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상상력.
한국에서는 동물 영화라면 대부분이 개와 관련된 영화이고 가끔 사건의 키(Key) 역할로 고양이 같은 동물이 가끔 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말(馬)이 나오는 영화로는 각설탕이 거의 유일무이했고, 주연배우인 임수진의 여우주연상으로 인해 공중파에서도 가끔 거론되는 영화로 인간과 동물의 감동을 다룬 드라마이다 보니 연기 감정의 폭도 크게 튀지 않는 낮은 감정의 연기가 주였다.
지정연기 대본을 받아서 보고 있으니 연기 선생님인 김영민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심사를 보는 4~5명의 교수는 하루에 작게는 30명, 많게는 100명까지도 연기실기를 봐야 해.
사실 20명 넘어가면 오늘 연기심사 했던 학생들을 아예 기억도 못하는 게 현실이야. 그러다 보니, 실기 시험은 어느 정도 연기의 틀이 정해져 있어.”
“틀이라면 가이드 라인이 있는 건가요?”
“가이드 라인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보통 자유 연기에서는 최대한 감정선을 큰 폭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격앙된 연기로 인상에 남는 연기를 해라는 것 정도야.
인원이 많다 보니 격앙된 연기를 하는 게 기억에 남게 되거든.
그런 의도를 심사 보는 교수들도 다 알다 보니 일부러 지정연기에서는 완전히 그 반대되는 감정의 폭이 작은 잔잔한 드라마의 대본을 줘.
10분 내외의 연기에서 격앙된 연기와 감정이 절제된 연기를 왔다 갔다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짜는 거지.
그게 어느정도 정해진 틀이야.
남자와 비교하면 감정이 쉽게 변하는 여학생들은 이 10분 내외의 연기에서 눈물을 흘리다가도 금세 웃으며 감정이 절제된 연기를 할 수 있어.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연기자는 눈물을 흘릴 정도의 감정이 격해지는 연기를 한 이후에 바로 감정을 절제하는 연기를 하기가 힘들어.
한번 올린 감정을 쉽게 가라앉히기 힘들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어떻게 하긴? 연기의 옷을 잽싸게 갈아입어야지. 격한 감정의 옷을 입었다가, 바로 절제된 감정의 옷으로 갈아입어야지.”
“으...연기를 그렇게 쉽고 빠르게 어떻게 변경을 해요. 이제 연기의 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그렇게 감정을 쉽게 바꿀 수가 없어요.
좀 쉬운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뭐 세상에 꼼수 없는 시험이 어디에 있겠냐? 미국 나사(NASA) 입사 시험도 꼼수가 있는 세상인데, 당연히 꼼수가 있지.”
“여윽시~ 우리 선생님! 어서 알려주세요.”
“바로 ‘상상력’이야.”
“상상력요? 그건 다 있지 않나요?”
“그 상상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정공법이 될 수도 있고, 꼼수가 될 수도 있는 거야.
먼저, 이야길 했지만, 연영과의 실기 시험은 어느 정도 정해진 틀이 있다고 했지? 자유 연기에서 감정의 폭을 크게 한 격앙된 연기를 하고 나면 지정연기에서 감정을 절제하는 연기를 시키는 틀.
그 틀을 상상력으로 공략해야 하는 거지.”
“공략해야 한다니깐 무슨 게임 같은데요.”
“하하하. 그래, 어떻게 보면 게임 맞지. 먼저 너는 물론이고 은채에게도 알려준 상상력의 사용법은 일단, 자유 연기와 지정연기를 합치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하는 거야.”
“두 연기를 합친다고요? 자유 연기는 우리가 정해 가는 거지만, 지정연기는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2개를 합쳐요? 그게 가능해요?”
“그러니깐 상상력이 필요하다니깐. 먼저, 자유 연기로 너에게 맞는 연기의 옷을 입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감정의 이입이 되기 쉽게 연기 속에서도 넌 고3의 학생인 거야.
감정이 격앙되는 상황을 만들어 보자면, 이런 설정을 해보자.
일단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널 아버지 혼자 키워온 설정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사기를 당해 빚으로 인해 돌아가셨어.
그런 상황의 장례식장에 미운 친척들이 찾아온 거지.
자유 연기에서는 이런 미운 친척들에게 화를 내는 연기를 하는 거야.
꺼지라고, 힘들 땐 안 오고 이제와서 슬퍼하는 척을 하는 친척들과 싸우는 격앙된 연기를 하는 거지.
이런 연기의 세부는 실기 시험 전에 만들어 주마.
그리고, 지정연기를 이 만들어진 자유 연기에 붙이는 거야.
