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전쟁의 서막 (1)
왕궁에서 돌아온 준은 게이트를 이용해 누아 마을로 돌아갔다. 원래는 진료가 끝나는 저녁에 가려고 했으나 딱히 할 일도 없어 서둘렀다.
갑작스러운 준의 방문에 견습 치유사들은 깜짝 놀랐다. 단골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준 선생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왕도에 계신 거 아니었어요?”
때마침 환자 대기실을 정리하던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준을 맞았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견습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
“여긴 지나가는 길이 없잖아요? 산골 마을인데.”
“아, 그런가?”
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견습 치유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관심이 부담스럽다기보단, 공과 사를 구분할 상황이었다.
“지금은 진료 중이다. 내가 아니라 환자분들에게 집중하도록. 인사는 생략하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견습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준은 우선 루치아의 진료실로 향했다. 준이 누아 마을로 발걸음을 서두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보고 싶었으니까.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준은 그 틈으로 루치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들 법도 한데, 그녀는 능숙하게 환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누아 마을 출신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때, 기척을 느꼈는지 루치아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당신?”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가 앞마당을 드나들듯 순식간에 이곳에 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기뻤다. 마침 그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나타나 주었으니까.
준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진료에 집중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루치아는 은근한 눈빛으로 답하며 다시 환자에게 집중했다.
준은 마침 곁을 지나가는 견습 치유사를 불러 세웠다.
“알렌 선생이 왔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묵고 있지?”
“선생님은 지금 아그네스 선생님께서 쓰던 진료실에 계세요.”
“아그네스의 진료실에서? 거기서 뭘 하는데?”
“환자를 보고 계세요.”
의외였다. 지원 요청을 한 것도 아니고 휴가를 얻어 왔다고 들었었는데. 준은 견습 치유사를 돌려보내고 즉시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렌 선생.”
“헉!”
마침 환자를 내보내고 기지개를 켜던 알렌이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준이 의자를 받쳐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오신 겁니까? 왕도에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왠지 반가운 손님이 계실 것 같아서 한번 와 봤지요.”
“농담이 많이 느신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로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오랜만이네요.”
두 손을 맞잡은 알렌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내일이면 다시 마르다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전에 준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준이 고마움을 표했다.
“모처럼 쉬러 오셨는데 이렇게 환자를 봐 주시다니. 덕분의 루치아 선생의 부담이 많이 줄었군요. 고마운 일이지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냥 쉬러 온 건 아닙니다. 이 진료소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어떤 게 말입니까?”
“아무런 배경도 없는 두 치유사분이 왕도에서 승승장구를 하고 계시는데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진료를 하면서 그 이유를 찾고 있지요. 자진 연수라고 할까요?”
그의 눈빛을 보니 농담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직 그는 배가 고픈 것 같았다. 지식과 경험에 대한 갈구가 분명히 느껴졌다.
준이 물었다.
“마르다 마을은 어떻습니까? 새로운 치유사가 왔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왠지 제 초창기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실력이 좋은 친구니 금방 적응을 하겠지요. 덕분에 휴가도 얻었고.”
“경영 상황은?”
“썩 좋진 않습니다. 치유사 두 명을 두기는 애매해졌지요. 큰 병을 앓는 환자들은 모두 누아 마을로 오게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마을에서 지원을 해 주니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심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환자가 적으면 진료소의 경영이 어려워진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해서 치유사를 늘렸다는 건 마을 자체에서 지원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괜찮다면 저희 가문에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금전적인 부분은 물론 인력도 파견해 드리지요.”
“정말입니까?”
“마르다 마을뿐만이 아닙니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여러 마을에 지원을 할 계획이지요. 왕도에 계신 분과 사업을 크게 해 보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이따 진료가 끝나면 자세히 말씀을 드리지요. 알렌 선생의 도움도 필요하니까.”
“제 도움이요?”
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차트를 든 견습 치유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알렌 선생님. 다음 환자분 대기 중이신데요.”
“죄송하지만 이따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번처럼 말씀도 없이 사라지시면 안 됩니다!”
준은 걱정 말라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으로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진료실이었다. 몇 년 만에 온 것도 아닌데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딸칵.
천천히 문을 열었다.
노을로 흠뻑 젖은 내부는 여전했다. 책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책상 및 가구들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의료 기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그때 생각이 나는데?’
누아 마을에 처음 온 그날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 촌장 아론은 여기로 가 보라고 했었다.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의 문을 열었을 때도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준은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왜 다시 누아행을 결심하게 됐는지 실감이 났다.
단순히 루치아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냥 이곳이 좋아서다.
누군가는 그 이유를 물을 것이다. 왜 좋냐고. 하지만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좋은 것에는 그 이유가 없는 법이니까.
“선생님?”
클로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누아 진료소의 견습 치유사로 켈세타 성 진료소에서 아그네스와 친분을 쌓았던 바로 그 소녀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밖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오늘은 제가 비번이라서요. 괜찮으시면 선생님 보조를 하고 싶어요. 진료하실 거죠?”
