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먹고, 먹히기.
“이 OST 노래 2곡도 ‘레드넘버’ 애들이 만든 거라고요? 4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인데, 그중 윤소원이란 이 친구가 우리 아티스트란 말이죠?”
“네. 이사님, 이사님이 뉴욕에 가셨을 때 회의를 해서 팀 ‘레드넘버’와 프로듀서 전속계약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러면 하면 되겠네요.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안경을 추켜올리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전상일 본부장을 보는 유영찬 이사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유영찬 이사는 국내 최대, 최고의 기획사인 MSM을 회장인 민수민과 처음부터 같이 키워낸 MSM 내 권력서열 2위의 실세였다.
더구나, MSM이 지금의 대기업이 될 수 있게 수십 곡의 히트곡을 만들었고, 전설이라 불리는 아이돌그룹 ‘SHOT’의 프로듀서였다. 2000년대에는 MSM리즘(msmrism)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MSM만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구축하고 MSM만의 개성과 매력을 구축한 전설의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른 노쇠함인지 1990년대 2000년대를 아우르던 그의 음악적 감성은 요즘 들어 구시대적인 음악적 흐름이라고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세간의 평가를 무시하지 못하는 게, 요즘 유영찬 이사가 프로듀싱하는 MSM 아이돌들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예전과는 다르게 늘 짜증을 냈고, 그런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다 보니 몸무게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버렸다.
그런 유영찬 이사의 좋지 않은 눈빛을 본 전상일 본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윤소원이나 성대현은 프로듀서로서는 신인이나 마찬가지라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빨간 펀치의 이 두 명은 좀 다릅니다.
이미, 자작곡으로 히트곡이 여러 개가 있고, 아티스트 계약으로 타 기획사 소속이다 보니 계약 관련으로 문제가 좀 있습니다.
법무팀에 문의해보니 가수활동과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은 별개의 업무라서 괜찮다는 유권해석을 받았지만, 어중간한 계약조건으로는 이 둘을 전속 프로듀서로 영입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 둘이 소속되어 있는 ‘딥 엔터’를 인수하는 건 어떨까 하고 재무팀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흠. 빨간 펀치는 자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프로듀싱이 가능한 인력이니 꽤 괜찮을 것 같군요. 딥 엔터 자체를 인수하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인수조건은 어느 정도 되는 겁니까?”
“아직 인수에 대한 말만 슬쩍 건넨 상태입니다. 조건은 딥 엔터 쪽과 만나서 맞추어 볼 예정입니다. 인수조건으로 협의하기 전에 유 이사님이 가이드 라인을 정해주시면 거기에 맞게 협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운영팀, 재무팀 팀장들을 불러서 한번 제시조건을 따져보도록 하세요. ‘아모르 미오’는 한국으로 오면서 들어봤고, 방금 OST 2곡도 들어봤는데, 일단 개성과 재능, 노력한 실력이 다 들어가 있는 노래들이네요.
이제 막 재능이 개화한 듯한 그런 느낌도 있습니다.
만약 딥 엔터의 인수문제가 난항을 겪으면, 예전 ‘E-BAM’에게 제시했던 조건으로 프로듀서 계약을 추진하세요.”
“네? ‘E-BAM’급 까지 프로듀서 계약조건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뭐, ‘E-BAM’과는 이정이의 ‘언더걸’, 소녀연대의 ‘JEE’가 대박나고 나서 전속계약을 했기에 투자한 만큼 이익을 못 봤지만, 이 4명은 이제 시작을 하는 애들이니 ‘E-BAM’보다는 더 성과를 내어주겠죠.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우리와 아티스트 계약으로 묶여있으니 그 정도까지는 괜찮습니다.”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하는 유영찬이사의 얼굴에는 어쩔수 없다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네, 알겠습니다.”
이사실의 문을 닫고 나오는 전상일 본부장의 머리는 복잡했다. 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2000년 중, 후반 ‘E-BAM’이란 남자 듀오로 구성된 창작팀은 이정이의 ‘언더걸’을 대 히트시켰고, MSM과는 소녀연대의 ‘JEE’로 역대급이라 불릴 정도의 메가 히트를 만들어 내었던 창작팀이었다.
그래서, 당시 MSM은 ‘E-BAM’을 잡기 위해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3년 계약에 30억 원이라는 프로듀서 전속계약을 맺었었다. 계약금만 30억이지 별도의 억대 연봉까지 주었기에 실질 금액은 40억에 육박하는 당시에는 전무후무한 대형 계약이었다.
하지만, 연이은 히트곡과 거기서 나온 저작권료, 3년에 30억이라는 엄청난 계약금까지 생기자 빛나던 그들의 재능을 돈이 집어 삼켜버렸는지, 이후 만드는 곡과 프로듀싱한 아이돌, 가수들은 중박 이상을 치지도 못했다.
심지어 중박도 한 번이었고, 3년간 그들이 보여준 성과는 기대 이하였다.