예를 들어서 지정연기로 류정범의 ‘미녀와 야수’란 영화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주인공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하는 독백연기가 정해졌다고 하면, 그런 상황을 장례식을 끝낸 고3의 자유 연기에 붙이는 거지.
아버지를 잃고 친척들에게 난리를 쳤지만, 그런 반항기 가득한 고3에게도 이런 사랑과 배려가 있다는 걸 상상력으로 연기를 붙이는 거야.
이해가 되니? 난폭한 고3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여주인공이 있지만, 그 여주인공은 장애를 가졌기에 난폭한 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더 감싸주는 배려심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식으로 상상력을 끌어내는 거야.”
“네 알 것 같아요. 만약 영화 ‘국제시장’에서 황전민이 나이가 들어서 하는 연기가 지정된다면, 자유 연기에서 피가 끓어 화를 내던 고3도 나이가 들어서 이런 젊었을 때의 회상과 후회를 하고 있다는 거로 2개의 연기를 한 개의 스토리 라인으로 만들라는 거지요?”
“이그젝틀리~! 그거야! 네가 가진 상상력으로 자유 연기와 지정연기를 합친다면 그 어떤 지정연기가 나오더라도 다 가능할 거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연습해 볼까?”
**
김영민 선생님이 알려준 실기 시험의 꼼수를 활용해서 장례식의 고3 연기에 영화 ‘각설탕’을 붙이는 상상력 마인드 콘트롤을 했다. 그러다, 같이 실기 시험을 대기하는 애들의 소리가 들렸다.
“야, 쟤는 가수 아냐? 가수면 실용음악과나 가지 왜 연영과 시험을 보는 거지. 괜히 경쟁률 올라가게 만들고 있어.”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이잖아. 연기도 같이하는 거니깐 연영과 올 수도 있지. 그리고, 어떻게 보면 쟤는 연영과 온 게 당연하지.
실용음악학과 가봐라. 아마 쟤보다 히트곡이 더 없는 교수가 지도교수라고 설치고 있을걸. 그걸 견딜 수 있겠냐?”
“아, 그렇네. 빛처럼 너에게 가겠다랑 지금 인기 있는 줄리엣도 쟤가 다 만든 거라고 하니깐 그게 또 입장이 그렇겠네.”
“뭐, 노래를 혼자 다 만든 게 아니라, 무슨 팀으로 몇 명이 같이 했다고 하지만, 그런 인기 있는 곡을 만들었는데, 학교에서 미디 음악 만들고 하면 자괴감 왔을걸.”
“네 말 듣고 보니 쟤는 연영과 지원하는 게 맞긴 하겠네. 경국대 연영과에는 연기의 대가라고 인정해 주는 교수들도 많고, 예능인들도 많으니 아이돌에겐 딱 맞겠다.”
“그러니깐 너도 오지랖 그만 부리고 대본이나 봐. 연습시간 20분 다 끝나간다.”
“수험번호 34-1241번부터 34-1246번까지 들어와 주세요.”
**
“음? 첫 번째 이 친구는 벌써 미니시리즈 조연으로 경험이 있네.”
“오현석이 감독했던 드라마였네. 현석이가 좀 까다로운 편인데, 같이 미니시리즈 했다면 괜찮겠네.”
“아, 그 드라마 기억나네. 복고스타일 드라마였지. 윤소원 학생 준비해온 자유 연기 해주세요.”
나름대로 실기 시험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감정을 잡았기에 시작하라는 말에 심호흡을 한번 하곤 연기를 시작했다.
“뭐야? 왜 이제 와서 슬퍼하는 척 하는 거야? 엉?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다고, 조금이라도 괜찮으니 여유가 있는 만큼이라도 빌려 달라고 했잖아.
그때는 그렇게 매달렸어도 얼굴 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왜 지금은 슬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아버지와 얼굴 마주칠까 봐 뒷문으로 나다니던 사람들이 이젠 죽었다고, 와서 슬퍼하는 거야? 이제 와서 가식 떨지 마!!”
교수들을 앞에 두고 술에 취한 듯이 벌떡 일어나 탁자를 뒤엎는 연기로 앉아 있던 의자를 앞으로 밀어 던졌다.
“오우~ 좋네.”
“눈빛을 흐리멍덩하게 술 취한 것처럼 하고, 눈동자를 흔들리게 한 것도 연기라면 꽤 단련된 연기야.”
“죽고 나서 찾아와서 미안했다고 하는 이따위 친척들 없는 게 더 좋아, 꺼져! 꺼지라고. 빌어먹을 핏줄들. 뽑아내 버릴 수 있다면 이따위 김가네 피다 뽑아 버리고 싶으니까 꺼져!! 앞으로..”
