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이게 연기 오디션이야? (부분 수정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수행하셔야 할 과제는 무대를 자연스레 걸어서 지나가는 연기입니다. 대사와 별도의 상황은 없으며, 자연스레 무대를 걸어가는 연기가 전부입니다.
1번 김도원 씨부터 시작되며, 10명씩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무대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뭐어? 그냥 걷는다고?”
“뭐지? 무대 위를 그냥 걸어가면 되는 연기라고? 이게 뭘 뜻하는 거지?”
대기실 홀에 있던 100명의 대기자는 이런 오디션이 처음이라며 혼란에 빠졌다. 나도 단순히 걷는 연기가 전부라고 하니 황당했다.
“그냥 무대를 걷는 거라면 모델 출신이나 워킹 수업을 받은 사람들이 이득이지 않을까?”
“걸을 때 멋있는 배우를 찾겠다는 건가? 이럴줄 알았다면 미리 모델 수업받아둘걸. 제길.”
대기실에 있던 배우들이 이 과제에 대해서 서로 이야길 하는데, 나도 이게 무슨 의도의 오디션 과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영민 선생님이 있었다면 이 과제의 숨은 뜻을 물어보고 그 숨은 의도에 맞는 연기를 하면 되는데, 지금은 오롯이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그래도 내 번호가 88번이라 앞에 과제를 진행했던 사람들을 보면서 대응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무대에 올라가서 오디션을 진행한 이후에는 오디션 내용이 뒤에 분들에 알려지지 않게 다른 대기실로 가서 있게 됩니다. 그러니 가지고 온 짐이 있다면 들고나오시기 바랍니다.”
“이런, 오디션을 보고 온 사람에게 주워듣기 하는 것도 완전히 막겠다는 거잖아? 도대체 뭐야? 뭘 숨기려고 하는 거야?”
대기자들의 원망에 찬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냥 영화의 홍보를 위해 오디션을 보러온 거라는 생각이었지만, 과제를 들으니 그냥 걷는 연기가 뭐기에 이렇게 하는지, 그게 궁금해서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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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자 번호 1번 민충기님 무대를 가로질러 저 끝까지 걸어가시면 됩니다.”
“네에? 진짜..이..이런 무대를 지나가는 게 오디션이 맞아요?”
“네, 저 끝까지 걸어가시면 됩니다.”
MC 전무호의 냉정한 말에 민충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도의 3년제 예술대학에서 연기과정을 다니고 있는 민충기에게 이런 오디션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상하다 못해 괴상한 오디션이었다.
단순히 걸어서 무대를 지나가는 연기라고 해서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무대에는 본인 외에도 수십 아니 수백의 사람들이 앉거나 서서 본인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다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소름 끼치게도 모두가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가면을 쓰고 쳐다보고 있었다.
어나니머스(Anonymous)를 상징하며, 저항의 아이콘이자 익명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가면의 그 괴상한 생김새는 그냥 보더라도 섬뜩한 느낌인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MC 전무호의 성화에 무대로 발을 옮겼지만, 다리가 떨리고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으..으..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1번 지원자라는 심리적인 압박도 있지만,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들에 압도된 민충기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과 오른 다리가 같이 움직이고, 왼손과 왼 다리가 같이 움직이게 걷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오른쪽 팔다리가 같이 움직이며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본인은 알지를 못했다.
겨우 무대를 가로질러 가긴 했지만, 무대 끝에 다 다른 민충기의 얼굴에는 마치 사우나에서 나온 듯이 땀이 흥건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숨을 헐떡거렸다.
“저렇게 외부 요인에 대해서 약한 저항력이라니. 유리멘탈로 연기를 하려고 했다는 게 웃기군. 1번은 탈락이야.
다음 지원자 올려보내시기 바랍니다.”
무대 아래에서 전광판을 통해 다양한 앵글의 영상을 보고 있던 심사위원석에서 핀잔이 터져 나왔고, 1번 지원자였던 민충기의 원서가 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2번 지원자. 이유진님 저기 보이는 무대의 끝으로 걸어가시면 됩니다.]
