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인생의 의미 (완결)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뜬 준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옆에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루치아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침잠이 많은 그녀였다.
이불을 살짝 걷은 준은 그녀의 배를 바라보았다.
꽤 부풀어 있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더욱 불룩해질 것이다. 그리고 새 생명이 태어나 우렁찬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느낌.
그 설레는 느낌이 전해졌을까. 곤히 잠들어 있던 루치아가 눈을 살짝 떴다.
“……벌써 아침이에요?”
“좀 더 자. 오늘은 내가 대진 볼 테니까.”
“그래도요.”
준은 미소를 지으며 루치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포근한 손길에 루치아는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준은 다시 이불을 잘 덮어 주고 방을 나섰다.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치유사복을 걸쳤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쏴아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가 흔들렸다.
날씨는 쌀쌀했다. 어느덧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이 찾아왔다.
이제는 진료소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출근하기 위해서는 조금 걸어야 했다. 오솔길을 따라 조용히 걷다 보니 근사한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곳엔 얼마 전 공사를 마친 아카데미 건물이었다. 환자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준은 동시에 진료소 건물도 따로 하나 지었다. 임상 진료와 연구를 할 수 있는 곳을 구분하고 입원 환자들을 한곳에 모아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다 보니 진료소의 규모가 커졌다.
이제 사람들은 이곳을 진료소라고 부르지 않는다. ‘엘누아르 병원’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생겼으니까.
“원장님 오셨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견습 치유사들이 하나둘 인사를 시작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반갑게 받았다.
안으로 들어온 준은 제일 먼저 진료현황판을 살폈다.
‘어제 응급 환자는 한 명. 당직의는 알렌 선생이었군. 별문제는 없었네.’
혹시 몰라 준은 차트를 다시 살펴본 뒤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알렌이 합류한 이후로 준은 당직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제 급한 환자가 생기면, 늦은 밤이라도 언제든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가까운 거리는 왕진도 갔다. 아침까지 기다리며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현재 엘누아르 병원에 소속된 치유사는 모두 일곱 명. 일주일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당직에는 원장인 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진료를 했다.
“원장님.”
돌아보니 알렌이 서 있었다. 피곤하지만, 그는 보람찬 얼굴이었다. 드디어 이곳에서 적성을 찾은 것이다.
“당직 보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 들어가서 좀 쉬시지요.”
“그러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연구 자료 좀 검토해 주십시오.”
“얼마든지요.”
알렌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숙소가 아니라 얼마 전 새로 지어진 연구동으로 향했다. 그는 준이 고안한 표적치료에 어울리는 새로운 약물을 개발하고 있었다.
준이 표적치료법으로 아레스 공작을 치료한 지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그네스는 왕립학술원에서 훌륭하게 발표를 마쳤고, 이후로도 왕도에 남아 표적치료법을 수많은 치유사들에게 전파했다.
그 이후로 치유사들은 보다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알렌도 그중 하나였다.
“정말 알렌 선생님은 열정이 대단하셔서 힘들다니까요.”
익숙한 목소리.
이번엔 브로콜린이 나타났다. 왕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즉시 누아 마을로 낙향했다. 준이 그를 연구원으로 초빙한 것이다.
비록 치유사는 아니지만 훌륭한 공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어 알렌의 연구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성격은 서로 상극이었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와도 잘 맞았다.
“잘 먹고 좋은 곳에서 연구하는 데 뭐 그리 불만이 많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은 다른 문제에 천착하게 되는 법이라고요.”
“꽤 철학적이군.”
“이 기회에 전공을 바꿔 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농담은 좀 농담으로 받아 주시면 안 됩니까?”
어깨를 으쓱한 준은 진료실로 걸음을 옮겼다.
일곱 명의 치유사들이 진료를 하고 있는 그곳은 굉장히 넓었다. 환자들이 대기할 수 있는 공간과 견습 치유사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그중 가장 끝에 있는 진료실로 향했다. ‘엔도버’라는 이름이 문에 걸려 있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지만 준은 가벼이 노크했다.
“오늘이 첫 진료지? 기분은 어때?”
“떨려 죽겠는데요? 한때 치유사라는 직업을 우습게 봤던 과거의 저를 반성합니다.”
엔도버는 때마침 치유사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긴장한 나머지 반대로 걸쳤다. 피식 웃은 준은 옷을 바로 입혀 주었다.