“오케이. 자유 연기 여기까지 하고 바로 지정 연기해주세요.”
준비해온 자유 연기의 절반밖에 하지 않았는데, 바로 연기를 끊어 버렸다. 교수들이 노린 것인지 친척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아 따지는, 발악하듯이 하는 가장 감정이 터져 나오는 그 부분에서 바로 딱 끊었다.
끓어 올렸던 화를 바로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되뇌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새롭게 살기 위해 경마장의 조마사로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곳엔 나를 화나게 했던 친척들도 없고, 말이란 멋진 동물들만 있는 곳이다.’
지정연기로 제시된 것이 처음으로 경마장에서 조마사들과 기수들이 말을 관리하는 것을 보며 새끼 망아지가 태어나는 걸 보는 장면이었기에 최대한 새로운 환경에 밝게 적응하는 사회 초년생이 되었다고 되뇌었다.
“와~ 형! 저 경마장에 오는 거 처음이에요. 늘 조랑말만 보다가 이렇게 경주마를 보니 진짜 말이란 동물이 얼마나 멋진 동물인지 알게 되었어요.
어? 형. 저 사람들 뛰어가는데 사고 난 거예요?”
“아니, 지금 망아지가 태어나는가 보다 보러 가자. 이런, 난산이다. 너도 옆에서 거들어.”
지정연기의 상대 배역을 대기자를 안내해주던 조교가 해주었다.
“말아! 힘내! 할 수 있어.”
각설탕이란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말은 원래 서서 새끼를 낳는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연기의 극적인 장면을 살리기 위해 말도 사람처럼 누워서 새끼를 낳을 거라 설정을 했다.
무릎을 꿇고 내가 아까 뒤집어 버린 의자를 누운 말로 생각해서 어루만졌다.
“조..조금만 힘내라. 이제 금방이야. 너도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거야.”
“제법이네. 현석이랑 드라마 했다더니 발악하던 화를 금세 가라앉히고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연기를 하네.”
“의자 보고 누운 말을 쓰다듬듯이 손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도 좋네요.”
“옳지. 옳지. 이제 다 나왔어. 금방이면 될 거야.”
마치, 내가 누운 말의 배를 쓸어 내리듯이 두 손을 움직여 쓸어내렸다. 혹시나 새끼를 낳다가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도 생각하자 손가락이 떨리는 게 자연스레 나왔다.
“와! 나왔다. 태어났어. 아, 이 방금 태어난 이 녀석도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잖아...마치 나와 같구나.”
방금 태어난 망아지를 끌어 앉듯이 두 손으로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잃고, 아는 형을 따라 경마장의 조마사가 되기 위해 홀로서기를 하는 내 모습과 어미를 힘들게 하며 세상에 태어나 혼자 일어서려 하는 망아지의 모습에 감정이 이입되다 보니 눈물이 금세 두 눈에서 흘러내렸다.
“오케이. 여기까지만 보지.”
조교가 티슈를 주자 눈물을 닦곤, 자빠져있는 의자를 다시 세워 앉았다.
“윤소원 학생. 표현이 굉장히 섬세한데, 이런 동물 출산을 실제 본적이 있어요?”
“TV 동물의 왕국에서 얼룩말이 새끼를 낳는 건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 말곤 실제로 강아지가 태어나는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TV로만 보고 실제 경험이 없는데도 꽤 리얼하네. 보통은 지정연기를 시키면 대부분이 영화나 드라마의 오리지날을 많이 따라 하려고 하는데, 완전히 달랐어. 그런 창작이 좋았어.”
“감사합니다. 연기준비를 하면 늘 제가 과연 진짜 주인공과 같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고민과 상상을 했던 것이 잘 나와준 것 같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대형기획사에 아이돌이라고 하기에, 뭐 대충하겠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섬세한 연기에 출산에 대한 두려움과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마음가짐이 연기에 나타나서 좋았어.
역시 브랜드 회사는 다르다는 생각이 드네. 좋을 결과 있을 거야.
그럼, 다음 학생 준비한 자유 연기 해주세요.”
다른 학생의 연기를 앉아서 보고 있는데, 연기를 끝냈다는 개운함이나,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며 합격을 의미하는 말도 좋았지만, 자유 연기로 준비한 고3의 삶과 지정연기로 나온 각설탕 속 조마사로 새 출발을 하는 삶을 내 상상력에 엮어 잘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감이 더 컸다.
아티스트로서의 상상력.. 그건 위대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