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휴가계
다음 날, 볼카누스는 아그네스가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바로 그녀를 만나러 갔다. 약간의 서프라이즈 파티 느낌으로.
그 사이 준은 알프하이겐 공작가로 향했다. 미리 연락을 넣진 않았다. 공작은 최근 업무를 쉬고 있기 때문에 외출하는 일은 없었다.
마차가 저택으로 접근하자 최근 달라진 준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누아르 가문의 마차다! 어서 안으로 기별을 넣어라!”
“옛!”
수문장이 지시하자 전령이 저택으로 말을 몰았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마차를 향해 무기를 겨누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예를 취했다.
엘누아르 가문 사람들은 무조건 귀빈으로 대하라는 아레스 공작의 명령 때문이었다.
준은 차창을 내려 수문장에게 인사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순조롭게 정문을 통과한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문에서 내리기도 전에 집사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남작님.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공작 각하를 뵙고 싶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계시긴 합니다만, 조금 기다려 주시지요. 지금 막 기침을 하셔서 말입니다.”
“그러지요.”
준은 집사를 따라 접견실에서 아레스 공작이 준비를 마치길 기다렸다. 그때 미놀렌 경이 들어와 준이 지루하지 않게 말 상대를 해 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고, 접견실로 아레스 공작이 들어왔다.
“오, 강준 경. 오늘은 진료일이 아닌데 무슨 일로?”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그대는?”
“저야 뭐 늘 그렇지요.”
아레스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깐깐하고 고집스럽고, 한편으로는 계산적인 공작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여유가 느껴졌다. 병이 호전될수록 그는 안정을 되찾았다.
―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공작이 평생 진리로 여겼던 하나의 명제였다. 그런데 그것이 틀렸다는 게 입증됐다. 다행히 준을 만나 목숨을 건지게 됐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공작은 돈과 권력보다 더욱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아침부터 실례를 했습니다.”
“실례라니?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앞으로는 그런 말을 삼가게.”
“아직 완치된 것도 아닌데 은인이라는 말씀은 좀 그렇군요.”
“완치가 아니더라도 뭔가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일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도 없었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정말 고맙네.”
“영광입니다.”
준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본 아레스 공작은 흡족한 마음이었다.
보통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면 목에 힘을 주거나 은근히 무언가를 요구할 법한데, 준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준은 더 이상 필요한 게 없는, 영생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닌 완벽한 사람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공작의 환심을 사게 된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각하의 진료 때문에 이렇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급한 일이 생겨 잠시 왕도를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그네스 선생에게 당분간 각하의 치료를 맡길까 합니다.”
아레스 공작의 눈매가 대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그 말인즉슨, 나보다 더 중요한 환자가 있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하하하! 농담일세. 아그네스 선생도 믿음직스럽지. 무엇보다 그대의 제자이기도 하고. 이젠 신뢰할 수 있네. 경의 뜻대로 하시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쉽게 풀렸다. 준은 공작의 병이 차츰 좋아지는 것보다, 그가 긍정적인 성격으로 돌아왔다는 게 더 마음에 들었다.
“여유를 되찾으신 것 같아 보기 좋군요.”
“그런가? 하긴, 그간 치열하게 살아오긴 했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공작은 창밖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련한 느낌이,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 같았다.
“이제는 본인을 위해 사셔도 되는 게 아닙니까?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말인가? 허허. 누가 들으면 첩자로 오해할 말을 하는군. 아직은 때가 아닐세. 평화로울 때가 가장 위험할 때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내가 물러설 수 없는 거라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거든.”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인생에 대한 환담을 나눴다.
일을 하나 끝낸 준은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니 브로콜린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여기에서 밤을 샌 모양이다. 피식 웃은 준은 기척을 죽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빈 종이를 꺼낸 후 바로 휴가계를 작성했다.
오늘 휴가계를 학장에게 전달한 후 바로 왕도를 떠날 계획이었다. 내용을 대강 채운 준은 깨끗한 봉투에 곱게 접어 휴가계를 담았다.
“안 돼!”
한참 후, 브로콜린이 허우적거리더니 잠에서 깼다.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잠에서 깬 그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준과 눈이 딱 마주쳤다.
“헉!”
“연구실에 간이침대라도 하나 갖다 놔라. 그렇게 의자에 앉아서 자지 말고.”
브로콜린은 두 번 놀랐다.
아무리 싸가지가 없기로 소문난 그라고 해도, 자기 할 일은 다 하기에 당당한 것이었다. 모시는 교수가 온 줄도 모르고 잤다는 건 큰 결례였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오신 줄도 몰랐네요. 언제 오셨어요? 오셨으면 헛기침 한 번 정도는 해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아. 미안하군.”
“아니, 거기서 사과를 하시면 어떡해요?”
“조교 선생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나 참…… 차 드실 거죠?”
“그래.”
브로콜린이 티 포트를 쥐었다. 그리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찻잎을 덜어내던 브로콜린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참. 아까 학장실 조교가 왔었습니다.”
“왜?”
“청원서 낸 학생들의 징계안이 나왔나 보더라고요. 청원서에 서명을 한 학생들은 유급 처분을 받기로 했다고 합니다. 수강 철회 건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네요.”
