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숲의 아이 (2)
저택으로 돌아온 아그네스는 바로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그녀가 봐야 하는 환자는 하룬이었다. 치료가 거의 다 되긴 했지만 마음을 놓지 않았다. 감염증은 조금만 방심해도 증세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역시나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기사들이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아그네스는 가볍게 묵례하고 하룬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 벌써 왔어?”
“다시 나가 봐야 해. 잠깐 온 거야.”
“오늘 당직인데 온 건가? 이야. 이거 황송하네. 고위 귀족이 된 느낌이야. 왕립 병원의 치유사님이 이렇게 왕진도 와 주시고. 하하핫!”
하룬은 기분 좋게 웃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그녀가 병원에서 얼마나 힘들게 적응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그네스는 웃으면서도 차갑게 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착각은 자유지. 저녁에 내과 선생님들하고 술 한잔하기로 해서 그래.”
“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러 나간다는 것은 처음인 데다가, 아그네스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까.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마디 했다.
“선배들이 막 술 억지로 마시게 하고 그런 거 아니지?”
“그냥 가볍게 한잔하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손이나 내 보렴.”
하룬은 붕대로 감싼 손을 내밀었다. 부기가 거의 빠져 정상처럼 보였다. 아그네스는 붕대를 풀고 꼼꼼히 살폈다.
“경과가 좋네. 오늘만 치료받으면 다 나을 것 같아. 약은 잘 먹고 있지?”
“물론이지.”
“잘 안 먹고 있구나. 한 번만 더 거르면 혼날 줄 알아?”
하룬이 흠칫거렸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네 얼굴에 다 써 있으니까.”
하룬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그런다고 있지도 않은 글자가 만져질 일은 없지만.
아그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가끔이지만 이런 바보 같은 순진한 모습이 좋았다.
치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나 요법으로 부기를 모두 제거한 아그네스는 붕대를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손수 약을 지어 주었다.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인데, 그녀는 직접 정성스레 약초를 배합했다.
“다 됐다. 내일 것까지 만들어 뒀으니까 잊어먹지 말고 꼭 챙겨 먹어. 알았니?”
“알았다고.”
“대답이 시원찮네. 안 되겠다. 지금 바로 하나 먹어.”
“아 진짜. 사람을 왜 이렇게 못 믿어?”
투덜거리면서도 하룬은 약봉지를 하나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으억! 써! 독이라도 탔냐?”
“독이 아깝다.”
“크억! 그 말은 더 써!”
악감정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약이 썼다.
하룬이 약을 먹는 것을 확인한 아그네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럼 잘 쉬고 있어. 다녀올게.”
“흠흠. 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 알았지?”
대답 대신 혀를 빼꼼 내민 아그네스가 방문을 닫았다. 하룬은 쉽게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침대에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사람 걱정은 다 시킨다니까.”
* * *
내과 살롱에서는 한창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들 나이도 어느 정도 있는 데다가 신입은 아그네스 혼자라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선임의 신뢰를 얻으면 환자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그렇다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기회가 보다 많아지고, 자리를 빨리 잡을 수 있게 된다.
반쯤 열린 문밖에서 잠시 멈춰 서 있던 아그네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 왔네? 안 올 줄 알았는데. 이야. 치유사복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드레스도 잘 어울리는데? 다시 봤어. 아그네스 선생.”
“그러게. 잘 어울리네.”
“감사해요.”
선임들이 아그네스를 반갑게 맞았다.
단연 필스너가 가장 좋아했다. 그는 처음부터 비워 둔 옆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 권했다. 아그네스는 거절하지 않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바로 본론이 시작되었다.
“요즘 공개 진료는 어때? 잘 되고 있나?”
제일 연차가 많은 선임이 와인을 직접 따라 주며 물었다. 그는 차기 내과 교수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는데, 이름은 람. 실력뿐만 아니라 가문의 권세도 그만큼 받쳐주는 사내였다.