대부분 지원자는 1번 지원자인 민충기처럼 긴장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가면들의 시선에 제대로 된 걸음걸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게 나머지 10번까지 지원자들의 걸음 연기를 봤지만, 대부분이 1번 지원자처럼 수많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에 기가 눌려 벌벌 떨며 걸음을 걷다가 손발이 혼란해져 우스꽝스럽게 걷거나 기세를 이기려고 너무 힘을 주다 뻣뻣하게 걸음을 걷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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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기 사장님, 이 오디션은 도대체 뭡니까? 저 무대 위의 사람들은 또 왜 저렇게 해둔 겁니까? 투자자인 우리에게는 이런 오디션이라고 하지 않았잖습니까? 단순히 공개 오디션으로 사람들의 투표로 뽑는다고만 이야길 하지 않았습니까?”
11번부터 20번까지의 지원자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이상한 오디션에 대해 듣지 못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민준기 사장에게 항의하듯이 물었다.
“그건 제가 답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런 오디션을 하자고 했습니다.”
“김주호 감독이 직접 이런 이상한 오디션을 하자고 한 겁니까?”
“네. 진짜 배우를 찾고 싶어서 이런 준비를 했습니다.
다들 영화투자 건을 진행하시면서 많은 오디션을 진행해 보셨을 겁니다.
거기서, 프로필을 보고 직접 오디션을 보러온 배우들의 연기를 많이들 보셨을 거고요.
오디션에 그렇게 올 정도의 배우들이라면 대부분이 연습과 연기를 해온 숙련자들일 겁니다.
특히나 연기 관련 학교를 나온 배우들이라면 몇 년간 배역을 연구하고, 거기에 맞는 발성 톤, 눈빛 연기, 몸짓까지 다 연습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커리큘럼을 나온 수십 명의 배우 중에서 진짜 진주라고 할 만한 타고난 배우를 찾는 게 쉬웠었습니까?
아마도 그런 보통의 오디션에서는 어느 정도 더 연습이 되어있고, 몰입을 좀 더 잘하는 배우를 찾는 것이 한계일 겁니다.
그리고, 그게 대부분의 오디션 결과일 거고요.
오늘 이 특이한 오디션은 진짜 연기를 아는 타고난 배우와 학교에서 정규과정을 밟으며 연습을 해온 학습된 배우와의 차이점을 확인하기 위한 오디션입니다.
프로필을 보셨듯이 대부분의 연기과 전공 지원자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당황을 했습니다.
특정한 상황에 대한 연기 수업을 들은 지원자들은 방금 나왔던 지원자처럼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배운 적이 없으니깐 머리 회로가 멎어 버린 겁니다.
그게 주입식 연기교육의 한계입니다.
제가 찾는 배우는 그런 주입식 연기교육이 아닌, 이런 특이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연기에 몰입할 줄 아는 타고난 천재 배우입니다.
그런 천재 배우를 찾기 위해서 이런 기괴한 오디션을 준비한 겁니다.”
이미 이러한 오디션인 것을 알고 있는 작가와 PLUS의 민준기 사장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게 무슨 오디션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는 투자자들은 아리송해 하면서도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는 지원자들을 보며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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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번 김달수 이 친구는 부산의 가마 소극장에서 연극 연기로 잔뼈가 굵은 친구입니다.”
“얼굴 보니 알겠군. ‘더 킬러’에 감초 역으로 나왔던 친구지?”
“네 맞습니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김달수이지만, 갑자기 무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보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각오가 선 것인지 입이 좌우로 크게 벌어질 정도로 크게 미소를 지으며 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남포동 길거리를 걷는 연극 단원의 걸음걸이가 나왔다. 마치 껌을 씹고 있듯이 입을 오물거리며 길을 걷는걸 보자 진짜 자연스러웠다.
길의 양옆에서 숨결이 닿을 듯이 가까이 붙어 자신을 쳐다보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 무리를 마주 쳐다보면서 여유가 있다는 듯이 ‘흥, 칫’ 같은 비웃는 듯한 효과음을 내면서 걸었다.
“역시 연극판에서 있던 애는 다르네. 오랜만에 쓰레기통에 안 들어갈 만한 연기를 하는 친구군.”
PLUS의 민준기 사장은 이런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김달수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서류를 따로 챙겼다.
“나름의 자신 있는 연기이지만, 이 연기는 감초 연기입니다.
주인공이 하는 연기가 아닙니다. 감초 배역을 뽑는 오디션이었다면 무조건 캐스팅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연을 뽑는 오디션입니다. 일단 이보다 더 좋았던 연기를 보인 사람이 없었으니, 합격으로 하겠지만, 이 친구가 주연인 김창호 역을 맡는 일은 없을 겁니다.”
