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2차 오디션.
“정말 민준기 사장님이 미리 언질을 준 게 아닙니까?”
“허허. 김 감독도 나를 못 믿어? 진짜 윤소원에게 말 안했다구.”
“그렇다면 저 친구 대단한데요.
신경이 아무리 굵어도 웬만한 아니, 100이면 100명 모두 저 정도의 인파에 특히나 저런 가면을 쓴 사람들 속에 가두어 져서 저런 시선을 받게 되면, 다들 자기도 모르게 얼굴 표정이 굳게 되어 버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본연의 두려움이 흘러나와서 저런 웃음을 보여주기 힘들죠.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고 저렇게 웃으며 주위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수양했다면 어린 나이인데도 대단한 친구입니다.
꽤 괜찮은 연기를 했던 김달수나 김태정은 그런 본연의 두려움을 자신의 연기로 이겨내고 자연스레 걷는 연기를 한 거지만, 윤소원은 그런 본연의 두려움을 이겨낸 연기가 아니라, 애초에 본연의 두려움 따위를 떠올리지 않은 거 같네요.”
“어쩌면, 윤소원은 저 무대 위의 가면 쓴 사람들도 모두 다 자기 팬으로 생각하고 연기를 했는지도 모르지.
강심장이 아니면 저 사이를 제대로 걷지도 못할 텐데, 저런 강한 자기암시라면, 이중인격으로 나오는 김창호 역에 어울리는 자기암시겠군.
이거 소원이는 너무 아쉬운데.”
“그렇죠. 어떻게 보면 사도(邪道)에 가까운 연기이지만, 가장 어울리는 연기를 한 거 같습니다. 사장님께 이야기 듣긴 들었지만, 너무 아깝군요. 스케줄 문제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출연시키고 싶은데.”
“어쩔 수 없는 거야. 2차 오디션까지 최대한 활용해.”
“네, 사장님 최대한 화제가 되게 해보겠습니다.”
**
“오~ 태정이 1차에서 살아남았구나. 어서 와 옆에 앉아.”
합격자 5명을 태울 미니 버스가 오자 김주호 감독과 따로 미팅한다고 남았던 내가 먼저 차에 올라탈 수 있었고, 한참이 지나 올라타는 1차 합격자 중에서 안면이 있는 태정이가 보이자 같이 앉아 가자고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윤소원 선배님. 여기서 보니깐 또 느낌이 다르네요.”
“아 진짜 선배라고 하지 말라니깐, 1년 먼저 데뷔한 거로 선후배 따지는 거 난 진짜 별로야. 전에도 동갑이니깐 그냥 친구 먹자고 했잖아.”
“그래도, 반말하다가 그게 인터넷 뜨며 바로 건방지다고 욕을 엄청 듣고, 멘탈이 다 털릴 것 같은데요.
나도 편하게 말하고 싶은데, 적응이 안 되네. 이렇게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할게요. 아! 요가 또 자연스레 붙네.”
“하하하.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런데 ‘더 슈트’는 다음 앨범 언제 나오는 거야?”
“그게...휴...첫 싱글을 냈는데도 10위 언저리에 오른 게 최고 등수라 지금 새로 싱글을 낼지 아니면 그냥 끝을 낼지 이야길 하는 중이라.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흠. 결과가 안 좋았구나.”
“사실 일반 기획사의 그룹이었다면, 10위 언저리만 되어도 다음 싱글을 낼 수 있는 성적일 텐데, 8개 기획사에 12명의 멤버이다 보니, 운영비 문제도 만만치 않고, 정산 문제로 회사끼리 트러블도 많았고.
제대로 5위 정도만이라도 되었다면, 어떻게든 다음 곡에 승부를 띄울 수 있을 텐데.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더 콜업’ 방송도 어중간했고 뭐, 우리 방송이 크게 히트 못 하다 보니 이제 프로듀서 부류의 방송은 아예 없어지고 있어.
아, 여자 버전의 프로듀스99가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하던데, 진짜야?”
“시즌별로 해서 진행을 하긴 한다고 하는데,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
그럼, 태정이 넌 다시 예전 팀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야?”
“지금 회사와는 내년에 계약이 끝나는데, 더 슈트도 잘 안되었고, 원래 팀도 뭔가 다른 게 안 보여. 그래서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이런 오디션 자리도 잡아주고 하는데, 사실 이런 영화 주연 자리는 다 회사 힘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아까, 다른 지원자 형이랑 이야길 했는데, 이미 소원이 네가 내정되어 있다고 하는 말이 있던데.”
