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민아이돌 프로듀스99-110화 (110/237)

# 110

이 바닥의 관념.

“이렇게 부서지고, 불타고 남은 재가 바닥에 널브러져서 쓰레기처럼 있는 건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벽에 낙서하는 건 무슨 심리로 하는 걸까?

그것도 완전 허허벌판이라 다른 것 하나도 없는 곳까지 찾아와서 낙서하는 이유가 궁금하네.”

손전등으로 어두워지는 2층의 건물을 둘러보는데, 양 사방에 ‘귀신이다’, ‘죽지 못해 여기서 산다’, ‘저주받을지니’ 같은 낙서가 온 사방 벽면에 되어있었다. 당연하게도, 어그로 갑 낙서인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수십 군데 남겨져 있었다.

“뭐 일부러 찾아와서 낙서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이유겠지. 우리도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깐.”

“하긴. 태정이 말이 맞네. 일부러 찾아왔겠지. 개인이 이렇게 찾아와서 했으면, 아메리카 TV에서 별풍선이라도 많이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상황의 재미를 위해 닉네임을 대며 인사를 했지만, 다들 닉네임 보단 이미 입에 익은 이름을 불렀다.

스프레이 락카로 중구난방으로 적혀있는 낙서 중에는 마치 오늘 한 거처럼 ‘여기는 감금학원’ 같은 홍보성 짙은 낙서도 있었는데, 스프레이 냄새가 살살 나는 것이 급하게 적은 것 같았다.

이런 걸 보면 왠지 김주호 감독이 우리 5명 이외에도 다른 사람을 건물에 넣어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런 준비도 한 것 같았다.

2층을 대충 둘러보고 3층으로 올라가는데, 어느새 산자락 끝에 걸려서 가늘게 노을을 뿌려주던 햇빛은 없어지고, 하늘이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타이밍 끝내주네. 내가 앞장서지. 빨리 5층까지 갑시다.”

부산의 소극장에서 극단 생활을 했다는 김달수가 앞장을 섰는데, 나나 태정이보다 5살이나 많았고, 선 굵게 생긴 외모와 앞장서는 적극적인 모습에서 왠지 리더같은 믿음직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금세 5층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3층 계단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람에 흔들리는 문짝의 끼익, 끼익 거리는 소리와 빈 깡통이 굴러다니는 소리에 다들 놀라며 몸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위험 없는 오디션 촬영이지만, 어두운 폐건물의 모습에 다들 본인도 모르게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 쫄보 들이었네. 하하하.”

카메라를 의식하며 크게 한번 웃고는 호기 있게 김달수가 다시 3층을 살피면서 걸었다. 좌우로 펼쳐져 있는 방이나 공간은 살펴보지 않고 4층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사실, 계단으로 5층까지 바로 가면 되었지만, 이게 오디션이다 보니 모든 방을 살피지는 못해도 각층 통로는 살펴보며 지나가야 뭔가 그림이 될 것 같기에 이렇게 한 층마다 둘러보며 올라갔다.

“여기 4층에서 제일 처음 불이 났었데. 여기 이 흔적 보이지?

이게 철문과 창살이 있었다가 뜯어낸 흔적이야. 화재 이후 건물이 버려 지면서 고물상이 창틀이나 돈 되는 철문들을 다 뜯어가서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네.

사고 난 직후에는 문을 열려고 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철문에 다 남아서 처참했다더라.”

날카롭게 생긴 최원섭이란 지원자가 4층의 입구에 서서 마치 본 것처럼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잠긴 문과 창문에 달린 창살로 인해 도망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것 같았다.

4층의 중간 정도 왔을 때, 갑자기 소름이 등과 뒷머리에 팍 돋았다.

‘아니, 최원섭은 4층의 그 창틀이나 문이 달렸던 흔적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이야길 할 수 있는 거지?

나만 해도 그런 사건이 있었고, 어렴풋이 신문기사에 대해서 기억만 하는데, 마치 한번 와 봤던 것처럼 남겨진 흔적만 보고 어떻게 그런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 혹시 감독님이 말한 한 명 더 있다는 도우미가 최원섭인가? 그래 그러면 말이 되지. 흠. 그러면 이제 최원섭을 주시하면 되는 건가?’

이런 혼자만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왼쪽 닫힌 방 쪽에서 후다닥 하는 발걸음 소리가 났다.

