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명성을 떨치다
봄꽃이 한창 만개할 무렵, 아레스 공작의 공개 진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이 바로 마지막 공개 진료일이다. 그래서인지 참관하는 학생들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쳤다.
“벌써 마지막 진료라니. 시간 참 빠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이런 기회가 또 있었으면 좋겠는데. 의학부에서는 뭐 없대?”
“쥐뿔도. 지금 로열 클럽 애들이 싸지른 거 치우느라 정신없을걸?”
“하긴.”
“근데 아그네스 선생님께서 정말 승낙해 주실까? 새로운 공개 진료 건 말이야.”
“그러길 바라야지.”
진료실에 모인 학생들이 저마다 소회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곧 준과 아그네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들이 일제히 기립해 꾸벅 인사했다.
준과 아그네스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벌써 열 차례니 진행된 공개 진료였기에 아카데미 강의처럼 체계가 완전히 잡혀 있었다.
“일찍들 모였군. 결석자 있나?”
“없습니다.”
학생들 앞에 선 준이 뒷짐을 지며 말을 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이 공개 진료 마지막 날이다. 아레스 각하의 병세를 최종 점검하고 표적치료의 성과를 확인하는 순간이지. 아마 왕국 의학계에 길이 남을 날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눈빛이 총명하게 빛났다.
지난 중간 검사에서는 암 조직이 거의 줄어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최근 약을 증량하고 새로운 약재를 추가한 상황이라 완치를 기대해 볼 만도 했다.
암의 완치.
치유사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을 꿀 만한 대단한 일이었다.
“각하께서 곧 도착하실 예정이니 모두 정숙하고 있도록. 오늘은 특별히 각하께서 오찬을 준비해 주셨으니, 공개 진료가 끝난 뒤에 모두 참여하길 바란다.”
“예!”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펜과 노트를 준비했다. 아그네스는 칠판을 학생들이 잘 보이는 쪽으로 끌어왔다. 분필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스캐너도 준비했다. 아그네스는 화면을 점검하며 아레스 공작의 암 조직이 완전히 사라져 있기를 기원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아그네스가 준에게 보고했다.
“준비 다 끝났어요.”
“수고했다.”
“그런데 선생님. 전에 말씀드린 건 생각해 보셨어요?”
아그네스가 조용히 물었다. 다른 학생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공개 진료 말인가?”
“예.”
“좋은 생각이야. 확실히 이대로 세미나를 끝내긴 아까운 면이 있지. 그런데 바쁘지 않겠어? 병원 일과 병행하려면 힘들지도 몰라. 특별히 보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요. 그래도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아요.”
“넌 지금도 잘하고 있어. 기회는 앞으로도 충분히 올 거다.”
아그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잘하려는 것도 있지만, 학생들하고 많이 친해져서요. 제가 아카데미에 출강할 수도 없는 거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접점을 만들고 싶어요. 다 미래를 위한 투자예요. 해 보고 싶어요.”
“그래.”
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그네스는 학생들을 완전히 통솔하는 데 성공했다. 뛰어난 외모도 한몫을 한 건 분명하지만, 의술에 대한 열정에 모두가 사로잡힌 것이다.
실력도 좋은데 열정까지 있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희생정신이 뛰어난 상냥한 사람.
학생들이 느낀 아그네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그래서 공개 진료가 끝나면 그녀에게 치유술이나 약초학에 대해 질문을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시 공개 진료를 열어 줄 수 없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도 도움을 주도록 하마. 진료실은 우리 저택에 있는 곳을 사용하면 되고. 다른 비품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그네스는 생일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몸은 훌쩍 자랐지만, 이럴 때는 아이처럼 순수한 면이 있었다.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아레스 공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학생들이 일어나 그에게 정중히 예를 취했다.
준이 가까이 다가가 진료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은 간단히 검사를 할 겁니다. 지금까지의 치료가 어떤 성과를 냈는지 객관적으로 관찰할 계획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말씀만 드릴 수 있겠군요.”
“좋아. 마음대로 하시게.”
아레스 후작은 겉옷을 벗고 침상에 누웠다. 기다렸다는 듯 슬라임 정제액이 발린 스캐너 헤드가 준의 손에 쥐어졌다. 그렇게 검사가 시작됐다.
화면에 각종 장기의 모습이 잡히기 시작했다. 모두가 가까이 다가와 뚫어져라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없다! 암 조직이 모두 사라졌어!”
“그럴 리가?”
“설마 완전관해가 된 건가?”
흥분이 섞인 웅성거림이었다. 화면상으로 아레스 후작의 폐에 전이되었던 암 조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준은 잠시 핸들을 내려놓고 손으로 마나를 직접 주입해 진단했다. 스캐너보다 훨씬 정밀한 추적이 가능했다.
“폐는 이상이 없다. 깨끗하군.”
“예.”
아그네스가 준의 말을 차트에 기록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다음 장기는 어떻게 변했을까?
준이 다시 핸들을 잡았고, 이번엔 간의 실루엣이 모니터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진료실이 침묵에 빠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모니터를 주목했다. 곧이어 또 다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없어!”
“그러게. 없는 거 같은데?”
“분명히 저 자리에 큰 조직이 있었는데…….”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긍정의 탄식이었다.
“간도 깨끗해 보여. 나만 저렇게 보이는 건가?”
“내 눈에도!”
“완치다! 이건 기적이야!”
섣부른 외침도 들려왔지만, 준은 모니터에 집중할 뿐이다. 곧 그가 진단을 내렸다.
“간도 이상 없음.”
아그네스가 다시 차트에 기록했다.
