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첫 녹화(1).
“작가 누나랑 전화통화를 좀 오래 했는데, 이야기 안 해주려는 거 겨우겨우 들었다.
첫 촬영에서 심사 무대와 심사평을 들은 이후에 등급이 매겨지게 된다더라. 그리고, 거기에 따른 인터뷰를 한다고 했거든.
그때 난 무조건 눈물 짜낸다. ‘선즙필승(先汁必勝)’이야.
어떻게든 먼저 눈물을 흘려서 시청자의 눈길을 잡아끌고, 여자 팬들에게서 모성본능을 모아야 해.
Nnet에서 했던 슈퍼스타 오디션에서도 먼저 눈물 짠 놈이 이겼다고.
무조건 선즙필승이야. 필승!”
일주일간의 합숙으로 인해 짐이 많아져서 KTX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가는 내내 강제로 경태의 선즙필승에 대해서 강의를 들어야 했다.
촬영은 내일 오후 2시였지만, 하루 일찍 올라가서 컨디션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야야. 저기 재네들 안 잘생겼냐? 모델인가? 봐봐. 존잘러들이다.”
“어디? 오~ 진짜네. 대박이다.”
“도시락 냄새가 가득한 KTX 안이 힐링 될 정도네. 쩐다. 모델들인가?”
“그렇겠지. 기럭지 장난 아니다. 난 97점.”
“난 95점. 나보다 어려 보여서 감점요소야. 맞은편에 애는 94점. 옆엔 매니저인가?”
대구에서 탄 여대생들인 것 같았는데, 건너 건너있는 우리에게 다 들릴 정도로 품평을 했다.
“우씌 난 왜 매니저 취급이냐.”
“경태 넌 아티스트니깐 다른 거지.”
“동정하지 마. 그게 더 가슴 아파 인마. 흐그흐그.”
계속된 여대생들의 품평 덕분에 다른 좌석에 있던 사람들까지 힐끔거리며 우릴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동반석에 앉아있다 보니 나와는 아예 눈을 마주치며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눈이 서로 마주치는 게 너무 뻘쭘해서 선글라스를 찾아 쓰고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숙소도 상암동 CH E&M건물이 있는 인근으로 잡았는데, MBS방송국의 상암동 신관과 SBC방송국의 프리즘 타워가 다 몰려 있다 보니 공개방송 방청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숙소에 많았다.
촬영 시작 시각은 내일 오후 2시부터였지만 아침 9시부터 방송국으로 향했다.
애들이랑 같이 잠을 자면서 미리 이야기 한 것처럼 프로듀스 99 제작진이 보이면 무조건 인사를 했다.
“촬영감독님 수고하십니다. 연습생 윤소원입니다.”
“수고하십니다~”
“야! 너네들 사전 선거운동 아니냐?”
“아, 작가님. 그게 일찍 도착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요.”
“너네는 어디 보자. 3층에 14번 방 대기실로 가면 될 거야. 개인연습생들은 같이 대기실을 쓰니깐 거기에 가 있으면 통보해줄게.”
“네 감사합니다.”
“오옷! 진짜 있다. ‘프로듀스 99 출연자 대기실’ 개인연습생 김경태, 이진욱, 윤소원. 이름이 딱 적혀있네.
와 대박! 사진 한번 찍자. 이런 게 다 기념이지. 첫 출연자 대기실이니 바로 이 장면이 역사가 될 거야.”
경태가 자기 이름이 들어간 출연자 대기실 종이를 본 것만으로 흥분해서는 배경으로 사진을 몇 번이나 찍었다. 물론, 진욱이도 찍었고, 나도 찍었다.
“대기실에는 간식 같은 게 있다고 하던데, 그냥 물만 있네. 아침에 시리얼 바 하나만 먹고 왔더니 배고픈 데 뭐 먹으면 안 되겠지?”
“절대 안 돼. MSM에서 나오는 아이돌 봤지? 늘 말라 있어.
록스타 못지않게 아이돌도 살이 찌면 끝이야. 특히나 이런 방송 녹화에는 절대 살찌면 안 돼 참아야 해.”
“햐..힙합씬은 클럽에서 그냥 양주병 나발 분다던데, 아이돌은 왜 이리 제약이 많냐.”
“그럼 ‘쇼 미더 달러’ 가던가. 네가 먹을 거 이야기하니깐 나도 배고프잖아. 먹는 이야기 하지마.”
[똑똑]
“네! 들어오세요!”
한 시간 넘게 무대연습과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반사적으로 들어오라고 이야길 했다.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개인연습생 윤소원입니다.”
내가 먼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자, 경태와 진욱이도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개인연습생 이재한입니다. 개인연습생 대기실 맞지요?”
“네 맞아요. 들어오세요.”
뻘쭘하게 들어와 의자에 앉는 이재한은 기타를 메고 왔는데, 내 기억 속에 있던 그 이재한이 맞았다.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 개인연습생으로 등장해 최종 멤버로 뽑혀 데뷔했던 멤버였다. 그리고, 만들어진 ‘원더원’ 활동이 끝이 나자 아티스트 전문 기획사로 들어가 솔로로 데뷔했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다만, 몇 년 후에 아역출신 배우로 탑 배우가 되었던 신윤정과 속도위반 결혼을 한 것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땐 신윤정과 결혼하는 게 부러워서 악플도 달았던 게 기억이 났다.
‘가만, 내 기억으로는 분명히 다른 개인연습생들과 합동 무대를 펼쳤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때와 달라진 것인가?
그러고 보니, 개인연습생이 7명인데, 그때와 숫자가 다른 건가.’
시간이 흘러 3명의 연습생이 더 도착했고, 메이크업하는 누나들이 와서 얼굴을 한 번씩 봐주고 다듬어 줬다.