내가 어, 어? 하는 사이에 최원섭과 김태정은, 자동 반사처럼 소리를 쫓아 뛰었다.

‘보통 사람 없는 어두운 건물 안에서 저런 소리가 나면 다들 놀라야 하는 거 아냐? 왜 저리 아무 생각도 없이 뛰어가는 거야?

아무리, 이게 다 짜여진 시나리오의 안이라고 하지만, 저건 안 맞는 행동이라고.’

난, 이게 상황에 안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처럼 가만히 있던 김달수, 이정웅은 아차 싶었던지 먼저 뛰어간 둘을 따라서 뛰어갔다.

아마도 상황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지만, 오디션을 위해 만들어진 상황이라 생각해서 따라가며 이야기를 만드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나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놓쳤어. 계단으로 뛰어서 내려가 버렸어. 끝까지 쫓으려다가 그냥 왔어.”

“스태프가 맞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무슨 소리야? 우리가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거겠지? 스태프가 갑자기 왜 튀어나오냐? 빨리 5층으로 가보자. 우린 공포스팟 찾으러 온 거잖아.”

내 말에 다들 아 그렇지 하며 5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통로를 지났다.

계속 빈 깡통이 굴러다니는 소리나 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하며 모두 다 나름대로 공포 스팟을 찾으러 온 일반인들의 연기를 했다.

**

[와 아메리카 TV에서 별풍 못 쏘는 방을 만들어서 이렇게 큰 이벤트도 다 하네. 돈 좀 많이 번 듯.]

[다섯 명 다 나름대로 연기 잘하고, 발 연기는 아니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영화 있지 않았냐?]

[이거 그거네, 페이크 다큐 공포영화 있었잖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했던 그거. 막 방안에 몰카 설치된 거처럼 해서 찍었던 그 공포영화 있잖아.]

[그래 맞네. ‘파라노말 액티비티(Paranormal Activity)’ 나도 그거 보고 지렸었는데. 개 무서웠음.]

[페이크 다큐같은거로 친다면 핸드헬드기법(hand-held shooting)으로 촬영하고 있으니깐 파라노말 액티비티 보다는 블레어 위치(Blair Witch)와 비슷하다고 봐야지.

핸드헬드기법이 휴대용 카메라를 이용해 바짝 붙어 촬영하는 카메라 기법인데, 지금 가슴에 카메라 붙이고 흔들리게 찍고 있는 이게 핸드헬드기법임.

따라서, 블레어 위치처럼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장르로 봐야지.

파묻혀 있던 영상이라는 뜻으로 픽션 작품이라는 설정인데, 주로 촬영자와 관계없는 사람의 손에 필름이나 카메라가 습득되어, 그대로 공개된다는 설정의 영화가 많아.

그래서, 제삼자에 의해서 발견된(found) 미편집의 영상(footage)이라고 해서, ‘파운드 푸티지’로 불리는 거야.]

[와 시발 개 재수 없네. 누가 물어 봤냐? 아는 척 개쩌네. 허세질 오진다.]

[그런거 물어본 사람 아무도 없거든. 존니 아는 척하네. 퉷~]

[저런 영화 허세충도 채팅방에 들어와 있는 거 보니 오디션 홍보는 졸라게 잘 된 듯.]

[야 이제 5층 도착!]

**

“이건 뭐야?”

5층에 도착을 하니 아래층과는 건물의 구조가 달랐다.

입구의 왼쪽에는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수업을 위한 방들이 있었지만, 오른쪽에는 로비처럼 확 트인 공간이 있었고, 발코니처럼 되어있는 외부공간도 있어서 밖의 전망이 한눈에 다 보였다.

그리고, 확 트인 공간에는 마치 우리를 위해 준비했다는 듯이 캠프 파이어를 위한 나무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세팅이 되어있었다.

심지어, 나무에 불을 붙이라고 라이터도 놓여 있었다.

아까 인기척을 내고 아래로 내려간 사람이 이걸 준비해 두고 내려가다 소리를 낸 것 같았다.

“이야 이거 마치 캠프파이어를 하라고, 누군가가 준비해 준 것 같네. 먹을 건 없어?”

김달수의 말에 다들 웃으며 준비된 나무에 불을 붙이곤 둘러앉았다.

“일단, 여기에 앉아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자. 아까부터 계속 캔이 우그러드는 소리가 저기서 나는 거 같은데. 마치 우리에게 와주길 원하는 거 같지 않아?”

