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배후의 음모
조각이 놓이는 순간 볼카누스의 동공이 커졌다. 그는 내심 아차 싶었다.
‘죽지 않고 이걸 받는다고?’
카이엔이 포기하길 바라는 마음에 오버 베팅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냉정했고, 소중하게 보관해 오던 조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팅했다.
‘이 패론 이길 수 없어!’
그것이 솔직한 볼카누스의 심정이었다.
자신은 2 원페어로 메이드가 끝났다. 아무리 패가 안 좋아도 카이엔이 2 원페어보다 높은 패를 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같은 2 원페어가 나온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 패가 동일할 때 다른 카드로 승부를 보는데, 가장 높은 카이엔의 카드가 A♠였으니까.
절망적인 상황.
그렇다고 여기에서 무너질 볼카누스가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카이엔이 노 페어이기를 바랐다.
그 마음을 읽은 걸까.
카이엔이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설마 2 원페어로 저 소중한 아그네스의 목도리를 베팅한 건 아니겠지?”
“흥. 그럴 리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이해라. 그럼 한번 봐주지.”
“이미 베팅이 끝났는데 헛소리는. 그런 얄팍한 수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볼카누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긴장감은 오랜만이었다. 신마전쟁에서 선봉에 설 때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떨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볼카누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패를 까 볼까?”
“그러지.”
“그 전에 다시 한번 묻지. 다이할 생각은 없나? 조각은 다음 판에 먹어 줄 의향이 있는데.”
“시간 낭비다.”
카이엔이 자신 있게 패를 오픈했다.
모든 카드가 드러나자 볼카누스는 환희에 차오른 표정을 지었다. 10♠가 없었다. 그가 손에 쥔 건 3♥와 3♣, 그리고 7♣였다.
걱정하던 로열스트레이트플러시가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플러시도 피했다.
“해냈다! 해냈어! 하하하. 이 귀여운 녀석! 개패였구나!”
“그래서 네 패는?”
“……응?”
그제야 볼카누스가 정신을 차렸다.
로열스트레이트플러시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신의 패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뜨겁게 타올랐던 기운이 싸늘히 식었다. 동시에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볼카누스는 다시 카이엔의 패를 확인했다.
“자, 잠깐. 3 원페어?”
“그렇다.”
“이 미친 새끼. 3 원페어로 이렇게나 달렸다고?”
볼카누스는 한옆에 수북이 쌓인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인간계에 풀리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카이엔이 냉정하게 말했다.
“포커는 패를 만드는 게임이 아니라 상대를 속이는 게임이지. 상대방을 얼마나 잘 속이는가가 중요해. 베팅이 그 수단이고. 그러는 의미에서 너는 포커에 재능이 없다.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니까.”
“큭!”
뜻하지 않은 팩트 공격. 카이엔이 이어 채근했다.
“어서 패를 까라.”
그가 자신의 패를 열지 않자 카이엔이 손을 뻗었다. 볼카누스가 재빨리 손을 뒤로 빼며 카드를 숨기려 했지만, 카이엔이 조금 더 빨랐다.
모두 열린 패를 맞춰 본 카이엔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2 원페어? 나의 승리로군.”
“젠장! 쳐죽일 놈! 3 원페어로 이렇게 달리다니! 빌어먹을! 크아아악!”
볼카누스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브레스라도 쏠 기세였다.
차라리 로열스트레이트플러시에 졌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명백한 차이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도 한 끗 차이로 지고 말았다. 전 판에 원페어 차이로 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졌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 줄까?”
카이엔의 손이 움직였다.
그가 처음에 버린 카드를 보여 주자, 볼카누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엔이 처음 버린 카드가 10♠였던 것이다.
이건 완벽한 농락이었다.
볼카누스의 두 눈이 싸늘히 식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투기를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그간 짓지 못했던 승부를 결착 낼 때가 온 것 같군. 패잔병.”
“바라던 바다. 파충류.”
카이엔도 일어나 마기를 끌어올렸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둘 다 그만둬.”
때마침 끼어든 목소리에 두 사내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준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볼카누스가 살기를 죽였다. 카이엔도 이어 마기를 거뒀다.
“돌팔이. 언제 왔냐?”
“게임 시작하기 직전에 왔지.”
“그럼 말을 해야지! 기척을 내던가! 힘 세다고 자랑하는 거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는데 놓칠 수 있나? 그나저나 아그네스가 선물한 목도리를 베팅하다니. 아그네스가 알면 서운해하겠어.”
볼카누스가 흠칫 놀랐다. 당황한 그가 손을 필사적으로 내저었다.
“비, 비밀이다! 아그네스에겐 절대 말하지 마!”
“내가 말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챌 것 같은데?”
“뭣?”
준이 턱짓을 한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카이엔이 전리품을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가장 먼저 아그네스의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그리고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흡족한 미소와 함께.
“음. 따뜻하고 좋군. 봄에 하는 목도리도 나쁘지 않군.”
“당장 벗어라!”
“내가 내 것을 하겠다는데 왜 그래야 하지?”
“크윽!”
틀린 말은 없었다. 이것은 내기였고, 자신은 완전히 패배했다. 심지어 목격자도 있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 하는 것이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피식 웃은 준이 카이엔에게 제안했다.
“목도리는 돌려주지 그래? 불쌍해 보이는데.”
