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숲의 아이 (3)
눈이 보석으로 되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갈색 로브로 몸을 가린 낯선 존재는 상당히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엘누아르 왕국, 더 나아가 대륙으로 범위를 넓힌다고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외모였다.
깨끗한 피부에 빛나는 눈동자. 거기에 신비스러운 빛깔을 띤 머리카락은 경비병들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만약 로브를 뒤집어쓰지 않았더라면 곤란에 빠졌을 것이다.
“어…….”
잠시 멍하니 있던 경비병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다행이네요. 도시는 익숙하지 않아서 헤맸거든요.”
목소리는 미성이었는데, 여성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외모는 고운 느낌이 드는 중성적인 외모였다.
병사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이 엘븐하임에서 온 엘프라는 사실을.
대신 그들은 긴장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로브를 걸친 수상한 사람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평소에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가문의 문지기들이었다면 미늘창을 목에 들이밀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지만 엘누아르 가문의 문지기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지 말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라는 준의 명령이 있었기에.
“혹시 우리 주군께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맞아요.”
“어디에서 오신 누구십니까?”
“그건 밝힐 순 없지만, 강준 남작님을 뵈었으면 해요.”
“약속을 미리 잡으신 겁니까? 제가 알기로 오늘 방문 예정인 손님은 없습니다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요. 이해해 주세요.”
어조가 상냥했고, 기품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경비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법.
“약속을 하지도 않고 방문 목적도 밝힐 수 없다면 안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부탁이에요. 남작님을 뵙게 해 주세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세상이 멸망할 거예요.”
“세상이…… 뭐요?”
“세상이 멸망한다고요!”
여인이 힘주어 진지하게 말했다. 덕분에 병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마터면 무기를 놓칠 뻔할 정도로 크게.
“와하하핫! 아니, 잠깐만. 세상이 뭐 어쩐다고요?”
“어디 아픈 분 아니야?”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오셨네. 유명한 치유사가 두 분이나 계신 곳이니 말이야.”
이렇게나 평화로운데 갑자기 세상이 멸망한다니?
경비병들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지만, 로브를 쓴 엘프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간절히 호소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당장 강준 남작님을 만나야 해요.”
“으음. 이봐. 어쩌지?”
“글쎄. 이런 경우에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렇긴 한데…….”
경비병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수신호가 오갔고,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고.
예전에 준은 폴링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비밀 진료소를 한번 열어 보고 싶다고.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을 가급적 막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귀족이든 천민이든 말이다. 경비병들이 그 명령을 떠올린 것이다.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내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
“잠깐?”
그때, 릴리가 나타났다.
병사들이 허리를 펴고 군례를 취했다. 하녀장은 꽤 높은 직급으로, 폴링 다음으로 높은 위치라 병사들이 함부로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릴리는 하녀장이라기보단 준의 최측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어린 외모에도 불구하고 실세처럼 행동했다.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릴리는 로브를 걸친 여인에게 시선을 뒀다.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은 주인님의 손님이야. 내가 직접 모실게.”
“아!”
그 말에 병사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그렇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저…… 소문을 들은 환자분인 줄 알고…….”
“뭐라구?”
병사들을 찌릿 노려보는 정도에서 경고를 끝낸 릴리가 여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들어갈까요? 멀리서 오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릴리가 나타난 후로 로브를 걸친 존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움이 깃들었다.
정령과 엘프. 서로 뗄 수 없는 긴밀한 존재끼리 만났기 때문이다.
두 존재는 정문을 통과해 정원을 가로질렀다.
“신기하네요. 인간에게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다니. 정령사인가요?”
“아뇨. 진짜 정령이랍니다.”
“정말요?”
“마스터가 몸을 만들어 주셔서 잠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죠. 지금은 일부러 정령의 기운을 내고 있는 거고. 친근하죠?”
“아, 그렇다면 혹시 릴리 님?”
님이라는 호칭은 언제 들어도 좋다. 들을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릴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강준 남작님을 모시는 능력 있는 페어리님이시라고.”
“호호호! 어떤 아버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딸 하나는 잘 키우셨네! 배우신 분!”
그 외침에 주변이 썰렁해졌다. 여인은 약간 당황한 눈치다.
“호호호…… 아무것도 아녜요. 자, 어서 가죠.”
릴리는 다시 근엄한 하녀장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마스터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특별히 바쁘진 않으시니 바로 얘기 나누시면 돼요.”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놀라지는 않으실까요?”
“걱정은 노노. 얼마 전에 마스터가 그러셨거든요. 조만간 숲의 아이가 찾아올 거라고. 그래서 방금 마중을 나간 거예요. 인간들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요정들은 늘 곤란한 일을 겪으니까.”
“역시 강준 님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이번 일을…….”
엘프 여인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과연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일인지 심각해 보였다.
“근데 엘븐하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거예요? 세상이 멸망할 정도라면 큰일 아닌가?”
엘븐하임.