“진짜 빨리 와서 확인해 달라고 하는 것 같네. 빠른 확인을 위해서 2명, 3명으로 나누어서 찾아보자.”

공포영화의 법칙에서 보면 뭉쳐있다가 흩어지면 꼭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있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기 쉽게 최원섭이 조를 나누자고 했다. 확실히 최원섭은 김주호 감독이 심어둔 도우미 같았다.

나와 김달수가 한 조가 되었고, 김태정, 최원섭, 이정웅이 한 조를 이루어서 강의를 위한 방들을 살펴봤다.

어두운 폐건물이다 보니, 다들 무서워하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어둠이 공포라는 것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었다.

마치 놀라게 하려는 걸 알고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놀라게 해줄지 모르기에 설레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두 눈으로 이런 어둠을 보는 우리완 달리 액션캠에 찍힌 화면을 보는 아메리카 TV의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파운드 푸티지’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 공포영화의 느낌이 물씬 났다.

MSM PLUS의 마케팅팀이 온라인에 작업을 쳐주고는 있지만, 이런 공개 된 ‘파운드 푸티지형식’이나 배우 오디션에 ‘핸드헬드기법’은 처음이라 다들 신선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냥 페이크 다큐 아니었어? 하며 일일이 오디션 지원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는 사람과 감금학원이라 불린 실로암 기숙학원을 검색해 보는 사람들이 생겨서 네이버 검색어 순위권에는 우리와 관련된 검색어가 계속 노출되고 있었다.

“여기는 문 손잡이는 다 떼가 버렸지만, 문은 나무문이라서 떼가지를 않았네. 닫힌 방에선 소리가 나고. 마치 이런 방들을 탐험하라는 거 같죠?

나누어서 살펴보죠. 제가 이방을 살펴볼 테니 저쪽 방 살펴보세요.”

문을 살짝 열어 강의실 안을 살펴보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우씌! 하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놀래서 뒤를 돌아보니 김달수도 방에 들어가다 말고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이 여러 개가 있다 보니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헷갈렸다.

일단, 우리 쪽이 아니라 저쪽 조에서 나는 소리 같았기에 둘이 뛰어갔다.

“안에 최원섭이 들어갔는데, 문이 잠겨서는 안 열어져.”

김태정과 이정웅이 문을 어깨로 밀치고 있었지만, 문은 흔들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야! 장난하지 말고 빨리 문 열어줘! 무서워 어서!”

닫힌 문 안에서는 최원섭이 어서 문을 열어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내가 도우미로 생각했던 최원섭이 방에 갇혔다는 사실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눈치를 살폈다.

“뭐야? 저리 가! 이 개새끼들 물러서! 야이!”

갑자기, 문 안쪽의 최원섭이 누군가와 다투는지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리고, 욕지거리와 비명 같은 큰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에서 최원섭의 목소리와 뭔가가 우당탕하는 소리만 들다 보니, 진짜 무엇인가에 최원섭이 공격을 당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던 도우미의 신호와는 완전히 다르다 보니, 이게 연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켜보려고 했던 생각을 바꾸어서 내가 나섰다.

“둘 다 비켜봐!”

뒤에 있던 내가 도움닫기 하듯이 뛰어서는 나무문을 발로 힘껏 찼지만, 쾅! 하는 소리만 나면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차볼게. 비켜봐!”

내가 물러나자 태정이는 아예 날아 차기를 했다.

<콰직!>

“아악! 내 다리!”

태정이는 운이 없던 건지, 아니면 문의 잠금장치가 너무 튼튼했던 건지 문은 그대로인데, 태정이의 발이 나무문을 뚫고 들어가서 다리만 걸쳐져 버렸다. 억지로 끼워져 있던 다리를 문에서 빼곤 주저앉아 버렸는데, 오른발의 정강이가 피투성이였다.

나무문을 부수면서 나무의 파편과 날카롭게 쪼개져 버린 나무 끝에 상처를 입은 거 같았다. 그걸 또 주저앉으며 억지로 다리를 뺏으니 상처가 더 커져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얼른 웃옷을 벗어서 지혈을 시키려는데, 액션캠 카메라 거치대가 걸리적거려서 그냥 카메라를 벗어 던져 버렸다.

