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그때 그곳에서. (2)
“뭐? 오현석 감독이 우리 강사진에게 연기 지도는 받지 말라고 했다고?”
회사에서 운영하는 연기 스쿨 강사진 4명 중에서 가장 젊은 강사인 류인해는 특유의 뾰족한 소리로 목소리를 높였다.
“네. 그게...이틀 수업을 받은 것만으로도 MSM 특유의 연기어체가 몸에 배겼다고, 발음이나 기본적인 것만 교육을 받고 연기 지도는 받지 말라고 해서요.”
“이거 기분이 확 나빠지네. 다들 수업받는 오후, 저녁 시간에는 일정이 안 된다고 해서 널 위해 특별히 아침 8시부터 수업을 하고 있는데, 연기 지도를 하지 말라고 했다고? 현업에 있는 감독이 배우에게 말해서 우리한테 전달하게 하니 기분이 더 더럽네.”
“죄..죄송합니다.”
창 프로덕션의 연기 테스트 후 받아온 대본을 보면 볼수록, 혼자서 대본을 보고 준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청춘 로맨틱드라마이긴 하지만, 성(性)적인 것이 많이 들어간 내용이었고, 연애라인을 타게 되는 부분에서는 연습할 상대역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회사에 도움을 청해 이틀 연기 수업을 받았는데, 어제저녁 캐릭터 분석을 위해 만난 감독은 벌써 MSM 특유의 연기가 보인다고 연기 지도받는 걸 중지하라고 이야길 했다.
그래서, 그 이야길 연기 수업을 해주는 류인해 선생님에게 이야길 하니 아침부터 난리가 났다.
“MSM 소속의 배우들이 연기대상은 아직 타지 못했지만, 다른 기획사 소속의 아이돌들에 비하면 나름 준수한 연기를 한다는 평가를 듣고 있어.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 게 가르치는 내 입장에선 가장 기분 좋은 평가였고.
그런데, 뭐? MSM의 연기어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나도 기분 나빠서 이런 식으로는 수업 못 해. 네가 알아서 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해.
네가 위에 말해도 다른 선생님들도 안 해줄 거니깐 이제 회사에서 연기 관련 도움을 받을 생각하지 마.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해주니 호강에 겨워 똥을 싸고 있어 정말 짜증 나게.”
꽝하는 큰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류인해 선생님이 연습실을 나가버리자 나도 어쩔 수 없이 연습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류인해 샘이 화를 내면서 가시던데, 오 감독님 이야기에 화를 낸 거야?”
“네. 아마도 이젠 회사에서 연기를 배우는 건 불가능해진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도 잘 모르겠다. 연기 지도를 회사에서 받지 말라고 했으면 거기에 대한 해결방안도 오 감독이 알려줬어야 하는데. 에혀. 일단 학교 가자.”
고민하면서 학교에 왔지만, 실질적인 해결책이 없었다.
어제도 늦게까지 활동을 하고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기에 수업을 듣긴 들어도 고개는 계속 꾸벅거리며 졸 수밖에 없었다.
“자! 특성화 이동수업 시간이니깐 다들 반 찾아가. 윤소원! 일어나! 야, 누가 소원이 데리고 아무 수업이나 들어가라!”
일어나서 애들을 따라가는데, 특성화 수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장 가까운 오픈 교실로 들어갔다.
“배우지망으로 연기자 반에서 내 수업 듣는 학생들은 손들어 보세요.”
30살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는데, 회색의 슬렉스 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가진 잘생긴 선생님이었다.
“다행히 20명 중의 2명밖에 없네. 나머지는 댄스나 다른 전공이야?
오! 엔오원의 윤소원 맞지? 이야 유명 아이돌이 내 수업을 받으러 왔구나. 하하하.
일단 내 소개부터 하마 난 예종을 졸업했고, 연기자로 10여 년을 지내며 배운 연기 노하우를 너희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는 김영민이라고 한다.
전임이 아니라서, 학원에서도 가르치고, 이렇게 특성화 고등학교의 계약직으로도 가르치고 있다.
자 그럼, 대부분이 연기 초심자니깐 기본부터 하자.
여기 맨 앞줄 학생 발 연기가 뭐라고 생각해?”
자기소개를 하더니 바로 맨 앞줄의 학생을 지목해선 그대로 수업을 시작했다.
“음. 연기인 것이 표시가 날 정도로 ‘지금 연기하고 있어요’ 라고 보이는 게 발연기 아닌가요?”
“오 비슷해! 전공이 뭐지?”
“연출입니다.”
“미래의 감독님이네. 나중에 잘 부탁해. 하하
이 미래의 감독님 말처럼 발연기는 감정의 과몰입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의 함정이야. 내가 지금 막 연기를 하고 있어요. 하는 감정의 과몰입이 발연기를 만들어 내는 거야.
