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전쟁의 서막 (3)
마리와 볼카누스가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았다. 마치 결투를 하듯이. 마리의 손에 쥐어진 마나 소드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 또 다른 무리들이 있었다.
“장난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진 않나?”
준과 루치아였다. 준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허공에서 대답이 나왔다.
“후후.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군.”
카이엔이 은신을 풀었다. 예상대로 그는 미리 레어에 도착해 있었다. 몸을 숨긴 채 볼카누스와 마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숨을 내쉰 준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리가 마나 소드를 치켜들 때였다.
“그만 둬라.”
“스승님?”
깜짝 놀란 마리가 마나 소드를 내렸다. 커다란 눈망울이 파르르 떨렸다. 덕분에 한숨 돌린 볼카누스는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돌팔이! 마침 잘 나타났다. 진료소에 위중한 환자가 있다며? 네 제자가 약 재료가 필요하다고 나를 때려잡으려고 하는군.”
“위중한 환자요? 그런 환자는 없는데? 입원하고 계신 분들도 생명이 위독하진 않아요.”
“뭐라고?”
“마리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루치아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마리를 향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게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볼카누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편 질문을 받은 마리는 고개를 숙인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치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볼카누스가 마리에게 받은 종이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필요한 재료라던데?”
재료 목록을 살펴본 루치아는 피식 웃었다.
“비늘 100개? 우와. 이 정도라면 제2차 신마전쟁을 치르고도 남겠는데요? 드래곤 하트는 또 뭐야. 혈마신을 부활시키기라도 할 생각이니?”
루치아는 종이를 접어 마리의 로브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마리는 여전히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결국 준이 나서야 했다.
“왜 미혹술을 배우려고 한 거야?”
“…….”
“좋아. 이유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준이 진지하게 말하자 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믿음을 주는 것을 넘어 뭔가 가르침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마법을 가르쳐 줄 때 한 말 기억하니?”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 글자 하나 안 틀리고 잘 기억하고 있구나.”
준은 장하단 눈빛으로 마리를 응시했다. 그의 따뜻한 눈길을 견딜 수 없었던 마리가 고개를 숙였다. 대체 미혹술을 왜 배우려고 했던 걸까.
한편, 볼카누스는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마리는 자신의 힘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흑마법을 배운다고 했으니 화가 날 수밖에.
그 불똥이 카이엔에게 튀었다.
“이 망할 패잔병! 대체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게냐? 엉?”
“누가 들으면 몹쓸 짓이라도 한 줄 알겠군.”
“당연하지! 너희 마족 놈들이 하는 짓은 뻔하니까. 선량한 인간을 타락시키거나 구워삶거나 했겠지!”
“그게 왜 우리 탓인지 모르겠는데.”
“뭐라?”
“원래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타락하는 것도 그만큼 쉽지. 인간 본연의 문제란 말이다. 하긴, 네 무식한 머리로는 그런 철학적 사유가 쉽진 않겠지만.”
“닥쳐!”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이어지는 준의 한마디에 고개를 홱 돌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진심으로 흑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배우도록 해.”
“그게…… 정말인가요?”
마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준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 줄 알았으면 재료 리스트를 만들어 오지도 않았을 텐데.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하지만 힘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는 거니까. 선택도 본인의 몫이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마리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옆에 있던 루치아는 왜 말리지 않냐는 눈빛을 보냈다. 흑마법에 한번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만큼 무서운 힘이었다.
하지만 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리의 선택을 기다려 주었다.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배우겠어요.”
“좋아.”
준이 뒤돌아보자 어느새 카이엔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마계의 대공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만큼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흑마법을 전수하도록 하지. 기본적인 마나 운용법부터 가르쳐 주마. 그 전에 자리를 옮겨야겠군. 이곳은 흑마법을 배우기 적당하지 않아.”
“알겠어요. 잘 부탁드려요.”
마리는 굳은 의지를 표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드래곤 레어를 나섰다.
루치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저렇게 둬도 괜찮은 거예요?”
“살다 보면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지. 한번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당신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때 볼카누스가 끼어들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냐?”
“알 거 없다. 이따 밤에 진료소로 넘어와. 고기 삶아 놓을 테니까. 오랜만에 술 한잔하지.”
“오, 그거 좋지!”
볼카누스가 환하게 웃었다. 술과 고기 덕분에 그는 마리가 흑마법을 배우려고 자신에게 칼을 겨눈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 * *
“다시 누아 마을로 돌아온다고?”
족발을 허겁지겁 집어먹던 볼카누스의 손이 뚝 멈췄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한 볼카누스가 다시 흡입을 시작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먹성이었다.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데도 열 사람 몫은 거뜬히 해치우고 있었다.
곧 접시가 다 비워질 기세였다. 준은 혹시 몰라 미리 준비한 수육을 내왔다.
“다음에 낚시나 같이 갈까?”
“웬 낚시?”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거든.”
“그 지루한 걸 왜 해? 그냥 마법으로 왕창 잡아다가 슥삭 먹어 버리면 그만이지.”