“내정은 무슨 그냥 연기 잘하는 사람이 캐스팅되는 거지.
우리 MSM은 이런 건 진짜 당당하게 하거든.
나보다 더 연기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연 꿰차는 거지. 진짜 내정되고 한 거 없으니깐 열심히 해봐.”
미니버스의 다른 좌석에 앉아서 내 이야기에 귀를 세우고 있을 사람들에게 들리라고 일부러 크게 이야길 해주었다.
뭐, 이렇게 이야길 들리게 한다고 해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을 터였다.
“진짜 확실하지?”
태정이가 다시 돼 묻는 거로 봐서는 얘도 내 말을 안 믿는 거 같았다.
“그래 진짜야. 내정 같은 거 없어. 야 과자 좀 먹어라. 손 줘봐.”
뭔가를 줄 것처럼 태정이의 손을 잡아선 아무도 보지 못하게 손바닥에 글을 썼다.
‘내정 X 난 바빠서 X. 마케팅 위해 오디션 참여.’
이렇게 태정이의 손바닥에 적어주자. 바로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디션에 나온 것이 영화 주연자리 캐스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와 오디션의 홍보를 위해 참여했다는 걸 알게 되자, 진짜 내정이 없다는 걸 알고는 태정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꽃 피었다.
“그럼, 오디션 내용에 대해서도 진짜 모르는 거지?”
“그래 진짜 몰라, 지금 어디에 가는지도 몰라.”
태정이와 미니 버스에 탄 다른 합격자들에게 모른다고 이야길 했지만, 1차 오디션 과제 이후에 김주호 감독을 만나서 이야기한 게 있긴 있었다.
“네? 감독님 그러니깐 2차 오디션 과제를 도와 달라는 거죠?”
“그래, 너와 다른 한 명은 사실 도우미 역할이야. 실제 5명 중에서 3명만 진짜 오디션을 보는 거야. 여기 상황 설명을 담은 시놉시스(synopsis 영화나 드라마 따위의 간단한 줄거리나 개요)야.”
“대본있는 X맨 역할이군요. 알았습니다. 헐. 시놉시스가 장난 아닌데요. 이걸 저보고 하라고요? 시간은 아무 상관 없이요?”
“그래. 아마도 먼저 다른 도우미가 상황을 만들어 줄 거야. 그때 이렇게 행동을 하면 되는 거야. 상황에 따라 언제든 좀 변형을 해서 하는 것도 가능할 거고. 대본 대신에 시놉시스만 주는 이유를 알겠지?”
“네, 그런데, 2차 과제는 아예 가슴에 캠을 달고 아메리카 TV에서 중계한다면 서요? 이 시놉시스 대로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각 채팅방마다 관리자가 있으니깐 괜찮을 거야.”
“이걸로 페이크 다큐를 찍어도 되겠는데요.”
“으...응? 그건 일정이 안되어서 못 찍어.
시놉시스는 다 외웠지? 버스 왔으니깐 빨리 타.”
그렇게 김주호 감독과 이야길 했던 걸 떠올리며 태정이와 이야길 하다 보니, 2차 과제를 진행할 장소에 도착했다. 주위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는데, 그 중간에 회색의 5층 건물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헐. 감독님 진짜 이 건물에 우리 5명만 들어간다는 거예요? 불에 탄 흔적도 있고, 금방이라도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데요. 덤으로 진짜 귀신도 바로 나올 것 같은데요.”
“그래 이 건물에서 2차 오디션이 진행될 거야. 한때 실로암(Siloam) 기숙학원으로 불리던 건물이지.
재수학원 중에서 유명해서 전국에서 재수생들이 다 모였던 학원이었어. 보다시피 주위에는 논밭만 있고, 공기도 좋고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어.
다만, 공부만 하고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문을 잠가 두는 바람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많은 학생이 죽었던 곳이고.
우리 영화 ‘감금학원’의 모티브가 되는 장소야.
자! 그래서, 의미 있게 여기에서 2차 오디션을 시작할 겁니다.
다들 가슴에 액션캠을 차고 손전등을 받아서 불이 제대로 잘 들어오는지 확인해 주세요. 해가 남아 있을 때 빨리 진행을 합시다.”
버스를 타기 전 김주호 감독에게 들은 말에는 진짜 이런 으스스한 곳에 와서 2차 오디션을 진행한다는 말 따위는 없었다.
