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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74화 (174/175)

174화 월척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답게 왕립학술원은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하늘 위로 높게 뻗은 첨탑 아래로 붉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줄 서 있는 마차만 해도 수십 대가 넘었다.

“이야. 사람 좀 봐. 이게 다 오늘 발표 들으러 온 사람들이야?”

“아마도?”

하룬의 너스레 덕에 긴장이 풀렸었는데, 마차에서 내리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긴장감이 들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체 선생님은 어디 가신 거야? 이 중요한 순간에.”

“걱정하지 마. 곧 나타나시겠지. 어쩌면 벌써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고. 일단 들어가자. 페르디낭 각하께 인사도 드려야 하니까.”

“알았어.”

하룬은 아그네스를 정중히 에스코트했다.

오늘은 정기 총회가 아니라 특별 총회기 때문에 평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페르디낭 후작은 아비루나 왕국의 학자들과 치유사들은 물론 다른 왕국의 지식인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 모인 수만 해도 어림잡아 수백 명은 넘어 보였다.

이례적으로 국왕은 물론 왕녀 샤넬도 이번 발표에 참석한다는 의사를 표명했기에, 발표에 큰 관심이 없는 호사가들도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그네스 선생!”

그때, 아그네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로 들어가려던 두 사람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그네스 선생이라고?”

“저 젊은 여선생이 표적치료법을 만든 그 사람?”

“대단한데?”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이미 아그네스는 발표자로 이름을 올렸고, 표적치료법을 확립한 두 치유사 중 한 명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소?”

“죄송해요. 들어가서 준비를 좀 해야 해서요. 다음에 한번 자리를 마련할게요.”

“아쉽구려.”

그밖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아그네스와 접촉을 해 왔다. 그 와중에 필사적으로 인파를 헤치고 온 남자가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내과 선임인 필스너였다.

아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왠지 익숙했는데 필스너가 멀리서 부른 모양이었다.

“어휴, 한참을 찾았네. 일찍 올 줄 알고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선배님도 오늘 발표 들으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아마 웬만한 치유사들은 오늘 다 올걸? 어때. 잘할 수 있겠어?”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더 이상 말을 걸어 주지 않았으면 싶었다. 벌써부터 주변의 관심을 받는 건 부담스러웠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먼저 실례할게요.”

“같이 가자. 안이 굉장히 넓으니까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할 거야.”

“괜찮아요. 든든한 호위기사가 있으니까요.”

아그네스가 웃으며 하룬을 바라보았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포근한 미소였다. 예전 같았으면 오두방정을 떨었겠지만, 강력한 힘을 얻은 하룬은 여유가 있었다.

마치 그 여유는 준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와 봐라.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그런 느낌으로 하룬이 정중히 손을 뻗었다.

“가시죠. 아그네스 선생님.”

“부탁해요.”

아그네스는 다시 하룬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필스너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 *

대기실에는 어마어마한 중역들이 모여 있었다.

왕립학술원장은 물론, 왕립 아카데미 학장과 페르디낭 후작, 그리고 아레스 공작도 모여 있었다. 덕분에 아그네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강준 선생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따로 오신다고 들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으신 거 같아요.”

“허허.”

페르디낭 후작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 발표장에 안 나타나기라도 하는 거 아닌가?”

“설마요. 그렇게 무책임한 분 아니에요.”

“그건 무책임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 어차피 아그네스 선생도 표적치료에 끝까지 참여했고 공동 치료자니까 발표는 한 사람만 해도 되잖아.”

“그래도…….”

“강준 그 친구라면 이런 기행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정도지. 안 그렇습니까, 각하?”

페르디낭 후작의 질문에 왕립 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있는 필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기 중에 휴가계를 내는 사람인데 무언들 못 할까.”

“하하하하! 역시 그걸 마음에 두고 계셨군요.”

그렇게 모인 고위 귀족들은 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쁜 이야기는 없었지만, 아그네스는 왠지 불편한 마음에 자리를 피했다.

갈 곳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아그네스는 하룬과 함께 발표장으로 들어갔다.

“잘하고 와.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그냥 돌아가. 쪽팔리게 휘파람 같은 거 불지 말고.”

“하하하하! 그럴 순 없지. 건수 하나 물어야 누아 마을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겠어?”

사람들이 없었다면 보란 듯이 등짝을 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신성한 왕립학술원이었다. 표정 하나까지 관리해야 하는 곳이다.

그때 젊은 사무직원이 아그네스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아그네스 선생님이십니까?”

“네. 맞아요.”

“반갑습니다. 저는 왕립학술원에서 일하고 있는 베론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연단으로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려요.”

들어가는 와중에도 아그네스는 하룬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과 함께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괜한 짓 하면 맞는다는 의미였다.

곧 아그네스가 연단에 올랐다. 아직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지만, 아그네스가 나타나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연단에는 귀빈석이 줄지어 있었다. 그중 가운데쯤에 아그네스의 자리가 있었다.

“여기서 편안히 앉아 계시면 됩니다. 국왕 폐하와 학술원장님께서 먼저 말씀을 하시고 발표 시간이 주어질 겁니다. 호명해 드릴 테니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감사해요.”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베론 씨. 혹시 강준 교수님은 아직 안 오셨나요?”

“강준 교수님이요? 특별한 전언은 없었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아니에요.”

