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요정들의 낙원 (3)
그 장관 속에서도 준의 눈엔 세계수의 이상한 부분이 보였다.
먼 옛날 봤던 그 세계수가 아니었다. 싱싱하던 껍질은 갈라져 있었고, 잎의 가장자리가 노랗게 병들어 있었다.
식물이 말라 가는 전형적인 모습이 세계수에 나타나고 있었던 것.
그나마 세계수가 내뿜는 금빛 광채는 여전했지만, 준의 눈에는 그것조차 저무는 태양 빛처럼 보였다. 표정이 씁쓸해졌다.
“시들었군요. 정확히 언제부터 이런 겁니까?”
“어디부터라고 말하기가 난감합니다. 서서히 시들어서 말입니다. 꽤 오래전 일인데, 아마 50년은 되었을 겁니다.”
하인케스는 그동안 세계수가 시드는 것을 막기 위해 했던 일을 열거했다. 모두 들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것 같았다.
준은 냉정히 진단했다.
“이대로 둔다면 채 10년도 버티지 못하겠군요.”
“원인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의심 가는 부분은 있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지요.”
준은 세계수에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 확실히 예전 같지 않군.’
이 포근한 느낌은 ‘세계수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기운이었다. 세계수 아래에 있으면 모든 상처가 빠르게 치유되는 효과가 있다. 피부 미용에도 그만이었다.
엘프들이 고운 피부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세계수의 축복’ 덕분이었다.
‘내 예상이 빗나갔으면 좋겠는데.’
준은 오른손을 뻗어 세계수에 손을 댔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웅―
준의 마나가 세계수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벼운 진동음으로 시작된 공명은 묘한 소리로 바뀌었다. 준은 세계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준이 눈을 떴다.
“역시 그랬던 건가.”
준의 혼잣말을 들은 엘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인케스가 참지 못하고 달려왔다.
“어떻습니까? 원인을 찾으셨습니까?”
“저 친구의 확인이 필요할 것 같군요. 이봐 카이엔. 한번 살펴보겠나?”
“그러지.”
카이엔이 준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도 준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수를 살피려 했다. 그때 뒤에 늘어서 있던 엘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손대지 마라!”
“세계수를 오염시킬 생각이냐? 물러나!”
“이 악마!”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엘븐하임에 발을 들이게 한 것도 불쾌한데, 그가 세계수에 손을 대려 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엔은 여유가 넘쳤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세계수는 말 그대로 세계의 중심이다. 내가 손을 댄다고 오염된다면 그건 세계수로서의 자격이 없겠지. 차라리 시들어 없어지는 게 나아.”
카이엔은 엘프들의 저항을 무시하고 세계수에 손을 대고 말았다.
몇몇 엘프들이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신을 찾는 엘프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위 마족이 손을 댔는데도 불구하고, 세계수는 그 손길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황금빛 오라를 내뿜어 그를 환영했다.
엘프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맙소사!”
“어떻게 저런 일이?”
카이엔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도 준처럼 기분 좋은 포근함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카이엔은 심상을 하나 떠올렸다.
해가 저무는 하늘.
정확히는 심상을 떠올린 게 아니라 세계수가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 하나로 카이엔은 준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눈을 뜬 카이엔이 손을 뗐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하인케스에게 말했다.
“카이엔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세계수는 병든 게 아닙니다.”
“뭐라고요? 그럼 대체 왜 이렇게 시든 겁니까?”
“수명이 다했습니다.”
“……예?”
“껍질이 갈라진 것도, 잎사귀가 노랗게 변한 것도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있는 현상의 일부입니다. 마치 식물이 죽어 가는 것처럼.”
하인케스를 포함한 모든 엘프들이 입을 벌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세계수는 말 그대로 세계의 기둥이다. 영겁의 시간 동안 차원을 떠받치며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 그런데 수명이 끝나다니?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는 세계수를 수호하기 위해 태어난 종족인데. 그런데 세계수가 사라지다니…… 인정할 수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겁니다.”
“누가 살펴보더라도 같은 결론을 내릴 겁니다. 원한다면 루치아 선생을 불러서 확인을 시켜 드리지요.”
“하…….”
하인케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태반이 넘는 엘프들이 좌절하고 있었다.
준이 물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수의 수명이 끝나면 이 세상도 사라지게 되겠지요. 서서히 붕괴할 겁니다. 모든 종족이 파멸을 맞이하겠지요. 고통스럽게.”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렇게 대꾸한 준은 희미한 황금빛을 내뿜는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오더니,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가 땅으로 떨어졌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죽음은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기도 하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새로운 세계수의 탄생을 준비하면 되는 겁니다. 당신들은 세계수의 수호자들이니까. 이곳을 떠나서 새로운 낙원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새로운…… 낙원이요?”
준이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를 향해.
곧 그 나뭇가지는 이르민의 손에 쥐어졌다.
* * *
아레스 공작의 공개 진료는 늘 만석이었다. 그 어떤 학생도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공석이 하나 있었다. 바로 준의 자리였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녀는 칠판에 중요한 것을 기록하며 강연을 이어 나갔다.
“약재를 표적으로 잘 유도하기 위해서는 약재가 지닌 기운을 이해해야 해요. 모든 약초는 고유의 기운을 가지고 있거든요.”
아그네스는 공작의 치료제로 쓰이는 약초 중 흔한 것 두 개를 들어 보였다.