“잘 되고 있고, 별문제는 없어요. 각하의 병세도 빠르게 호전되고 있어요.”
“다행이네. 정말 큰일을 하고 있구나. 그런데 어떻게 강준 교수님과 같이 진료하게 된 거야? 듣자 하니 엘누아르 가문 저택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던데.”
람이 날카롭게 질문을 이었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아그네스를 향했다.
“아.”
“너무 사적인 질문을 했나? 부담스러우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아그네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한편 필스너는 그 대답을 애타게 기다렸다. 혹시나 준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싶어서.
서류상으로는 엘누아르 가문의 가신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너무 어리고 예쁘니 충분히 오해할 만도 했다. 실제로 오해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아그네스는 말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준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실은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어요.”
필스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그네스가 부끄러운 표정을 거두고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강준 선생님 제자예요. 그래서 이번 진료에 공동 주치의로 참여할 수 있었어요. 보조를 해야 할 실력이지만 선생님께서 기회를 주셨어요. 그래서 겸사겸사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에 머물고 있어요.”
“오, 사제관계였단 말이야? 그건 처음 듣는데?”
“죄송해요.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죄송할 건 없지. 이제야 아그네스 선생에 대한 비밀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네.”
“맞아. 나이에 비해 실력이 좋았으니까. 안 그래들?”
“그렇지.”
주변이 웅성거렸다.
선임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의 젊은 교수, 그의 수제자라면 출중한 실력도 이해가 간다.
람이 재차 물었다.
“그럼 표적치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네? 강준 교수님 제자라면 말이지.”
그 질문이 오늘 아그네스를 이 자리에 있게 한 핵심이었다.
많은 선임들은 표적치료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다른 분야에 비해 약을 많이 쓰는 과였으니까.
예상하던 질문이었지만, 막상 대답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자 아그네스는 고민을 피하지 못했다.
“아그네스 선생 입장도 난처한 건 이해를 해. 강준 교수님이 표적치료에 대해 아무것도,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고 계시니까.”
람은 손으로 와인을 권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강준 교수님의 문제고, 공동 주치의인 아그네스 선생은 조금 다르지 않겠어?”
“그렇지. 좋은 건 서로 나눠야 하는 거 아닌가?”
“환자들을 위한 일이라고.”
아그네스를 압박하는 의견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그녀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걸 보다 못한 필스너가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면 평소에 아그네스 선생에게 좀 잘들 하시지. 다들 관심도 없다가 공개 진료가 잘되니까 이렇게 나오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 한마디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오히려 깜짝 놀란 건 아그네스였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바라보자 필스너가 손을 휘저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하하하하!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정색들 하시긴. 그냥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는 것 같아서 해 본 말입니다.”
“농담이 아닌 거 같은데?”
“농담이래도요.”
람이 필스너를 흘겨보며 답했다.
“하긴. 필스너 선생 말도 맞아. 우리가 좀 소홀히 한 것도 있긴 해.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거잖아? 서로 좀 더 알아가자는 의미에서.”
“그럼요. 잘하셨습니다!”
필스너가 보란 듯 박수를 쳤다.
그는 할 일을 다 했다. 이제 아그네스 차례였다. 사람들은 표적치료에 대한 정보를 원하고 있었다. 그 동기가 어떻든 간에.
이런 질문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아그네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표적치료법을 전수할 생각은 있지만……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요.”
“왜지?”
“공작 각하의 허가를 받아 특별히 진행되는 시범 치료예요. 다시 말해 아직 의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치료 방법의 전수는 그 검증이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환자의 생명이 걸린 일이니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아그네스는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일전에 이 문제를 준에게 상의했을 때, 그는 표적치료 방법을 가르쳐 주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준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환자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결국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놀랍도록 준의 생각과 일치했다. 결국 두 사람은 아직 학술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방법이라고 판단하여 전수를 보류한 것이다.
