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유급 시험 (1)
준 일행은 하인케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세계수가 시든 원인이 나왔기 때문에 엘븐하임 장로회가 소집되었고, 이주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매우 격렬한 토론이었다. 이건 단순히 거주지를 옮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종족의 미래가 걸린 일이었다.
반면 하인케스의 집은 고요했다.
볼카누스는 시시한 일이라며 잠을 청했고, 카이엔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준은 이르민이 직접 만들어 준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과연 엘븐하임이라 생각될 정도로 훌륭한 향을 지닌 차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준이 카이엔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새 찻잔을 내려놓고 그에게 한잔 권했다. 찻잔을 쥐고 잠시 고민하던 카이엔은 차를 한입 들이켰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시작된 말은 조금 의외였다.
“쓰러져 가는 세계수를 보니 왠지 고향 생각이 나더군.”
“고향? 철혈의 대공에게 이렇게 감상적인 구석이 있을 줄이야. 볼카누스가 들으면 한 500년은 놀려먹을 아주 좋은 소재네.”
“마음대로 하라고 해라.”
피식 웃은 준은 카이엔의 어깨를 다독였다.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세계수와의 접촉은 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을 테니.
준은 그 감상을 나중에 천천히 듣기로 하고 다시 자리를 옮겼다.
밖엔 이르민이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괜찮아.”
“침소를 마련해 두었어요. 인간들이 쓰는 침대보다 편하진 않지만 쉴 만할 거예요.”
준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이르민은 그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기세였다.
“차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 내가 일하는 아카데미에서는 이렇게 맛있는 차가 없거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미안할 지경이지.”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차니까 특별할 수밖에요.”
어쩌다 보니 세계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이르민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세계수가 병든 게 아니라 수명이 다한 거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준은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르민은 아까 받은 나뭇가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결 나아 보였다. 이제는 원인을 알게 되었으니까.
“모든 것엔 끝이 있기 마련이지.”
“왠지 우리 할아버지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럴 수밖에. 난 너희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준은 미소를 지었다. 강해서가 아닌, 오랜 세월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그런 미소였다.
이르민은 어루만지던 나뭇가지로 시선을 옮겼다. 시들어야 정상일 텐데, 나뭇가지는 왠지 아까보다 더욱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 나뭇가지를 건네며 준이 말했었다. 새로운 세계수를 키우는 건 자신의 몫이라고.
왠지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이 나뭇가지로 새로운 세계수를 탄생시키는 건가요?”
“그래. 마치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잘됐으면 좋겠어요.”
“잘해 낼 거다.”
“혹시 실패하면 어쩌죠? 그때도 준 님께서 도와주실 거죠?”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은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지만 인간의 수명은 너희들처럼 길지 않아. 세계수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흙으로 돌아가겠지.”
“그래도 권능이 남아 있으시니까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높은 클래스의 인간 마법사들은 수백 년 동안 산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글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구나.”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서면 불행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인생이 즐거울 리가 없으니까.
준은 신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만큼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기로 했다.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자식들이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늙어 갈 계획이야.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왠지 준 님과 어울리지 않아요. 신의 대리인이 평범하게 산다는 게…….”
“그래서 더 기대되는 것도 있다. 나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고 새로울 테니까.”
“마음에 두신 분은 있으시고요?”
루치아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천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인간계로 강림했다.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사랑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절대악을 물리치고 윤회의 사슬을 끊었던 그때, 그녀가 말했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다시 만났다.
그래서일까. 그녀와 함께라면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있다.”
“정말요? 누구인가요?”
소녀답게 이르민의 두 눈이 반짝였다.
다행히 그때 문이 열리고 하인케스가 들어왔다. 이제야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는 아까보다 훨씬 홀가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르민은 조금 아쉬웠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장로회에서 이주가 결정되었습니다. 내일 바로 레인저를 파견해 새로운 낙원을 찾을 계획입니다.”
“잘됐군요.”
“솔직히 주어진 시간 내에 찾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10년이라고 하셨죠?”
“작은 변수가 하나 있으니까.”
“변수라면?”
“혈마족의 추종자들이 세계수의 안식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미약하긴 하지만 그들이 세계수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하인케스는 탄식을 흘렸다. 혈마족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대대적인 강령술을 펼친다면 세계수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준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시간은 최대한 벌어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자가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날아올 겁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때, 준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진료를 마치고 대가를 청구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누아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을 루치아를 생각하니 예외가 생겼다.
