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숲의 아이 (1)
늦은 저녁, 준은 왕도에 있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루치아와 마리, 볼카누스, 그리고 카이엔과 저녁을 먹고 오는 길이다.
오랜만에 초월자들끼리 함께 한 식사는 굉장히 좋았다. 준은 기분이 한결 개운해짐을 느꼈다.
여유를 부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평복을 입은 아그네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릴리 씨가 그러더라구요. 선생님 누아 마을에 다녀오셨다고요.”
“맞아. 좀 볼일이 있어서.”
“진료소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그네스를 보니, 미리 말이라도 하고 다녀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치아 선생이 더 바빠진 것 빼고는 아무 일도 없더군. 살이 좀 빠질 정도로 힘들어하는 것 같아.”
“어떡하죠? 환자들이 줄지 않았나 봐요. 선생님이 왕도로 떠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좀 줄어들 줄 알았는데.”
아그네스가 또 다른 걱정에 빠지자 준은 됐다며 손을 내밀었다.
“아레스 각하 치료가 끝나면 나도 손을 좀 보태야지. 너는 걱정할 거 없다. 당분간은 병원 적응에 최선을 다하도록 해.”
“왠지 루치아 선생님께 죄송스러워서…….”
“죄송스러우면 편지라도 한 통 쓰든가.”
“아, 그래야겠네요!”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준은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아그네스가 자리에 앉았다.
“하룬은?”
“잘 쉬고 있어요. 약이 잘 들어서 곧 완치될 거 같아요.”
“다행이군. 혹시 루치아 선생에게 편지를 쓸 거면 볼카누스에게도 한 통 써 줘. 네 소식을 무척 궁금해하더라.”
“그래야죠.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왔는데. 다들 잘 지내세요?”
“너무 잘 지내서 탈이지.”
마음 같아서는 볼카누스와 카이엔의 포커 명승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괜한 얘기가 될 것 같아 말을 삼켰다.
“근데요, 선생님.”
아그네스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준이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주목했다.
그녀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자 준이 먼저 나섰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그게요…… 병원에서 계속 공개 진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그렇겠지. 치료 성과가 예상보다 훨씬 좋으니까.”
“표적치료에 대해 알려 달라는 분들이 많은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아직 선생님 제자라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는데요.”
준은 질문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아그네스는 준의 표적치료법을 완벽하게 흡수했다. 학생들에게는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지만, 아그네스에게는 아낌없이 지도해 준 덕이다.
다시 말해, 아그네스는 표적치료법을 자신이 전파해도 되는지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직접 알려 주지 그래? 병원에 적응하기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이 기회에 병원 선생들하고 친분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도 괜찮을까요? 표적치료법은 선생님이 고안한 방법이라서…… 왠지 제 공으로 여길까 봐 걱정돼서요.”
“하하하. 별게 다 걱정이다.”
준은 미소를 지었다.
표적치료법으로 부와 명예를 얻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학생들에게 전수할 계획이었고, 또 널리 알릴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아그네스가 주목받는다면 조금 더 좋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내 걱정은 말고 편한 대로 해. 병원에서 그렇게 물어본다면 사양하는 것도 피곤할 텐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다음 공개 진료도 잘 부탁한다.”
“맡겨 주세요!”
아그네스가 활짝 웃었다. 어느덧 그 밝은 미소가 준에게도 큰 활력소가 되었다.
* * *
공개 진료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2회차가 끝나고 3회차에 접어들었을 때는 아레스 공작의 암 조직이 거의 절반 이상 줄어드는 기적을 보였다.
걱정되었던 부작용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기력을 빠르게 되찾아 조만간 다시 정무에 복귀가 가능할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 소문은 왕도는 물론 왕국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아비루나 왕국의 치유사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교수님! 저희도 공개 진료 참관 기회를 주십시오!”
“아니면 치료 방법이라도!”
“학생들에게만 공개하는 것은 불공정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치유사들과 의료 관계자들이 찾아와 불평과 애원을 늘어놓고 갔다. 물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지금 주도권을 쥔 건 바로 준이었으니까. 그의 선택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준은 아직 표적치료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해 주지 않았다.
곁에서 치료를 함께하는 아그네스만이 그 방법을 이해했다. 그래서 공개 진료에 참여한 학생들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이해관계가 상충하기 시작했다.
떼돈을 벌고 싶은 제약 상단들. 그리고 부와 명예를 얻고 싶은 풋내기 치유사들. 난치병을 정복하고 싶었던 능숙한 치유사들까지.
그들이 찾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바로 준에게 직접 기술을 전수받는 것.
덕분에 준의 연구실엔 기다란 대기 줄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한 명씩 손님을 맞이하던 준은 시간이 부족해 서너 명을 동시에 안으로 들였다.
그래도 줄이 쉽게 줄진 않았다.
매일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다시 찾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만큼 준의 공개 진료는 이제 왕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다음 손님 들어오시죠.”
브로콜린이 손님을 들이려 했는데, 당초 정했던 세 명이 아니라 한 명만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두 사람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브로콜린이 그들에게 손짓했다.
“거기 두 분도 같이 들어오세요.”
하지만 두 사람은 머뭇거렸다. 앞선 중년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이봐, 조교. 내가 누군지 모르겠나?”