그리고, 내 웃옷으로 상처를 덮어서 누르고, 허리띠를 풀어 무릎 위를 묶어서 최대한 피가 나오지 않게 지혈을 시켰다.

“오디션 그만둬야 할 것 같은데, 스태프와 바로 연락할 방법 없어요?”

“난 없는데, 엇? 이정웅 지원자는 어디 갔지?”

나와 같은 조였던 김달수가 조금 전만 해도 옆에 있던 이정웅이 없어졌다고 당황해했다.

“감독님 이거 보이지요? 오디션 중지해야 합니다. 빨리 올라오세요.”

김달수의 액션캠을 보고 이야길 하곤,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전만 해도 문 안에서 무언가와 싸우던 소리를 내던 최원섭도 조용했고, 태정이와 같이 있던 이정웅은 진짜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뭔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태정이 너도 김주호 감독님에게 무슨 힌트나 시놉시스 같은 걸 받았어?”

“아야..살살 눌러..아니, 난 그런거 없었어.”

“달수 형은 감독님에게 뭐 들은 거 있죠? 전, 누군가가 사라지면 간질환자처럼 연기를 해라고 시놉시스를 받았어요. 원래라면 지금 간질환자 연기를 해야 하지만, 태정이 다리 상처는 연기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최원섭이나 이정웅도 모두 연기 과제를 받은거군.

난 따로 떨어지게 되면 6층 옥상으로 올라가라는 과제를 받았어. 흠.

리얼 오디션이라 그런지 이런 불상사가 생기네. 상처가 꽤 큰데.”

“둘 다 나를 봐줘요. 내가 캠 보고 방송 종료되었다고 이야길 할 테니깐.

여러분 감금학원의 2차 오디션은 뜻밖에 일어난 사고로 인해 이렇게 종료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뭡니까?”

내가 방송종료를 알리고 있는데, 김달수가 갑자기 두 대의 액션캠 전원을 꺼버렸고, 내가 집어 던진 액션캠에 가서는 손으로 들고선 허공을 찍으며 마구 흔들어 대다 비명을 질렀다.

“으악! 다들, 빨리 뛰어! 어서!”

내 앞에 누워 있던 태정이도 김달수가 비명을 지르며 난리 치는 걸 보더니, 갑자기 ‘날 두고 가지 마! 나도 데리고 가죠! 아악!’ 하는 비명을 질러댔다.

김달수가 다 되었다는 듯이 내 액션캠의 전원을 끄자, 그제야 둘 다 조용해졌다.

“영화 블레어 위치처럼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장르의 홍보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지. 그래야 시청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 혼란을 주지.”

헐! 이란 말이 절로 나오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김달수는 연극계에서 오래 있었다 보니, 사고로 인해 촬영을 중지해야 하는 상황을 ‘감금학원’의 홍보를 위해 모두가 죽었고, 남은 액션캠 영상만 여러분들에게 전해졌다는 ‘파운드 푸티지’ 장르 영화의 마무리를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그리고, 다리를 다쳐 누워 있던 태정이도 그걸 알아채곤 비명을 질러서 제대로 연기를 했다.

이런 둘에 비해서 태정이가 다쳐서 사고가 났다는 이유만으로 오디션과 홍보방송을 접어야 한다고 했던 내가 저 둘에 비해서 프로정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이 중요하지 영화가 중요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몸이 아프더라도, 누군가 연기 중에 다치더라도 그 촬영 씬을 마무리하고 쓰러져야 진짜 배우답다고 칭찬을 받는 게 이 바닥 룰이었다.

방송계에선 개그맨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이라도 생방송에서 웃으며 관객들을 웃겼다고 해야 진정한 희극인으로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 줬다고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개인의 감정이나 집안의 문제로 공적인 업무에 영향을 준다면 프로답지 못하다고 욕을 듣는 곳이 이 바닥이었다.

이 바닥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백이면 백 모두 다 김달수와 김태정의 연기를 칭찬하고, 촬영을 중지시킨 내가 욕을 듣고 죄송하다고 이야길 해야 하는 게 이 바닥의 관념이었다.

아마도, 내가 방송이 종료되었다고 카메라를 보며 이야길 했을 때, 김주호 감독은 모니터링을 하며 혀를 찼을 것 같았다.

이런 돌발상황에서의 연기를 더 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한 대본 없는 진짜 연기라는 걸 알릴 수 있는 최고의 홍보상황을 내가 발로 차서 뒤엎어 버린 것이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태정이가 나에게 이야길 해왔다.

