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세븐 포커
“으아아아악! 이 망할 놈!”
신경질을 부리며, 볼카누스가 손에 쥐고 있는 카드를 던져 버렸다. 보기 좋게 카이엔에게 패했다.
두 사람은 포커 게임 중이었다. 테이블엔 베팅에 쓰인 황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중 절반이 볼카누스의 것이었지만, 방금 패를 확인한 이후 소유주가 바뀌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이엔이 유유히 모든 황금을 챙겼다.
“고작 3 투페어로 이렇게 많은 황금을 먹다니! 양심도 없냐?”
“양심? 이상한 논리로군. 정당한 승부에서 대가를 취했을 뿐인데. 하나 충고하지. 작은 걸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라네.”
“닥쳐! 이 패잔병!”
“패잔병에게 진 소감이 어떤가?”
“큭!”
볼카누스는 한참을 씩씩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마지막에 가까스로 A 원페어가 완성됐지만, 카이엔이 가지고 있던 패는 공교롭게도 3 투페어였던 것이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한 끗 차이로 진 것이다.
느긋한 손길로 황금을 다 챙긴 카이엔이 볼카누스를 향해 씨익 웃었다. 고위 마족다운 간사한 미소였다.
“오늘도 다 잃은 건가? 갈수록 시시해지는 느낌이야. 역시 강준이나 루치아 선생이 없다면 게임이 되지 않는 건가. 상대를 바꿔야겠어.”
“시끄러워!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다고?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겠군. 자네에겐 더 베팅할 황금이 남아 있지 않다네.”
카이엔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볼카누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차분히 대꾸했다.
“그래. 맞아. 오늘도 내가 힘들게 모은 황금을 네놈에게 다 빨렸지.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볼카누스가 오른팔을 내밀었다. 공간이 쩍 벌어지며 그의 손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황금으로만 베팅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후두두둑!
볼카누스의 손에 물건들이 하나둘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각종 무기에서부터 시작해 보석, 거기에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유물까지 실로 다양한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왔다.
볼카누스는 자신의 아공간 창고를 모조리 털고 있는 것이다.
“호오. 제법 많이 모아 뒀군.”
아이템들을 바라보던 카이엔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템을 모조리 뺏어올 수 있다면 자신의 던전을 보다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에게 보상도 충분히 줄 수 있고 말이다.
그새 아공간 창고를 텅텅 비운 볼카누스가 호기롭게 외쳤다.
“하하핫! 오늘 제대로 죽여 주마! 베팅의 진수를 보여 주지.”
“시작하기 전에 하나 확실히 할 필요가 있겠군.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네가 잃은 걸 돌려줄 생각은 없다. 정말 하겠나?”
“쫄리면 뒈지시던가.”
“누가 할 소리를.”
“그런데 네놈은 뭘 걸 거냐?”
테이블에 깔린 갖가지 보물들을 바라보던 카이엔이 품에서 작은 조각 하나를 꺼냈다. 정말 보잘것없는 뼛조각이었다.
툭.
그러나 그것이 테이블에 놓이는 순간, 볼카누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뼛조각을 가리킨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그, 그건!”
“마신의 유골 조각이다. 마지막 베팅 카드로 이 정도라면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중간 베팅은 황금과 다른 아이템을 섞고. 나도 어느 정도 아이템은 확보해 놓았으니.”
“좋다.”
볼카누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지에 몰렸던 그였지만, 의외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신의 유골 조각’을 얻을 수 있다면 꺼낸 아이템들을 모조리 잃어도 상관없다.
그게 바로 그의 속마음이었다.
그만큼 ‘마신의 유골 조각’은 대단한 물건이었다. 카이엔에게 있어 소중한 물건이기도 했고.
솔직히 카이엔이 베팅할 아이템의 수준차가 난다고 항의하지 않는 게 이상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볼카누스가 카드 더미를 쥐었다.
“이번에는 내가 섞도록 하지.”
“소매 걷어라.”
“쳇!”
마음 같아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셔플을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볼카누스가 소매를 걷었다.
셔플이 시작됐다.
두 존재의 시선이 카드로 집중됐다.
사실 둘은 무엇이든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이 카드만큼은 예외였다. 준의 권능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공정하고 재미있는 게임을 위해 준은 권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서로 패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베팅을 해야 했다.
진검승부.
패가 돌아가는 지금 순간을 가장 정확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한마디를 찾으라면 이게 아닐까?
이윽고 네 장의 패가 각자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존재는 은밀히 패를 까보았다.
“으음.”
가장 먼저 볼카누스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있는 카이엔도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볼카누스였다.
“후후후.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군.”
“웃는 여신도 찡그리게 할 정도로 말이 많아.”
“새끼. 후달리냐?”