이러한 것을 전상일 본부장과 같이 보며 잘못된 계약이라고 같이 욕을 했던 것이 유영찬 이사였다.
다시 그런 실수가 재현될지도 모르는데, 유영찬 이사는 그런 조건으로 계약해도 좋다고 이야기를 했다.
문득 유영찬이사 이후 MSM을 대표할만한 대표프로듀서가 없다는 것이 생각이 났고, 자식과 같이 커온 MSM에 큰 빈틈이 있다는 게 가슴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유영찬 이사가 파격적인 조건으로라도 ‘레드넘버’를 영입하라는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서 회사를 위해 트렌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프로듀서 일에서 점점 손을 떼고 있는 유영찬 이사의 씁쓸한 마음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전 본부장의 발걸음은 빠른 걸음이었지만, 참으로 무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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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본부장님. 생각을 잘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빨간 펀치 누나들이 소속된 ‘딥엔터’를 인수하신다고 해도, 창작팀 ‘레드넘버’와 계약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아티스트로서의 빨간 펀치 두 사람과, 창작집단 레드넘버에 속해있는 두 사람은 다른 존재로 보셔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MSM과 계약한 윤소원과 레드넘버의 윤소원은 다른 존재입니다. MSM에서 제시하는 아티스트의 의무만 성실히 수행한다면 그 외는 법적으로 강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신인가수들 노래 듣고 모니터링해서 심사하는 그런 행위들 말입니다.”
“소원아, 그 부분은 우리도 법률 자문받았으니 알고 있어. 다시 이야기 안해도 자알~ 알고 있다.
우리 회사 차원에서는 이왕이면, 레드넘버와 계약할 때, 아티스트로서의 빨간 펀치도 같이 우리 회사로 데려오고 싶다는 거지. 딥 엔터의 이 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하. 우린 뭐 일단 MSM에서 제시하는 조건을 봐야지 않겠습니까?
빨간 펀치는 아직 계약이 5년이나 남아 있고 하니,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확실히 싸게 먹힐 겁니다. 우리로서도 MSM의 하위 레이블로 들어가는 것은 나쁘지 않은 조건입니다. 문제는 돈이죠. 돈, 안 그렇습니까? 허허허.
빨간 펀치는 확실히 프로듀싱이 가능한 자체 제작돌이니 그만큼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후후.”
검은 피부에 얼굴에는 접대용 미소가 걸려있는 딥 엔터 이재용 사장은 느끼하게 웃으며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저기 사장님, 저희.. 이제.. 빨간 펀치로는.. 곡을 안 만들거에요.”
“뭐어? 그게 무슨 말이야?”
느끼한 웃음을 짓던 이재용 사장은 금세 험악한 얼굴이 되어선 몰아붙였다.
“이제 빨간 펀치로 활동할 때 자작곡으로 활동하지 않을 거라고요.
이번에 레드넘버 만들 때 계약서 자문받으니, 반드시 저희 자작곡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조항 자체가 없으니 가수로서만 활동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우리도 회사에서 주는 곡으로 활동하고 싶어요.”
“야! 너네 갑자기 왜 이래? 미쳤어? 우리 회사에 다른 프로듀서가 어디 있다고. 흠흠. 전상일 본부장님. 오늘은 이만 자리를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이런 돌출문제가 생기네요.
야! 빨리 일어나! 너희 밖에서 보자!”
화가 나서 얼굴이 익은 대추처럼 벌게진 이재용 사장의 독촉에 빨간 펀치 누나들이 회의실을 나가는데, 누나들과 눈이 마주친 내가 고개를 끄덕여 안심하라고 신호를 줬다.
“미친것들이 여기서 갑자기 왜 이런 지랄을 하는 거야.”
“이재용 사장님! 우리 회사 대표님들에게 그런 단어를 쓰시면 안 됩니다.”
“넌 뭐야? 남인철? 너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
네 마음대로 병원에 애들 데리고 가고, 입원시켜서 내가 얼마나 손해 본 줄 알아? 그런데 어디라고 네가 와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너 이제 얘들 매니저 아니야 인마. 길 비켜!”
“이재용 사장님. 다시 말합니다. 말조심하십시오. 사장님 말대로 전 딥 엔터 소속의 매니저가 아닙니다. 서로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말조심하시죠.”
“뭐? 이 새끼..그러고보니 너 이 건물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 거야? MSM에 들어온 거야? 이씨..”
이재용 사장은 이런 사건이 MSM에서 인수조건 때문에 작업을 친 것으로 보고 고개를 돌려 전상일 본부장을 노려봤다.
하지만, 전상일 본부장의 호기심 어린 얼굴을 보자, MSM에서 작업을 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재용 사장님. 방금 이야기 드렸듯이. 빨간 펀치의 두 분은 우리 회사의 대표님이십니다. 앞으로 대표님들의 모든 스케줄에는 비서로서 제가 수행을 할 예정입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대표라니? 비서는 또 뭐야? 미친 거 아냐?”
