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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56화 (156/175)

156화 요정들의 낙원 (1)

휴가계가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준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엘누아르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 먼저 릴리를 불렀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기린은 요즘 잘하고 있나?”

“아, 그 아이요?”

기린은 사이먼과 함께 누아 마을을 습격하려고 했던 여마법사였다. 음모를 실행하기 직전 생포되어 화를 면했지만, 마나가 봉인되어 있는 상태였다.

준은 그녀에게 기회를 줬다. 충분히 반성한다면 봉인했던 마나 서클을 다시 풀어준다고 약속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릴리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일은 잘하고 있긴 한데 아직 알 수는 없죠. 속에 어떤 흑심을 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요망한 계집!”

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제대로 이야기해.”

“칫. 다른 하녀들하고도 친해져서 별로 위화감이 들지 않아요. 일도 열심히 하는 편이고. 아마 전직 마법사라고 한다면 다들 놀랄걸요?”

“그 정도야?”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볼카누스, 카이엔이 엘븐하임으로 가 있는 동안 마리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기린을 불러 그녀의 보조를 시킬까 싶었다.

사실 임무의 보조로는 하룬이 적격이었는데, 그는 저택을 지켜야 하는 임무가 있다. 그렇다고 누아 마을에 있는 루치아를 붙여 줄 수도 없는 노릇.

잠시 고민하던 준이 결정을 내렸다.

“지금 바로 기린을 불러오도록.”

“설마 봉인 풀어주게요?”

“글쎄. 이야기 좀 들어보고 결정해야지.”

릴리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안 돼요! 마력을 되찾으면 더 이상은 못 부려먹잖아요!”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그 아이가 도망치지 않고 우리 저택에 붙어 있을까요? 마력도 되찾았고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데? 이건 마치 제가 페어리 퀸이 되었는데 마스터 곁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구요!”

“그건 봐야 아는 일이지. 그리고 비유가 잘못됐잖아. 네가 페어리 퀸이 되는 경우는 없다.”

“이 악마!”

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어서 불러오라는 제스처였다. 입을 빼쭉 내민 릴리는 곧장 나가 기린을 데려왔다.

그녀는 조심스레 인사했다.

“왠지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인데.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은 주방에서 일하고 있어서 밖으로 잘 나오진 않아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잘 벼려진 날카로운 단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예리하고 섬세했는데, 지금은 많이 무뎌져 있었다.

표정도 많이 달라졌다.

봉인을 풀어달라고 애걸복걸할 때와는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건지 불평이나 괴로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다고 할까.

“슬슬 네 서클 봉인을 풀어줄까 한다. 그래서 불렀어.”

“……정말요?”

“생각보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군.”

그제야 기린이 아차 싶었다. 딴마음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였다.

“아뇨,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사실 지금 생활도 크게 불편한 게 없어요.”

“하녀로 일하는 게 적성에 맞나?”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특히 요리가 재미있어요. 마력을 되찾으면 마나를 이용해서 요리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렇군.”

사실 그녀에 대한 보고는 주방장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요리에 재능이 있다고. 그리고 그녀 또한 요리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만약 마나를 되찾게 되면 어떨까? 마나는 인간의 생활에 다양한 도움을 준다. 아마 그녀의 요리도 훨씬 풍성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준이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라.”

“정말 봉인을 풀어주시는 거예요?”

“약속은 지켜야지.”

기린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사실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의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생사를 걸고 살얼음판을 걷는 마법사 생활보다, 안전하게 이곳에서 일하는 게 훨씬 좋았다.

그런데 힘을 되찾을 수 있다니?

“봉인이 풀리면 뭘 할 생각이지?”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요리 생각만 하고 있어서요. 마탑으로 돌아가는 건 이제 불가능하니까, 여길 나간다면 또 어딘가에서 숨어 지내야겠죠. 이름도 바꾸고.”

“저택을 나갈 필요는 없다. 원한다면 계속 머물러도 돼. 여기는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니까.”

“그건…… 생각해 볼게요.”