“개인연습생 일곱 명 다 왔지요?
이 이름표를 배와 가슴 사이에 다 붙이세요. 촬영순서가 되면 알려드리러 오겠습니다. 화장실도 가시면 안 됩니다.
나중에 촬영 전에 화장실 갈 거니깐 참아주세요.
참. 이제는 핸드폰 다 꺼두시고요. 촬영하시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FD인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와서는 우리 이름이 적혀있는 이름표를 주고 갔는데, 그 이후로 한참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예정되어 있던 오후 2시가 훨씬 넘었지만, 녹화가 시작하거나 진행되고 있다는 말도 없었고, 진짜 대기실에서 대기만 할 뿐이었다.
“야, 나 방광 터지겠는데, 환장하겠네.”
“그러게 물 좀 작작 마시지.”
“긴장되니깐 물이 계속 들어가지. 아 짱나. 아! 밖에서 아까 그 사람이 ‘대광기획사 연습생들 지금 나갈게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계속 촬영 중이고, 촬영순서에 따라 연습생들을 데리고 가는 것 같아. 그 큐시트라도 좀 주고 가지.”
경태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해보니, 숫자가 적혀있는 의자를 두고 펼쳐지는 분량에서는 우리가 배제된 것 같았다.
전생에서도 개인연습생의 입장은 아예 다 편집이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숫자 의자 부분의 방송에서는 1위에 앉던 못 앉던 무조건 빨리 입장하는 것이 분량확보에는 이득이었다.
‘이렇게 되면 1위 자리에 대한 분량확보는 포기하고. 심사평가 무대에만 올인을 해야 하는구나.’
*
*
“자, 첫 출연자 뉴미디어 라인 소속 3명 들어옵니다. 2번 카메라! 다시 4번 카메라. 오케이”
“헐, 우리가 처음이야? 우와 이 의자 산 장난 아니네.”
“압도되는데. 우와. 어쩌지 어디 앉지?”
“군대에 가도 중간만 하라고 했어. 중간만 가자. 카메라 잘 받는 중간에 앉자.”
“그래그래.”
녹음감독이 뿌려주는 소리를 헤드셋을 통해 듣고 있는 박종환 책임PD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실장이 자기애들 패기 있다고 돌풍의 핵이라고 해서 첫 입장을 시켰는데, 그릇이 딱 중간크기밖에 안 되는 애들이네.”
“그렇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일단 그쪽들이랑 딜한 데로 6개 기획사 차례로 입장시켜볼게요.”
“내가 사전 인터뷰에서 그 애들 다 봤잖아. 6개 기획사에서는 진주가 없었어.
일단 편집감독도 같이 보라고 하고, 입장 순서 관계없이 흥미가 생기는 애들 위주로 편집순서 마음대로 편집해도 된다고 전달해줘.”
*
*
[팟!]
숫자 의자의 맞은편 스크린에 DS를 형상화한 로고가 떠올랐다.
“오 대상프랜차이즈다”
“거기 이제 여자 아이돌만 키운다고 안 했어?”
“모르지. 그런 소문은 있는데, 그래도 한때는 최고의 기획사였잖아.”
“우린 패기있는 신생이고, 저기는 전통있는 명문이니깐 좀 다르겠지?”
“안녕하십니까? 대상프랜차이즈 연습생입니다.”
“야, 인사도 다르네. 우린 그냥 쭈뼛쭈뼛했는데, 우리 다시 내려가서 인사할까? 우리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냥 가만히 좀 있어. 중간만 가자. 오옷! 1위로 올라간다.”
팀버랜드의 노란색 워커에 위아래 청청패션에 붉은 마후라로 멋을 낸 대상프랜차이즈 3명의 연습생들은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비어있는 상위권으로 움직였다.
“여기 의자들 비어있어서 그냥 앉으면 되는 거지요?”
모두가 다 아는 상황이었지만, 차고 있는 인 이어 마이크를 의식해서 한 번 더 물어보곤 대상프랜차이즈 3명의 연습생이 1,2,3위 의자에 앉아 버렸다.
“오~ 강단 있네.”
“야, 우리도 저기 앉을걸. 중간보다 저기가 더 카메라 받는 자리네.”
“우린 간이 작아서 저기 앉지도 못해. 재들도 얼굴 붉어지는 거 봐라. 나름대로 다 긴장해서 앉은 거야.
네가 저기 앉았으면 긴장해서 오바이트 했을 거다.”
“오늘 아침도 안 먹어서 오바이트는 안 했을 듯. 엇, 또 기획사 로고 떴다. 파파야엔터?”
“와, 레게머리다. 간지 있네.”
*
*
“1위 앉은 애가 대상에서 온 ‘류진율’이지?”
“네, 사전 인터뷰때 자기가 대상프랜차이즈를 다시 최고의 기획사로 키우겠다고 했던 애입니다. 21살에 서울예대 재학 중입니다.”
“와꾸도 그럴 듯하고, 용기도 있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더니, 그래도 대상에는 진주가 하나 있었네.
1위 자리 앉고 하는 거 편집 잘 넣어줘.
아차! 그러고 보니 자리에 대해서 생각을 못 했네.”
“어떤 생각요?”
“1위 자리를 서로 뺏을 수 있게 해야 했는데, 그래야 연습생들 간에 서로 감정싸움이 생기고 자리를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화제가 생기는데, 아 참 내가 이걸 생각 못 했네. 아쉽다.”
“그럼 지금이라도 연습생들에게 알릴까요?”
“이미 늦었어.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숫자 의자 착석할 때는 1위 자리 밀어내기 가능한 거로 미리 공지하자. 감정 뽑아내는 꿀통을 하나 놓쳤네. 아쉽다.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