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또 다른 안배 (1)
“어? 여긴 촌장님 댁 아닌가요?”
“그러네.”
산책을 하던 두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느새 촌장 집에 도착한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루치아가 제안했다.
“한번 노크해 볼까요? 안 주무시는 거 같은데. 집터 물어보기로 했었잖아요.”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실례가 아닐까?”
“오히려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아예 누아 마을로 내려오겠다는 말을 들으신다면.”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앞장서서 노크를 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문이 먼저 열리고 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어색하게.
“오, 영주님.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마을로 잠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인자한 미소와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를 잠시 잊고 지낸 게 미안할 정도였다.
“산책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허허허. 그러시군요. 어서 들어오시지요. 마침 찻물을 우리던 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은은한 차향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준은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아론이 말을 걸어 오는 터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왕도 생활을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처럼 마음에 들진 않더군요.”
준은 차분히 이야기를 풀었다. 왕도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누아 마을로 돌아오겠다는 이야기였다. 아론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물론 영지민들도 모두 좋아하겠지요.”
그때, 루치아가 슬쩍 물었다.
“그래서 집을 하나 지을 생각인데, 혹시 좋은 터가 있을까요?”
“두 분이 머무실 곳입니까?”
“그럼요.”
수염을 쓸어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긴 아론이 테이블을 탁 두드렸다.
“마침 봐 둔 곳이 하나 있습니다만. 아주 조용하고 햇볕도 잘 드는 곳입니다.”
“어딘가요?”
“괜찮으시면 한번 보러 가시겠습니까?”
“지금요?”
뜻밖의 제안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아론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잠이 없어져서요. 함께 가 보십시다.”
아론은 대답도 듣지 않고 지팡이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차를 입에 대 보지도 못하고 그를 따라 나와야 했다.
어느새 주변이 깜깜해졌다. 아론은 라이트 마법을 시전해 빛의 구체를 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본 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꽤 수준이 높은 마법이군요.”
“허허. 그래 보입니까? 영주님 수준엔 한참 못 미치는 조악한 마법이지요.”
상당히 밝은 빛이었다. 무엇보다도 신비한 느낌이 서려 있었다. 마치 루치아가 사용하는 힘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뭐지? 이 느낌은.’
준은 슬쩍 루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준은 문득 예전에 아그네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약초 채집을 나갔던 그때, 자신이 사용한 라이트 마법을 보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었다. 할아버지의 라이트 마법을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건 아그네스가 마법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평가였다.
외형은 크게 대단할 게 없지만, 마나를 다스리는 방식은 훨씬 세련됐다.
“그럼 가실까요? 여기서 그리 멀진 않습니다.”
아론이 앞장섰다. 준은 상념을 거두고 루치아와 함께 그의 뒤를 따라갔다.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무언가 우뚝 서 있었다. 빛의 구체가 하늘 높이 떠 주변을 밝히자 우뚝 서 있던 그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집이었다.
예전의 진료소처럼 폐가가 아니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런 깨끗한 집이었다.
“집이 있네요.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요?”
“아닙니다. 여기가 맞습니다. 두 분께 선물을 하려고 몰래 지어 두었지요.”
“정말요? 와!”
루치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지만, 준은 왠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훌륭한 집인 것도 분명하고, 뜻밖의 선물이라 기분도 좋았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준은 지나가듯 아론에게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이 한집에 살 거라는 걸 알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두 분이야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닙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지요.”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아론은 그저 웃어 보였다.
“나이를 먹다 보면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도 잘 보일 때가 있지요. 집이야 놔두면 언제든 쓸 데가 있지 않습니까? 너무 괘념치 마시지요.”
“맞아요. 당신 좀 예민한 거 같은데. 집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 거 아니야.”
“한번 들어가 봐도 되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신이 난 루치아가 먼저 뛰어 들어갔다. 준도 따라 들어갔다.
내부에서는 숲 향이 가득했다. 인위적으로 낸 건지, 자재에서 우러난 건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인테리어는 소박했다. 테이블 몇 개와 의자, 그리고 책장 같은 것이 전부였다.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당장 내일부터 여기에서 살고 싶을 정도인데요?”
“정리는 다 끝났으니 마음대로 머무셔도 됩니다.”
“어때요, 당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둘러본 두 사람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갈림길까지 함께 간 다음, 두 사람과 아론은 서로 갈라졌다. 헤어지기 직전 준이 아론에게 감사를 표했다.
“집은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루치아 선생이 좋아하는 걸 보니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집을 잘 못 봐서 말입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기쁘군요. 우리 마을을 위해 애써 주신 공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시길.”
“단지 그것뿐입니까?”
준의 물음에 아론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루치아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촌장.”
“제가 드릴 말씀이지요. 허허허.”
