진짜 기레기 될 거라니깐.”
아주 당당하게 기레기가 될 거라고 확신에 찬 이야길 하는 지혜를 보니 철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철이 너무 든거 같기도 해서 난처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었듯이 일정 분야에서는 확실히 조언을 얻을만 했다.
“그럼, 너 내 친구 미영이 알지?”
“응 그 언니 알지. 눈하고 안면윤곽해서 엄청 이뻐졌던데. 그런데 왜?”
“네가 보기엔 어때? 이번에 여자 편 프로듀스108에 나간다고 하는데.”
“음. 오빠 친구로서 이야길 듣길 원하는 거야? 아님, 아이돌 연습생을 보는 회사의 입장을 원하는 거야? 그것도 아님, 투표하는 국민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답을 원하는 거야?”
“셋 다.”
“삐삑! 추가 DLC(Downloadable content)를 구매 해야 되는 답변입니다.”
“아씨! 진짜 기레기네.”
투덜거리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지혜에게 DLC 값이라고 오만원을 줘여줬다.
“뭐, DLC 값이니 이걸로 되겠네. 후훗. 일단, 미영 언니는 생각을 다 바꾸어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