과연 볼카누스다운 발상이었다. 곁에 함께 있던 루치아가 싱긋 웃었고, 준은 술잔을 들어 그녀와 건배했다. 그녀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허벅지로 뻗어 오는 그녀의 손을 가로막으며 준이 말했다.
“낚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더군. 세월을 낚는 거라나?”
“뭔 개소리야?”
“나도 모르니까 한번 해 보려는 거지.”
“정말 심심한 모양이군. 아그네스가 불쌍해 죽겠어. 이런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니. 쯧쯧!”
볼카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포크질을 멈추지 않았다. 수육을 한번 맛본 그는 된장 소스와의 조화에 깜짝 놀랐다.
“이건 정말 기가 막히는군! 차라리 치유사를 그만두고 식당을 차려 보는 건 어때?”
“그 정도로 솜씨가 좋지는 않아서.”
“그건 의술도 마찬가지 아닌가?”
“뭐, 그럴지도 모르지.”
술자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간신히 배를 채운 볼카누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레어로 돌아갔다. 머리는 썩 좋지 않지만 그렇게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두 사람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준은 루치아와 함께 뒷정리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주방 일에 익숙했기에 설거지는 금방 끝났다.
“배도 부른데 산책이나 나갈까?”
“술 많이 마시지 않았어요?”
“괜찮아.”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더워질 것 같았다.
“언제 이 마을에 처음 왔다고 했었죠?”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아.”
“시간이 많이 흐른 거 같은데 그래도 이제 일 년밖에 안 지났네요. 어때요? 감상은.”
“별거 있나.”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런데 그때 수상한 그림자가 두 사람에게 따라붙었다. 워낙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라 아무도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마리였다.
그녀는 최상승의 은신술을 카이엔으로부터 전수받았다. 실전에서는 처음 사용하는 거지만, 워낙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벌써부터 진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기회를 포착한 마리는 지팡이를 준에게 겨냥했다.
우웅!
마나가 진동했다. 순간 마리의 투명한 두 눈에 진득한 암흑이 몰아닥쳤다. 곧 두 눈이 피처럼 붉어졌다.
미혹 마법이 시전되었다.
고위 마족이 전수한 마법이었다. 거기에 천부적인 마리의 재능이 합쳐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미혹술이 펼쳐졌다. 연붉은 마나의 파동이 준에게 쏘아졌다.
그것이 준의 몸에 닿는 순간, 화살에 맞은 것처럼 준이 걸음을 멈췄다.
“응? 왜 그래요?”
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미혹술을 펼친 마리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금방 반응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곧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차올랐다.
드디어 연모하던 스승이 자신을 돌아봐 주는 순간이었다.
준이 걸음을 옮겼다.
마리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그를 맞이하기 위해 길 쪽으로 나갔다. 아직 두 사람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혹술에 걸렸다면 자신을 알아볼 것이다.
그런데 그때 준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허리를 굽혔다. 손을 뻗은 그는 길가에 피어 있던 야생화를 꺾었다. 싱싱하게 잘 자란 예쁜 꽃이었다.
“어머, 나한테 주는 거예요?”
“어울릴 거 같아서.”
“고마워요.”
꽃을 받아든 루치아는 꽃보다 예쁜 미소를 지었다. 반면 마리의 표정은 시무룩해졌다. 혼신을 다한 미혹술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까 집을 짓는다고 했잖아요. 우리의 집이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게 프러포즈였나 싶어서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면 그런가 보지.”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것 좀 봐. 완전 선수네.”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꽃향기를 듬뿍 맡았다. 모양새처럼 좋은 향기가 났다.
“우리 수천 년 동안 함께했는데 질리지도 않아요? 한땐 나 미워하기도 했잖아요.”
“릴리가 가르쳐 준 말이 생각나네.”
“갑자기?”
“답정너.”
“그게 무슨 뜻이죠?”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라는 뜻이라고 하더군.”
루치아는 한참을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었으니까.
“고향에는 가 보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요. 같이 돌아가게.”
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두 사람은 갈 길을 갔다. 멀어지는 준의 모습을 보며 마리도 걸음을 돌렸다.
진료소로 돌아온 마리는 힘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비야.”
습관적으로 고양이를 불렀는데, 이상하게 자신의 고양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마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양이는 침대 밑에 숨어 있었다.
“나비야? 거기서 뭐 해?”
“야오옹!”
고양이가 뒷걸음질 치며 자신을 피했다. 그 모습에 마리는 큰 충격에 빠졌다.
“혹시…….”
마리는 자신의 심장에서 꿈틀거리는 흑마력을 억제했다. 그러자 고양이가 경계를 풀고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예민한 동물이다 보니 마기에 불안감을 느낀 것 같았다.
“미안해. 안 그럴게.”
“야옹.”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준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일을 통해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마리는 고양이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빠각!
곧 심장에 맺혀 있던 흑마력 서클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애초에 적은 양이었고, 볼카누스의 권능이 있었기에 쉽게 부술 수 있었다.
뺨에서 보드랍고 촉촉한 느낌이 느껴졌다. 어느새 어깨에 올라탄 고양이가 혀로 뺨을 핥고 있었다.
“간지러워. 그만해. 응?”
기분이 좋아졌다. 그제야 마리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