“보세요. 이 두 약초는 생김새도 다르지만, 서로 다른 고유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배합하게 되면 그 기운이 달라진다는 거죠.”
아그네스는 천천히, 하지만 정확하게 두 약초를 배합하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곳에 핸드밀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곱게 갈린 약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배합된 약초에도 고유의 기운이 있죠. 그걸 읽어 내는 게 표적치료의 핵심이에요.”
그때, 학생들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준의 조교이기도 한 브로콜린이었다.
“말씀하세요.”
“기운을 읽으려면 마나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마나 유저가 아니면 표적치료는 할 수 없는 겁니까?”
“네. 없어요.”
너무나도 칼 같은 대답에 브로콜린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단호하시네요. 단호박인 줄.”
브로콜린의 질 낮은 개그에 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그네스는 문득 준과 처음으로 약초를 캐러 갔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월영초를 캐던 그때, 준은 약초를 캐기 전에 보존 마법을 걸면 좋다고 말했었다.
그때 준에게 마나가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었는데 준은 단호하게 없다고 말했었다. 지금 자신이 브로콜린에게 대답한 것처럼.
‘시간이 꽤 흘렀구나. 내가 이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치유술을 가르치고 있는 걸 보면.’
감상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회상을 끝낸 아그네스의 눈이 총명을 되찾았다.
“없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학생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사실 아그네스는 준조차 갖고 있지 않은 강점이 하나 있었다.
마나를 다루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학생들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스캐너가 개발되기 전에는 마나 유저들만 환자들의 내부를 살펴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스캐너가 발명되고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환자들의 내부를 볼 수 있게 됐죠. 같은 원리예요. 누군가 획기적인 발명품을 만들어 낸다면 표적치료도 마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거예요.”
아그네스는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브로콜린을 바라보았다. 자연과학부 3학년인 그에게 그 역할을 맡겨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브로콜린은 그 눈빛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지만.
아그네스가 분필을 내려놓았다.
“강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준 교수님이 당분간 자리를 비우셔서 다음 시간에도 제가 진료를 하고 강의를 할 거예요. 모두 꼭 참석하길 바라요.”
학생들이 짐을 하나둘 챙겨 나가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는 침상에서 쉬고 있는 아레스 공작에게 다가갔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각하.”
“강준 경이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앞으로는 굳이 강준 경이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떤가.”
“그래도 저희 선생님께 진료를 받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강준 경은 뭔가 친절한 맛이 없어서 별로야.”
“선생님께 전해 드려도 되죠?”
“그거 좋은 생각이군.”
공작은 농담을 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몸이 좋아지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잠깐이지만 아그네스는 공작과 환담을 나눴다.
왕진 가방을 챙긴 아그네스도 진료실을 나섰다.
“아그네스 선생님?”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아그네스가 돌아보니 브로콜린이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안 가고 있었어요?”
“아, 거참. 말씀 편히 하시라니까.”
“전 아카데미 교수도 아닌데 어떻게 그래요.”
“그 고집도 준 교수님께 배우신 겁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준에게 배운 것은 단순히 치유술만이 아니었으니까.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오늘 강의 최고였어요.”
“그 얘기 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거예요?”
“그럴 리가요. 괜찮으시면 식사나 같이하고 싶어서요. 방해꾼이 없으니 지금이 기회죠.”
고개를 갸웃한 아그네스는 잠시 뒤에야 방해꾼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미안해요. 다음에 방해꾼 선생님이 돌아오시면 같이 해요.”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치유술에 관한 것만.”
하지만 브로콜린은 아그네스의 지시를 어겼다.
“준 교수님을 좋아하세요?”
브로콜린이기에 할 수 있는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아그네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브로콜린은 다시금 볼을 긁적였다.
“그게,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 말입니다. 교수님을 마음에 담아 두신 거라면 제가 확실히 물러나려고요. 어정쩡한 건 싫어서.”
“브로콜린 씨.”
“저 입 무겁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이야기 안 할게요. 그러니까.”
아그네스가 말을 끊었다.
“오늘 표적치료에 대한 강의 내용, 다음 시간까지 정리해서 보고서로 제출하세요. 질문거리 세 개 이상 만들어 올 것. 건성으로 해 오면 다음 공개 진료에서 제외시킬 거예요. 이상.”
싱긋 웃은 아그네스는 저택을 나섰다.
때마침 폴링이 마차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공개 진료는 여러모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의전을 갖췄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기관님.”
“감사해요.”
두 사람은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 폴링은 아그네스가 쉴 수 있도록 마부에게 마차를 천천히 몰 것을 주문했다.
아그네스는 방금 브로콜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폴링 님.”
“예. 서기관님.”
“루치아 선생님께 보낸 편지, 지금쯤 도착했을까요?”
“아마 도착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뭐 잊으신 거라도?”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편지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적으신 겁니까?”
아그네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루치아 선생님께 지지 않겠다고 적어 보냈어요.”
“하하하. 선전포고입니까?”
“그럴 지도요?”
“잘해 내실 겁니다. 공작 각하의 진료도 순조롭고, 병원에서도 서기관님을 찾는 환자가 하나둘 늘어가고 있으니까요. 루치아 님보다 훌륭한 치유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아그네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가 지지 않겠다고 한 것은 의술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좀 더 포괄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에 대한 문제도 포함하고 있었다.
루치아가 어떤 답장을 보낼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