그렇게 아론은 답례를 하곤 그곳을 떠났다. 준은 한참이나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그래요? 오늘따라 이상하네. 혹시 술 덜 깬 거예요?”
“그냥. 촌장님께 늘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당신이 베푸는 게 더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과연 그럴까?”
준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치아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지만, 그가 더 멀어지기 전에 달려가 팔짱을 꼈다.
* * *
며칠 누아 마을에서 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준은 다시 왕도로 돌아왔다. 다시 올라오고 싶진 않았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그는 즉시 폴링을 불렀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누아 마을은 어떻습니까?”
“여전하지요. 참, 경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명하십시오.”
준은 알렌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폴링에게 마르다 마을 진료소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줄 것과 추가 인력 배치를 명했다.
“알겠습니다.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폴링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이 정도 지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근 금광 사업과 귀금속 사업이 번창하면서 정말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으니까.
“아그네스는 저택으로 돌아왔습니까?”
“예. 서기관께서는 오늘은 일찍 돌아오셔서 집무실에 계십니다. 영주님께서 아주 어려운 과제를 내주셨다며 힘들어하시더군요.”
“그래요?”
“벌써 얼굴이 반쪽이 되었습니다.”
“그 정도라니.”
한 차례 웃은 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로 폴링에게 투정을 했다면 정말 힘든 모양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 사탕 주머니를 하나 챙겼다.
준은 아그네스의 집무실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머리를 틀어 올린 아그네스가 정신없이 필기를 하고 있었다.
워낙 바쁘다 보니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문득 그녀가 초급 치유사 시험을 준비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느낌이 많이 달랐다. 외모는 크게 변한 게 없지만 지금은 뭔가 전문가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미안한데 식사는 나중에 할게요. 지금 마무리해야 할 게 있어서요. 방으로 가져다주진 마세요.”
대답이 없자 눈을 깜빡인 아그네스가 고개를 홱 들었다.
멍한 표정도 잠시,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꽃폈다. 며칠 밤을 새운 피로가 단번에 날아갈 정도로.
“선생님!”
“얼굴이 반쪽이 됐다고 해서 와 봤다.”
“누가요?”
“폴링 경이.”
아그네스는 부끄럽게 웃었다. 얼마 전에 그에게 투정을 부린 게 떠올랐던 것이다.
“정리는 잘되고 있나?”
“해 보곤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지금은 자료 정리만 얼추 끝낸 상황이에요.”
“부담 갖지 말고 해.”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요? 다른 데도 아니고 왕립학술원에서 하는 발표인데. 우리 선생님은 여유가 넘치셔서 탈이라니까.”
준은 표적치료 과정과 결과를 논문화해서 왕립학술원에 발표해 보는 게 어떠냐는 페르디낭 후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진 빚이 있으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기왕 하게 된 발표이니 제대로 해 보기로 했다.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최대한 얻어 가면서.
그래서 준은 한 가지 변수를 줬다.
자신이 혼자 발표하는 게 아니라, 아그네스와의 공동 발표 형식으로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절차와 명예를 중시하는 왕립학술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아레스 공작의 공동 주치의로 이름을 올렸고, 또 왕립 병원에 소속된 치유사였기에 자격에 문제는 없었다.
그 기초 자료 정리와 눈문 초안 작성을 아그네스에게 맡긴 것이다.
“언제쯤 끝날 것 같아?”
“다음 주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너무 못했다고 혼내시면 안 돼요. 알았죠?”
“노력해 보지.”
“오랜만이네요. 선생님이 이렇게 얄미운 거.”
그 말에 준이 깜짝 놀랐다.
“내가 얄미운 적도 있었어?”
“그럼요. 사탕 가지고 놀릴 때도 그렇고,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늘 싱글벙글이셔서. 저는 잘 모르니까 마음 졸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군.”
“그럴 땐 그렇군이 아니라 미안하군이라고 해야 맞는 거고요.”
준이 의외라는 듯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잠깐 못 본 사이에 좀 달라진 것 같은데?”
“피곤하니까 한번 봐주세요.”
“왠지 본심이 나온 거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준은 아까 챙겨온 사탕 주머니를 책상에 슬쩍 올려 두었다. 아그네스가 좋아했다.
“역시 우리 선생님이 최고라니까. 언제 또 이런 걸 준비하셨어요?”
“머리가 안 돌아갈 땐 단 게 최고지.”
“의학적으로 입증이 된 건가요?”
“한번 네가 입증해 봐.”
배시시 웃은 아그네스가 사탕을 한 알 입에 넣었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기뻐했다.
지금은 귀족이 되고 벌이도 많아져 얼마든지 사탕을 구할 수 있을 텐데.
“고생해.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고. 폴링 경 말고.”
“노력해 볼게요.”
준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바로 그때, 뒤에서 아그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