그것은 요정들의 낙원이자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제가 생겼다면, 세계수나 엘븐하임 전체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말하기 불편하면 얘기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마스터가 해결하셔야 하는 문제니까.”
“죄송해요.”
“별말씀을. 우리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릴리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여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들어간 두 존재는 바로 준의 집무실로 향했다. 릴리가 눈짓하자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노크 후 문을 열었다.
때마침 준은 집무실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해야 하는 일이 상당히 많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까. 집무실에서 준을 볼 때마다 느끼는 릴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주인님? 기다리시던 손님이 오셨어요.”
“그래.”
준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앞으로 걸어왔고, 엘븐하임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여인과 준의 시선이 마주쳤다.
준이 살짝 웃었다. 마치 기억한다는 듯이.
“오랜만이구나. 이르민.”
“절 기억하세요?”
“물론이지. 넌 특별한 존재니까.”
이르민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릴리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어쩜 저렇게 자연스럽게 작업 멘트를 날리지!’
물론 준은 전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었다. 이르민은 하이엘프의 피를 이어받았고, 언젠가는 엘븐하임을 통치할 엘프였다. 그래서 특별한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릴리가 새침하게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다기와 뜨거운 물을 준비해 줘.”
“그러지요.”
릴리가 밖으로 나갔다. 준은 멀뚱히 서 있는 이르민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아라. 혼자 오다니. 어려운 길이었겠구나.”
“왕도에 도착하기 전까진 알바트로스를 타고 왔어요. 그래서 특별히 문제가 있거나 하진 않았어요.”
알바트로스는 정령이 깃든 거대한 새다. 은신 능력이 있어 들키지 않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닐 수 있는 편리한 이동 수단이다.
“그렇군. 아버님은 별일 없으시고?”
“여전하시죠. 뵙게 되면 꼭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아공간 창고에서 꺼낸 허브를 직접 손으로 갈았다. 엘프들이 좋아하는 별잎차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향이 좋아요.”
“너희 아버지도 종종 그렇게 말씀하셨지. 어릴 때라 잘 기억이 안 나겠지만.”
“그래도 직접 뵈니 기억이 좀 떠오르는 것 같아요. 흐릿한 기억이긴 하지만요.”
“다행이구나.”
곧 릴리가 뜨거운 물과 다기를 준비해 왔다. 준은 찻잎을 티 포트에 넣고 우러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향기로운 별잎차가 완성됐다.
준은 찻잔을 이르민의 앞에 내려놓았다.
“마셔 봐. 피로가 풀릴 거야.”
“감사해요.”
이르민은 조심스레 찻물을 들이켰다. 청량한 숲의 향기가 오감을 자극했다. 기분 좋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준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역시 세계수에 문제가 생긴 건가?”
“알고 계셨어요?”
“최근에 짐작한 일이야. 내 친구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맞아요. 세계수가 시들어 가고 있어요.”
카이엔의 예상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준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차를 홀짝이기만 했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르민은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버지께선 강준 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분의 힘이라면 세계수가 병들어 가는 걸 막을 수 있다고요.”
“확실히 그랬었지. 예전엔.”
“예?”
준의 과거형 표현이 이상하게 들렸다. 이르민이 궁금증을 표하자 준은 찻잔을 든 채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는 은퇴했다. 이제 더 이상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는 말이야.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런 일이…….”
“혈마신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강령술사들이 뭔가 일을 꾸미는 걸 발견했지. 그들을 물리치면 세계수의 상태가 좋아질 수도 있어.”
그런데 그때, 예상치도 못한 말이 이르민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아마 그 일과는 크게 관계는 없을 거예요. 세계수는 예전부터 병들어 있었거든요.”
“뭐라고?”
입으로 가져가려던 찻잔이 멈췄다. 그 정도로 준은 놀랐다. 지금까지 자신과 동료들이 내린 추측과는 어긋나는 정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께서 부탁하셨어요. 꼭 강준 님을 모시고 오라고. 죽어 가는 세계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강준 님의 힘뿐이라고요. 부탁드려요! 엘븐하임으로 오셔서 세계수를 보살펴 주세요.”
이르민이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곧 투박한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별일 없을 거야.”
“와 주시는 건가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너희 아버님껜 신세진 일도 있으니까. 이곳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가도록 하마.”
“감사해요!”
이르민은 울먹일 정도로 기뻐했다. 그러나 곧장 계획을 세웠다.
“도보로 가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니 같이 알바트로스를 타고 가요. 일을 마치실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릴게요.”
“알바트로스보다 더 크고 빠른 게 있다.”
“정말요? 그게 뭔데요?”
“곧 보게 될 거야.”
준은 잠시 비밀에 부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날개를 활짝 펼친 레드 드래곤 로드의 위용을 보고 놀라는 이르민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한편, 창밖을 바라보는 준의 눈빛이 점점 깊어져 가기 시작했다.
‘혈마족과 관계가 없다면…… 대체 세계수는 왜 시들어 가고 있는 거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