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행복을 찾아서 (1)
다음 날, 준은 늦잠을 잤다.
휴가계를 낸 상황이라 아카데미에 출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는 없다.
하지만 늘 규칙적인 생활을 해 왔던 준이었기에 이런 기분이 낯설었다.
몸을 일으킨 준이 창밖을 응시했다. 햇빛이 한창인 걸 보니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릴리 이 녀석은 왜 깨우지 않은 거야?”
준은 릴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릴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주 잠이 달콤하셨죠? 어제 눕자마자 주무시던데. 꿈에서 루치아 님과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하셨나요? 꿈에서 데이트라니. 어머, 낭만적!”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갈 뻔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정령이었다. 꿀밤을 먹인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왜 안 깨웠어?”
“오늘은 특별한 일정 없으시잖아요. 오후에 입궁하는 거 빼고는. 이런 날 푹 쉬셔야지요. 폴링 경이 걱정하고 있어요. 여독이 다 안 풀리신 거 같다고. 마스터는 은근 남 걱정만 하는 사람이니까.”
“쯧. 괜한 걱정은.”
“어쩔 수 있나요? 폴링 경은 마스터가 전직 절대자라는 사실을 모르는데 말이죠.”
생글거리는 릴리를 보며 준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건 꽤 오랜만이었다.
무엇보다도 릴리는 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즐거운 모습이었다. 루치아와의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물었다.
“그렇게 재미있냐?”
“그럼요! 남의 연애사를 구경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요. 거기에 한 남자를 둘러싼 세 여자의 혈투! 아주 그냥 기가 막히죠. 마스터는 잘 모르실 거예요. 수천 년 동안 여자를 만나지 않았으니까. 이야, 그 정도면 완전 고자 아니냐?”
준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릴리가 몸을 움찔했다. 너무 신난 나머지 선을 넘은 것 같은 느낌. 그녀가 깔깔대며 수습했다.
“아이참. 농담도 못 해요? 정색하시긴. 아무튼 팝콘 기계를 통째로 들여놔야 할 판이라구요. 지금 이 몸을 버리고 다시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심히 고민 중이랍니다.”
확실히 정령일 때는 준과 늘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몸은 버리지 마라. 다시 만들기 번거로우니까.”
“고민 좀 해 볼게요.”
“명령이야.”
“칫!”
볼을 부풀린 릴리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기지개를 켜고 릴리가 가져다준 물로 세안을 한 준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집무실로 올라와 책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배가 불러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무엇을 하든 머릿속에서 루치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침은 잘 챙겨 먹었는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했다.
준이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루치아 님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머릿속에 안 들어오시죠?”
어느새 나타난 릴리가 고개를 내밀고 놀리기 시작했다. 준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를 밀어냈다.
“오늘은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마.”
“그게 바로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라고요.”
“명령이다.”
“권위주의자!”
릴리가 사라지고, 준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따 저녁에 누아 마을에 다녀와야겠어. 으음. 그래. 알렌 선생에게 인사도 할 겸?’
준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해도 되는데 알렌을 핑계로 삼을 줄이야.
그래도 그렇게나마 마음을 먹으니 한결 편해졌다. 천 번의 환생을 거치며 절대자로 군림했던 그였지만,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그런 설레는 감정.
방금 릴리가 말했다.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준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 * *
집무실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던 준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내 인생이겠지?’
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역시 루치아의 영향력이 컸다. 관계가 깊게 진전된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폴링을 불렀다. 함께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측근 중 하나였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오늘은 찾아오는 손님들이 없었습니까?”
“없을 리가요. 다행히 안부만 묻고 돌아갔습니다. 영주님의 계략이 잘 먹혀들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편히 앉으시죠. 차 한잔 어떠십니까?”
“좋죠. 감사합니다.”
준은 그에게 특별히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차를 직접 타 주었다. 한 모금 음미한 폴링은 짜릿한 기분에 감탄을 터트렸다.
“오! 이렇게 향이 좋은 차는 처음이군요.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우연히 구한 겁니다. 차 이름은 저도 잘 모르겠군요.”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을 받을 만했다. 다른 재료도 아니고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거니까. 앞으로 몇 달간은 잔병치레 없이 건강할 것이다. 또한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차를 장복하면 수명이 늘어나는 효과도 있다.
“아쉽습니다. 이런 차라면 매일같이 먹어도 질리지 않을 텐데요.”
“그건 됐고. 실은 경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예? 상의요?”