“이재용 사장님 이거 한 장 받으시죠. 법인 등록증 사본입니다. 오늘 오전에 세무서에서 받아온 따끈한 사본입니다.
법인 대표이사명단에 빨간 펀치의 멤버이자 레드넘버의 멤버인 이채연, 한원희 보이시죠? 전 본부장님도 한 장 받으시죠.”
“레드샵(#)? 이건 또 뭐하는 회사야?”
“본부장님. 그건 제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누차 강조했듯이 아티스트일때와 제작자, 프로듀서일 때는 주체가 다릅니다.
그래서, 레드샵(#)이란 창작법인회사를 만들었습니다. 레드샵은 ‘레드넘버’가 만들어 내는 모든 저작권을 관리하는 회사입니다.
회사에 직원이 없으면 안 되니, 직원으로 얼마 전까지 딥 엔터에서 매니저로 계셨던 남인철씨를 고용했습니다. 당분간 직원이 할 일이 없어서 남인철씨는 비서로 대표이사를 수행하는 업무를 할 겁니다.
아마도, 매니저 업무를 잘 아시는 분이니, 제대로 아티스트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서 잘 관리를 해주실 겁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고등학생 같지 않다고 하더니, 이런 건 어떻게 한 거야?
레드샵에는 너희 4명 말고는 다른 사람이 아예 없는데, 누가 이런 걸 알려준 거야?”
“본부장님. 그건 조만간에 아시게 될 겁니다. 전 본부장님도 아시는 분이거든요.
본부장님도 이제 파악하셨겠지만, 이제 레드넘버란 창작팀과의 전속계약 문제는 레드샵과 하시면 됩니다.”
“그러네. 허허. 일단 그쪽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서 끝내지. 다음 회의는 남인철씨에게 연락을 하면 되겠지?”
‘소원이와 빨간 펀치 애들이 저렇게 이재용 사장과 각을 세우는 걸 보니, 태업하거나, 계약서에 따라 딱 정해진 일만 하는 준법투쟁 같은 걸 할 생각이군.
자연스레 딥 엔터같이 준비가 안 된 회사라면 제대로 된 곡을 준비해 주지 못할 테고, 5년간의 남은 계약 기간이 어찌 될지 보이는군.
그러면, 인수조건을 딥 엔터가 아니라 레드샵에 제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유능한 프로듀서니깐.’
“네 부장님. 레드넘버의 일은 이제 레드샵의 남인철씨에게 연락을 해주시면 됩니다.”
“너 남인철이 이 새끼 네놈이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치는 거야?”
“사장님 뒤통수가 아니라, 비즈니스지 않습니까? 전 우리 회사 대표이사님들을 수행해야 하는 게 저의 일입니다.
대표님들 회의실로 가시죠.”
“네. 남 비서님 잘 부탁합니다.”
미친 듯이 화가 난듯한 이재용 사장을 데리고 따로 마련된 회의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우리가 선임한 변호사가 미리 앉아 있었다.
그리고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니깐, 앞으로 빨간펀치의 활동에 사용되는 자작곡은 레드샵(#)에 의뢰를 하고 그걸 받아서 활동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빨간 펀치는 자작곡을 아예 안 만들 거라는 말이야?
야! 너희 둘!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이건 아니잖아.
어떻게 너희들이 나에게 이럴 수 있냐?”
“사장님. 이제까진 우리가 어려서 잘 몰랐는데, 이건 엄연히 우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꾸려는 것뿐입니다.”
“이씨 그놈의 권리.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줬는데,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이재용 사장님. 말조심하시라니까요.
그리고, 사장님이 계속 이상한 병원에만 가라고 하고 입원을 요하는 큰일인데도 무시하고 행사를 돌린 건 사장님이셨습니다. 아티스트의 보호의무부터 제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권리 찾기를 왜 우리가 하는지부터 사장님은 반성해야 합니다.
일단 우리의 요구조건은 여기 다 적혀있습니다.
보시고, 빨간펀치의 활동에 대해서 다시 이야길 하시죠.
일단, 오늘 저녁 대찬대학교 축제행사가 있으니 우리 대표님 두분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대표님들 가시죠.”
“이재용 사장님. 위임받은 변호사로서도 이야길 드리자면, 판단을 잘하셔야 할 겁니다.
남은 5년 동안 빨간 펀치의 입맛에 잘 맞춰주고 약간 줄겠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뽑을지, 아니면 그 약간의 줄어들 수익 때문에 별도로 곡을 받아오고 프로듀싱을 해서 빨간 펀치를 운영하실지. 생각을 잘하십시오.”
이후 1시간 넘게 이야기가 오갔고, 늦은 시간까지 고민한 딥 엔터의 이재용 사장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제시한 조건과 활동에 대해서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