손을 뻗은 준은 그녀의 가슴에 마나를 주입했다.

파지직!

전류가 흐르며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비명을 지른 그녀가 쓰러지려 하자, 릴리가 그녀를 부축했다. 심장이 저릿한 느낌에 기린은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해야 했다.

준이 물었다.

“어때. 마나가 느껴지나?”

“네. 확실히 느껴져요.”

“다룰 수 있겠어? 한번 해 봐.”

기린은 손을 뻗었다.

굉장히 오랜만이었지만, 심장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기운을 손바닥 끝으로 뿜어냈다.

화르륵!

푸른 마나의 불꽃이 손바닥 위에서 넘실거렸다. 그녀는 금방 감각을 되찾았다. 불꽃은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꾸며 화려하게 빛났다.

“좋아. 봉인은 이제 모두 풀렸다.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

“정말 저택을 나가지 않아도 괜찮은가요?”

“나는 지키지 않을 약속은 하지 않아.”

예전엔 믿지 않았지만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본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준과 시선을 마주한 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여기에 머물고 싶어요. 주방장님께 배워야 할 게 많거든요.”

“그렇게 해.”

“그리고…… 제가 마력을 되찾은 건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요.”

“한 사람만 조심하면 돼. 그렇지?”

준이 릴리에게 눈짓하자 릴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준 앞에 똑바로 선 기린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고리타분한 인사는 됐고. 넌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그 재능을 조금 더 좋은 곳에 쓰도록 해.”

“네.”

“그리고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나가려던 기린이 다시 멈춰 섰다. 이젠 버릇이 됐는지 다시 마법사가 됐는데도 그녀는 두 손을 앞치마 위로 공손히 모았다.

준이 상황을 설명했다.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제거해야 하는데 네 힘을 빌리고 싶어.”

“엘누아르 가문엔 실력자들이 많지 않아요? 대단한 마법사도 있고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마리에게 맞은 벼락의 고통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때 정신을 잃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리가 너보다 마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경험이 부족해. 네가 보조를 해 줬으면 한다. 그리고 경험만의 문제가 아니야.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일 때가 훨씬 더 효율적이겠지.”

“전 괜찮아요. 마리 그분이 절 받아 주신다면 따라가겠어요.”

준은 지체하지 않았다. 즉시 마법진을 이용해 기린과 함께 누아 마을로 향했다.

순식간의 주변 풍경이 바뀌자 기린이 깜짝 놀랐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이동 마법을 변형시켜 게이트를 만들려면 몇 서클의 마력이 필요한지 도대체 감이 오지 않았다.

“당신이 만든 게이트인가요?”

“그래.”

“…….”

그녀도 한때 마탑에서 마도를 걸었던 사람이었다. 막상 게이트를 보니 그제야 준의 대단함이 피부로 와닿았다.

“대체…… 당신은 누군가요? 정체가 뭐죠?”

“누아 마을의 치유사 겸 왕립 아카데미 교수.”

또다시 할 말을 잃은 기린이었다.

그녀는 이 게이트의 비밀을 풀기 위해 분석을 시도했다. 하지만 번번이 막혔다. 술식을 파악하기는커녕, 얼마나 큰 마력이 들어갔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며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기린의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다. 준 혼자만 올 줄 알았는데.

“오셨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어요?”

“이제 용서해 주기로 했다. 봉인했던 마력도 다시 풀어줬어.”

“예.”

마리는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준의 말 한마디라면 무엇이든 하는 그녀였다. 그가 한 일이라면 분명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준이 즉시 본론을 꺼냈다.

“네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다.”

“말씀하세요.”

마리는 손에 쥔 지팡이를 꼿꼿이 세웠다. 이젠 제법 노련한 마법사 같았다.

“왕국 곳곳에 강령술사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하는구나. 이대로 둔다면 혈마신이 부활할지도 몰라. 볼카누스와 카이엔이 위치를 추적해 줬다. 여기에 적힌 곳으로 가서 그들을 처치해라.”