폴링이 마시던 잔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준이 상의라는 표현을 쓰는 일은 많이 없다. 대부분 알아서 결정을 내리고 지시하거나, 아니면 아예 일을 맡기는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긴장의 끈을 조였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갑작스러운 결정이긴 한데…… 이곳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다시 누아 마을로 돌아갈까 합니다.”
“영주님이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폴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내려가는 것도 아니라 이곳 생활을 모두 정리한다니?
그러기엔 벌려놓은 일이 너무 많았다.
사업은 그렇다 쳐도 아카데미 교수직이 아까웠다. 평생을 걸쳐 노력해도 얻기 힘든 것을 누리고 있는데 그걸 포기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폴링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봐 온 준이라는 사람은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제 행복을 위해서지요.”
“그렇습니까.”
폴링은 미소를 지었다. 다시 찻잔을 쥐고 차향을 음미했다.
“역시 루치아 님 때문인가 봅니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이지요. 그런데 알고 계셨던 겁니까?”
“얼마 전에 결혼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날 짐작했습니다. 루치아 님께서 새벽 일찍 떠나신 걸 우연히 보기도 했고요.”
루치아 정도의 능력자라면 기척을 숨기고 떠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그에게 들켰다는 건, 자신의 방에서 나가는 걸 일부러 보여 줬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짓궂을 줄이야.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감정이 더해졌다.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은 정말 잘 어울리니까요. 실제로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 오해가 사실임을 보여 줄 때라고 생각합니다.”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군요. 일단 누아로 돌아가서 여유를 되찾을 겁니다. 점점 유명해지다 보니 지금 낙향하지 않으면 여생을 조용히 보낼 수 없을 것 같네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요. 최근 손님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누아 마을이 그립습니다.”
폴링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그건 좀 의외입니다. 누아 마을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느새 고향이 되어 있더군요. 사람들의 미소도, 고즈넉한 풍경도 그립습니다.”
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 다듬어진 정원이 보였지만, 누아 마을의 숲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왕도에 있다 보니 더욱 생각이 나더군요. 근사한 건물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이지만, 이곳 왕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준의 솔직한 고백에 폴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배경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표현하고 있는 감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참, 그럼 저택은 어떻게 할까요? 거점을 좀 더 저렴한 곳으로 옮기는 것도 비용을 줄이는 방법입니다만.”
“그냥 남겨 두겠습니다. 제가 왕도에 아예 안 올 것도 아니고, 아그네스 선생은 계속 병원 생활을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폴링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군요.”
“물론이지요. 영주님께서는 갑작스러운 결정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잘된 결정이라고 할까요?”
“저는 경이 말릴 줄 알았는데?”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예전부터 영주님께서 지나치게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본인의 행복을 위해 조금 욕심을 부리셔도 될 것 같은데 늘 주변 분들만 챙기셨지요. 밖에서는 제자들 걱정, 안에서는 환자들 걱정…….”
이 중요한 순간에 준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이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폴링이 웃으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이제는 저와 제자들에게 맡겨 주시고 편안하게 즐기십시오. 한 번뿐인 인생이 아닙니까?”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상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이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행복을 위해서 살아온 것은 폴링이 훨씬 더 길었다. 게다가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이런 경험은 아무리 강한 상대를 물리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영주님께서 누아 마을로 내려가시면 메디치 가문에서 꽤 곤혹스러워하겠군요. 미리 이야기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오늘 입궁 전에 한번 찾아가려고 합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그런 매라면 백 번 맞아도 좋을 겁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준은 함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허심탄회하게 티타임을 즐겼다.
* * *
정오가 지나자마자 준은 외출을 서둘렀다. 입궁하기 전에 페르디낭 후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왕도 입성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페르디낭 후작이었다. 또한 왕국의 의료계를 개혁하기 위해 의기투합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래서 준은 향후 계획을 그와 상의하기로 했다. 누아 마을로 돌아가더라도 그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도착했습니다! 주군.”
준을 태운 마차가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 미리 말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의 집사는 준의 방문에 놀란 표정이었다.
“남작님! 어인 일이십니까? 병환 중이라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다 나았습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군요. 각하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집사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자 준이 그 이유를 물었다. 집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실은 지금 안에서 파티가 열리고 있습니다.”
“음? 오늘 무슨 날입니까?”
“주인님의 취미 생활이라고 할까요.”
집사는 말을 아꼈지만 준은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 페르디낭 후작은 사교계의 제왕이었다. 틈만 나면 파티를 열고 왕국의 미녀들을 초대했다.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에 준이 물었다.
“초대받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도 참가해도 괜찮겠지요?”
“물론이지요. 아마 주인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안내해 드리죠.”
준은 집사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