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인생의 즐거움이란 (1)
준이 승낙하자 아레스 공작은 꽤 놀랐다.
“요즘 자네의 농담이 늘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설마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아닙니다. 국왕 폐하와 관련된 일인데 어찌 농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자네가 거절할 줄 알았어.”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지금까지 공작을 치료하면서 단 한 번도 사사로운 청탁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처음 그와 만났던 날도 그랬다. 가문의 부와 명예를 드높일 좋은 기회였는데, 그림에 없는 점을 보고는 다짜고짜 병원으로 가자고 했었다.
아레스 공작의 눈에는 물욕에 전혀 관심이 없는 괴짜 젊은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제 조교가 그러더군요. 폐하의 금지옥엽을 유급시킨 것도 모자라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으니, 폐하께서 부를지도 모른다고요.”
“우울증에 빠졌다면 자네가 다시 고치면 되지 않나? 그 좋은 솜씨로.”
“한 왕국의 지존이 그렇게 단순히 사람을 부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준의 한마디에 아레스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는 의미로.
“그래도 자네에게 악감정은 없으시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샤넬 왕녀는 좀 더 혼이 나야 돼. 정신을 차리려면 멀었지.”
“그래도 왕실의 명예가 실추된 건 사실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자네의 잘못을 추궁하기 위해서 보자고 하시는 건 아니네.”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좀 예민했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입궁하시는 날 불러 주십시오. 단, 아카데미 강의가 있는 날은 피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우리 바쁘신 교수님 스케줄에 내가 맞춰야지. 기다리고 있게. 내 조만간 연락을 주지.”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예를 취하고 준은 바로 저택을 나섰다. 마차에 올라 마부에게 지시를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빨리 국왕과 만나게 될 줄이야.’
먼 옛날 아비루나 왕국의 지도자와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자연스레 준은 국왕의 의도를 분석했다.
‘아무래도 샤넬 왕녀의 유급을 빌미로 군수 사업에 동참시킬 생각인 것 같은데…… 거절하기 난감한 자리가 되겠어.’
그것 외에는 자신을 보자고 할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왕실에 환자가 없는 이상 부르진 않을 테니까.
거기에 아레스 공작이 강력하게 추천을 했을 것이다. 군수품의 효과가 뛰어나다는 사실도 있고, 거기에 목숨을 건졌으니 말이다.
‘일단 한번 만나 보는 게 좋겠어. 그 이후의 일은 다음에 생각하자.’
그렇게 마차가 한참을 달려 엘누아르 가문에 도착했다.
오늘은 또 다른 제자인 마리가 저택에 오는 날이다. 엘누아르 가문과 누아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저택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혈마신의 추종자들을 모두 제거하라는 임무를 마치고 나서 처음 보는 자리였다. 그래서 준은 특별히 신경을 썼다. 아끼는 제자니까.
저택으로 들어오니 하녀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그중엔 마리와 기린도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늦을까 봐 조금 서둘렀어요. 임무는 모두 완수했습니다. 스승님.”
“정말 잘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고?”
“그럼요. 생각보다 시시했어요.”
마리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것이리라.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 준이 이번엔 기린을 주목했다.
“자네는 어땠나?”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과연 스승님의 실력은 대단했어요. 배울 게 많았습니다.”
“스승님이라니?”
“앗.”
기린이 말실수를 한 듯 입을 가리자 마리가 대신 설명했다.
“말씀을 안 드렸네요. 앞으로 이 아이는 제가 가르치기로 했어요.”
“그래?”
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리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건 파악했지만, 이렇게 빨리 제자가 생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자의 제자라니.
그래도 준은 긍정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지도한다는 건 단순히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게 아니다. 지도하는 사람도 제자에게 영향을 받으며 함께 성장하게 된다.
즉, 그녀는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보고 드린 대로 강령술사들은 모두 해치웠어요. 잔당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건 시간이 되는 대로 다시 확인해 볼게요.”
“그건 됐다. 볼카누스와 카이엔이 나서 줄 테니까.”
“알겠어요. 그런데 스승님은 어떠셨어요? 멀리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요.”
“네가 애써 준 덕분에 그쪽 일도 잘 끝났다. 둘 다 고생했을 텐데 올라가서 쉬어라. 이따 만찬에서 보자.”
“예. 스승님.”
마리와 기린은 처소로 올라갔다. 하지만 기린은 즉시 평범한 하녀로 돌아갔다. 곧 만찬이 예정되어 있기에 주방에서 일을 도왔다.
한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폴링이 보고했다.
“영주님. 확인해 주셔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 집무실에 놓아 두었으니 시간 나실 때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그러지요.”
준은 집무실로 돌아왔다. 외투를 벗고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결재가 필요한 서류는 없었고, 대부분 보고서였다. 가문의 대소사는 이제 폴링이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준이 실제로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업은 아주 순조롭게 잘 풀리고 있군. 마이더스 상단 쪽 일도 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폴링은 현재 가문의 재정 상태를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날이 갈수록 순이익이 늘어나고 있었고, 엘누아르 가문의 창고도 풍요로워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준의 아공간 창고에 잠들어 있는 보물들보다야 가치가 높진 않겠지만 이제 한미한 시골 가문이라고 무시당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지방 하급 귀족 가문이 이렇게 단기간에 부를 축적한 경우는 대륙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을.