준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진료를 강요할 줄은 몰랐는데?”
“오늘은 환자가 좀 많아서요. 좀 봐주세요. 저도 비번인데 이렇게 일을 하러 내려왔잖아요?”
“아그네스 소식이 궁금한 건 아니고?”
클로에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진심을 들킨 것이다.
준이 물었다.
“그런데 비번인데도 아까 환자 대기실을 정리하고 있었나?”
“그냥 숙소에만 있기 따분해서요. 그렇다고 켈세타에 다녀올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말을 타도 이틀은 가야 하니까.”
“그렇군.”
준은 조만간 켈세타에서 온 견습 치유사들을 위해 장기 휴가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누아 마을로 돌아온다면 일손에 여유가 생길 테니까.
그리고 다른 계획도 있었다.
지금까지 견습 치유사를 위한 전문화된 교육 기관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비용 부담이 커서 대부분 진료소나 병원에서 실습을 하며 의술을 익혀야 했다.
때문에 가난하거나 신분이 미천한 사람들은 치유사가 되기가 어려웠다. 재능이 있어도 말이다.
그래서 준은 이곳에 건물을 하나 더 세워 의학에 뜻이 있는 견습 치유사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론 교육과 실습이 모두 가능한 최적의 환경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거기에 페르디낭 후작이 후견해 준다면 왕도 진출도 무난할 것이다.
“말 나온 김에 여쭤볼게요. 아그네스 선생님은 어때요?”
“아주 잘하고 있어. 내 뒤를 이어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와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그네스 선생님은.”
“너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환자분 모셔올게요.”
왠지 클로에는 릴리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준은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환자가 들어왔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준이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 클로에에게 슬쩍 물었다.
“그런데 마리는?”
“글쎄요? 아까 나가시는 거 같던데.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준은 궁금했다. 보통 자신이 게이트를 이용해 누아 마을로 오면 그녀가 마중을 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기별도 없었다.
대체 그녀는 어디로 간 걸까?
* * *
그 시각. 마리는 누아 마을 뒷산에 있는 던전으로 진입했다. 엘누아르 기사단은 재정비를 위해 철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내부는 고요했다.
지팡이를 손에 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순식간에 순간이동 포털을 찾아내더니 던전의 코어로 이동했다.
그곳엔 카이엔이 있었다. 그는 피처럼 붉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음? 너는…….”
카이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볼카누스의 권능을 각성했기 때문에 포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마리가 이곳에 올 이유는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것도 아니었고.
마리는 지팡이를 꼿꼿이 세운 채 카이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경험이 많은 카이엔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나에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군.”
“아저씨는 마족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두운 기운이 물씬 느껴졌거든요.”
정체가 이렇게 쉽게 탄로 날 줄은 몰랐지만 카이엔은 당황하지 않았다. 마리는 이미 규격 외의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으니까.
영혼이 성숙해지는 만큼 지혜가 늘어날 것이다.
“아저씨는 어느 정도 수준의 마족이에요?”
“네가 상상하는 이상의 수준이다. 인간들이나 다른 종족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 철혈의 대공이라고.”
“그렇군요.”
겁을 먹을 만도 했는데 마리는 침착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카이엔이 먼저 운을 뗐다.
“용건을 말해라.”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흑마법이요.”
“흑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이 대목에서 카이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흑마법은 금기의 마법이다. 그리고 마리는 이미 높은 경지에 오른 마법사였다. 흑마법을 익힐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준이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흑마법은 어쨌든 인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니까.
“어려운 부탁을 하는군. 하지만 들어볼 필요는 있겠지. 대체 어떤 마법을 배우고 싶은 건가?”
“미혹술(迷惑術)이요.”
“음? 미혹술이라면…….”
미혹술은 쉽게 말해 상대방을 유혹하는 마법이다. 상대방보다 힘이 강할 때 상대방의 정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환술이었다.
카이엔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혹술을 배워 어디에 쓰려는 거지?”
“전쟁이 시작됐어요.”
마리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스승님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요. 저는 지지 않을 거예요.”
“미혹술로 네 스승을 유혹하겠다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엔은 웬만해서는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하. 네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나?”
“잘은 몰라요. 강하신 분이죠. 하지만 자신 있어요. 전 언젠간 스승님보다 강해질 테니까.”
“그런 날이 올까?”
물론 뜻하지 않은 기연을 얻어 더욱 강해진다면 준을 능가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그릇 자체가 달랐다. 카이엔은 불가능하다 생각했지만, 이 상황 자체는 흥미로웠다.
“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네가 부탁한다고 가르쳐 줄 순 없다. 어쨌든 너는 볼카누스의 후계자니까. 그의 정체도 짐작하고 있지?”
마리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엔이 말을 이었다.
“조건이 있다.”
“어떤 조건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카이엔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