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경쟁 (2).
“야! 이거 받아. 혼자 봐.”
이삿짐을 싸고 있는데, 아까부터 이삿짐 차량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슬기가 쪽지 하나를 주곤 뛰어가 버렸다.
“수찬아, 이삿짐 다 실었으니께, 퍼뜩 차에 타라.”
“예”
이삿짐이 다 실려있는 용달차 짐칸의 남는 공간에 올라타 쪼그려 앉아서는 쌍문동 달동네를 내려가며 슬기가 나에게 주고 간 쪽지를 펴보았다.
‘재개발되면서 다들 이사 때문에 헤어지지만, 2년 후 3.1절에 63빌딩 입구에서 다 같이 보자는 약속은 기억나지? 그때 우리 꼭 보자.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 지기 시작할 거야. -어린왕자 책에서.’
“가시나, 이사가는거 별거 아닌 척 하드만, 쪽지를 다 주고 코 찡하게시리..그래도 내가 읽어보라는 어린 왕자 책은 읽어보긴 했네. 그래, 2년 후에 보자...”
덜컹거리는 용달차에서 쪽지를 고이 접어 호주머니에 넣으며 땀에 젖은 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소원이 연기 잘하네. 차에서 덜컹거리면서 눈물 연기하기 힘든데.”
“감독님. 연기칭찬 감사합니다.”
“자 우리 배우님! 첫 드라마 촬영종료 기념 꽃다발, 선물입니다. 기념사진 한번 찍으시고요. 이건, 공식 인스타에도 올라가는 겁니다. 감독님하고 일단 먼저 한 장 찍습니다.”
기봉이 형이 어디서 챙겨왔는지 꽃다발도 주고, 코디와 메이크업은 물론이고, 출연진, 스태프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다 같이 첫 드라마를 아무 사고 없이 잘 끝냈다는 기념이었기에 웃음이 사진마다 가득했다.
촬영감독님도 꽃다발과 선물을 챙겨줬다.
“소원이와는 진짜 촬영이 끝났네. 아쉽다. 잘생긴 어린 남자랑 연인역을 또 언제 찍을 수 있을까? 우리 둘이서만 사진 한번 찍자.”
쪽지를 주고 도망쳤던 슬기역의 진아 누나가 내 팔짱을 끼며 옆에 붙었다.
“네, 누나. 그런데 누나는 촬영 안 끝났어요? 우리 분량은 여기서 끝이라고 하던데.”
“회상 씬에서는 나도 끝이야. 이제 63빌딩에서 너 기다리는 씬 남았고, 공항에서 신혼 여행 가는 씬만 남았어. 넌 공항에서 이미 촬영했지?”
“네, 공항에서 다시 어린 왕자 그 문구 적힌 쪽지를 신혼 여행가는 누나에게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쪽지 버리는 씬이었는데, 그건 이미 찍었어요.
63빌딩에는 군대가 있다고 저랑 상호 역의 일휘 형은 안 나오는 씬이구요.
진짜, 누나랑 찍는 것도 완전히 끝이 났네요. 이제 끝이네요. 흑흑 누나.. 그동안 고마웠어요. 사실, 누나 사랑했었어요.”
“야! 거짓 눈물 연기 하지 마! 이게 이젠 끼를 부리네.”
“에이 좀 넘어가 줘도 되잖아요. 이젠 진짜 누나 보기 힘들 것 같은데..아, 엔오원 콘서트 티켓 받으셨죠?”
“그래 콘서트 티켓 받았어. 내 친구랑 같이 꼭 가마.
그리고, 네가 나를 보는 게 힘든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보는 게 힘든 거잖아.
한류 아이돌과 뽀뽀해봤다는 추억을 이젠 가슴속에 묻어둬야겠구나.
뽀뽀하는 거 찍을 때 그냥 콱! 혀를 넣어 버릴 걸 그랬다. 쩝.”
“누나 저 미성년자랍니다. 소중히 해주세요.”
“이게 또 연기하네! 콱~ 그냥~호호호”
나와 진아 누나는 일에 여유가 있어서 이야길 하고 있다지만, 다른 스태프들은 여전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강행군 중이었다.
“나도 오늘 밤까지만 찍으면 끝인데, 다른 쪽은 밤샘해야 한다더라.”
