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조율? 벨런스?
유영찬 이사는 편하게 협업의 결과에 따라 MSM의 프로듀싱이 달라질 거라고 단순히 이야길 했지만, 듣는 내 입장에서는 피부에 와 닿는 의미나 무게가 확연히 다르게 다가왔다.
25년의 역사를 가진 것은 둘째 치고, 90년대 한류라는 말을 외국에서 만들어 쓰게 했던 MSM의 간판 프로듀서가 자신의 음악적인 방향을 결과에 따라 바꾸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소원이에게도 기대하지만, 같이 레드샵을 결성해서 노래를 만드는 성대현과 빨간 펀치도 기대를 하고 있어.”
앉아 있는 나와 이나영 팀장의 어깨를 잘하라는 듯이 두드려 주곤 유영찬이사는 전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나도 그렇지만, 신인팀 이나영 팀장의 얼굴에도 부담감이란 것이 내려앉았다.
“방금 유영찬 이사의 말이 너에게 하는 이야기였지만, 나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네.
신인팀의 멤버선발은 내가 하지만, 최종선발 결정은 본부장님이나 유 이사님이 결정을 해. 하지만, 최대한 내 의견을 반영해서 최종 멤버를 결정해.
한데, 나에겐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너에게 은채나 수나를 합류시키는 걸 알아서 해라고 했다는 건, 이번에 네가 하는 걸 봐서 아예 신인팀의 운영도 너에게 맡기겠다는 이야기야.
내가 선발했던 NTC321 애들 중에서 예능이나 다른 부분에서 아무도 뜨질 못했으니 문책성이라고 봐야겠지. 휴.”
문책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갑자기 41살의 이나영 팀장 얼굴이 회의 전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게 어두워졌다.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멤버들 최종 결정은 본부장님이나 유영찬 이사님이 하신다면서요?
그럼, 책임도 당연히 최종 결정권자가 지는 게 맞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팀장님 기운 내세요. 이번에는 대박 칩시다요. 홧팅!”
“그래! 15년 근속이 몇 없으니 잘리지는 않겠지.
소원이 너도 알겠지만, 몇몇 실력 있다는 프로듀서들이 우리 간판 아이돌을 프로듀싱해준적은 많아. 하지만, 늘 건 바이 건으로 작업을 하곤 끝났어.
제대로 회사에 뿌리를 내리고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업계 최고 조건을 제시해도 MSM에 남아 있지 않아.
프로듀서도 MSM의 그늘에 소속되어 있다면,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 행동을 하지 못하게 통제에 따라야 하거든.
완벽한 관리와 우월성을 추구하는 MSM 특유의 기업문화 때문에 소속 프로듀서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규율을 지켜달라고 계약조건에 넣어.
대부분의 프로듀서들이 자유분방하다 보니 그런 걸 못 참고 떠나는 거야.”
“회장님의 아이돌 론이 그렇다 보니 바꾸지도 못하는 거군요.
거기에 아마도 저처럼 어릴 때부터 MSM을 동경해서 회사에 남은 프로듀서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몇 년 동안 음원 저작권료 1위를 찍었던 유영찬 이사님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을 테고요.”
“그렇지. 어릴 때 동경해오던 음악을 만든 사람이다 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알게 모르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유영찬 이사님은 어떻게 평가할까? MSM과 다른 스타일의 음악이 만들어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머리에 심어 지는 거지.
거기다, 유 이사님의 제자들도 있다 보니 프로듀서끼리도 부침이 있었겠고.”
“자기 검열에 프로듀서 팀들 간에도 눈치를 봐야 하는 거네요. 그래서 더 조심하다 보니, 제대로 히트치는 음악이 나오지 않았을 테고, 성과가 없다 보니 MSM에 남고 싶어도 프로듀서 팀에 눈치가 보여 결국은 MSM을 떠났을 테죠.”
“맞아. 그래서 너란 존재가 참 특별한 거야.
기존에도 아이돌로 데뷔를 해서 프로듀서로 전향을 하려고 했던 케이스는 있었어. 하지만, 결과는 알지?”
