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또 다른 안배 (2)
돌아서니 아그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그래서일까. 분위기가 점점 어색해졌다.
늘 밝고 쾌활한 제자였다. 환자를 앞에 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진지한 모습은 새로웠다.
오히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되었다. 예전에 루치아가 귀띔을 해 준 적이 있었으니까. 아그네스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래도 모른 척 말을 받았다.
“왜?”
“그게……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아그네스는 불러놓고 후회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자꾸 피했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준은 피식 웃었다.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은 표정인데? 진료 자료 날려 먹은 거라도 있어?”
“아뇨. 자료는 무사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달칵.
준이 다시 문을 닫았다. 그 소리가 방아쇠가 된 것처럼 아그네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난 걸까?
마음 같아서는 1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마도 진료 자료를 정리하며 논문을 쓰다 보니 정신이 잠시 나간 것 같다.
준이 채근했다.
“무슨 일인데? 물어볼 게 있다면서.”
“아, 그게요.”
막상 분위기를 잡았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선생님이 좋다는 그 짧은 한마디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기다려도 아그네스가 질문을 꺼내지 않자 준이 다시 문을 열었다.
“피곤한 모양인데 좀 쉬도록 해. 식사 거르지 말고. 이야기는 다음에 천천히 듣도록 하지.”
“아뇨. 잠깐만요. 지금 할게요.”
아그네스가 다시금 용기를 냈다. 그녀는 책상 앞으로 걸어 나오며 준의 앞에 섰다. 부끄러운지 양쪽 볼이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소문이 돌고 있어요. 혹시 알고 계세요? 선생님하고 루치아 선생님이 그렇고 그렇다는…….”
“그건 소문이 아니야. 사실이다.”
“정말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치아가 자신의 방에서 밤을 보낸 그날, 목격자가 폴링 하나일 거라고 단정할 순 없었다. 다른 사람이 봤을 수도 있고, 지레짐작해서 소문이 퍼진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굳이 숨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숨기게 되면 루치아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가문 사람들에게 축하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눈앞에 있는 아그네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하는 게 그녀에게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다. 헛된 희망을 주는 것보다는.
“그럼 두 분, 혼인하시는 거예요?”
“아직 결정된 건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마침 너희 할아버지께서 근사한 집을 선물해 주셨단다. 앞으로 그곳에서 같이 살게 될 거야.”
“그랬군요.”
아그네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아그네스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죄, 죄송해요! 별 의미는 없었어요.”
“괜찮아. 솔직히 말해도 된다.”
“부러워서요.”
준의 마음을 빼앗은 루치아가 부럽다는 의미였지만, 준은 이것만큼은 오해를 했다. 자신이 부러운 것으로.
“너도 옆에 든든한 친구가 있잖아?”
“누구요? 설마.”
“그래. 그 녀석.”
“그런 말 마세요. 친구가 아니라 짐인데요.”
“녀석이 들으면 서운해하겠군.”
하룬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데 분위기를 원래대로 돌려줬으니까. 평소의 표정을 되찾은 아그네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선생님에게 저는…… 어떤 존재인가요?”
“귀여운 제자.”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렇게 칼처럼 바로 대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약간의 아쉬움과 서운한 감정이 큰 눈망울에 맺혔다. 아그네스가 생긋 웃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더 할 말은?”
“기왕 물은 김에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그러든지.”
“하룬 녀석은 선생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귀여운 제자.”
설마 했는데 진짜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이야. 귀엽다는 건 자신의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아끼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마지막 질문은 괜히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그네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히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시간 뺏은 건 나지. 더 물어볼 건?”
“이제 없어요.”
“그래. 그럼 수고해.”
준이 나가자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그네스는 한동안 멍하니 어질러진 서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귀여운 제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들짝 놀란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준이 나간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시간이 금보다 귀한 시점인데 너무 낭비를 해 버렸다.
뺨을 두어 차례 친 그녀가 심호흡을 했다.
“그래. 아직 끝난 건 아니야. 조금만 더 힘내자!”
곧 서걱거리는 펜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멈칫거릴 때도 있었지만, 밤늦은 시간까지 펜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논문을 쓰는 게 최우선이었다. 이 논문을 제대로 완성시켜야 수많은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그녀의 혼잣말은 단순히 논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준을 향한 자신의 마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라는 말이 이렇게 간절하게 와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아그네스는 표적치료법에 관한 논문의 초고를 완성해서 준에게 들고 왔다.
그런데 준은 논문보다 그녀의 안색을 먼저 살펴야 했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아마 잠을 못 자서 그럴걸요.”
“얼마나?”
“딱 10분 만이라도 자면 소원이 없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거의 흙빛이었고, 그 와중에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와 있었다. 화장은 생각지도 못했다.
일주일 만에 10년은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앉아라. 피로 회복에 좋은 차를 타 주지.”
“차보다 약을 처방받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과로사하기 직전인 것 같아요.”
“약보다 더 좋은 거야.”
