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그때 그곳에서. (5)
“왔다 왔다!” “역시 아이돌이라 그런지 풀메이크업이네. 대본 리딩인데도 저렇게 풀메이크업을 다 하네. 대본 리딩이라는걸 모르는 거 아냐?”
“의상도 보니깐 정오에 뭔가 행사도 벌써 하나 뛰고 온 거 같은데. 그리고, 스냅 사진은 대본 리딩때도 찍으니깐 메이크업을 한 거 같은데. 잘 생겼다.”
“쉿, 이쪽으로 온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물 가져가면 되나요?”
“네, 마음껏 가져가시면 됩니다. 물티슈도 있고요. 혹시 펜도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 간식은 안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되죠?”
혹시 몰라 물과 물티슈를 여유 있게 챙겨 들고는 대회의실로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책상이 직사각형으로 쭉 배치되어 있었고, 각 자리마다 이름표가 다 놓여 있었다.
오현석 감독과 작가는 아직 오지 않았는지 자리가 비어있었다.
미리 얼굴을 알아둔, 주인공 ‘찬욱’역의 김지섭과, ‘지희’ 역의 윤차희에게 아이돌식 폴더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수찬 역의 윤소원입니다. 첫 연기이다 보니 많이 부족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엔오원 팬이에요! 저도 잘 부탁해요.”
‘찬욱’과 대칭되는 주연급 조연인 ‘상호’역의 채일휘와 밝힘증 변태 고등학생 ‘창진’역인 이석우에게도 폴더 인사를 했다.
다들 개성이 강하다고 하기보다는 무난한 인상의 배우들이었다.
“우리도 잘 부탁해요. 오히려 우리가 이렇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해야 할 정도인데. 잘 부탁해요.”
“다들 형님 누나들인데 말 편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그냥 소원이라 불러주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연으로 되어있는 배역은 물론, 리딩 장에 들어와 있는 모든 배우와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음악방송에 가면 모든 가수,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는 게 생활화되어 있다 보니 이런 부분에 서는 걸리는 것이 없었다.
지정된 자리에 앉아서 찬찬히 배우들을 살펴봤다.
찬욱 역의 지섭이 형은 확실히 훈남으로 인상 자체가 좋았다. 고등학생에 우유부단한 연기에 잘 어울릴 것 같았고, 25살이지만 교복을 입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지희 역의 윤차희는 미스 춘향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차분하고 참하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남, 여주인공 모두 강한 개성이 없다 보니 좀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여주인공에게서 이런 차분한 이미지를 오현석 감독이 원했다면, 왜 김민경을 캐스팅하지 않고, 윤차희를 여주인공으로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남, 여 주인공이 확 눈에 띄는 외모와 개성이 없고, 이름 또한 알려진 배우들이 아니다 보니, 오현석 감독이 주연을 정했을 때 확실히 투자자나 방송국과의 조율이 힘들었을 것 같았다.
다른 조연들을 봐도 뭔가 눈에 들어오는 개성을 가진 조연들이 없이 무난한 인상의 배우들만 있었다.
슈퍼모델 출신으로 꺽다리 여자 조연전문인 ‘숙희’역의 이정화와 나와 썸을 타게 되는 ‘슬기’ 역의 최진아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는데, 이게 또 웃겼다.
미스 춘향 출신이자 주연인 ‘지희’역의 윤차희 보다도 꺽다리 여자 조연인 숙희 역의 이정화가 더 지명도가 있었고, 슬기 역을 맡은 아역출신 배우 최진아가 개성이나 배우로서의 경력상 여주인공에 더 어울렸다.
그런 이들보다 더 뛰어난 부분이 있으니 오현석 감독이 여주인공으로 윤차희를 캐스팅 했겠지만, 지금으로는 그런 특별함이 보이지 않았다.
“자, 다들 다 온 것 같으니 시작해 볼까?”
활짝 문을 열고 들어온 오현석 감독의 뒤로 작가와 배우들이 같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마 다른 곳에서 미리 만나서 이야길 하고 들어온 것 같았다.
주연을 맡은 여자배우보다 오히려 여자 조연들이 더 이름이 알려져 있었기에 조금 미묘한 긴장감이 돌긴 했다.
“확실히, 멀리서 봐도 ‘연예인, 아이돌이에요’ 의 아우라가 있는 소원이가 앉아 있으니 분위기가 확 달라지네. 역시 아이돌이 최고야!”
