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요정들의 낙원 (2)
대부분의 엘프가 그렇지만, 이르민은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였다. 많이 놀랄 거라는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정신까지 잃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일까. 볼카누스가 역정을 냈다.
― 거봐! 내가 뭐랬어! 마족의 패잔병 따위 데리고 가지 말자고 했잖아! 제엔장!
“그냥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호들갑 떨지 마라.”
― 정신을 잃은 것 자체가 문제라는 거야! 이 기생충아!
“별명이 또 하나 늘었군.”
피식 웃은 카이엔은 이르민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이르민은 가벼운 쇼크로 잠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크게 위험하진 않았다.
같이 이르민을 살펴보던 준이 고개를 들고 카이엔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인데? 이르민이 정신을 잃어 서운한 건가?”
“글쎄.”
애매모호한 대답이, 오히려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카이엔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너무 인간들 사이에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쓸데없는 감정이 느껴지는군.”
“바람직한 현상이야.”
“왜지?”
“과거가 어쨌든 지금은 즐겁잖아? 나도 그렇고 볼카누스와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누아 마을 사람들도 너를 제법 따르잖아. 아직 무섭다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카이엔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준이 정확히 지적했기에.
“인생은 짧아. 너나 볼카누스는 아주 긴 세월을 보낼 수 있겠지만 나는 다르지. 평범한 인간이니까. 그래서 이런 소소한 시간이 좋아.”
“다른 건 몰라도 평범한 인간이라는 말은 동의할 수 없군.”
“마음대로 생각해.”
피식 웃은 준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겠어? 이르민은 기절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엘븐하임에서는 그렇지 않을 거야. 마기를 느낄 수 있는 자들도 있을 거고,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어.”
“예상 범위 내에 있는 일이다.”
카이엔이 아니라도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 어둠의 종족은 죽음과 소멸에 조예가 깊지. 엘프들도 밝혀 내지 못한 원인이라면 필시 나의 도움이 필요할 거다. 언젠가 그대도 말하지 않았나? 빛과 어둠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심연처럼 진지한 한마디에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볼카누스는 한마디 대꾸할 만도 한데 침묵을 지켰다.
“좋아. 중재는 내가 맡도록 하지. 화살 한 발 날아오지 못하게 해 주마.”
― 뭔 개소리야? 콱 그냥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려!
“하하하하!”
볼카누스 덕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나쁘지 않구나. 이런 시간도.’
준은 왕진이 아니라 여행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남자 셋이 떠나는 여행도 꽤 유쾌했다.
무엇보다도 볼카누스와 카이엔이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려 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겉으로는 싸우고 있지만, 두 존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제 친구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 번의 환생을 거치며 신의 퀘스트를 수행한 그에게 친구라는 단어는 상당히 낯설었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소원을 빌어 이 세계로 오긴 했지만, 아직 친구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카누스와 카이엔, 그리고 루치아는 매우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남은 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돌팔이! 뭐 하고 있어? 치유사면 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눕혀 놓을 게냐? 고귀한 피를 이어받았다면서!
“참, 그렇지.”
준은 가볍게 마나를 일으켰고, 푸른빛이 이르민의 머리에 스며들자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파르르 떴다.
“어……? 제가 왜 누워 있는 거죠?”
“잠시 정신을 잃었다. 카이엔이 마족이라는 소리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아아.”
이르민이 다시 풀썩 쓰러졌다.
그 목석같던 카이엔이 살짝 놀랐고, 준도 당황했다. 이렇게 연약한 아이일 줄이야. 덕분에 볼카누스는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 얻었다.
― 이런 젠장. 누가 돌팔이 아니랄까 봐! 제대로 못 하나?
“그냥 충분히 쉬고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게 좋겠어. 생각보다 충격이 심한 것 같군.”
그렇게 일행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이르민이 기절 상태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 * *
광활한 바다.
저 멀리 펼쳐진 수평선은 끝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볼카누스는 거대한 날개를 쉼 없이 펄럭이며 힘차게 날았다.
얼마나 날았을까. 이르민이 다시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기분은 좀 어때?”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가볍게 심호흡을 한 이르민이 카이엔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마족이 준 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준 님은 분명 천족의 편에서 신마전쟁에 참여했었잖아요?”
“그랬었지. 하지만 안심해라. 그는 널 해치지 않아.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긴데, 카이엔도 나와 비슷한 신세거든. 고향을 잃고 누아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지.”
“그래도 철혈의 대공이라면 굉장히 무서운 마족이잖아요. 제가 들은 적이 있을 정도면…….”
또다시 이르민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이종족 중 ‘철혈의 대공’이라는 수식어를 모르는 존재는 없다. 그만큼 카이엔은 잔혹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런 그가 눈앞에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섭기도 하고.
―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저 늙은 마족 놈 따위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으니까!
“정말인가요?”
― 내가 거짓말을 하는 드래곤처럼 보이나? 이래 봬도 드래곤 로드라고. 에헴!
이르민은 순진한 얼굴로 수긍했다. 준은 얼마 전 포커 이야기를 할까 하다 참았다.
이야기를 나누며 이르민이 점차 안정을 되찾자, 준은 카이엔과 만나게 된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겸사겸사 볼카누스와 만났던 이야기도 해 주었다.
어느새 이르민의 두 눈엔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다. 실로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였다.