약보다 더 좋은 게 있나? 그런 의문을 품었지만, 아그네스는 순순히 소파에 몸을 묻었다. 시선은 준을 따라갔다. 그는 처음 보는 찻잎을 티 포트에 덜어내고 있었다.
저게 뭘까. 궁금증이 들었지만 생각을 더는 이어 가지 못했다. 몽롱한 상태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아그네스.”
“앗?”
아그네스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선생님?”
방금 전까지 차를 타고 있던 준이 어느새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손으로 찻잔을 가리키고 있었다. 찻잔엔 찻물이 가득 담겼고,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기억이 잠깐이나마 끊긴 것 같은 느낌.
그제야 아그네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혹시 저 그새 잠든 건가요?”
“아주 맛있게 자던데? 코까지 골면서.”
“아…….”
“코 골았다는 건 농담이야. 잠든 건 사실이고. 아무튼 마셔라. 피로가 싹 풀릴 거다. 귀한 차야.”
아그네스는 조심스레 찻물을 들이켰다. 뜨거운 건 잘 못 마시는 그녀였지만, 입천장이 데는 걸 감수할 정도로 향이 좋았다.
“와, 정말 맛있어요!”
조금 마셨는데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청량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긴 역부족이었다. 왠지 잠은 오는데 몸만 상쾌한, 그런 힘든 느낌이었다.
“어때?”
“좋긴 한데 역시 잠을 자야 하나 봐요. 피곤하네요.”
“정말 열심히 했나 보구나.”
“병원에서 자료로 쓸 거면 이렇게 열심히 안 했죠. 왕립학술원에서 발표할 자료잖아요. 그럼 왕국의 모든 치유사들이 볼 수도 있는 건데…….”
아그네스가 몽롱한 표정을 짓더니 또다시 잠들었다. 준은 피식 웃으며 차를 음미했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깜짝 놀라며 깨어난 그녀가 두 손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설마 저 또 잤어요?”
“하하하하.”
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세계수의 잎을 우려 낸 차로도 해결할 수 없는 피로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쉰 아그네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논문은 확인 안 하셔도 돼요?”
“뭐, 알아서 잘했겠지.”
준이 대충 넘기려고 하자 아그네스는 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장 확인해 주세요! 그거 왕립학술원에서 발표하기로 한 논문이잖아요. 틀린 게 나오면 안 돼요. 선생님의 명성에 큰 누가 될 거라고요!”
“알아서 할 테니까 화내지 마.”
“아! 죄, 죄송해요…….”
뜻하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는 걸 깨달은 아그네스가 고개를 숙였다.
“제자가 힘들게 과제를 마쳤는데 차라도 한잔 대접할 시간은 줘야지. 아무튼 고생했다. 가서 좀 쉬어. 새벽까지 네 집무실에 불이 켜져 있다고 다들 걱정하더라.”
“아쉽게도 이제 곧 출근해야 해서요.”
“휴가계 안 냈어?”
“말단이 어떻게 휴가를 써요?”
준은 그녀를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계질서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왕립 병원에서 쉰다는 건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늘은 그냥 쉬어라. 내가 병원장에게 특별히 연락을 해 놓지. 왕립학술원 발표 건이라면 그쪽에서도 이해해 줄 거다.”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지. 다들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발표잖아? 네 선임들도 표적치료법 전수에 관심 많다면서. 그러면 누구보다도 널 이해해 주겠지.”
귀가 솔깃해졌다. 오늘 하루만, 아니 오전만이라도 잘 수 있다면 정말 소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환자를 위해 뭐든 아끼지 않는 준이 진료를 쉬라고 하니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평소의 그라면 조금 피곤하더라도 참고 이겨 내라고 할 텐데.
그 의구심을 눈치챘는지 준이 먼저 말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는 것만이 의료행위는 아니지. 넌 그 이상으로 큰일을 했어. 임상 진료가 한 명의 환자를 살린다면, 연구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의 환자를 살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하루 정도는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포장해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졸다가 의료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잖아.”
“역시 그렇죠?”
아그네스는 얼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었는지 해맑게 웃었다.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차를 다 비운 그녀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럼 선생님만 믿고 한숨 잘게요.”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마.”
아그네스가 방을 나섰고, 홀로 남은 준은 그녀가 남기고 간 논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호오. 생각보다 잘했는데?’
치료 과정과 방법론, 그리고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카데미 과정을 밟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정말 대단했다.
만약 아그네스가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면 학문적으로도 큰 성과를 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기왕 확인하는 김에 좀 더 완벽하게 해 주면 좋겠지? 녀석에게 큰 선물이 될 테니까.’
만약 그 선물이 무엇인지 아그네스가 들었다면 혼절했을 것이다. 그만큼 대단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준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논문의 보완을 시작했다.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어렵거나 생략된 부분은 누가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게 바꾸었다.
최종고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아 완성됐다.
왕국 의학계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준은 가볍게 기지개를 한번 켤 뿐이었다.
‘이제 아그네스에게는 이쯤 하고. 슬슬 다음 안배로 넘어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