“창진 형 인기가 많아져서 대본 수정된 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래, 창진이가 찬욱이한테 지희가 왜 갑자기 상호랑 결혼해서 미국으로 갔는지를 알려주고, 왜 상호가 슬기 결혼식 뒷풀이에서 술먹고 찬욱이를 때리면서 울었는지를 알려주는 거로 변경되었어.
그리고, 지희와 상호의 애가 찬욱이 애일 수도 있다는 힌트를 주는 거로 다 변경이 되었더라고. 창진이가 핵심 키가 되어 버렸어.”
“그럼, 결말이 쪽대본에 나와 있던 것처럼 미국의 지희와 상호 집 앞에 서서 가족의 모습을 보는 찬욱이의 모습에서 끝이 나는 거예요? 열린 결말로?”
“그래, 그렇게 흐리멍덩하게 결말이 난다고 하네. 박 작가님이 시즌2를 노리는 것인지 일부러 이렇게 결말을 짠 거 같아. 좀 이해가 안 되지만.”
“12화가 시청률이 9% 넘었다고 하니, 방송국에서도 은근히 다음 시즌이나 후속작을 원해서 그렇게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일단, 아무리 바빠도 너 꼭 쫑파티에 와야 한다. 알았지?”
“네, 누나 그럼 남은 촬영 잘하시고, 쫑파티 때 봐요~!”
**
“소원아! 너희 회사에서 혹시 커뮤니티에 작업하는 건 없지? 있냐?”
“기원형 그게 무슨 말이야?
“넌, 모르는 거냐? 커뮤니티랑 여러 곳에서 너희 ‘엔오원’이랑 이번에 데뷔한 ‘더 슈트’라는 그룹을 비교하거나 하는 게시물과 유튜브 영상이 계속 올라오기에 너희 엔오원 맡는 회사랑 그 더 슈트라는 회사가 서로 작업치는 거로 생각했는데, 넌 모르는 거야? 대충 봐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기에 너희 회사에서 작업하는 거로 난 생각했는데. 아는 게 없어?”
“어 형. 난 아는 게 없어. 그런데, 우리 회사 MSM에선 그렇게 작업을 안 할 거 같은데, 그렇게 작업할 이유도 없고, 어쩌면, 다른 멤버들 회사에서 그렇게 작업하는 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올라오는 글들이 대부분 두 팀 간의 싸움을 붙이는 글이야?”
“그래, 대부분이 싸움 붙이는 글이야, 어느 쪽이든 우리 같은 마케팅업체가 붙어서 작업을 치는 거 같은데.
그래도 네가 방송에서 팬들끼리 싸우고 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지 알아서 쉴더를 잘 치고 있긴 하더라.”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 괜히 이런 거에 형도 힘 빠지게 대응하지 마.”
“그럴까? 팬들끼리의 분란을 그쪽에서 계속 유도하는 게 아마도, 경쟁공연인가 그거 흥행을 위해서 하는 걸 수도 있으니 그냥 두고 보마.”
“그래 형. 어쩌면 우리 마지막 콘서트 투어 홍보 때문에 우리 쪽에서 작업을 치는 걸 수도 있어.”
형과 통화를 끝내고 생각을 해보니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
결국, 대중문화이든, 팀이든 뭐든 다 돈벌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알맹이가 빠져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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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감독님! 감독님이 저를 까주셔서 제가 가수가 될 수 있었어요.
오현석 감독님! 저를 까주셔서 감사합니다아~ 다음에 또 까면 미워 할꼬에요~!
여러분 모두 ‘아모르 미오~’ 다 같이~ 신나게 한번~ 갑시다~!”
‘그때 그곳에서’ 드라마의 16화 최종화가 시작되기 전에 쫑파티가 시작되었는데, 나에게 쫑파티 이야기를 들은 민경이 누나가 꼭 쫑파티에서 노래를 불러야겠다며 찾아와선 저렇게 멘트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곤 바쁘다고 밥도 먹지 않고 행사를 가버렸다.
정말 억지로 시간을 내어서 이곳에 들린 것 같았다. 캐스팅을 해주지 않았기에 가수가 되어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그래도 배우로서 몇 번이나 오디션을 봤음에도 까인게 마음에 많이 남았던 것 같았다.
어제 했던, 15화 시청률은 13.4%로 TVL방송국은 물론이고, 모든 케이블 방송사의 드라마 시청률 상위 TOP3 기록에 근접했다.
그러다 보니, 첫 촬영 회식으로 쌍문동 근처의 저렴한 고깃집에서 했던 것과는 차이 나게 강남의 고급 갈빗집을 통째로 빌려서는 쫑파티를 했다.