“정말 세 분이 한 마을에서 만났단 말이에요? 대단한 우연이네요!”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일지도 모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면 이렇게 볼카누스 님의 등에 탄 채 엘븐하임으로 돌아가는 것도 정해진 운명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세계수를 병들게 한 것도 운명이라는 건가?”
“그건…….”
“신의 섭리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일이지.”
이르민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때 크고 따듯한 손이 어깨를 어루만졌다. 돌아보니 준이 자상한 미소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잘될 거야.”
“네!”
그때, 주변에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안개는 너무나도 짙어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인간의 함선이 안개 지역에 들어온다면 방향을 잃고 좌초했을 것이다.
― 거의 다 왔다. 속도를 올릴 테니 괜히 뛰어다니지 말라고.
쉬이익!
볼카누스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자 주변에 있던 안개가 싹 걷혔다. 단숨에 앞으로 치고 나간 것이다.
잠시 후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한마디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거대한 섬이 공중에 떠 있었다. 한쪽으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위로 진한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가고, 그 위로 거대한 나무가 하늘을 떠받치듯 우뚝 서 있었다. 나무가 너무나도 커서 섬이 그 나무에 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섬의 한가운데 우뚝 선 나무.
그것이 바로 세계수였다.
겉으로 보기에 세계수는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여전히 신비로운 금빛 오라를 풍기며 섬 전체를 풍요롭게 감싸고 있었다.
“아름답군.”
“엘븐하임엔 얼마 만에 오시는 건가요?”
“네가 아주 어렸을 때니까 한 백 년은 전인 것 같구나.”
“좋은 일로 모셨어야 하는데. 괜히 죄송하네요.”
“괜찮아.”
볼카누스가 속도를 줄였다. 섬 한쪽에 엘븐하임의 주민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한가운데에 갈색 조끼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손을 들었다.
그가 바로 이르민의 아버지이자 엘븐하임의 족장인 하인케스였다.
“아버지! 준 님을 모시고 왔어요!”
이르민이 양손을 흔들자 하인케스가 미소로 화답했다.
무사히 착지한 일행이 가까이 다가오자 엘븐하임의 주민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준 일행을 경계했다.
“뭐지? 이 불길한 기운은?”
“마기다!”
“마족이 나타났어!”
예민한 엘프들이 카이엔의 기척을 읽었다. 날렵하기로 소문난 레인저들이 활과 검을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마기를 느낀 건 하인케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어야 했다.
“대체 왜 마족과 함께 계신 겁니까?”
“세계수 치료에 도움을 줄 친구입니다.”
“뭐라고요?”
하인케스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카이엔을 노려보았다. 카이엔은 특유의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하인케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대, 대체 당신은 누구요?”
“카이엔.”
“말도 안 돼!”
위엄이 깃든 이름 세 글자가 뇌리에 박히자 동요가 더욱 심해졌다. 엘프 레인저들은 활시위를 당겨 카이엔의 머리와 심장을 겨냥했다.
카이엔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너희들의 조악한 무기로는 내 몸에 흠집조차 낼 수 없다.”
“닥쳐라! 더러운 마족이 신성한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하지 않아도 좋다. 그걸 바라고 온 건 아니니까. 그 전에 세계수를 좀 살펴보고 싶은데?”
그때, 준이 나서 중재를 시도했다.
“카이엔은 나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나를 신뢰한다면 그도 신뢰해 주십시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세계수 치료에 도움을 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하지만…….”
“적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들을 위해 이 먼 길을 온 겁니다. 그 점을 헤아려 주시지요.”
하인케스는 탄식을 흘렸다.
태어나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세계수를 돌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준밖에 없었으니까.
“좋습니다. 준 님을 믿겠습니다. 혹시라도 불경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제가 책임을 지도록 하지요.”
“모두 물러나라.”
하인케스가 명령하자 엘프 레인저들이 모두 무기를 거뒀다. 하지만 경계의 눈빛은 거두지 않았다. 모든 엘프들의 시선이 카이엔을 향하고 있었다.
카이엔은 여유롭게 그 시선을 견뎌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준이 말했다.
“그리고 알아 두셔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이보다 더 놀랄 일이 또 남았습니까?”
“어쩌면요.”
준은 자신이 은퇴했으며, 이제 더 이상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왜 신의 권능을 포기하신 겁니까? 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루치아 님까지 강림을 하시다니요?”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가득한 법이지요. 자, 서두릅시다. 시간이 없군요. 세계수의 상태가 어떤지 보여 주십시오.”
한숨을 내쉬었지만, 하인케스로서는 딱히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정중한 몸짓으로 준 일행을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준과 나란히 걸으며 하인케스가 물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신마전쟁이 끝난 이후로 통 소식을 듣지 못해서 말입니다.”
“즐겁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진짜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루치아 님은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십니까?”
“시골 마을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예?”
대체 차원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의 대리인이 은퇴를 했고, 고귀한 천족이 강림을 한 것도 모자라 시골 마을에서 치유사 노릇을 하고 있다니.
하인케스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하지만 더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지금은 세계수가 병든 원인을 찾는 게 더 우선이었으니까.
“자, 바로 이곳입니다.”
하인케스가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 앞엔 거대한 나무가 우뚝 솟은 채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또 다른 우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