“네. 다들 대중성과는 좀 거리가 있는 자작곡에 프로듀싱이었죠. 아마도, 어릴 때부터 유영찬 이사님의 작업을 보고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을 불렀기에 유영찬 이사님을 뛰어넘지 못했던 거겠죠.
거기다, 정식 제자는 안되고 방계 제자 같은 그런 위치였을 테죠.
재능이라는 게 더 있었다면 뛰어넘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은 좀 아쉽죠.”
“그래서 우리들은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유 이사님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MSM에 알아서 들어왔고, 자작곡과 프로듀싱으로 이미 성공한 결과를 보여 주었기에 새로운 물결을 네가 만들어 낼 거라 기대하고 있어. 물론,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지만, SGY기획 예룡이 자작한 곡으로 빅턴팀이 대박을 치고, 자작곡으로 낸 솔로 앨범이 차트를 요동치게 하는 걸 볼 때면, 파벌이 다르더라도 다들 한마음으로 우리 MSM에서도 아이돌 출신 히트 프로듀서가 나오길 빌고 있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거에요. 그냥 기대 없이 봐주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오래된 회사이니만큼 유영찬 이사님 밑에서 큰 성골, 진골을 따지는 사람들과 다른 회사 합병으로 인해 만들어진 저희 같은 방계파벌도 있으니 모두 다 같은 마음일 수는 없겠죠.
연습생들만 해도 지방파, 수도파로 나누어져 있으니...어디엔들 그런 반대되는 사람이 없겠어요?
어휴. 그러고 보니 회사에 다양성이란 게 가득 있으니 여러 음악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은 준비되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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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이 형도 이번 앨범 제작에 참여하시는 거예요? 형도 작사, 작곡하는지 몰랐어요. 숨어있는 고수였던 거에요?”
“아니, 고수는 무슨. 다룰 수 있는 악기도 하나 없어. 견학 겸해서 그냥 온 거야. 나도 앨범에 참여는 하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수박 겉핥기라도 어떻게 곡이 만들어지는지를 한번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오~ 견학 한 번 하고 제일이형 각성하는 거 아닙니까?
잠자고 있던 재능이 대폭발해서, 순식간에 히트곡 메이커 되는 거 아닙니까? 닉네임도 ‘천하제일’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처..천하제일? 흐흐 듣기만 해도 좋네.”
내가 띄어 주는 이야기 한마디에 진짜 ‘천하제일’이란 닉네임을 쓰는 제작자가 된 것을 상상하는지 제일이 형이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일단 협업에 대한 기준이 없으니 투트랙으로 일단 가보면서 정답을 찾아보자.
먼저, 기존의 MSM소속 작사가들이 적은 가사에 레드샵에서 곡을 붙이는 형태로 가고.
그 반대로 레드샵에서 준비해온 가사에 우리가 곡을 붙이는 것으로 2곡을 만들어 보자.
이후 다시 편곡을 반대로 줘서 고쳐보는 거로 하지. 자 시작해 볼까!”
평상시와는 다르게 편한 트레이닝복에 야구모자를 쓰고 나타난 유영찬 이사는 이제껏 MSM의 노래를 만들어온 기존의 프로듀서들과 같이 나타났는데, 다들 유영찬 이사의 제자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유영찬 이사와 4명의 프로듀서가 들어와선 약간의 대결 구도 같은 작업방식을 제시했는데, 다분히 의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유영찬 이사와 그 밑에서 큰 4명의 프로듀서는 회사 내에서 속칭 성골(聖骨)로 불리는 사람들이었고, 데뷔 20년이 넘은 ‘SHOT’ 출신으로 이사로 이름이 올라있는 ‘강현’이나 슈퍼키즈의 ‘예찬’같은 경우에는 진골(眞骨)로 MSM스튜디오 파트에서 불렸다.
그리고, PLUS나 우리 레드샵처럼 인수되어 하위 레이블이 된 회사 출신들은 방계나 육두품으로 스튜디오에서 지칭 되었다.
