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62화 (162/175)

162화 인생의 즐거움이란 (2)

루치아는 끝내 저택에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선물에 대한 고마움만 표했다.

그리고 만찬이 시작되었다. 누아 마을 진료소의 주역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기에 모두가 즐겁게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눴다.

만찬이 끝나자 루치아는 아그네스를 불러 따로 테라스로 나갔다. 마침 그 모습을 하룬이 목격했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네요.”

“왜?”

“저길 보세요.”

준은 하룬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곳엔 루치아와 아그네스가 테라스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아도 그렇고, 루치아 선생님도 그렇고. 뭔가 진지한 거 같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거라 반가울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은 거 같고요.”

거리가 꽤 있고 문이 닫혀 있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뭔가 미묘하긴 했는데, 특별히 달라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진지해서 나쁠 거 있나? 환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지. 신경 쓰지 말고 네 수련에 집중해.”

“저도 빨리 마나 유저로 만들어 주십쇼. 그럼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빨리 강해지면 부작용이 그만큼 커지는 법이다.”

“마리는 아니잖아요?”

“마리는 천부적인 자질을 지니고 태어났지. 하지만 넌 아니잖아.”

“하. 뭔가 본전도 못 찾은 느낌이네요.”

하룬은 풀이 죽었지만, 두 팔을 번쩍 들며 다시 기운을 차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하룬은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왕실기사단의 일원이 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니까.

“추천장 써 주시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예전에 제 검 망가뜨리셨을 때 하신 말씀 말입니다.”

“잊지 않았지. 그래서 준비는 됐고?”

“아직은 아니죠.”

“의외네. 자신 있게 준비가 끝났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준은 농담조로 말했지만, 하룬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래서 준은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도전해 보고 싶은데 갈 길이 머네요. 네아나 마리는 벌써 꿈을 이루고 있는데 저만 뒤처진 것 같아서요.”

“마나 유저가 된다고 해서 그 길이 단축되거나 하진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뒷짐을 진 준은 하룬을 빤히 바라보았다. 곧 그의 표정이 풀어지며 인자한 미소가 걸렸다.

“좀 더 꿈을 크게 가져보는 건 어때?”

“왕립기사단보다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검을 누구를 위해 휘두를까 생각하라는 거지. 왕의 검으로 평생을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다른 길도 있지.”

준은 아그네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아그네스의 꿈은 치유사가 되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 녀석은 왕립 병원에서 주목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어. 비결이 뭐라고 생각해?”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이죠, 뭐.”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는 걸 부정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차이요?”

준은 다시 하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없는 시골 소년에서 이제는 의젓한 기사가 된 제자가 눈을 빛내며 대답을 재촉했다.

“아그네스는 치유술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용하고 싶었던 거야. 환자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순수한 심성으로. 욕심을 버렸기 때문에 빨리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으음. 어려운 문제군요.”

“결국은 본인이 선택해야 하는 문제니까.”

“저도 나중에 멋진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과연?”

하룬은 섭섭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저도 나름 최측근인데, 예? 소중한 부하를 위해서 선의의 거짓말 한번 못 해 주십니까?”

“난 너를 부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자라고 생각하지.”

“그건 좀 감동이네요.”

코끝이 찡했는지 하룬이 손으로 코를 슥 문질렀다.

그때, 테라스의 문이 열리고 루치아와 아그네스가 밖으로 나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사람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루치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요? 나도 끼워 줘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준이 되물었다. 아그네스는 이미 마리와 어울리고 있어 대답은 루치아가 해야 했다.

“뭐, 여자들끼리의 비밀이라고 할까요. 그나저나 당신 정도의 능력자라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들었을 거 아니에요? 새삼스럽게.”

“남의 대화를 엿듣는 취미는 없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한마디로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이번엔 준이 양보했다.

“이 녀석이 왕실기사단원이 되고 싶다고 해서.”

“어머, 그래요? 하긴. 하룬도 이제 한몫할 때가 됐죠. 조만간 국왕 폐하를 만나러 간다고 했으니 그때 살짝 찔러 보는 건 어때요?”

“그러지 마. 괜히 기대할라.”

이미 하룬은 잔뜩 기대한 상태였다. 루치아는 힘내라는 말을 남기곤 준을 끌고 한쪽으로 걸어갔다.

“배도 부르고, 조용한 데서 둘이 한잔할래요?”

“그럴까?”

그렇게 늦은 밤, 준과 루치아는 방 안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단둘이서.

준은 그간 밀린 이야기를 차분히 풀었다.

루치아는 그저 먹고 자고 환자들을 돌보는 일상을 반복했기에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반면 준은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덕분에 루치아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그냥 속이 다 시원하네. 유급된 녀석들은 가만히 있던가요? 괜찮은 가문이라면 뭔가 보복을 하려고 할 텐데요.”

“여론이 잠잠해지면 하나둘 수작을 부리겠지. 아직은 조용해.”

“그땐 나도 옆에 있어야겠어요. 그런 재미있는 건 직접 봐야 제맛이지. 참, 엘븐하임에 갔던 건 어떻게 됐어요?”

준은 엘븐하임에서 있었던 일도 이야기했다. 마계의 대공이 세계수와 접촉했다는 부분에서는 루치아의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

엘프족이 새로운 낙원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루치아는 와인을 들이켜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역시 세계수의 수명이 끝난 거로군요.”