그냥 촬영 세트장에서 찍는 거처럼 이야길 하며 도와 달라고 했는데, 가슴에 액션캠을 차고선 이런 으스스한 폐건물에 오디션 지원자 5명만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나 이외 다른 지원자들은 해라도 떠 있을 때 빨리 들어가려는 듯이 가슴에 액션캠을 차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 그럼 2차 오디션에 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인터넷에서 만난 공포 스팟(horror spot) 동호회의 5명이 이 실로암 건물에 방문하여 건물을 탐색하는 것입니다.
따로 정해진 대본, 대사는 없습니다.
오늘 인터넷을 통해 만난 5명의 회원이 실제 되었다는 연기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상황은 가슴에 달린 액션캠으로 아메리카 TV에서 다섯 개의 채널로 중계될 것입니다.
영화 오디션에서 이런 방식의 오디션은 국내 아니 전 세계 최초일 겁니다.
본인이 가진 자신만의 색을 아메리카 TV를 통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김주호 감독과 촬영 스태프들은 우리에게 액션캠만 채워주고는 바로 모니터링과 인터넷 중계를 위해 마련된 차량들로 사라져 버렸는데, 휑한 시골의 들판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뭐 이런 강아지 같은 오디션이 있지? 헛! 지금 촬영되어서 바로 뜨네요.”
내 말에 다들 가슴에 달린 액션캠의 액정을 열어서 보는데, LIVE ON 이라고 떠서 온라인으로 뿌려지고 있다는 게 보였다.
지금부터 아니, 이미 오디션은 시작되고 있었다.
“전 닉네임 ‘남자성기사’입니다. 인터넷 카페에서 본 분들이니 제 닉네임 다 아시죠? 다들 통성명이나 하죠.”
다른 지원자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할 때 내가 먼저 상황극을 시작했다.
김주호 감독의 말처럼 인터넷에서 만난 공포스팟 동호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금방 캐릭터를 만들어선 상황을 주도하자, 다들 정신을 차린 듯이 닉네임을 만들어서 소개를 시작했다.
“안녕 난 ‘안시원소주’야. 다들 동갑 친구지?”
“어 그래, 난 닉네임 ‘안착한형’ 이야.”
“반가워요. 전 ‘푸른오줌물결’입니다.”
“전 ‘문크리스탈파워’라고 합니다. 줄여서 ‘문파워’라고 다들 편하게 불러 주해요.”
연기를 하는 거지만, 그래도 서로 닉네임을 만들어서 인사를 하니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자 공포 스팟 찾으로 들어가죠!”
이게 모두 다 정해진 상황인 걸 아는 내가 앞장을 서서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독님. 그런데, 다섯 명에게 모두다 다른 상황의 시놉시스를 주면서 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겁니까? 서로들은 말이 달라서 오히려 서로가 알고 있는 시놉시스를 방해하는 상황이 나오지 않을까요?”
다섯 명의 액션캠에서 전송되어 오는 신호를 받아 확인하던 조감독이 궁금하다는 듯이 김주호 감독에게 물었다.
“조감독, 내가 이야기했잖아. 원래 알고 있던 상황과 시놉시스가 갑자기 달라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고 싶다고. 진짜 도우미는 한 명이야.
나머지 4명이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자고.
학습, 연습 되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대처 능력을 봐야 이 배우가 진짜 타고난 배우인지 아니면 교육으로 만들어진 배우인지 알게 된단 말이야. 난 그걸 보고 싶고, 내가 찾아낸 타고난 그런 배우를 내 영화에 세우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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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 건물에 불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불탄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여기서 누가 불을 피웠으니 불탄 냄새가 나지. 어? 이쪽 보지 마. 여기서 개나 고양이를 구워 먹은 거 같아. 죽은 동물 머리뼈가 있어.”
양 사방 벽에 낙서가 되고 쓰레기가 쌓여있는 것만 해도 짜증이 났는데, 죽은 동물의 머리뼈가 있다는 소리에 더 짜증이 났다.
확 그냥, 김주호 감독과 내가 이야기했던 비밀을 다 이야기해주고 이 건물을 나가고 싶었다.
“엇 저기 화살표가 있는데, 저 화살표를 따라서 가보죠. 결국, 5층까지 다 가야지 카페든 뭐든 다 해결이 될 테니 한번 올라나 가봅시다.”
김달수 지원자가 화살표를 가리키며 건물을 올라가 보자고 했다.
창틀도 없는 창문에서 끝 노을이 내리쬐고 있었기에 지금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들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로비의 역할을 하던 1층과는 달리 2층은 창문이나 큰 문이 없었는지, 마치 해가 져 버린 듯이 어두웠다.
받아둔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건물 안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