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전쟁의 서막 (2)
해가 저물고 모든 환자의 진료가 끝났다. 오늘은 환자가 많아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진료를 봐야 했다.
클로에는 보조를 훌륭히 해냈다.
아그네스가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료를 도울 때 지저분한 분비물이나 역겨운 냄새가 나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실력은 잘 모르겠지만, 환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이 일을 정말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준과 눈이 마주치자 클로에가 싱긋 웃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역시 왕립 아카데미 교수 출신은 다른데요? 의료진 소개도 멋지게 꾸며서 진료소 한쪽에 걸어 놓을까 봐요.”
“쓸데없는 일이야. 가서 저녁이나 먹도록 해.”
“선생님은 안 드세요?”
“나는 약속이 있어서.”
클로에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준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렇게 연속으로 환자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 가벼운 피로감이 들었다.
그때, 코를 간질이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눈을 뜨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루치아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조금만 더 고개를 내밀면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무슨 바람이 분 거예요? 그 바쁘다는 사람이 진료소에 다 찾아오고. 진료도 했다면서요? 클로에 양에게 들었어요.”
“아카데미에 휴가계를 냈어. 당분간 출강하지 않아도 돼. 일시적인 백수 상태지.”
“처음 듣는 얘기네. 왜요?”
“쉬고 싶어서.”
“이야. 세상 참 편하게 사시네. 멋대로 쉬기도 하고.”
“페르디낭 각하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루치아가 미심쩍은 눈으로 준을 내려다보았다.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다 입술 닿겠어.”
“그럼 더 좋은 거 아닌가?”
피식 웃은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상하네. 당신이 그렇게 게으른 사람이 아닐 텐데. 지금쯤 왕도의 의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며 앞장서서 달려나갈 때 아닌가요?”
“걸음만 빠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지.”
“웬일이실까. 돌부리는커녕 눈에 안 보이는 독침도 피할 양반이.”
준은 창밖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자리 좀 옮길까?”
“그래요.”
두 사람은 진료소를 나가 들판을 걸었다. 주변이 어둑해지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에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 아카데미 그만둘 거야. 누아 마을로 다시 돌아올 계획이다.”
“정말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그와 손을 잡고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잘됐네요. 정말 기뻐요. 어라? 혹시 착각하는 건 아니죠? 당신이 와서 일거리가 줄어들어서 좋다고 한 건데.”
“그럼 어쩔 수 없고.”
“왜 그렇게 사람이 끈기가 없어요? 재미없게.”
“하하하하.”
준은 유쾌하게 웃었다. 오히려 그녀의 농담 때문에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좁은 길을 따라 산책을 계속했다.
“역시 다른 계획이 있는 거죠?”
“일단은 여기에 작은 아카데미를 세울 거야. 치유사를 양성하는 곳으로. 그러려면 치유사가 좀 더 필요한데, 아그네스를 불러올 수는 없으니 알렌 선생을 우리 진료소로 모실까 한다.”
“임상강사로 쓸 생각이군요.”
“그래. 아마 아그네스는 쉽게 돌아오지 못할 거야. 한창 성장할 시기이니까.”
“그러다 아카데미 교수로 임용되는 거 아닐까?”
“녀석이 원한다면.”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이제 경험뿐이었다. 아레스 공작과 페르디낭 후작, 그리고 아인하르트 후작이라는 당대 최고의 명사들이 그녀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레 한 단계씩 올라갈 것이다. 우연히 귀족의 중병을 치료한다면 준처럼 작위를 받을 수도 있고.
“알렌 선생은 본인도 여기로 오는 걸 원하는 거 같더라고요. 시기가 좋긴 하겠어요. 마르다 마을에도 치유사가 한 명 왔다고 듣긴 했는데.”
“그쪽 진료소도 우리 가문에서 지원할 계획이야.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지.”
“당신다운 발상이네요.”
“그나저나 집도 한 채 지어야겠지?”
“당신 집이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히 들뜬 그의 모습을 보니 루치아는 왠지 놀려주고 싶었다.
“진료소에서 매번 살던 분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집을 갖고 싶으신 걸까나?”
“당신이 불편하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불편하진 않아요. 오히려 지금은 적응이 돼서 따로 살면 왔다 갔다 하기 귀찮아질지도. 혹시 다른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예요?”
준은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 모습은 새로웠다. 처음 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루치아가 싱긋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레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그건 당신의 집이에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집이지.”
루치아는 행복한 표정을 아끼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그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차분히 두 눈으로 담으며 준이 물었다.
“어디에 짓는 게 좋을까?”
“촌장님께 한번 추천을 받아 보는 건 어떨까요? 이곳에서 제일 오래 사신 분이기도 한데.”
“좋은 생각이야.”
준은 촌장 아론과 이야기를 나눈 지 정말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이 밝으면 한번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참, 혹시 마리 못 봤어?”
“마리요? 글쎄요. 아까 오전에 보고 안 보이는 거 같던데. 왜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평소라면 장난을 쳤겠지만, 마리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아직 마리의 심장에는 결계가 남아 있었으니까.
루치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설마 폭주의 조짐이 있는 거예요? 이 근방의 마나 파동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묘하게 신경이 쓰여서.”