“모르겠는데요.”
인상을 찌푸린 중년이 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왕립 병원의 고위 간부를 뜻하는 표식이었다.
“나 혼자 들어갈 생각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차례에 들이는 게 어떤가.”
“그러죠. 뭐.”
브로콜린은 불필요한 마찰을 피했다. 미리 준의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중년은 준과 면담을 시작했다. 그의 목적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없겠소? 아그네스 선생도 그대를 찾아가 보라는 말만 하고 있고. 답답하군.”
“계속 같은 대답을 드리는 저도 답답하군요.”
“그러지 말고 좋게 생각해 보시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도 있지 않소?”
그는 준에게 편하게 말을 할 정도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준은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공개 진료의 인원을 늘릴 계획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치료 방법을 공개할 때는 아닌 것 같군요. 그렇게 쉽게 전수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하지만 선생. 나는 학생이 아니라 치유사 출신이란 말이오. 살짝 귀띔만 줘도 알아들을 거요.”
“치료 방법에 대해서는 추후에 세미나를 열어 제대로 전수할 계획입니다. 그러니 그때 다시 오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것은 중년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지식의 독점.
그것이 바로 중년이 원하는 것이었다. 준의 치료법으로 부와 명예를 얻으려는. 공세를 취하던 중년은 준을 회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준 선생. 그러지 말고…….”
“그만.”
준이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잠깐이지만 강력한 기운이 풍겼다. 중년은 꺼내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치료법입니다. 암 조직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완치된 것은 아니지요. 내일 당장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고. 충분히 자료를 모은 뒤 알리는 게 오히려 앞뒤가 맞는 일 아닐까요?”
준의 정론에 중년의 고위 간부는 반박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탄식만 내뱉을 뿐이다.
준이 선수를 쳤다.
“브로콜린. 손님이 가신다고 하는군.”
“알겠습니다. 자, 가시죠.”
“오늘의 일은 잊지 않겠소. 강준 선생.”
뻔한 협박을 늘어놓는 손님을 문 밖으로 돌려보낸 브로콜린이 문을 닫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교수님. 부탁인데 공개 진료 인원 좀 늘리면 안 됩니까? 손님 맞는 제 입장도 좀 고려해 주시라고요. 이렇게 극한직업인 줄 알았으면 조교 따위 안 하는 건데. 휴우.”
브로콜린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며칠 전부터 연구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기에.
준은 다시 찻잔을 들고 여유를 부렸다.
“그럴 생각은 없다. 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특별 강의니까. 손님이 찾아온다면 응해야지.”
“그럼 치료 방법이라도 좀 전수해 주시라고요.”
“내가 할 일이 아니라서 그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누가 해요. 주치의는 교수님이잖아요.”
“한 명 더 있잖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브로콜린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잠시 잊고 있던 한 사람을 떠올린 것이다.
“설마 아그네스 선생님께 그 중요한 일을 맡기시려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그럼 교수님이 덜 주목받잖아요. 왕국 의료계에서 단번에 정점에 오를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닙니까? 선생님이 고안한 치료법인데 왜 다른 사람한테 공을 넘겨요?”
“치료법에 주인은 없다. 그걸로 환자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만인 거지.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 발견했을 치료법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납득했겠지만 브로콜린은 매의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 않으셔서 그런 건 아니고요?”
“제법이군. 어떻게 알았지?”
“모르면 바보죠. 교수님은 늘 한결같으시니까. 아무튼 뭐라도 떨어지면 받아먹으려고 했는데 틀렸군요. 이래서 라인을 잘 타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거였어.”
피식 웃은 준은 손을 흔들었다. 다음 손님을 들이라는 신호였다.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시달리는 것은 아그네스도 마찬가지였다. 당직을 설 때도, 회진을 돌 때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병원 복도를 걷고 있던 그때 저편에서 젊은 치유사가 뛰어왔다. 평소 아그네스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필스너였다.
“잠깐! 아그네스 선생! 한참을 찾았네.”
“무슨 일이세요?”
“오늘 저녁에 가볍게 와인 한잔 어때?”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무슨 약속이 그렇게 매일 있어?”
필스너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녁에 다른 일이라도 하나? 매번 내가 뭐 좀 하자면 약속이 있어요, 바빠요, 다음에요. 이렇게 거절하고 말이지. 나 참.”
“아, 딱히 그럴 의도는…….”
“오늘 내과 선임들끼리 저녁 먹기로 했다고. 아그네스 선생도 부르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물어본 거야.”
“그래요?”
내과 선임들이라면 수련의 과정을 마친 선배들이었다. 앞으로 교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
잠시 고민하던 아그네스가 말했다.
“그럼 조금 늦게라도 참가해도 괜찮을까요?”
“전혀 상관없어. 혹시 데이트?”
“아뇨. 제가 봐야 하는 환자가 있어서요.”
“그럼 지금 보면 되잖아.”
“환자가 저희 저택에 있어요.”
필스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그 환자가 누군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저녁에 내과 살롱에서 보자고. 혹시 자리를 옮기면 메모를 남겨 둘 테니까 그쪽으로 와.”
“알겠어요. 이따 뵐게요.”
아그네스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과 선임들과의 저녁.
다소 긴장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이 기회에 그들과 친분을 쌓는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