“그럴 순 없다. 나도 소중한 것을 베팅했으니까.”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상대였잖아.”
잠시 생각에 잠긴 카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포커는 상대를 속이는 게임이다. 블러핑을 하는 게임. 즉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는 것도 능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족인 카이엔은 포커 게임에 가장 최적화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일종의 종특이라고 해야 할까?
그에 비해 볼카누스는 얼굴에 패가 다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풀하우스를 잡으면 반색했고, 탑을 잡으면 시무룩했다. 어쩌다 포카드나 스트레이트플러시라도 뜨면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이엔은 그 표정을 보고 베팅을 하거나 죽으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도 두 존재가 포커 게임을 즐기는 근원적인 이유가 달랐다.
볼카누스는 재물에 탐을 냈지만, 카이엔은 조금 달랐다. 황금을 먹는 게 아니라 볼카누스가 패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즐거웠다.
애초에 이번 게임도 전리품을 떠나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만족한 그였다. 그래서 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좋아. 그대의 부탁도 있으니 오랜만에 자비를 베풀지. 받아라.”
카이엔이 목도리를 건넸다. 울먹이기 직전이던 볼카누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 돌려주는 것이냐?”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이걸 빌미로 더럽고 치사하게 계약을 한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혀를 찬 카이엔이 손을 거두려 하자 볼카누스가 재빨리 낚아챘다. 하지만 실패했다. 곱게 넘기려던 카이엔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더럽고 치사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쩔 수 없군. 진짜 더럽고 치사해져 볼까? 자, 따라 해라. 그럼 목도리를 돌려주지. 고귀하고 위대하신 카이엔 님. 제발 미천한 저에게 목도리를 돌려주십시오.”
“고……고귀…… 이런 쳐죽일!”
“그럼 없었던 일로.”
카이엔이 아공간 창고에 목도리를 넣으려고 하자 볼카누스가 바싹 엎드렸다.
“고귀하고 위대하신 카이엔 님! 제발! 미천한 저에게 목도리를 돌려주십시오!”
“목소리가 작은데?”
“고귀하고! 위대하신! 카이엔 니이이임! 제발! 제발! 목도리를 미천한 저에게 돌려주십시오오오!”
“흐음. 그럴까?”
결국 아그네스의 목도리를 돌려받은 볼카누스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루치아가 이 장면을 봤어야 했는데.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며 준이 카이엔을 주목했다.
“잘 생각했어. 다른 아이템은 던전 보상으로 놔두면 좋겠군. 너무 귀한 건 빼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던전은 잘 돌아가고 있어?”
“그대의 기사단은 정신력이 매우 강하더군. 벌써 4층을 돌파했다. 5층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조만간 돌파될 것 같다. 좀 더 무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그렇게 하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 있으니.”
“그렇지.”
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진도가 빨랐다. 엘누아르의 기사단원들은 던전을 공략하며 더욱 강해질 것이다.
카이엔이 되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왕도의 일이 길어질 것 같다고 들었는데.”
“너희들에게 아무런 소식도 없어서 직접 와 봤어.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롭게 포커나 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이봐. 볼카누스. 그만 좋아하고 내 말에 좀 집중하지?”
“어? 너 아직 안 갔냐?”
“괜히 아그네스에게 말하게 하지 마.”
볼카누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목도리를 아공간 창고에 넣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얌전히 준을 향해 돌아섰다.
카이엔이 대신 설명했다.
“강령술사에 대한 조사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완벽하게 정리한 다음 소식을 주려고 했지.”
“그래?”
“네 추측이 맞았다. 배후가 있었어. 혈마신을 부활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
“역시 예상대로군.”
“하지만 그게 궁극적인 목적은 아닌 것 같다.”
“무슨 소리야?”
준이 묻자 카이엔은 잠시 뜸을 들였다. 턱을 괴는 걸 보니,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놈들이 원하는 건 세계의 파멸인 것 같다.”
“그래?”
“별로 놀라지 않는군.”
“좀 의외긴 한데 예상 범위 내에 있는 일이거든. 숲의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뭔가 그쪽에 문제가 일어난 거 아니겠어?”
볼카누스는 준의 추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카이엔은 내심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곧 그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설마 세계수에 문제가 생긴 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뭣? 세계수가?”
볼카누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세계수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은 나무다. 만약 그것이 병들었다면, 이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볼카누스가 궁금증을 표했다.
“그럼 숲의 아이들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강령술사의 음모로 세계수가 병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솜씨 좋은 치유사를 찾아가겠지.”
“솜씨 좋은 치유사?”
“거기에 절대자 출신이면 더더욱 좋을 거고.”
“그런 놈이 있어?”
“눈앞에.”
카이엔이 준을 가리키자 볼카누스가 격하게 부인했다.
“이놈은 절대자 출신이긴 한데 솜씨가 좋지 않잖아. 돌팔이라고! 오히려 루치아 선생 쪽이 훨씬 어울리지.”
“신의 대리인과 전령은 하늘과 땅 차이지.”
“알 게 뭐야?”
준은 두 사람의 다툼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지금은 생각에 집중했다.
카이엔의 추론은 상당히 그럴듯했다. 혈마신이 부활할 조짐이 보이고, 세계수가 병들었다면, 숲의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게 입증이 된다.
‘엘프들이 나를 찾고 있다고?’
어쩌면 조만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