오현석 감독이 긴장을 풀어주겠다고 유머 비슷한 말을 몇 마디 하고 리딩을 시작했는데, 이미 주연들의 경우에는 감독과 작가와 같이 리딩연습 뿐만 아니라 연기 리허설까지 맞추어 본 것처럼 쉽게 쉽게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가는 부분에서도 한 번에 쭉 연기를 이어나가자, 다들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오히려 능숙하고 뻔뻔하게 연기를 하는 나에게 놀라서 그런지 상대역인 최진아가 버벅거렸다.
‘이야, 요즘 뜨는 아이돌을 홍보를 위해 섭외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부산 사투리 제대로다.’
‘그러게, 주연부터 조연까지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기 좀 한다는 무명들을 캐스팅하다 마지막으로 아이돌을 끼워 넣길래 투자자 입김이 있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네. 의외로 연기를 너무 잘하는데.’
‘아이돌이라 로봇연기 하려나 했는데, 다른 배우들에게 빠지지 않는데.
연기가 좀 부족해도 홍보빨로 생각해서 그냥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MSM 출신이라 그런지 연기도 좋네. 기본 이상이야.’
‘유명 아이돌에, 얼굴에 노래에, 연기까지 되면 세상 참 불공평하네. 세상 혼자 사는구나.’
다른 배우들이 나를 슬쩍슬쩍 쳐다보는 눈빛을 느끼다 보니 김영민 선생님과 했던 감정의 단계조절이 확실히 연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기뻤다.
“사실, 소원이가 제일 많이 걱정되었거든. 첫 연기이고, 아이돌이라 보니 연기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준비를 못할 거로 생각했어.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네. 대본을 아예 안 보고 할 정도로 연습을 많이 했어. 아주 마음에 들어.”
감독의 말에 스냅 사진을 찍고 있던 기자가 나와 상대역인 최진아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고, 배우들뿐만 아니라 다른 관계자들도 이미 대본을 다 외우고 대본 리딩을 하는 나에게 놀랍다는 반응을 보여줬다.
‘오현석 감독이 배우 보는 특별한 눈이 있다더니 진짜네. 아이돌 중에서 배우 재능있는 애들을 어떻게 저렇게 잘 알아보는 거지.’
‘미스 핑크의 지수 이후에 또 아이돌 스타 배우가 나오는 거야?’
‘아무리 부산 출신이라지만, 사투리와 서울말을 완전히 억양 다르게 쓰는 게 대단한데. 그냥 말 할 땐 사투리가 전혀 안 느껴져.’
‘MSM에서 제대로 배우 만들어 보냈네. 소녀연대의 윤하보다 더 연기적으로는 완성된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제작 발표회나 언론보도로 드라마 편성확정이나 홍보를 안 하는 거지?’
‘그게 투자문제 때문이래, 지금도 남, 여 주연배우 변경하라고 압력이 있게나 봐. 그러다 보니 아직 홍보를 못하는 거지. 날짜는 다가오는데, 아직 확정발표도 못 하고. 참 시작부터 이리 꼬이니 결과가...흠...그냥 그렇다구.’
대본 리딩은 보통 1화 분량을 하는게 보통인데, 다들 연기를 잘해서 그런지 막히는 게 없어서 2화 분량까지 쭉 치고 나가 버렸다.
“다들 너무 좋아, 첫 촬영일정 조율 중이니깐 컨디션 조절 잘하고, 최대한 에너지를 채워두고 있어. 한 번에 터트려야 하니깐.
그리고, 소원이도 오늘 와서 알겠지만, 배우들의 지명도보다 소원이의 인기나 지명도가 더 높아. 그래서 소원이의 역할이 참 중요해. 매니저님도 최대한 홍보나 기자 간담회 같은 스케줄에 최대한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 예.예.”
뒤에 앉아서 멍때리던 기봉이 형은 갑자기 자신이 언급되자 네네 거리며 인사를 했다.
첫 대본리딩 기념으로 다들 모여서 기념 촬영을 하고 서로 간에 연기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해주었다.
오현석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가려고 했는데, 오 감독의 스케줄 표에 음악감독과 미팅이라고 적혀있는 게 눈에 보였다.
“저 감독님 드라마 OST는 혹시 어떻게 되고 있는가요? 벌써 전곡이 다 나왔나요?”
“아직이지. 벌써 OST가 다 나오면 드라마 찍기 쉽지. 왜? 소원이도 가수니깐 OST에 관심이 있어? 한번 한 곡 해볼래?”