“배운 대로만 하면 된다. 환자들은 널 믿고 오는 거니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불안감을 주는 것도 병을 키우는 원인이 되는 거 알고 있지?”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래.”
준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곤 밖으로 나왔다.
가업을 물려받겠다던 그가 의학부를 졸업하고 치유사가 됐던 건 좀 의외였다. 그리고 실습을 받기 위해 엘누아르 병원으로 내려온 건 더더욱 의외였다. 겉으로는 조용한 곳에서 편히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아직 준에게 배워야 할 게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간을 확인한 준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릴리를 불렀다.
“우리가 이 세계로 온 지도 꽤 지났지?”
“그렇죠. 햇수로 이제 4년 차니까.”
“그간 고생 많았다.”
“잉?”
릴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뒷걸음질까지 치면서.
“토사구팽? 이제 제가 더 이상 쓸모없어졌나요?”
“그런 거 아니야.”
“그간 고생이 많았다니! 우리 주인님이 이렇게 상냥할 리가 없다구!”
준은 피식 웃으며 아공간 창고를 열더니, 천상의 빛을 머금고 있는 작은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걸 본 릴리가 화들짝 놀랐다.
“천공의 씨앗!”
“제대로 알고 있군.”
“그걸 어떻게 가지고 있어요?”
“루치아가 줬다. 언젠가 필요하면 쓰라고 하더군.”
릴리는 멍하니 그 씨앗을 바라보기만 했다. 영적인 존재를 단번에 최고의 존재로 승격시켜 줄 수 있는 위대한 아이템이었다.
즉, 자신이 사용한다면 당장이라도 페어리 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준은 그것을 릴리에게 건넸다.
“네가 원한다면 가져라. 지금이라도 페어리 퀸이 되기는 늦지 않았으니까.”
“정말요?”
“마음 바뀌기 전에 가져가.”
“음…….”
그녀는 손을 뻗었지만 천공의 씨앗을 잡진 않았다. 무언가 깊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그녀는 손을 다시 거두었다.
“왜?”
“아기가 태어나는 건 지켜봐야죠. 다른 아기도 아니고 마스터와 루치아 님의 아이인데.”
“그거 보고 가려고?”
“음…….”
릴리는 또다시 고민했다. 그녀는 팔짱을 끼더니 도도하게 말했다.
“안 가요. 제가 없으면 진료소가 잘 안 돌아갈 테니 어쩔 수 없죠.”
“너 하는 일 없잖아. 잡일은 기린이 다 해 주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요망한 계집!”
입을 씰룩거린 릴리는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다. 흉측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마스터의 아이가 태어나면 제가 수천 년 동안 괴롭힘당한 걸 되돌려줄 거예요.”
“마음대로 해라.”
준은 천공의 씨앗을 다시 아공간 창고 깊숙한 곳에 넣었다. 이제 이 물건이 언제 다시 세상에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준은 확신했다. 릴리는 천공의 씨앗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그녀도 이곳에서의 삶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 페어리 퀸이 되는 것보다 더더욱.
그때,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소란스러워졌다.
“벌써 도착한 건가?”
준이 진료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화려한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아그네스였다. 그간 보지 못한 사이 한껏 성숙해져 있었는데, 상냥한 눈빛과 미소는 여전했다.
그녀는 얼마 전 왕립 병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시작된 누아 마을로 돌아왔다.
“어서 와라.”
“잘 계셨어요? 루치아 선생님은요?”
“늦잠.”
“여전하시네요.”
아그네스는 해맑게 웃었다. 이제 두 사람을 연결시켜도, 아그네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준을 향한 마음은 동경이라고 결론지은 상황이었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야 온전히 준을 스승으로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부터 엘누아르 병원에서 치유사로 일하게 된 아그네스입니다. 모두 잘 부탁드려요.”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들 중 아그네스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의 수제자이기도 했고, 왕도에서 맹활약을 펼쳤으니까.
미리 나와 있던 마리도 지팡이를 흔들며 인사했다. 어깨에 앉아 있던 흰 고양이도 앞발을 들었다.
아그네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하룬이 안 보이네요?”
“아직 안 온 거 같은데?”
아그네스는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가장 먼저 도착해 환영해 줄 줄 알았는데 지각이라니.
그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꽤 급해 보였다. 멀리서 지켜보니 허름한 로브를 두른 한 사내가 이쪽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하룬이었다.