준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총 열한 곳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가까운 곳도 있었지만 아주 먼 곳도 있었다.

마리가 종이를 마저 확인했고, 준이 팁을 전해 주었다.

“강령술사는 영혼을 다루는 자들이다. 망자의 시체도 다루지. 가끔은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언데드가 출몰했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추적이 더 쉬울 거야.”

“맡겨 주세요. 그런데 생포할 필요는 없나요?”

“바로 처리해라. 혹시 배후를 가리키는 단서가 있다면 모아 주고. 그리고 나는 일이 있어서 당분간 왕국을 떠나 있을 거야. 소식은 마법진으로 교환하자.”

“예. 스승님.”

“그리고 괜찮다면 기린을 보조로 붙여 주고 싶은데. 어때?”

“전 상관없어요.”

마리는 단 일 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기린은 깜짝 놀랐다. 동시에 준을 향한 마음이 물씬 느껴졌다. 이건 보통의 사제관계에서 생길 수 없는 그런 끈끈한 감정이었다.

부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신의 스승은 이런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을 정도로 추악하고 교활했다. 실력이 아닌 가슴과 엉덩이에만 관심이 있는 노인네였다.

과거 회상은 거기까지. 마리의 시선이 느껴지자 기린이 긴장했다.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마리 님.”

“그럴까?”

동시에 마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볼카누스의 권능을 각성하며 한 단계 성장한 그녀였다. 그 불꽃을 본 기린은 그녀에게 완벽히 굴복했다.

손쉽게 교통정리를 끝낸 마리가 말했다.

“그럼 스승님. 저는 바로 임무에 들어갈게요.”

“몸조심해라.”

“곧 있으면 루치아 선생님 진료가 끝날 거예요. 기왕 오셨으니 한번 뵙고 가는 게 어떨까요?”

꾸벅 인사한 마리는 기린을 데리고 폐가를 떠났다.

‘녀석. 괜한 이야기를 해서.’

준은 누아 진료소에 들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세계수 일을 끝내고 돌아와 충분히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날 밤,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 * *

본체로 변한 볼카누스는 창공을 마음껏 휘저었다. 거대한 몸집에 막강한 힘이 붙으니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가 보였다.

신기하게도 등에 올라탄 준과 그 일행은 바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편하게 앉아 담소를 나눴다.

“정말 굉장해요! 드래곤 등에 타 보는 건 처음이에요! 알바트로스보다 백 배는 빠른 거 같아요!”

아직 엘프 나이로는 어린 축에 속하는 이르민이 예쁜 눈망울을 반짝였다. 그녀는 무섭지도 않은지 사방을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준이 카이엔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처음이지 않아? 너희 종족 역사상 드래곤, 그것도 로드급의 드래곤 등에 탄 존재는 네가 처음일 것 같은데.”

“감상을 원하나?”

“해 주면 좋지.”

“심히 불쾌하다.”

― 미친 새끼! 누가 누구한테 불쾌하다고 해?

왠지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이러다 브레스를 쏠 것 같아 준이 나섰다.

“욕은 하지 마. 이르민도 있으니까.”

― 허! 꼬맹이 하나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하다니. 로드 체면이 말이 아니군. 아무튼 등에 뭔가 기생충 한 마리가 붙은 것 같으니 떼어 내 버려라!

그렇게 볼카누스와 카이엔은 서로 말싸움을 시작했다. 이르민의 눈엔 친구로 보였기에, 둘이 말다툼을 할 때마다 재밌다며 웃었다.

“정말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요. 볼카누스 님이 드래곤인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럼 카이엔 님도 드래곤이에요?”

카이엔이 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준은 슬슬 이르민에게 그의 정체를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계수 치료를 위해서는 그의 힘이 필요하니까.

“이르민. 놀라지 말고 잘 들어라.”

“응? 뭔데요?”

“카이엔은 마족이다.”

이르민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마족이 아니라 마계의 대공이지. 과거 철혈의 대공이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신마전쟁에서 선봉에 서기도 했고…… 음? 이르민?”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르민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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