“그럼 한번 찾아볼까요?”
“짐작 가는 데가 있어?”
“대충요.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아서.”
루치아가 앞장을 섰다. 준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곧 뒷산 초입에 들어섰다.
* * *
“마리 말인가? 그 아이는 아마 볼카누스의 레어로 갔을 거다.”
“한발 늦었네요.”
루치아는 마리의 행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카이엔의 거처로 들어온 상황.
이번엔 준이 물었다.
“마리가 왜 여기에 왔지? 쉽게 위치를 찾을 수 없었을 텐데.”
“비밀이다.”
“왜?”
“사실을 알면 네가 분명 화를 낼 테니까.”
그러니 더욱 궁금해졌다. 루치아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준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화 안 낼 거니까 이야기해 봐.”
“이름을 걸어라.”
“좋아. 내 이름 두 글자를 걸고 맹세한다.”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
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가 마족이라는 걸 아는 존재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카이엔이 마족이라는 걸 알 수 없다.
그런데 마리가 그것을 알아챘다는 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또다시 경지가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족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찾아왔다고? 혹시 싸움을 걸어 왔나?”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지. 나에게 배움을 청하더군.”
“그건 좀 뜻밖이네.”
“흑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래?”
카이엔의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준은 조금의 불쾌함도 없이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이엔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화가 나진 않나? 아끼는 제자가 흑마법을 배우겠다고 하려는 것이.”
“오히려 너에게 배운다면 낫지. 함부로 익혔다가 강력한 힘을 주체하지 못하면 타락할 수도 있으니까. 주화입마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까? 그게 녀석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언제부터 운명론자가 됐지? 오히려 그 반대 아니었나?”
그 물음에 준은 루치아를 힐끔 바라봤다.
카이엔의 말이 맞았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루치아와 사랑을 나누던 그 순간, 준은 운명을 인정했다.
운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노력만 한다고 이렇게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조건을 걸었다. 내가 건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흑마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
“무슨 마법을 배우려고 했지?”
“미혹술이다.”
준을 고개를 갸웃했다. 미혹술은 마력 상승에 도움이 되는 마법이 아니다. 일종의 보조 마법이라고 할까.
“무슨 일인지 도대체 모르겠네. 미혹술을 왜 배우려는 거지?”
“루치아 양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한번 물어보는 게 좋겠군.”
순간 카이엔의 몸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곳은 던전의 중심이었다. 그는 마음먹은 대로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준이 루치아에게 물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진짜 모르겠어요? 전직 절대자라는 분이 영 허당이네. 미혹술이 무슨 마법인지 잊었어요?”
“상대방을 현혹시키는 마법이잖아.”
“그래요. 마리가 현혹시킬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잠시간의 침묵 후 준이 살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나?”
“당신도 큰일이네요. 이래서 어떻게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건지. 아무튼 마리를 빨리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말 흑마법을 배우기 전에.”
“그런데 무슨 조건을 걸었다고 했었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준은 기감을 끌어 올려 카이엔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던전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준이 턱을 괴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빛냈다.
“볼카누스의 레어.”
“거기에 갔다고요?”
“카이엔에게 가장 구미가 당기는 일이 뭔지를 생각해 보니 답이 나오더군. 아마 볼카누스를 난처하게 만드는 짓을 했을 거야.”
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두 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건지. 마리는 진지한 마음으로 나서고 있는 것일 텐데.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준과 루치아는 즉시 볼카누스의 레어로 장소를 옮겼다.
* * *
“뭐가 필요하다고?”
볼카누스는 멍한 표정으로 마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종이를 펼쳐 또박또박 다시 읽었다.
“드래곤 비늘 100개, 꼬릿살, 눈썹, 뿔 두 조각, 발톱 네 개. 그리고 드래곤 하트요.”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마지막 재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늘 100개도 섬뜩한데 드래곤 하트라니. 볼카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야. 드래곤 하트가 뭔지는 아니?”
“아저씨 심장이요.”
“그래. 그럼 그 심장을 뽑으면 어떻게 되지?”
“죽어요.”
볼카누스는 내심 깜짝 놀랐다. 마리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요즘 애들은 원래 이렇게 무섭나?
“그걸 아는 녀석이 그래?”
“그게…….”
마리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볼카누스가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재료가 없다면 환자를 치료할 수 없어요. 어떻게든 구해 가야 해요. 환자가 목숨을 잃으면 아이들은 고아가 될 거예요.”
“하, 미치겠군.”
볼카누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준이 그랬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며 엉덩이를 걷어찼겠지만, 마리를 보니 왠지 고향에 있는 딸아이 생각이 났다.
“울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야. 왕도에 가서 스승님을 모셔오는 게 어떠냐? 돌팔이긴 하지만 실력이 나쁘지 않으니까.”
“스승님은 늘 바쁘신걸요.”
“그래도 얘야. 드래곤 로드를 죽이는 것보단 낫지 않겠니?”
볼카누스는 마리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잘 타이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움찔!
눈을 부릅뜬 볼카누스가 재빨리 몸을 빼냈다. 강력한 마나가 느껴졌던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이냐?”
“용서하세요.”
마리가 손을 뻗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엔 시퍼런 마나 소드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