드라마는 대박을 터트리며 끝이 날 것 같고, 무명이었던 대부분의 배우들은 이제 얼굴을 알리다 못해 차기작 주연까지 꿰찬 경우가 되어 버렸기에 다들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쫑파티 자리는 흥겹다 못해 난잡했다.
여기저기서 술을 아끼지 않고, 폭탄주를 만든다고 잔을 쌓아서 만들고 있었고, 평소에는 비싸서 잘 못 먹는 한우 갈비를 구워서 던지고 하며 난리였다.
다들 흥겨웠지만, 난 주위 시선 때문에 술도 못 먹고 사이다만 홀짝거리다 보니, 흥도 별로 나지 않아서 최종회가 시작되자 일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떠버렸다.
나중에 노래방이라는 진아 누나의 전화가 왔지만, 늦은 시간에 미성년자인 아이돌이 노래방에 가서 사진이라도 찍히면 골치가 아플 것 같아서 아예 전화기를 꺼버렸다.
미성년자 아이돌이기에 너무나도 제약이 많았다.
드라마 ‘그때 그곳에서’의 최종화 시청률은 14.5%였고, 언론에서는 공중파로 치면 35%의 초 대박 작이라며 무명의 배우들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오현석 감독의 연출력을 추앙하는 듯한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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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봉형 그런데, 경쟁공연 하기로 한 곳이 잠실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이라면 엄청 넓은 곳 아닌가요? 예전 빌보드 1위 했던 가수 ‘싼이’가 콘서트 할 때 봤는데, 엄청 넓던데요. 2만 명 정도 수용 가능하다고 나오네요.
우리 마지막 콘서트도 고척 돔 구장에서 하기로 했는데, 인원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그냥 고척 돔 구장에서 하면 연속성도 있고 해서 더 좋을 것 같았는데.”
“그래, 원래라면 고척 돔 구장에서 ‘더 슈트’와의 경쟁공연을 하려고 했었어. 원래, KBC에서 방송을 위한 공연이니 공연장 임대료를 전액 지불한다고 해서 고척 돔 구장으로 정했는데, 갑자기 60%만 지원해 준다고 해서 돔구장은 물 건너가 버린 거지. 돔구장은 임대료가 많이 비싸거든.
거기다, 방송을 위한 경쟁공연은 무료공연이잖아. 그러다 보니 돔구장 임대료와 무대 비용을 감당하기가 힘이 들었어.
그렇다고, 5~6천 명 들어가는 실내 체육관에서 경쟁공연을 하기에는 좀 부족하고. 그래서 수를 낸 것이 잠실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이야.”
“거긴 확실히 임대료는 저렴하겠네요. 그러면 그만큼 무대 설비에 돈을 더 쓸 수도 있을 거고요.”
“맞아. 장소 임대비에서 아껴서 무대에 최대한 심혈을 기울이려고 하더라.”
“그럼 ‘더 슈트’는 어느 공연장에서 한다고 하던가요?”
“그게... 우리 공연장 바로 옆의 잠실 실내 체육관이야.”
“에? 잠실 실내 체육관은 11,000명 들어가는 곳이잖아요. 그럼, 거길 우리가 먼저 선점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린 돔구장에서 당연히 하려고 했지, 그런데 예산이 갑자기 줄어드니 그제야 알아보다 보니, 뺏긴 거지. 일부러 KBC에서 노린 거 같기도 하고.”
“일부러 전액지원에서 60%로 장난질 친거네요. 날짜도 같은 날짜에 경쟁공연을 하는 건데, 같은 잠실이라.
그러면 잠실에 사람들 엄청 몰리게 될 것 같고 문제가 많이 생길수도 있겠네요. 여자팀 그룹의 경쟁공연도 그날 동시에 열리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쪽은 어떤데요?”
“여자팀은 부산에서 하기로 했어. 두 팀다 인지도가 없으니, 거긴 벡스코 1관과 3관의 동일 한 크기의 공연장에서 공연해서 누가 더 많은 팬이 오는지로 경쟁을 한다고 하더라.”
“어떻게 보면 같은 공연장에서 그렇게 하는 게 가장 공정한 경쟁공연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이걸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 내일부터는 촬영팀들이 따라붙을 거야.”
“한 달 후이니, 아마도 그전에 방송에서 어그로 또 끌고 하겠네요.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