나머지 전이된 장기에 대해서도 모두 검사가 끝났다. 암 조직이 남은 장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완전관해에 성공한 것이다.
준은 스캐너 헤드를 내려놓고 아레스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각하. 전이된 장기에서 암 조직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이제 한숨 돌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레스 공작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왕국의 군무를 책임지는 대신이 저런 표정을 지을 줄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준이 이어 설명했다.
“하지만 이건 완치가 아닙니다. 암은 재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약을 드시고, 꾸준히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공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뜻하지 않은 반응에 준과 아그네스가 깜짝 놀랐다. 아그네스가 황급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공작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레스 공작이 손수건을 정중히 거절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이런.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군. 이젠 괜찮네.”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손으로 준의 어깨를 잡았다. 감격스럽게.
“고맙네! 강준 경. 경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 자네의 노고는 결코 잊지 않겠네!”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왕국을 대표하는 귀족의 목숨을 구한.
“오히려 제가 감사한 일입니다. 학생들을 위해 공개 진료를 승낙해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이번 진료에 참관한 학생들도 오늘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경이 명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네. 아니, 신의라고 해야 하나? 여기 모인 제군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보네. 안 그런가?”
대답 대신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학생들은 준과 아그네스, 그리고 아레스 공작을 향해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알프하이겐 가문의 원로들과 식솔들도 함께 기쁨을 나눴다.
그렇게 준의 첫 번째 공개 진료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 * *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지금이 딱 그 속담에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아레스 공작의 암이 깨끗이 나았다는 소문이 왕도에 퍼졌다.
왕도는 물론 아비루나 왕국의 전역, 나아가서는 인접한 국가에까지 준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아레스 공작은 파급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불치의 병을 치료한 신의(神醫) 강준.
덕분에 준의 명성은 순식간에 퍼졌다. 진료 의뢰를 하려는 사람보다 그와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바로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으로.
“이번엔 어디라고요?”
“세비앙 백작께서 뵙기를 희망하십니다. 왕도에서 이름난 상단을 거느리고 있는 가문이지요. 한번 만나 보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준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폴링 경. 세비앙 백작까지 포함해서 지금 총 몇 명이나 찾아온 겁니까?”
“헛걸음을 하고 돌아간 분들까지 포함하면 모두 마흔다섯 명입니다.”
“마흔다섯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유명해질 거라는 생각은 하긴 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택에 들이닥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준은 짜릿한 쾌감이 아닌 두통을 느꼈다.
“오늘은 모두 돌려보내도록 하세요. 요즘 무리해서 와병 중이라고 하시고.”
“알겠습니다. 영주님. 이 일은 제게 맡기시고 일단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지요. 아무튼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내려가 보세요. 경도 고생이 많군요. 잘 부탁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는 듯 싱긋 웃은 폴링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모든 손님들이 저택을 나섰다. 준이 와병 중이라는 핑계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오히려 또 다른 역풍을 몰고 왔다.
소문을 들은 왕국의 귀족들이 그에게 몸에 좋은 약초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구하기 힘든 적솔잎을 비롯해 금장미와 여우꽃까지. 마차가 한 대 도착할 때마다 약초가 한 무더기씩 쌓였다.
폴링이 사색이 되어 다시 집무실로 올라왔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설마 왕실에서 사람이 나오기라도 했습니까?”
“오, 그건 생각만 해도 더 끔찍한 일이군요!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닙니다.”
폴링은 저택 앞마당에 쌓이기 시작한 약초에 대해 설명했다. 창가로 가 밖을 슬쩍 살펴본 준은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약초를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도록 하세요. 아그네스 선생에게 보존 마법을 걸라고 하고. 손질해서 저택 진료실에 보관합시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약초를 보낸 가주들에게 감사 편지도 잊지 말고. 약초는 빈민 구제에 쓰겠다고 해 주십시오.”
폴링의 수완 덕에 상황은 금방 정리되었다. 덕분에 엘누아르 가문의 진료실에는 1년 정도는 충분히 사용하고도 남을 약재가 저장되었다.
하녀들과 기사들이 모두 달려드는 그 장면을 지켜본 준이 탄식을 흘렸다.
‘이거, 아카데미에 다시 휴가계를 내야 하나?’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대로 연구실에 나간다면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길 게 분명했으니까.
집무실로 돌아온 준은 아카데미 학장인 필딘에게 보내는 휴가계를 작성했다. 준수한 필력이 ‘과로’라는 사유를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휴가계는 즉시 승인되었고, 준은 당분간 저택에서 칩거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알프하이겐 가문의 미놀렌 경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전령이 아닌 그가 직접 왔다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 생긴 것이리라.
준은 그와 대면했다.
“휴식을 방해해 대단히 송구합니다. 아레스 공작 각하의 전언입니다. 내일 오후, 입궁할 예정이니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전해 주시지요.”
“그럼 그때 뵙지요. 그런데 병환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좀 괜찮으신 겁니까? 아레스 각하께서 무척 걱정하고 계십니다.”
“오늘이 지나면 다 나을 예정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하하하. 역시 명의다운 말씀이군요. 다행입니다.”
미놀렌을 직접 배웅한 준은 침소로 돌아왔다. 릴리는 침구를 정리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루치아 님 불러 드릴까요? 힐링엔 역시 여친이 최고죠.”
“시끄러워.”
“호호호! 아무튼 흥미진진하네요. 과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그네스 양과 마리 양이 어떤 전략을 들고나올지…… 이 저택은 이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거라고요! 여마법사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블리자드가 쏟아지는 법!”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준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렸다. 침대에 누운 그는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