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유급 시험 (2)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준이 조용히 말했다.
“그만. 시간이 끝났다. 펜을 내려놓도록.”
하지만 세 사람은 펜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준이 웃으며 재차 경고했다.
“당장 펜을 놓지 않는다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 참관하시는 분들은 이 점을 잘 헤아려 주시길.”
이번 시험 감독은 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강의실 뒤편에 학생과 직원, 그리고 교수로 구성된 참관인단이 모여 있었다.
결국 세 사람은 펜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건 흔한 쪽지시험 같은 게 아니었다. 징계위원회가 연 학사일정 중 하나였다.
모두 펜을 내려놓은 것을 확인한 준이 명령했다.
“앞으로 나와 답안지를 제출해라.”
켈빈과 무어의 답안지는 빼곡했다. 반면 샤넬 왕녀의 답안지는 깨끗했다. 답안지를 받아 든 준이 싱긋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평소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답안지가 아주 깨끗하군. 다른 시험에 재활용해도 되겠어. 왕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그대의 노고는 나중에 국왕 폐하를 뵙게 되면 따로 말씀해 드리지.”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까지야. 자네들은 학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거니까. 다만 그 책임은 질 필요가 있겠지. 권리에 대한 책임. 그것이 바로 지성인이 갖춰야 할 미덕이야.”
답안지를 모두 회수한 준은 즉시 채점을 시작했다.
우선 샤넬 왕녀의 답안지부터 체크했다. 볼 것도 없이 준은 맨 위에 0점을 표시했다. 지켜보던 샤넬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다음으로 무어의 답안지를 확인했다. 글씨가 빼곡하게 차 있어 기대를 품었지만 내용은 완전히 허술했다. 준은 특별히 점수 옆에 의견을 기입했다.
― 문학부 전과를 추천하는 바임.
무어의 이름 옆엔 30점이 기록되었다. 생각보다는 높은 점수였다.
마지막으로 켈빈의 답안지를 확인했다.
채점하는 데 오래 걸렸다.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켈빈은 어느 정도 실력이 있었다. 과연 의학부를 주름잡는 리더다운 모습이었다.
채점을 끝낸 준은 다시 점수를 확인한 뒤 합산 점수를 기록했다.
“자, 채점이 모두 끝났다. 점수를 확인하고 이의가 있다면 바로 이야기하길 바란다.”
낮은 점수를 기록한 샤넬과 무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샤넬은 아예 빠져나올 구멍이 없었고, 무어는 준이 남긴 의견을 확인하고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때 켈빈이 손을 들었다.
“켈빈 군. 무슨 문제가 있나?”
“서술형 문제인 만큼 신중히 채점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검토를 부탁드리죠.”
“나는 충분히 신중하게 채점을 했어.”
“사람이 하는 일에는 실수가 있는 법이죠. 혹시 또 모르잖습니까?”
버릇없는 한마디였지만, 준은 인정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켈빈이 돌려서 말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받은 점수는 59점이었다. 1점 차이로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점수를 올려 달라는, 우회적인 요구였다.
“공정함을 위해 검토는 다른 교수님께 부탁하도록 하지. 가네트 교수님. 대신 확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지요.”
참관인단 중 배 나온 중년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네트 자작으로, 아카데미 의학부 소속 교수였다.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라 켈빈은 내심 안도했다.
평소 학생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만큼 1점 정도는 올려주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가네트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며 켈빈의 답안지를 다시 확인했다. 잠시 후, 그가 인상을 쓰며 답안지에 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강준 교수. 이 부분이 좀 이상하군요.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아, 확실히 그렇군요.”
가네트 교수가 가리킨 곳을 확인한 준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준은 즉시 잘못 채점된 부분을 바로잡았고, 점수를 수정했다.
그런데 곁에서 지켜보던 켈빈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올라가야 할 점수가 오히려 54점으로 낮아진 것이다.
“대체 뭡니까?”
“용어의 철자가 잘못되었군. 고마워. 자네가 재검토를 의뢰하지 않았다면 내 실수가 그대로 묻힐 뻔했군.”
준은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지만, 켈빈의 귀에는 조롱처럼 들렸다.
“말도 안 됩니다! 철자 하나 틀린 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십니까?”
이번엔 가네트 교수가 대신 대답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친구야. 의학 용어는 아주 중요하다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학문인 만큼, 혼동된다면 큰 실수로 이어지는 법이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과연 가네트 교수님이시군요. 탄복했습니다.”
“흠흠. 이 정도야 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가네트 교수가 참관인석으로 돌아갔다. 답안지를 모두 수거한 준이 활짝 웃으며 세 학생에게 말했다.
“애석하게도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없군. 내년에도 자네들은 같은 과정의 수업을 수강해야 할 거야. 그땐 열심히 하기를 바라네.”
준은 그렇게 강의실을 떠났다.
* * *
로열 클럽의 세 학생들이 유급되었다는 공고가 아카데미에 걸렸다. 켈빈, 샤넬, 무어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됐다.
개인적인 자존심의 문제를 떠나 가문의 명성에 흠집이 난 사건이었다. 유급은 말 그대로 자격 미달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특히 샤넬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왕실은 일반적인 귀족 가문과는 전혀 다르다. 왕국 신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유급을 당했으니,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만했다.
