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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54화 (154/175)

154화 숲의 아이 (4)

왕립 병원에서 출발한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하룬은 손을 뻗어 아그네스가 조심히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마워.”

“우리 사이에 고맙긴 무슨.”

“그럼 취소.”

“야.”

두 사람의 장난은 마치 소꿉놀이처럼 보였다. 적어도 현관을 나서 마중을 나온 폴링의 눈에는 말이다. 그는 인자한 미소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서기관님. 오늘은 좀 늦으셨군요.”

“병원에서 모임이 있었어요.”

“그러셨군요. 참, 손님이 오셨습니다. 영주님께서 바로 올라오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손님이요?”

뜻하지 않은 소식에 아그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왕도에서 자신을 찾아올 손님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누아 마을에서 온 손님일까? 루치아는 자리를 비울 수 없을 테니, 그럼 아버지?

“혹시 저희 아버지가 오신 거예요?”

“애석하게도 아닙니다. 멀리서 온 손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처음 뵙는 분일 것 같군요.”

아그네스는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다. 누아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마을과 사람들이 그리웠던 그녀였다.

그때, 하룬이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별말씀 없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같이 들어오라든가…….”

“딱히 없었습니다만.”

“이런.”

어쩔 수 없이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돌아가기 전, 하룬은 아그네스에게 물어볼 것을 떠올렸다.

하룬은 그녀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필스너라는 남자. 어떤 사람이야?”

“아까 소개해 줬잖아? 왕립 병원 내과 치유사라구.”

“그거 말고. 뭐 사람 됨됨이나 그런 거.”

“좋은 분이야. 선임인데도 날 잘 챙겨 주시고. 다음에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려고.”

“선배가 후배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인데 뭔 밥까지 사?”

“살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니?”

아그네스가 조용히 경고하자 하룬이 딴청을 피웠다.

“아니. 뭐 그냥 신경이 좀 쓰인다고 할까. 남자는 믿을 게 못 된다고. 아까도 술 한잔 더 하자고 하지 않았어?”

“으휴. 너는 남자 아니고?”

할 말을 잃은 하룬은 입맛만 다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준의 집무실 앞에서 헤어졌다.

아그네스는 적당한 긴장과 기대감을 품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 외로 손님은 젊었다. 아니, 어리다고 해야 하나. 피부가 아기 같았다.

“늦었구나.”

“오늘 내과 회식이 있었어요.”

“힘들었겠는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훤히 보이는 그였다.

“말도 마세요. 선임들이 다 같이 모여서 표적치료법을 알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긴 했는데, 막상 그런 얘길 직접 들으니 더 떨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치료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의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은 방법이라고 판단했어요.”

아그네스는 조심스레 말했다. 어떻게 보면 준의 치료법이 완전하지 않다는, 그런 식의 비평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니까.

하지만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잘했다고 말했다.

“공개 진료가 끝난 뒤에 논문을 한 편 쓰는 것도 좋겠구나.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것도 치유사의 임무 중 하나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선생님이 쓰시면 분명 훌륭한 논문이 나올 거예요.”

“당연히 같이 써야지. 공동 주치의인데. 기회가 되면 왕립학술원에서 발표를 해도 되겠군. 페르디낭 각하께서 무척 좋아하실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제야 아그네스는 이르민과 인사를 나눌 기회를 잡았다.

아, 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빛이 나는 존재였다.

준이 이르민을 소개했다.

“아주 멀리서 온 손님이다. 인간이 쉽게 갈 수 없는 곳에서 왔지.”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엘븐하임에서 온 손님이다.”

“예에?”

아그네스는 깜짝 놀랐다.

엘븐하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요정들의 낙원이라고 알려진 곳이었으니까.

대전쟁 이후 엘프들은 자취를 감췄고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그들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전승되고 있었다. 적어도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미지의 종족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그건 드워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엘프처럼 아직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산속 깊숙한 곳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정말 이분이 엘프라는 말씀이에요?”

“그래.”

“어쩐지 되게 특별해 보였어요. 막 후광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요. 피부도 너무 고우셔요.”

아그네스는 이르민의 이모저모를 꼼꼼히 살폈다. 엘프는 귀가 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로브에 가려져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행동이 실례라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앗! 죄송해요. 초면에 인사도 못 드리고 너무 쳐다보기만 했네요. 기분 나쁘셨으면 사과드릴게요.”

“아니에요. 익숙한 일인걸요. 이르민이라고 불러 주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그네스라고 해요. 강준 선생님 제자예요. 그런데…… 여자예요, 남자예요?”

“글쎄요. 어떨까요?”

이르민이 생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준이 한번 맞춰 보라고 거들었고, 턱을 괴며 한참을 고민하던 아그네스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남자!”

“아쉽지만 틀렸어요. 여자예요.”

“엄청 곱게 생긴 남자라는 느낌이었는데…….”

“엘프족은 대체로 그렇다. 외모가 중성에 가깝지. 게다가 로브로 머리를 가리고 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이르민은 기꺼이 후드를 벗었다. 긴 머리가 찰랑이며 쏟아졌다. 뒤이어 뾰족한 귀가 튀어나왔다. 아그네스가 감탄을 내뱉었다.

“이제야 여자인 걸 알겠네요. 그런데 정말 귀가 길쭉해요! 신기하다.”

“괜찮으니까 맘껏 구경하세요. 만져 보셔도 돼요.”

“그래도 돼요?”

“인간만 치료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언젠가 선생님도 엘프를 치료할 날이 올 수도 있는데, 그때를 대비해서.”