배우는 눈물을 흘리면서 연기를 하는데, 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배우의 감정을 이해를 못 하게 되는 거지.
뭐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
'괜찮아요? 많이 놀랬죠?' 같은 장길원의 무감정 로봇 발연기는 예외야.
그 사람은 일반적인 것과는 반대야. 답이 없는 자신만의 연기라서 그 연기를 벗어나기 힘들 거야.
자 그럼, 발연기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겠지? 내가 하는 4주 동안의 수업내용은 ‘발연기를 벗어나자!’라는 주제야.
자 다들 이 유인물 한 장씩 받아. 지정대본 연습을 해보자.”
“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쪽 대본인가? 막 나눠 주니깐 찌라시 대본이라고 해야 하나.”
“어? 이건 내가 아는 거다. 대본이 다 다르네.”
나는 물론이고 A4용지로 된 각기 다른 대본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자 다들 대본 받았지? 3분 준다. 대본을 보고 한번 파악해봐.
오디션 현장에 가면 이렇게 갑자기 준비 안 된 대본을 줄 때가 있어. 이건 짧은 시간 동안 배우가 대본을 얼마만큼 해석을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하는 테스트야.
한마디로 자본으로 만들어지고 준비된 자유연기가 아니라, 배우가 가진 본능, 자질을 바로 볼 수 있는 테스트야.”
김영민 선생님의 이야길 듣고 보니, 내가 창 프로덕션에 가서 오디션을 받은 게 생각이 났다. 개인이 미리 준비해가는 자유연기보단 아마도 이런 지정대본 연기가 배우의 자질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았다.
실제로 나도 지정대본에서의 억양 덕분에 캐스팅을 받은 것이기에 이런 것들을 알려주고 학생들이 하는 지정대본 연기에 대해서 일일이 감평을 해주고 있는 친절한 김영민이란 사람에게 신뢰가 갔다.
“그럼, 이번엔 유명인 소원이도 한번 해 볼까.
대본은 뭐 받았지? 어디 보자. 소원이는 유명한 걸 잡았네.
영화 ‘베테랑 형사’의 유아일의 대사네. 한번 해봐.”
[1. (의자에서 몸을 뒤틀며 표정에는 짜증을 넣어서) 기사님 맷돌 손잡이 알아요?
2. (짜증이 나지만 참고 이야길 하는 톤)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 해요. 어이.
3. (좌우 연기자들을 돌아보며) 맷돌에 뭘 갈려고 뭐 집어넣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손잡이가 빠졌네
4. (양손을 활용한 감정표현을 한다) 이런 상황을 어이가 없다 그래요.
5. (내적 짜증이 살짝 나온다) 황당하잖아. 아무것도 아닌 손잡이 때문에 해야 될 일을 못 하니깐
6. (황당과 어이가 없는 걸 표현하며)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네.]
아까 김영민 샘이 이야기한 대본을 얼마만큼 해석을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했는데, 이걸 유아일과 똑같이 하기보다는 개성을 넣어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실 앞으로 나가 준비된 의자에 앉아서 지정대본 연기를 시작했다.
1. 아재요! 맷돌 손잡이 알고있으요?
2. 맷돌 손잡이를 ‘으이’라고 해요. 으이.
3. 맷돌에 뭐를 넣어가꼬, 맷돌을 돌리가 그걸 갈아뿔라 카는데, 손잡이가 없는기라.
4. 이렇게 된 상황을 으이가 없다 그라는기라.
5. 골 때리잖아. 좃도 아닌 손잡이가 없어가 돌리야 되는 맷돌을 못돌리잖아. 안 그래?
6.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으이가 없네. 으이가.
“오옷~” “와~ 역시 연예인인가? 연기하는 표정이 다르다.”
“대단한데 이걸 사투리로 대사를 쳐버리네.”
“근데, 이거 엄청 유명한 거니깐 MSM에서 미리 이렇게 해라고 배운거 아닐까?”
부산 사투리로 연기해야 하는 ‘그때 그곳에서.’ 수찬이 역을 위해서라도 한번 사투리로 변경해서 해봤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아주 좋아! 지정대본이라지만, 무조건 유아일과 똑같을 필요는 없는 거야.
이런 캐릭터의 변형을 할 수 있어야 제대로 연기를 하는 거지. 소원이는 본인만의 개성을 가진 대사를 하는 연기자가 될 수 있는 재능이 있어.
내가 매의 눈으로 자세히 봤는데, 데뷔한 연예인이라 그런지 바로 앞에서 친구들이 쳐다보고 있는데도 떠는 것도 없고, 굉장히 억양이나 말투가 자연스러워. 마치 본인의 평소 말투와 행동인 것처럼 연기를 하네.”
내가 연기를 하는 중에도 김영민 선생님은 내 말투와 억양까지 아주 자세히 관찰했던 것 같았다.