한편, 방금 꺼낸 아그네스의 대답은 선임들에게 다양한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해석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앞으로 하는 걸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쉽게 말해 잘 보이라는 의미.
“아그네스 선생의 말이 맞습니다. 환자의 생명이 우선이죠!”
이번에도 필스너가 거들었다. 람이 슬쩍 노려보긴 했지만,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다른 선임들도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표적치료법은 천천히 배우자고.”
“설마 아그네스 선생도 같은 내과인데 우리를 따돌리겠어? 너무 재촉하지 말자구. 나름 부담이 클 텐데.”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레스 각하라면…….”
아그네스를 옹호하는 여론이 하나둘 형성되었다. 비록 오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지만, 기회는 언제든 있으니까. 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술자리가 깊어져 갔다.
* * *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리가 끝났다. 선임들은 하나둘 마차를 타고 병원을 나섰다. 다들 집안이 좋아 집사들이 근사한 마차를 끌고 마중을 나왔다.
필스너가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선생은 저택으로 어떻게 가?”
“저도 마차 타고 가려고요.”
“괜찮으면 가기 전에 한 잔만 더 할까?”
“아뇨. 저 술은 별로 안 좋아해요.”
필스너는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그네스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누아 마을에서는 상냥했으나 병원에서는 매뉴얼 그 자체였다.
“아까는 감사했어요.”
“응? 뭐가?”
“저 감싸려고 일부러 나서 주셨잖아요.”
“들켰나?”
아그네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저 그렇게 눈치 없진 않아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괜히 선임분들께 찍히면 곤란하잖아요? 저야 돌아갈 곳이 있지만…….”
“하고 싶은 말도 못 하면서 답답하게 살고 싶진 않아. 지를 때 확 질러야지. 쌓아 두면 병 된다고. 근데 돌아갈 곳이라니? 우리 병원에 정착할 생각 아니었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저희 마을은 오래도록 치유사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치유사가 꿈이었던 건가.”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스너는 왠지 마음이 설렜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비밀을 혼자 안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런 마음을 조심스레 그녀에게 전하려던 바로 그때.
“네아!”
방해꾼이 나타났다.
멋진 갑옷과 망토를 걸친 젊은 사내가 마차를 등진 채 병원 입구에 서 있었다. 아그네스가 그를 알아보고 반색했다.
“하룬? 거기서 뭐 하고 있니?”
“뭐 하긴. 너 기다렸지.”
“웬일이야?”
늘 귀찮다며 내빼던 하룬이었는데, 이렇게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다. 아그네스가 생긋 웃었다.
필스너는 그제야 알았다. 하룬을 바라보는 아그네스의 눈빛이 다르다는 것을. 뜻밖의 경쟁자를 만난 것이다.
“저 기사분은 누구?”
“아, 제 고향 친구인 하룬이에요. 하룬. 이리 와서 인사해. 우리 병원 내과에서 일하고 계신 필스너 선생님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하룬은 의젓하게 행동했다. 갑옷을 입은 채 어깨를 펴니 정말 당당해 보였다.
“필스너입니다. 반갑네요.”
필스너는 악수를 청했는데, 하룬의 오른손에 붕대가 감겨 있는 걸 발견했다.
“다치신 겁니까? 제가 치료를 해 드리죠.”
“괜찮습니다. 제 소꿉친구가 솜씨 좋은 치유사라서.”
“그렇군요.”
두 사내는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그렇게 눈치가 없지는 않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아그네스는 그들을 지나쳐 마차에 올랐다.
“필스너 선생님. 저 먼저 갈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저도 이만. 다음에 또 뵙죠.”
“그럽시다.”
하룬이 마차에 올랐고, 마부가 말을 출발시켰다.
그렇게 마차가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으로 향할 무렵, 로브를 쓴 낯선 존재가 정문으로 다가왔다. 병사들이 경계하며 무기를 쥐었다.
“실례지만 여기가 강준 남작님의 저택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