‘가능하면 가문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겠지. 어디서 방해 공작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터트릴 땐 터트리더라도 아직은 아니야.’
오히려 준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사교계의 손짓이었다. 왕도에서 명성이 높아질수록 여러 곳에서 초청장이 날아오고 있었다.
준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는 페르디낭 후작도 그 부분에서 아쉬움을 표했다.
사교계에 진출하게 되면 단번에 주목을 받을 수 있는데, 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참가를 거부하고 있었다.
사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굳이 사교계에 진출해서 얼굴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크게 아프기 마련이니까.
‘굳이 연회장이 아니라도 진료실에서 얼마든지 친분을 쌓을 수 있지. 아인하르트 후작과 아레스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굳이 무대에 나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알아서 무대를 마련해 주니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준에게 사교 모임 참가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라 페르디낭 후작도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다만 왕립 학술원에서 표적치료법에 대한 강연은 계속 요청했다. ‘로가리듬의 법칙’도 포함해서. 준은 다른 건 몰라도 그 건은 수락하기로 했다.
‘미뤄서 좋을 건 없으니 공개 진료가 끝나면 한 번에 처리해야겠어. 브로콜린 녀석의 얼빠진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준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이 늘어 갈수록 인생이 즐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정리해 나갈 무렵, 노크가 들리고 아그네스가 들어왔다. 준이 그녀를 맞았다.
“어서 와라.”
“잘 다녀오셨어요? 며칠 자리를 비우셨을 뿐인데 빈자리가 꽤 크더라고요.”
“공개 진료 이야기는 들었다. 이제 내가 필요 없게 되었다지?”
“설마요. 누가 그래요?”
아그네스는 예쁘게 웃었다. 최근 그녀는 준 앞에서 이렇게 웃는 일이 많아졌다.
“아레스 각하를 만나고 오셨다면서요? 저도 오는 길에 잠깐 공작가에 들렀거든요. 선생님이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왕도에 돌아왔으니 인사는 드려야 하니까. 요즘 아주 잘하고 있다며? 네가 없어서 아쉬워하시더군.”
“다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공작 각하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환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 마음 잊지 마라. 참. 마리가 와 있어. 얘기 들었나?”
“예. 먼저 인사드리고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이따 식당에서 봬요. 마리랑 놀고 있을게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네스가 돌아가고 잠시 후, 다시 노크가 들렸다.
그런데 평범한 인간이 품을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준은 깜짝 놀랐다.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루치아였다. 예전에 켈세타에서 구입한 예쁜 드레스를 입고서.
“뭐야. 언제 왔지?”
“뭐야라니. 듣는 사람 서운하게 그게 뭐예요? 아, 정말.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 받을 사람이 아닌데.”
도도하게 걸어온 루치아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료소는 어쩌고?”
“진료 끝났어요. 해 떨어진 지가 언젠데. 마침 마르다 마을의 치유사가 찾아와서…… 이름이 뭐더라?”
“알렌?”
“맞아요. 그분한테 잠시 진료소를 부탁하고 왔지요. 급환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거예요. 허당은 아니니까. 그리고 게이트가 있으니 오가는 건 금방이잖아요. 뭘 새삼스레.”
그제야 준이 웃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으니, 사실 마을을 떠났다고 하기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런데 알렌 선생은 왜 왔대?”
“마르다 마을에 드디어 신입 치유사가 왔다나 봐요. 오랜만에 휴가를 얻었는데, 당신을 보러 마을에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쉽게도 꽝이었죠.”
“내가 왕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못 들은 모양이군.”
“시골 마을이니 소문이 늦을 수밖에요.”
잠시 말이 끊겼다. 또다시 준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루치아가 날카롭게 자신을 쏘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 난 빼놓고 어린 애들 데리고 재미있게 놀려고 한다면서요? 남자들이 어린 여자 좋아한단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당신도 그럴 줄은 몰랐네요. 평범한 인간이 되더니 취향도 평범해졌어.”
“무슨 소리야? 마리가 고생해서 저녁 한번 먹으려는 건데.”
“고생은 마리만 하나요? 나도 시골에서 환자들 보면서 고생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전에 누아 마을에 왔었다면서요. 왜 그냥 돌아갔어요? 얼굴 한번 보고 가는 게 그렇게 힘드나?”
“누가 그래?”
“누구겠어요. 당신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그랬지.”
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븐하임으로 가기 전에 누아 마을에 들렀던 그때를 말하는 것 같다. 차라리 잠깐이라도 보고 갈걸.
그런데 마리가 그런 이야기를 왜 했을까?
평소에 입이 무거운 아이였는데.
“잠깐 들르는 것보다 일 마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려 했지. 다른 의도는 없었어.”
“일이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 것 같진 않던데.”
할 말이 없어진 준은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루치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선물이야.”
“지금 이런 걸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거예요? 정말 당신은 도대체…… 어머?”
하지만 그것이 세계수 잎으로 만든 찻잎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기억해 주고 있었다.
루치아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확인한 준이 물었다.
“그래서, 대체 왜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