“소원아. 어쩔 수 없는 거야. 너와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다른 거야.”

“그래, 태정이 말이 맞지. 화려한 무대에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대중의 환호를 받는 업계 1위 기획사 소속의 스타와 언제 없어질지 알 수 없는 듣보잡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태정이와는 연기에 임하는 자세가 다른 거지.

물론, 부산의 50석 규모 정도 되는 소극장에서 연극을 하며 한 달에 40만 원 겨우 버는 나 같은 사람과는 서 있는 곳이 더 다를 테고.

그렇게 서 있는 곳이 다르니, 연기에 대한 자세도 다를 수밖에 없는 거야. 나나 태정이는 저렇게 다리를 다쳐도 그대로 가야 할 정도로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들이거든.”

김달수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야길 해주며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지만, 더 자괴감이 들었다.

전생에서 나이가 들고 성대가 고장 나며 인기 있는 후배들에게 조연이라도 부탁하며 아부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기억하고 있는 노래 몇 곡과 대현 형, 빨간 펀치 누나들의 편곡에 힘입어 성공하자, 밑 바닥일 때 겪었던 아픔을 잊어버렸던 것 같았다.

회귀한 지 채 3년도 되지 않았는데, 어려웠던 때를 벌써 잊어버렸다는 게 부끄러웠다.

홍보를 위해 참여한 오디션에서 잊어버린 지도 모르고 있던, 초심을 되찾은 것 같았다.

한참 있자 밑에서 스태프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119는 지금 불렀으니깐 올 거야. 일단, 다리 말곤 다른 상처는 없지? 다행히 들 것이 있으니깐 태정이 데리고 내려가자.”

스태프들이 올라오니 문안으로 숨어 있던 최원섭도 슬그머니 나왔고, 사라졌던 이정우도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다.

결국, 오디션을 위한 도우미는 2명이었던 거였다.

나와 김달수에게는 혼선을 주기 위해 김주호 감독이 밑밥을 친 것 같았다.

“다행히, 달수와 태정이가 마무리를 잘해주었습니다.

자 여기 보세요. 네이버 1위부터 10위 중에 우리 관련 검색어가 4개입니다. 계획했던 오디션 내용보다는 짧아졌지만, 화제성을 몰고 왔으니 일단 성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독님, 그럼 우리 3명만이 오디션 대상자였던 겁니까?”

“그건 아니야. 내가 소원이한테 이야기한 것처럼 5명 모두에게 상황 과제를 줬지. 물론, 살짝살짝 서로 꼬일 수 있게 준거지.

오늘 오디션에서 연기적으로는 최원섭이 가장 훌륭했고, 그다음이 김태정이야.

뭐, 김달수와 너는 전달 받은 상황 과제를 누설했으니 마이너스이고.”

감독의 말을 듣고는 들것에 실려 내려가는 태정이를 쳐다봤다.

“미안, 나도 상황 과제를 받았는데, 그걸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을 못했어. 다들 흩어졌을 때, 깡통 소리가 나게 하고, 그 소리를 못 들었다고 혼란을 주는 게 내 과제였는데, 해보지도 않고 이야길 하긴 좀 그랬어.”

“그런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어. 일단 오늘 오디션의 합격자는 최원섭, 김태정, 김달수입니다.

추후 3번째 오디션은 이 상처가 다 나으면 진행하던가 하죠.

뭐 사실, 이미 캐스팅이 다 끝나긴 했지만 말이죠.

아, 오늘 찍은 이 영상들도 영화 ‘감금학원’에 쓰일 거고, 촬영 스태프에도 5명의 이름이 올라갈 겁니다.”

영화의 크래딧에 내 이름이 올라가든 올라가지 않든 아무 상관 없었다.

태정이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고, 나는 시무룩하게 기봉이 형의 차에 실려 기원이 형의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씻고 잠이 들려고 누웠지만, 오늘 오디션 촬영 중에 느꼈던 초심이라는 것과 지금의 내 위치에서 너무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였을까도 고민을 한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

“소원아! 빨리 일어나봐. 빨리 이거 봐. 네이버에 난리 났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인데 기원이 형이 나를 깨워서는 스마트 폰을 들이밀었다.

“응? 왜 이형이 네이버 실시간 1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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