“어서 와라. 때맞춰 도착했군.”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는 걸 보니 정신없이 달려온 듯했다. 몸을 가리던 가죽 갑옷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아주 지저분했다.
그 또한 대륙 곳곳으로 모험을 떠나고 오늘에서야 돌아온 것이다.
말에서 내린 하룬은 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깜짝 놀란 일행이 달려나갔다. 그중 아그네스가 하룬을 부축했다.
“어디 다치기라도 했니? 이 상처는 또 뭐야?”
“큰일…… 났어.”
“큰일? 무슨 일인데?”
하룬이 숨을 헐떡였다. 답답한 마음에 아그네스가 회복 마법을 영창했지만, 효과가 전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룬은 더욱 괴로워하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배가…… 고파.”
“뭐?”
“배고프다고. 이틀째 아무것도 못 먹었어. 급하게 오느라. 빨리 뭐라도 좀…….”
아그네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녀는 부축을 하던 손을 뺐다. 방심하던 하룬이 뒤로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쳤다.
“크억! 치유사가 환자 잡네!”
“모험 나가서 나이 덜어내고 왔니? 철들었나 싶었더니 어이가 없네. 정말. 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그네스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오랜만에 같이 술이라도 한잔하면 좋지 않을까?
소란이 잦아들고 어느덧 누아 마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늦은 밤, 준은 외투를 걸치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 *
밤이 늦었는데도 촌장의 집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마치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은은한 차향까지 느껴졌다.
준은 문을 노크하려 했다.
하지만 한 박자 먼저 문이 열렸다. 촌장 아론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맞았다.
“이런 우연이 있나.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마침 차를 우리던 참인데 한잔하고 가시겠습니까?”
“정말 우연입니까?”
“뭔들 어떻습니까? 일단 안으로.”
자리에 앉자마자 차가 준비되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좋은 차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얼마든지 있으니 더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시길.”
“촌장님.”
진지한 준의 말에 아론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마치 손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를 누아 마을로 오게 한 것도, 정착하게 한 것도 모두 당신의 의지입니까?”
“허허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운명이냐는 물음입니다.”
준이 눈을 빛냈다.
말없이 찻잔을 들이켠 아론이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움직였고, 다시금 준과 마주했다. 그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영주님께서 이곳에 정착하는 것을 도왔을 뿐이지요.”
“루치아가 강림한 것도?”
“강림이라니.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론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준은 더 이상 추궁할 수 없었다. 사실 그럴 마음도 없었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아론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꺼냈다.
“이미 정해진 것은 운명이 아닙니다. 그것을 비틀고, 때로는 자신의 길로 끌어들이는 게 진정한 운명이겠지요. 영주님께서는 운명을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본인의 인생을 살고 있는 거지요. 이것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묵직한 한마디가 가슴을 때리는 듯했다. 그제야 준이 웃었다. 우문현답이라고 할까. 준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 * *
그날 밤, 마을에 파티가 열렸다. 아그네스는 물론 하룬도 오랜 수련에서 돌아온 날이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술과 음식을 아끼지 않았다.
술잔을 단숨에 비운 마리가 빈 술잔을 내밀었다.
“술 더 주세요.”
“안 된다니까. 너 많이 마셨어. 그만해.”
“이거론 술의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없어요. 더 주세요.”
또박또박 말하고 있는 듯했지만, 마리는 주기를 배출하지 않고 고스란히 다 마셨다. 눈은 풀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그네스는 마리의 잔을 채워 주어야 했다. 하룬은 이미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포커 게임이 한창이었다. 카이엔과 볼카누스, 그리고 브로콜린 세 사람이 세기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칩이 먼저 바닥난 건 볼카누스 쪽이었다.
‘재미있게들 노는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편 바위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루치아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춥지 않아?”
“괜찮아요. 더 놀지 않고선 왜 왔어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니까.”
“어머나. 내 손발. 태교에 안 좋아요. 질 낮은 개그는 하지 말아요.”
그러면서도 좋은지 루치아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불룩한 배를 쓸어 만졌다. 건강한 태동이 들렸다. 그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애기 이름은 지어 놨어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많이 여유로워졌네요. 당신.”
“덕분에.”
준은 루치아의 손을 잡았다. 루치아도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유성이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소원을 빌었다. 그 소원은 똑같았다. 우리가, 그리고 여기에 모인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마치 소원을 접수했다는 듯, 유성이 반짝이며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 완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