김주호 감독은 연극판에서 만들어지고 단련된 김달수의 연기에 칭찬하면서도 주연감은 안된다며 서류를 따로 빼버렸다.
“74번 지원자 김태정입니다. 이 친구는 연기 신인입니다.
‘더 슈트’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입니다.”
인물 조감독인 한성균이 이번 지원자가 아이돌 멤버에 연기 신인이라고 하자, 대부분의 심사위원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해서 서류를 접으려고 했다.
“어? 좀 다른데.”
걷는 연기를 위해 무대에 올라온 김태정도 처음 보는 이런 광경에 놀라며 멈칫했지만, 여유 있게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곤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방향에 따라 가면의 사람들이 고개만 움직이며 쳐다봤지만, 김태정은 마치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나갔다.
“대범하고 자연스러운데요. 오, 셔츠의 단추를 풀고, 진짜 길을 걷는듯한 자연스러운 연기네요.”
“연기 신인 맞아요? 꽤 경험 많은 배우처럼 느껴지는데.”
심사위원들이 자연스럽다고 할 정도이니 그 뒤에서 같이 지켜보던 사람들도 여유 있게 걸어서 무대를 지나는 김태정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는 게 포인트네요. 특이점 없던 걷는 연기에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행동에 포인트를 주었네요.”
“그러고 보니 키도 컸고, 비주얼 적으로도 좋은데.”
“뒤에 관객들도 괜찮다고 하네요. 하하하. 역시 눈은 같은가 봅니다.”
“74번이나 되어서야 제대로 연기하는 주인공 감이 나왔네요.
그러면 거의 김태정으로 결정 나는 건가요?”
“일단 끝까지 한번 보죠. 그다음에 추려서 2차 과제를 해본 이후에 결정하겠습니다.”
[88번 지원자 윤소원 군 무대 앞으로 자연스레 걸어나가시면 됩니다.]
내 순서가 되어 무대에 올라와 무대를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무대 중앙의 비워진 길을 빼고는 무대가 좁다는 듯이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가면을 쓴 얼굴로 쳐다보는데, 이건 연기 오디션이 아니라, 담력 테스트라고 할 만큼 섬뜩한 장면이었다.
‘그래, 감금학원 자체가 공포영화이다 보니 그런 공포영화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담력이 있는 배우를 뽑으려고 이런 오디션을 준비한 거구나.
그렇담 담대하게 걸으면 되는 건가? 아니, 그냥 담대하게 걸어나가는 건 또 아닐 거야. 심사위원은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무대 입구에 서서 어떤 목적으로 이런 오디션을 진행하는지 생각해보려 했지만,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엔오원의 윤소원이라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얼어 버린 건가?”
“기대가 너무 컸나?”
“너무 긴장해서 발이 안 떨어지는 거 아냐?”
무대 아래에서 뭔가가 들리긴 했지만, 무시하고 내가 방금 결론 내린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저거 저래도 되는 거야?”
무대의 입구에서 V자를 그리듯이 양 사방을 보며 마치 사진 포즈같은 포즈를 잡던 윤소원이 갑자기 옆에 있던 가면 쓴 사람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매니저님 팬들이 많이 나와 있네요. 앞에 길 좀 만들어 주세요. 비행기 시간 아슬아슬합니다.”
내게 손이 잡힌 사람은 이건 뭐야 하는 표정을 지었을 것 같았지만, 내가 빨리 앞장서라고 하자 진짜 내 매니저처럼 사람들이 물러나라고 손으로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 공항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어이쿠 조심하세요. 넘어져요!”
마치 내가 공항 출국장에서 공항패션을 보여주고 출국인사를 팬들에게 하듯이 주위의 가면 쓴 사람들의 손도 잡아주고, 친근하게 인사를 하며 무대를 걸어나갔다.
“허, 아이돌이라 그런지, 출국장 상황을 만들어서 아예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사람들을 이용해 해버리는군.”
“이건 아이돌이라서 가능한 연기이려나?”
“그러고 보니 대사를 친 유일한 지원자군요. 민 사장님이 따로 언질을 주거나 한 건 아니시죠?”
“절대 아니야. 윤소원은 아마 캐스팅이 되어도 일정이 안 맞을 거야. 홍보를 위해 초대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신경을 안 써도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