“혹시 답례로 찻잎을 조금 얻어 갈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이르민. 가서 찻잎을 가져오거라. 좋은 것들로.”
“예. 아버지.”
이르민이 세계수 가지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밖으로 나갔다.
* * *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 강의실에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바로 로열 클럽의 멤버인 켈빈과 샤넬, 그리고 무어였다. 그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젠장. 학장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이야.”
쾅!
무어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켈빈과 샤넬도 마찬가지였다.
학장은 대대적으로 공고를 냈다. 이번 청원서 문제를 항명 사건으로 규정했고, 아카데미 학생으로서의 책임감과 자질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말미에 세 명에 대한 유급 시험을 치겠다고 공지했다.
이 공고는 일대 파장을 일으켰다. 학계는 물론 사교계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켈빈의 가문에서는 난리가 났다. 말이 유급 시험이지, 가문의 명예와 직결된 일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항명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버린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자칫하다간 정치적인 싸움으로 번질 수 있으니까.
그건 샤넬도, 무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국왕을 아버지로 둔 샤넬은 차가운 시선을 견뎌 내야 했다. 사춘기 소녀의 망상과 치기 어린 욕심이 큰 화를 부른 것이다.
샤넬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시험에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재수 없는 이야기는 그만둬. 짜증 나니까. 국왕 폐하께 말해 본다는 건 어떻게 된 거야?”
“시험을 보라고 하셨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구!”
샤넬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켈빈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한숨이 나왔다. 시골에서 온 촌뜨기 교수와의 기 싸움이 이렇게 커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때 문이 열리며 익숙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준이었다.
뒷문으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번 시험의 참관인단이었다.
강단에 선 준은 특유의 여유를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긴장한 모양이군. 마음 쓸 거 없다. 의학부 2학년 학생이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를 출제했다고 하니까.”
“문제는 교수님께서 내신 겁니까?”
“아니. 휴가를 다녀오느라 다른 교수님께 부탁했지. 누구라고 언급하긴 어렵지만 걱정 마라. 나보다는 관대하신 분이니까.”
준은 관대하다에 방점을 찍었다.
동시에 켈빈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천박한 남작 가문 출신 교수가 으스대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준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히 무시하는 게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니까.
“자, 그럼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지. 답안지를 받아 맨 위에 이름과 학번을 적길 바란다.”
준이 답안지를 나눠 주었다. 의학부 시험은 객관식이 없다. 자신의 견해와 치료 방법을 서술형으로 써야 하는 그런 시험이다.
다시 강단으로 돌아온 준이 시험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문제는 총 네 개다. 그중 자신 있는 두 문제를 선택해서 답을 쓰면 된다. 배점은 문제당 50점. 합격점은 60점 이상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부정행위를 하면 0점 처리된다. 유급뿐만 아니라 다른 징계가 추가되겠지. 채점은 이 자리에서 바로 하고, 결과를 알려 주도록 하겠다.”
준이 돌아섰다. 그런데 한 가지를 빼먹었는지 씨익 웃은 그가 다시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시험에 탈락하게 되면 공고에 이름이 실려 왕도 곳곳에 게시될 거다. 유명해지고 싶다면 유급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겠군.”
“…….”
“그렇게 노려볼 필요까지야. 농담이다.”
다시 돌아선 준은 칠판에 문제를 적었다. 총 네 개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칠판을 보던 세 사람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도 더러 보일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저게 2학년 수준의 문제라고?”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샤넬 왕녀였다.
로열 클럽 멤버 중 가장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다. 왕족이 아니었다면 입학이 불가능했을 거라는 게 정설이었으니까.
준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지목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저건 배운 적이 없는 문제예요. 뭐가 2학년 수준이라는 거죠?”
“배운 적이 없는 게 아니라 강의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어서 펜을 들어서 내가 출석부를 대조하는 수고를 덜어 주지 않겠나? 샤넬 양.”
“지금 뭐라고 했죠?”
“나는 아카데미의 교수다. 그게 왕실의 예법인가?”
샤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렇게 쪽팔림을 당한 건 입학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니, 평생 왕녀로 떠받들어졌으니 태어나서 처음일 것이다.
준은 더 이상 그녀를 자극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켈빈을 주목했다. 그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자네도 이의가 있나?”
“없습니다.”
“그럼 어서 시작하지. 시간은 충분하지만, 자네들에겐 왠지 부족할 것 같은 느낌이라서.”
준의 도발에 세 사람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렇게 운명을 건 유급 시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