“알고 있었어?”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은 아니지만, 전 특별한 전령이니까요.”

또다시 와인을 마신 루치아는 이번엔 초콜릿을 입에 쏙 넣었다. 이어지는 행복한 표정. 은근히 먹는 것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배부르다며.”

“괜찮아요. 술배는 따로 있거든요.”

“그것도 천족의 권능인 모양이네.”

“이 저택에 치유사가 몇 명인데 배탈 좀 나면 어때요?”

하긴,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때 뜬금없는 한마디가 루치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그네스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하네요. 선생이 아니라 남자로.”

“언제는 아니라고 하더니?”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거죠. 아니면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여자 마음은 갈대라고 하잖아요?”

예전에 켈세타 성에서 열린 연회에서 루치아는 아그네스를 이렇게 평가했었다. 애정이 아니라 동경을 품은 거라고.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닮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거라고.

그런데 지금, 그때 내렸던 평가를 번복하고 있는 것이다.

“아까 테라스에서 둘이 한 얘기가 그거였나?”

“비슷해요. 사실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뭐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는 일이고.”

준도 잔을 기울여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아그네스 본인이 아닌 루치아에게 전해 들으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선물한 머리핀을 최근에 자주 하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여러 신호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컸다.

하지만 준은 제자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끌린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루치아였다. 그녀와는 정말 특별한 시간을 보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준이 그녀를 응시했다. 무슨 의미냐고 되묻는 듯했다.

“여긴 당신이 태어난 곳이 아니에요. 이곳의 귀족들은 여러 부인을 두고 있고, 정인(情人)도 있죠. 당신이 몇 명의 여자를 두든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당신이 나를 바라봐 주기만 한다면.”

“진심이야?”

“그럼요.”

“네 마지막 인생이야. 게다가 천족의 권능을 포기하면서까지 강림한 거잖아?”

“당신에게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는 선택이었죠.”

준은 웃고 말았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오늘 루치아가 예쁘게 꾸미고 왔다는 사실을. 자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알렌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준은 그 마음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 * *

루치아는 아침이 오기 전에 저택을 떠났다. 준은 침대에 누운 채 옆자리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짧았지만 꿈같은 하룻밤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과 촉촉한 눈망울이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왜 이제야 그녀를 받아들인 걸까.

조금은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후회 끝에 찾아온 것은 기쁨이었다.

그래서일까.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준은 다른 생각에 잠겨야 했다.

“영주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함께 식사를 하던 폴링이 그렇게 물을 정도였다.

“아니. 괜찮습니다. 어디 아파 보입니까?”

“평소랑 좀 달라 보여서 말입니다. 멍하신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닙니까? 여독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나 걱정이군요.”

준은 잠시 휴강을 할까 고민했지만, 여느 때와 같이 식사를 마치고 아카데미로 갈 준비를 했다.

“서기관은 출근했습니까?”

“늘 그렇듯 새벽같이 병원에 가셨지요. 가끔은 늑장을 부릴 만도 한데 참 부지런하신 것 같습니다.”

“마리는?”

“마리 님도 아침 일찍 누아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저택을 나섰다.

돌아선 준이 폴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할 얘기가 있는 표정이라 폴링은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런 질문을 하기 좀 뜬금없지만…… 경의 결혼 생활은 어떻습니까?”

“하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나 긴장했는데 의외의 말씀이군요. 행복합니다. 힘든 면도 분명 있지만, 한 번쯤은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두 번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요. 요즘은 애들 커 가는 걸 바라보는 재미로 삽니다.”

“그렇군요. 조언 고맙습니다.”

“마지막에 드린 말씀은 제 집사람에게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폴링은 웃으며 가방을 건넸다. 준은 그것을 받아들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아카데미를 향해 힘차게 달렸다.

연구실엔 역시나 브로콜린이 일찍부터 불을 밝히고 있었다. 준을 본 브로콜린은 살짝 놀랐다. 그는 인사 대신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같은 질문이 또 나왔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준은 자리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어 보였는데, 주변 사람들은 자꾸 아프냐고 묻고 있다.

“아픈 곳이 있었다면 벌써 치료를 했겠지.”

“하긴, 교수님은 명의시니까. 아니면 아그네스 선생님께 부탁해도 되겠군요. 뭔가 하숙하고 싶은 그런 저택이다~ 복지가 끝내주네.”

“어디가 이상해 보여?”

준이 묻자 브로콜린이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밤에 뭐 하셨어요? 뭔가 음흉한 생각을 계속 하고 계신 것 같단 말이죠. 기운도 없어 보이시고. 혹시 아그네스 선생님과…….”

“됐다.”

“하긴. 환자밖에 모르는 우리 교수님이 그러실 리가 없지. 몸 안 좋으시면 휴강하는 게 어떻습니까? 학생들한테 제일 인기 있는 교수는 강의를 잘하는 교수가 아니라 휴강을 잘하는 교수지요.”

“그것도 됐어.”

왠지 놀림을 받는 기분이라 준은 전공서를 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캠퍼스를 걷던 준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개한 꽃들이 더욱 풍성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평소 무심코 지나갔던 풍경들이 하나둘 눈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 이런!”

아차 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시계를 확인한 준은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하지만 처음으로 수업에 늦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