아그네스는 손을 뻗어 이르민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르민은 아그네스를 좀 더 배려해 팔을 뻗었다. 덕분에 아그네스는 살아 있는 엘프의 피부를 경험할 수 있었다.

피부가 굉장히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피부가 연해서 의료용 칼날로 쉽게 절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의학서에서 잠시 언급된 부분이기도 한데, 이렇게 실제로 만져 보니 확실히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감사해요. 덕분에 귀한 경험을 한 것 같아요.”

“강준 님이 믿을 만한 분이라고 하셨으니까 괜찮아요.”

“정말 그러셨어요?”

준은 피식 웃기만 했다. 아그네스는 왠지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실은 내일 아카데미에 휴가계를 내고 잠시 어딜 좀 다녀올 생각이다.”

“예? 그럼 공개 진료는…….”

“나머지는 네가 진행하는 게 좋겠어.”

“그래도 괜찮을까요?”

“치료가 궤도에 올랐으니 잘 유지만 하면 될 거다. 너도 마나 유저고 왕립 병원의 치유사니까 누구도 반대하지 않겠지.”

“그래도 각하께서 좀 실망하실까 봐 걱정되네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알겠어요. 그런데 어디 멀리 가셔요?”

준은 이르민의 의뢰로 왕진을 간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덧붙였다.

“가능하면 너도 데리고 가고 싶지만 공개 진료도 있고, 병원을 쉬기 어려우니 다음을 기약해야겠구나.”

“전 괜찮으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선생님이 안 계시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어요. 루치아 선생님도 누아 마을에 묶여 계셔서 오지 못하시는데.”

“그래서 준비했다.”

준은 한쪽에서 새장을 가져왔다. 그 안엔 날렵한 새 한 마리가 쉬고 있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새의 발에 있는 전서통에 편지를 넣어서 보내라. 그럼 내가 받아 볼 수 있을 거야.”

“알겠어요.”

아그네스는 가뿐한 마음으로 새를 받았지만, 그 새가 천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천년극락조(千年極樂鳥)라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천년극락조의 비행 속도라면 어디에 있든 몇 시간 안으로 소식을 받아 볼 수 있다.

“그럼 얘기는 이쯤 하고, 아그네스. 이르민에게 쉴 만한 곳을 내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그네스가 이르민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준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마법진에 손을 올렸다. 곧 푸른빛이 마법진을 따라 은은히 발산되었다.

준이 나직이 말했다.

“마리. 지금 바로 볼카누스와 카이엔에게 전해라. 좀 보자고.”

* * *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엘누아르 가문에서 유일하게 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준의 서재였다. 연락을 받은 볼카누스와 카이엔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초월적인 존재들이라 그 누구도 그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아그네스에게 포커 얘기는 안 했지?”

“안 했다.”

“후후후. 잘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군.”

첫 질문을 쓸데없는 것으로 날린 볼카누스에 비해, 카이엔은 제법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숲의 아이가 와 있군.”

“엉? 정말이네.”

“그래. 엘프족의 딸이 와 있다. 하이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녀석이지.”

“으음. 확실히.”

카이엔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볼카누스가 그를 견제했다.

“그 아이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 천박한 짓은 하지 않아.”

“마족 놈들은 다 똑같지.”

볼카누스가 시비를 걸자 카이엔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준. 아그네스는 지금 어디 있나? 목도리의 주인이 잠시 바뀌었었다는 걸 전해야겠어.”

“젠장! 치사한 놈!”

결국 볼카누스는 꼬리를 내려야 했다. 그는 직감했다. 앞으로 몇 년, 어쩌면 수십 년 이상 목도리 베팅 건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 같다고.

웃으며 이 재미있는 장면을 지켜보던 준이 입을 열었다.

“이르민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뭔데?”

“일단 세계수가 병들었다는 카이엔의 추측이 정확했어. 그런데 혈마족과는 관련이 없다는 게 녀석의 설명이다. 예전부터 병들어 있었다고 해.”

“뭐라고?”

볼카누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특별한 이유 없이 세계수가 병들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정확히 추측했던 카이엔도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들의 기색을 살펴보던 준이 물었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던가?”

“세계수가 병든 일은 가끔 있었지. 하지만 대부분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데. 혈마족 놈들의 짓이 아니라면 뭐 때문이지?”

볼카누스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한편 준은 아까부터 침묵을 지킨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카이엔을 주목했다. 그의 표정은 마르다 마을의 던전에서 처음 만났을 그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추측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르민을 따라 엘븐하임으로 가려고 한다. 가서 세계수의 상태를 직접 살필 생각이야.”

“그래서 우리를 불렀군? 하긴. 이런 심각한 일에 드래곤 로드 정도는 나서 줘야지.”

“넌 우릴 엘븐하임으로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순식간에 이동 수단으로 전락한 볼카누스가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그저 웃기만 하는 준에게 그 이상을 얻을 수는 없었다.

화를 삭인 볼카누스가 카이엔을 째려보며 물었다.

“근데 이놈도 데려갈 거냐? 아마 엘프들이 기겁을 할 것 같은데.”

“데려갈 생각이다. 본인이 허락만 한다면.”

“가겠다.”

카이엔은 조금도 고민 없이 말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볼카누스는 납득하지 못했다.

“마족 놈이 대체 어딜 간다는 게야? 얌전히 저택에 틀어박혀 있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대체 뭐가?”

“예전에 너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 않나? 본래 천족과 마족은 한 뿌리였다는 걸. 분명 카이엔이라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다.”

“크흠!”

볼카누스는 끝까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물론 준도 알고 있었다. 그가 불만을 토하는 건 엘프족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등에 카이엔을 태우기 싫어서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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