“예능을 하는 희극인들도 마찬가지야. 똑같은 콩트의 대본이라도 강호동이 하는 콩트와 유재석이 하는 콩트는 그 느낌이 달라.
연기도 마찬가지야. 그 역을 맡는 배우에 따라 그 역할이 극과 극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라고. 다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에~”
“소원이 혹시 자유연기 되는 거 있어?”
“예전 SBC 드라마 ‘피아노’의 한억관의 연기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 자유연기가 준비되어 있다는 거라면 이미 배우 쪽으로도 오디션을 받거나 진출할 단계라는 거구나. 음, 그런데 한억관도 사투리 연기잖아.
고정시키지 말고, 다른 표준어 쓰는 자유연기는 없어?”
“급하게 잡힌 드라마 오디션 때문에 준비한 거라 그거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보자. 어, 그래 이거면 되겠다. 이거 보고 한번 지정연기 해봐.”
김영민 샘이 나에게 다시 준 대본은 내가 모르는 대본이었다.
몇 분간 대본을 보곤 의자에서 일어나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오~ 이거 뭐야? 무슨 대본이지?”
“야, 누구 드러누워서 시작하는 대본 들고 있는 사람 있어?”
“우리가 받은 것 중에서 누워서 시작해라는 대본은 없는데.”
“대본 서류철에서 꺼낸 거면 우리에게 나누어준 대본 중에 하나라는 소린데, 누워있는 설정이 없다면, 저것도 소원이가 캐릭터 변형을 준거라는 소리잖아. 2~3분 만에 캐릭터 분석이 되는 거야? 개 소름.”
드러누워선 왼쪽 다리를 세우며 오른손으로 배를 긁적거렸다.
“야! 돼지야! 김 돼지! 빨리 와봐.
오빠 급하다! 빨리 와!
방에 불 끄라는 거 절대 아니야, 어서 와 봐 큰일 났다!
헐리업~ 컴온 베이비~~
우씌~”
짜증 나는 말투를 뱉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야, 김향기! 너 이리 빨리 안 뛰어오지?
오빠 말이 말 같지 않냐?
이 오빠가 응. 휴가를 나와서 집에 있으면서 부르면 뛰어와야지. 생까냐? 엉?
오빠가 그냥 목마르다고, 야!! 물가 지고 와!!”
“오~ 거기까지. 다들 박수!”
“짝짝짝”
김영민 선생님이 준 대본은 독립영화의 대본으로 군에서 휴가 나온 오빠가 빈둥거리며 동생을 부르는 연기였는데, 동생을 이렇게 살살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실제 해본 것이기 때문에 나름 디테일 있게 나온 것 같았다.
“오, ‘충공깽’ 이란 독립영화 대본이네. 누워서 시작한다거나 다리 세우고 하는 저런 설정은 대본에 없어.”
“그래, 너희들 중에 이 대본 들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방금 소원이가 한 누워있거나 배를 긁적거리는 상황 설명은 없었어.
그런데, 군에서 휴가를 나와 보지도 않은 소원이가 이 대본만 보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거야. 대단하지 않냐?”
“MSM 소속이니깐 배운 거 아닐까요?”
“야, 소원이 국민아이돌 – 프로듀스99 통해서 데뷔했잖아. MSM에 들어간 지 6개월도 안 되었어. 더구나 활동도 계속하고. 배울 시간이 없었을걸.”
“그러네. 그럼, 우와 타고난 거야?”
“햐. 노래만큼 연기도 타고난 거네. 재능 충이네. 이 더러운 세상. 얼굴 잘생기고, 노래 잘 부르는데 연기재능도 준거야?”
“세상 혼자 사네. 혼자 살아. 부럽다.”
“애들 이야길 듣고 보니 이해가 되네.
MSM 소속인데, MSM 특유의 연기 느낌이 없길래. 뭔가 다른가 생각했는데, MSM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구나.
그래서, 뭔가 자유분방함이 느껴져.
지금의 그 자유로운 연기의 느낌을 잘 지켜나가야 할 거야.”
오현석 감독에 이어, 김영민 선생님까지 MSM 특유의 연기를 안 닮아서 좋다고 하자, MSM에서 연기 수업을 받지 못해서 불안해했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오현석 감독뿐만 아니라, 김영민 선생님까지 그런 MSM의 특징을 알아채는 사람이 많다는 말은 그 특징이나 연기 버릇이 없어야 좋은 배우라는 말처럼 들렸다.
“소원이는 억양이 자유자재네. 부산 사투리 억양과 서울말, 표준어, 군대 말투에 영어까지 그 억양과 발음이 자연스러워, 고정된 억양이 아니야. 그대로 따라 하며 금방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억양을 가진 건 엄청난 재능이다. 선물이야.
이런 재능이 있으면 연기가 참 쉽거든. 나도 부러운 재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