“정식으로 공지가 된 건가?”
“아직이요. 내부적으로만 결정된 것 같더라고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브로콜린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찻물 이제 막 올렸는데.”
“책상에 놔둬.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오마.”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준은 그길로 학장실로 향했다.
* * *
학장실엔 때마침 반가운 손님이 있었다. 바로 페르디낭 후작이었다. 후작은 아카데미의 학장인 필딘 경과 환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페르디낭 후작이 두 팔을 벌리며 준을 맞았다.
“여긴 웬일인가? 안 그래도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젠 워낙 유명인사가 되어서 얼굴 보기도 힘들구만.”
“청원서에 서명한 학생들의 처분이 결정되었다고 들어서 면담차 왔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자리를 비켜 줘야겠군.”
페르디낭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준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후작의 발을 붙들었다.
“가만.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군.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지. 놓칠 수 있나?”
“자네도 아카데미에 한 발 정도는 걸치고 있으니 들어도 상관은 없겠지. 강준 교수도 그만 서 있고 이쪽으로 앉으시게.”
필딘 학장은 노년의 신사였다. 전대 국왕 시절 재상을 지냈던 인물로, 수많은 업적을 세워 온 국민의 칭송을 받는 명사였다.
그래서 페르디낭 후작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성격적으로 완전히 반대였지만,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리에 앉은 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은 학생들이 청원서 서명을 철회했다고 들었습니다. 징계안이 나왔다면 철회를 하지 않은 학생들이 있다는 말이겠군요.”
“정확하네. 켈빈, 샤넬, 무어. 이 세 학생은 서명을 철회하지 않았지.”
“로열 클럽 멤버들이군요.”
필딘 학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로열 클럽 멤버라고 한정하기엔 예외가 하나 있었다.
“그래도 엔도버는 가장 먼저 서명을 철회했지. 사실 그 친구 덕에 다른 학생들도 용기를 내서 철회를 할 수 있었던 게야.”
“폭행 사건이 있었다는 건 들으셨습니까?”
“듣긴 했지만 본인이 부인하고 있어서 특별히 조사하거나 하고 있지는 않네.”
“그렇군요.”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엔도버는 본인이 말한 대로 그것을 전략적인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것은 너무 일이 커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덮어 두기엔 맞은 상처가 아프다.
그래서 적당히 소문을 내는 것으로 로열 클럽의 인지도를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의학부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엔도버가 로열 클럽에서 탈퇴한 이후로 파벌이 나뉘었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상황이었다.
반 로열 클럽에 속하는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켈빈, 샤넬, 무어 이 세 사람이 쥐고 있는 권력이 상당히 강했기에 기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 모든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필딘 학장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사실 청원서 건은 덮어 두려고 했지만, 이대로 방치한다면 의학부의 내분이 심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치를 취하게 됐네. 다른 교수들의 우려도 있고 해서 말이야.”
“잘하셨습니다.”
“글쎄. 표정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페르디낭 후작이 끼어들자 준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제대로 봤다.
“학장님의 견해는 존중하지만 유급 처분은 조금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신중히 내린 결정이네. 그들은 왕명을 어긴 것과 다를 바 없어. 사실 이 정도의 조치로 끝난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 거야.”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샤넬 양은 왕녀라고 들었는데요. 왕실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 문제는 국왕 폐하도 알고 계시네.”
“국왕 폐하도 왕실의 일원일 뿐이지요. 왕실의 구성원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을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요. 저야 누아 마을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두 분께서는 앞으로 이곳에서 큰일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준이 정곡을 찌르자 필딘 학장과 페르디낭 후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준이 말을 이었다.
“조금 더 명분을 취하는 방향으로 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복안이 있나?”
“그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겁니다. 특별 시험을 치르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세 학생은 모두 2학년이니 2학년 수준의 문제를 내면 되겠군요. 합격점을 받으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시지요. 떨어지면 유급을 시키고. 학년에 맞는 지식을 갖추지 못했으니 유급은 당연한 일이 됩니다.”
“하하하! 그것참 걸작이군! 먼저 자리를 떴다면 큰일 날 뻔했어!”
페르디낭 후작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자비를 베푸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시험에 떨어져 유급을 당하면 수치스러움은 곱절이 될 것이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필딘 학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시험을 추진해 보지. 문제 출제는 자네에게 맡겨도 되겠나?”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준은 품에 넣어 놨던 휴가계를 꺼내 학장에게 전달했다. 봉투를 뒤집어본 학장이 물었다.
“이게 뭔가?”
“당분간 아카데미를 쉴까 합니다. 먼 곳으로 왕진을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부임하자마자 휴가계를 쓰는 교수는 또 처음이군.”
필딘 학장은 잠시 고민했다. 휴가를 주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 준은 중요한 일을 하나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아레스 각하의 진료는 어쩌고?”
“그건 아그네스 선생에게 맡겨 놨습니다.”
“뭐?”
필딘 학장은 멍한 표정으로 준과 휴가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페르디낭 후작은 또다시 걸작을 외치며 목청 좋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준의 휴가계가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