반면 로열 클럽에서 탈퇴한 엔도버는 반사이익을 얻었다.
공개 진료 건을 시작으로, 그는 켈빈과 대립하며 의학부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됐다.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한 것.
그렇게 준의 등장으로 분란에 휩싸였던 의학부는 평화를 되찾았다.
“축하드립니다. 뜻하지 않게 참교육을 시전하셨네요. 고 녀석들, 당분간 학교에 못 나올 겁니다. 샤넬 왕녀는 자퇴한다는 소문도 있네요.”
브로콜린이 뜨겁게 우린 차를 건네며 말했다. 준은 별 관심이 없는지 책상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연구실엔 둘뿐이었다.
“근데 하나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뭔데?”
“왕녀가 개쪽을 당했는데, 국왕 폐하께서 가만히 계실까? 이런 의문이 드네요. 만약 제가 국왕이라면 그놈 면상 좀 보자 이렇게 명령을 내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의외의 대답에 브로콜린이 귀를 쫑긋했다.
“아레스 각하의 암이 거의 완치되고 있어. 공개 진료도 끝나 가고 있고. 굳이 샤넬 왕녀의 일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불려 갈 거라고 생각한다.”
“애증의 대상이겠는데요? 금지옥엽을 유급시킨 것도 모자라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으니.”
“그럼 다시 누아 마을로 돌아가야지. 걱정하지 마라. 너에게 교수 자리를 물려줄 테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준이 빙긋 웃었다.
“당연히 농담이지. 넌 자연과학부니 애초에 물려받을 요건이 안 되잖아?”
“왠지 요즘 농담이 느신 것 같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브로콜린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던 연구를 계속했다.
최근 그는 마나를 이용하지 않는 표적치료 장치를 개발하고 있었다.
아그네스의 강의에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살짝 삐뚤어진 성격도 한몫했는데, 마나 유저가 아닌 자의 저력을 보여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준은 그런 그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줬다.
일반인이 마나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마법공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나를 응축한 장치, 즉 마나 배터리가 필요한 것이다.
준은 직접 마나 배터리를 만들어 브로콜린에게 주었다. 그것 자체로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연구는 좀 어때? 진척이 있나?”
“절반 정도 온 것 같네요.”
“벌써? 생각보다 빠르군.”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피식 웃은 준이 왕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강의가 모두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아카데미에서 용무는 없었다.
학생들이 가끔 찾아오곤 하지만 준은 쓸데없이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일과가 끝나면 칼같이 저택으로 돌아가곤 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수고해라.”
밖으로 나온 준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출발시키기 전에 목적지를 수정했다.
“알프하이겐 가문의 저택으로.”
“알겠습니다.”
마부가 말을 출발시켰다. 준을 태운 마차가 천천히 캠퍼스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 *
아레스 공작은 예전의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이제는 공직으로 돌아가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살도 꽤 붙기 시작했다.
“휴가는 어땠나?”
“즐거웠습니다. 뜻하는 바도 모두 이뤘지요. 양해해 주신 덕분입니다.”
“다행이군. 그런데 아그네스 선생은?”
“지금쯤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있겠지요.”
“아쉽군.”
이제는 준보다 아그네스를 더 찾게 된 공작이었다. 서글서글하면서도 포근한 그녀의 성정에 감화된 것이다.
준이 물었다.
“부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자네답지 않게 서두르는군. 선약이라도 있나?”
“오늘 밤에 제자가 오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만찬이라 늦으면 곤란해서 말입니다.”
“오, 아그네스 선생 말고 또 다른 제자가 있었군.”
준은 그렇다고 답했지만, 제자가 천재 마법사라는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이 이상 공작에게 관심을 사게 되면 피곤해질 것이다.
“다른 건 아니고 예전 이야기네.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 하려던 이야기 말이야.”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는 그 말씀 말입니까?”
“하하하하. 자네 잠깐 못 본 사이에 많이 짓궂어졌구만?”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레스 공작은 기분 좋게 농담으로 받았다. 그가 웃음을 그치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평화로울 때가 가장 위험할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네.”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래서 여유가 있을 때 군비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해. 이에 대해서 국왕 폐하께서도 동의하시고 있고 말이야.”
“그렇군요.”
“자네 진료소에서 개발한 키트가 꽤 좋은 효능을 내고 있다고 전해 들었네. 상비약도 그렇고. 일전에 마이더스 상단 쪽에서 견본을 받은 적이 있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은 마이더스 상단 켈세타 지부장인 알파를 통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군수 사업을 하게 된다면 자네 가문에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어떤 점에서 말씀입니까?”
“부를 축적할 수 있지. 무엇보다도 국가를 수호하는 일에 협력한다는 게 큰 명예가 되지 않겠나?”
“그렇군요.”
별로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금광 사업이 잘 풀리고 있어 더 이상의 부는 의미가 없는 상황. 그리고 아비루나 왕국은 자신의 고향도 아니었다.
그래도 준은 관심을 보였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아비루나 왕국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을 위해서 조금의 수고로움을 감수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조만간 입궁할 생각인데 동행하지 않겠나? 안 그래도 요즘 아카데미 일 때문에 자네를 한번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일세.”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동행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