직원이 그곳에서 물러났다. 그때 앞쪽에서 어슬렁거리던 젊은 남자가 연단으로 슬쩍 올라왔다. 그는 준의 조교 브로콜린이었다.

“조교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선생님 보러 온 거 아니니까 걱정 마십시오. 강준 교수님의 충실한 조교니 여기에 왔지요.”

“아, 그렇지 참.”

교수가 외부 학술 활동을 할 때는 보통 조교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각종 심부름을 담당한다.

그때 브로콜린이 아그네스에게 반쯤 접힌 작은 쪽지를 건넸다.

아그네스는 그걸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게 뭐예요?”

“강준 교수님의 전언입니다. 연단에 앉으신 이후에 전달하라고 하셔서 여기 붙잡혀 있었어요. 그럼 전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만.”

아그네스는 쪽지와 브로콜린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녀는 즉시 쪽지를 펼쳐 보았다.

― 친구들과 낚시하러 간다. 발표 잘 부탁한다.

깜짝 놀란 아그네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연단을 정리하던 베론이 황급히 다가왔다.

“선생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아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치유사를 불러드릴까요.”

“저도 치유사예요.”

“참, 그러셨죠? 하하하. 제가 깜빡했군요. 혹시라도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아그네스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자 베론이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쪽지를 쥔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설마, 오늘 발표를 혼자 해야 한다는 거야?

눈앞이 컴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 *

왕립학술원에서 발표가 한창 진행될 무렵, 준은 항구가 있는 도시에 와 있었다. 이곳은 왕도에서도, 그리고 누아 마을에서도 꽤 떨어진 곳이었다.

포트 벨리움.

아름다운 해안선과 풍부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또한 제법 규모가 큰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여행객과 상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하. 진짜 낚시를 갈 줄은 몰랐군. 아그네스는 지금쯤 발표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텐데 이렇게 농땡이를 피워도 되나?”

“오히려 녀석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야. 모두의 관심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하다만.”

볼카누스가 투덜거렸다. 그의 손엔 나무로 만들어진 낚싯대가 들려 있었다.

그건 함께 온 카이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칠흑처럼 검은 낚싯대를 준비했는데, 바다에 드리우면 마룡이라도 걸려들 것 같은 무시무시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준이 웃으며 대꾸했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카이엔도 있으니 적적하지는 않겠지.”

“흥! 낚시가 뭔지 제대로 알려 주지. 패잔병. 잘 보고 배워라.”

“필요 없다.”

“무슨 자신감이야?”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을 아나? 모든 흐름은 하나로 통하는 법. 낚시도 비슷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너를 낚듯이 낚으면 물고기가 잘 낚이겠지.”

“이 빌어먹을 새끼가!”

가까스로 배에 오른 세 사람은 속도를 냈다. 준은 자그마한 닻을 펼쳤고,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바람을 일으켜 바다로 나갔다.

세 사람이 미끼를 끼우고 바다에 휙 던졌다. 준을 가운데에 두고 나란히 앉아 물고기가 낚이길 기다렸다.

“그런데 왜 우리끼리 온 거냐? 루치아 선생도 부르지 않고선. 새로 온 애송이도 있는데 시간 뺄 수 있잖아?”

“한 번은 친구끼리 와 보고 싶었어. 루치아 선생이 있으면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벌써부터 잡혀 사는 게냐? 한심한 놈.”

“그러는 넌?”

“내 말 한마디면 껌뻑들 죽지! 우리 집에서는 내가 최고라고. 에헴.”

준은 그저 웃었고, 카이엔은 노골적인 비아냥을 보냈다. 볼카누스도 내심 찔리는 게 있는지 그 부분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실 준이 웃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친구’라는 표현에 아무도 기분 나빠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서로 상극이지만, 볼카누스와 카이엔은 어느새 누구보다도 더 깊게 교감하고 있는 것이다.

볼카누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준에게 슬쩍 물었다.

“신혼 재미는 어때?”

“결혼도 안 했는데 신혼은 무슨.”

“그게 그거지. 같이 살고 있잖아?”

“행복해.”

준이 낚싯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볼카누스는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설파하려다, 옆에서 카이엔이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바람에 그곳에 시선을 빼앗겼다.

촤악!

은빛 물결을 가르며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였다. 카이엔은 낚싯바늘을 빼고 물고기를 들어 올렸다.

“후후후. 월척이군!”

카이엔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볼카누스를 바라보자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호승심을 제대로 자극했고, 그는 낚싯대를 움켜쥐었다.

“이런 망할! 저런 패잔병도 물고기를 잡는데 왜 나는 입질도 안 오는 거야? 술수라도 쓴 게냐?”

“엉뚱한 데 화풀이를 하는군.”

“닥쳐!”

볼카누스는 온몸으로 힘을 써 가며 낚싯대를 움직였다.

그러다 무언가 손에 묵직하게 걸리는 느낌이 났다.

“옳거니! 드디어 왔군!”

볼카누스가 낚싯대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는 낚시 경험이 없었다. 힘을 주자마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낚싯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하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때마침 그때, 손에서 묵직한 입질이 전해졌다. 준의 눈빛이 매처럼 빛났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건 누가 내다 버린 장화였다.

볼카누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이번엔 카이엔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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