뭐,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이기에, 회사가 상장되고 커지면 커질수록 구성원들 간의 이런 파벌 형성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나 공자님의 제자들도 파벌이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파벌문제는 인간의 본성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런 파벌 간의 경쟁이 서로를 자극해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에 파벌이란 게 부정적인 것만은 또 아니었다.
서로가 자극되는 결과물이 나온다면 절치부심(切齒腐心)해서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서로 경쟁을 했을 테고, 그 결과 회사와 개인에게도 이득이 돌아왔을 터였다.
물론, 파벌 간은 ‘경쟁’에서 끝이 나야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다.
경쟁을 넘어서 파벌 간 싸움이 되어 버리면 오히려 구성원들을 서로 갉아 먹는 괴물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파벌이었다.
그리고, MSM에 닥친 위기의 원인에 이 파벌문제도 어느 정도는 관여되어 있을 것 같았다.
유영찬 이사가 우리에게 건넨 가사를 보니 노래 가사가 사랑과 관련된 발라드의 느낌이 나는 가사였다.
“노래 제목이 ‘네가 알아주길?’ 완전 발라드 가사인데, 이거 개사해도 되는 거지?”
대현 형이 가사를 주고 다른 작업 공간으로 옮겨간 유영찬 이사의 눈치를 본다는 듯이 기웃거리며 이야길 했다.
“되겠죠. 일단 곡을 한번 붙여보고, 안 맞는 부분이 있으면 개사해 보죠. 가사 설명도 있네요. 전 앨범의 히트곡인 줄리엣의 뒤를 잊는 곡으로 가사를 만들었으며, 줄리엣과 헤어진 로미오가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가사다.”
“소원아 제목 위에 설명 이거..설마 너 회사에서 연...”
빨간 펀치의 원희 누나가 가사 설명글을 보고 내게 질문을 하려다 옆에 제일이 형이 있다는 걸 알고는 급히 입을 다물고 눈치를 봤다.
“아, 아마도 연말 가요축제에서 우리 YAM의 줄리엣과 영시스터의 로미오 합동 무대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아마, 그래서 회사에서는 이렇게 헤어지는 노래를 미리 만들어서 우리 YAM이랑 영시스터 애들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겠죠.”
나도 제일이 형 눈치를 보며 급하게 말을 돌렸다.
분명히 은채와 만날 때는 성당 안에 들어오기 전까진 아예 손도 안 잡았고, 성당 안이나,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담으로 둘러싸인 청년회 건물 앞에서 꽁냥거렸기에 이게 노출될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게 있었다. 그래서 원희 누나 말대로 진짜 회사에서 이런 가사로 연애에 대한 경고를 미리 주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도 사랑의 추억으로 남기고 그런 나를 여자 쪽에서 알아봐 주길 원하는 좀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그런 부탁 조의 노래네. 이런식으로 가사를 적어야 하는거야?”
대현 형과 빨간펀치 누나들과 눈빛을 주고받는데, 다행히 제일이 형은 가사를 본다고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짜릿한 스릴감도 있었지만, 죄지은 것도 아닌데, 숨겨야 하는 이런 상황이 짜증이 났다.
“자, 집중하고. 가사는 완전 발라드의 가사이지만, 요즘 발라드 노래로 차트 1위 한 건 우리가 만들었던 OST ‘빛처럼 너에게 가겠다’ 밖에 없어.
그것도 OST라서 드라마의 지원사격과 ‘빨간 펀치’ 인 채연이와 원희의 애절한 목소리로 감동을 실어서 불러냈기에 가능한 거였어.
하지만, 남정네 12명이 한 파트씩 잘라서 불러서는 그런 감동을 주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 3분 30초 언저리에 12명이다 보니 제대로 후렴 부를 넣을 수도 없을 거야.”
대현 형의 냉철한 분석에 테이블에 둘러앉은 5명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가사가 발라드에 맞는 슬픈 가사라도 미디엄 템포로 가야 해. 일단 장르는 뉴잭 스윙장르로 가자. 그게 안 된다고 하면 락 발라드로 가야 해. 완전 정통 발라드는 절대 안 돼!
일단 소원이 네가 생각하는 리듬으로 한번 불러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