“그렇지 않아도 한번 여쭈어 보고는 싶었거든요. 요즘 작사, 작곡 쪽도 공부하고 있어서요. 진짜 OST에 참여해도 되는 거죠?”
“그래 참여해 주면 우리가 좋지. 드라마 홍보할 때 OST에 윤소원 자작곡이 들어간다고 하면 언론 플레이 하기도 좋고, 만들어 둔 곡이 있으면 다음 주까지 노래 들고 한번 와봐. 음악감독하고 한번 들어보고 의견을 맞추어 보자고. 그렇지 않아도 OST 디지털 음반 형태로 12곡 만든다고 음악감독이 고생하고 있거든.”
“감사합니다. 곡이 안 좋더라도, 꼭 넣어 주셔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메인 테마곡은 안되더라도 넣어 줄 테니깐 가지고 와. 그리고, 연기는 MSM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거야? 전혀 MSM의 느낌은 안 나던데.”
“감독님 말 듣고는 따로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아, 그래서 그런데, 연기 지도하시는 선생님과 상대 배역을 해주고 있는 배우분에게 대본을 드려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죠?”
“오늘 연기했던 게 자연스럽다고 했더니, 그냥 나온 게 아니었네. 연기 지도해주는 선생님도 있고, 별도의 상대 배역도 준비해가면서 철저히 준비했다니 연기에 임하는 자세가 마음에 드네. 연기 준비를 위한 거니 당연히 공유하도록 해. 유출만 안 되게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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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석 감독 말이야. 위에서 누르는 압박이 심한가 본데, 촬영장에서 감독은 왕이야. 그런데, 그런 왕이 너랑 나에게 잘 부탁한다고 하다니, PLUS에 있을 때 배우들 스케줄을 많이 진행했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다.
하긴, 지금 출연진 중에서 너 빼곤, 대중에게 크게 이름을 알린 배우도 없고, 지명도도 고만고만하다 보니 투자자나 방송국 입장에서는 쪼을 수밖에 없긴 하더라.”
“그렇겠죠? 분명히 오현석 감독 정도 되면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서로 하겠다고 달려들었을 텐데, 왜 그런 배우들을 마다하고 거의 신인급들 배우들로 채웠을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한두 명이면 그 한두 명 배우에게 뒷돈을 받든 로비를 받든 했다고 하겠지만, 너 빼곤 전부 다 크게 유명한 배우가 아니다 보니 이건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너도 많은 기대는 말고, 그냥 첫 연기 해본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워야 할 것 같다.”
“이미 마음을 비운 지 오래입니다. 대현 형 기획사인 게놈프로젝트로 가주세요. 대현 형과 같이 OST 작업을 하기로 했어요. 저녁 스케줄도 없으니 아마 4~5시간은 작업실에 있을 것 같아요. 형도 밀린 은행 일 같은 거 처리하고 좀 쉬세요.”
“그래 고맙다. 하지만, 회사 들어가 봐야 해.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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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가 그 드라마 OST도 참여하게 되었다고?”
“네, 본부장님. 엔오원에 작사 작곡하는 멤버가 있는데, 그 멤버랑 같이 OST 작업한다고 해서 작업실에 내려다 주고 오는 길입니다.”
“소원이 실력은 어때? 음악적으로.”
“제가 배우들만 따라다니며 매니저 일을 배워서 음악은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번에 전설의 명곡에서 부른 ‘애희’ 편곡을 할 때 보니 그냥 뚝딱뚝딱하더니 노래를 편곡하더라고요.”
“흠. 따로 한번 음악쪽 사람을 붙여봐야 겠네.
출연한다는 ‘그때 그곳에서’ 출연진들 보니깐 무게감이 하나도 없던데, 배우 매니저 했던 네가 보기엔 어때 보여? 제대로 나올 것 같긴 해?”
“리딩하는걸 보니 다들 연기는 꽤 하던데, 본부장님 말씀처럼 출연진들 전체적인 무게감이 좀 부족하긴 합니다.”
“그럼, 우리가 OST에 노래 몇곡 더 넣고, PLUS 소속의 배우 몇 명을 집어넣는 조건으로 투자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김 매니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곳에서’ 드라마 자빠지기 직전이야. 투자처에서 배우들 캐스팅 안 바꾸면 투자 않겠다고 엄포를 놨거든.
그래서 대본리딩까지 했는데, 제작 발표회나 언론홍보를 안 하고 있는 거야.
네가 보기엔 어떨 것 같아? 오 감독이 고개 숙일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