카이엔은 피식 웃어넘겼다. 볼카누스가 카이엔을 노려보며 네 장의 카드 중 하나를 버렸다. 카이엔도 마찬가지로 하나를 버렸다.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동시에 카드가 한 장씩 뒤집혔다.
카이엔이 뒤집은 카드가 A♠인 것을 확인한 볼카누스가 이마를 찡그렸다. 반면 카이엔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볼카누스가 꺼낸 카드는 5♣라 선은 카이엔이 가져갔다.
그리고 볼카누스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젠장!”
적당히 베팅이 이어지다 네 장과 다섯 장째에 연속으로 K♠와 Q♠가 붙었다. 카이엔 쪽으로 말이다.
그에 비해 볼카누스의 카드는 참담했다. 2♥가 붙더니, 10◆가 붙었다.
카이엔은 플러시와 마운틴, 그리고 로열스트레이트플러시 등 높은 족보가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볼카누스는 모양마저 모두 다른 최악의 패였다.
까진 패를 확인한 카이엔이 웃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딱 봐도 개패로군.”
“언제는 나한테 말 많다고 구박하더니, 지는 잘도 나불거리네?”
“미리 죽으라고 조언해 주는 거지. 우리 사이에 그 정도의 정은 있지 않나?”
하지만 죽으라면 더 죽고 싶지 않은 게 본연의 심리.
선을 잡은 카이엔이 황금을 한가득 베팅 테이블에 쌓았다.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하지만 볼카누스가 누군가.
자신의 아공간을 털면서까지 카이엔을 쓰러트리고 싶은 사내였다. 그는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깔린 아이템 중 커다란 대검을 들었다.
그것을 본 카이엔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설마 그걸?”
“멍청한 줄 알았더니 다행히 알아보는군. 차원의 대검이다. 네놈의 황금으로 값어치를 매길 만한 물건이 아니지.”
“흐음.”
잠시 생각에 잠긴 카이엔이 아공간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이템으로 베팅이 시작된 이상, 황금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도 소유하고 있던 아이템을 꺼내야 했다.
그가 꺼낸 것은 손바닥 두 뼘 정도 되는 완드(Wand)였다.
허름한 나무로 만들어진 완드였지만, 품고 있는 마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볼카누스가 흠칫 놀랐다.
“사령술사의 완드?”
“제대로 봤군.”
“……콜.”
볼카누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심 카이엔이 포기하길 바랐는데 따라왔으니까. 그는 카드를 카이엔 쪽으로 한 장 뒤집었다.
제발 좋은 패가 나오지 말기를.
하지만 그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재미있게도 카이엔의 패에 J♠가 붙은 것이다.
“…….”
어이없고 억울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연속으로 좋은 패가 붙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카이엔의 패는 A, K, Q, J였다. 그것도 같은 모양의. 이미 플러시가 완성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보다 높은 족보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볼카누스가 미동도 하지 않자 카이엔이 채근했다.
“포커 치던 드래곤 어디 갔나?”
“시끄럽다.”
인상을 찌푸린 볼카누스가 자신 쪽으로 여섯 번째 패를 붙였다.
“오!”
볼카누스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2♥가 나왔다. 액면으로 2 원페어가 완성된 것이다.
“좋아! 이 정도라면 승부를 볼 수 있겠군. 자, 받아라!”
볼카누스가 베팅한 아이템은 작은 반지였다. 색 바랜 보석이 박힌 반지였는데, 그 가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순간이동 반지?”
“그 정도는 걸 패라서 말이지. 후후후.”
“그렇다면.”
카이엔이 맞서 꺼낸 것도 반지였다. 보석 대신 흉물스러운 해골이 박힌 반지였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콜은 힘들고, 네가 좀 더 걸어야겠지?”
“큭.”
카이엔이 꺼낸 것은 ‘허무의 반지’였다. 마법 저항력을 올려주는 것은 물론, 치명적인 마법 공격을 방어해 주는 유물급 아이템이었다.
입맛을 다신 볼카누스가 목걸이를 던졌다.
바로 ‘여신의 눈물’이라는 유물급 아이템이었다. 볼카누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콜?”
“콜.”
마지막 히든 패가 들어갔다.
볼카누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패를 확인하는 것과는 달리, 카이엔은 히든 패를 확인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오감이 예민해진 볼카누스가 그것을 그냥 지켜볼 리가 없었다.
“무슨 개수작이냐?”
“이미 패가 완성됐는데 굳이 쓸모없는 패를 확인해야 하나?”
“……!”
볼카누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허풍처럼 들리지 않았다. 준과 포커를 칠 때는 적당히 느낌이 왔는데, 카이엔은 고위 마족이라는 특성이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설마 로티플이 떴나?’
로열스트레이트플러시. 포커 게임에서 가장 높은 패를 의미한다.
지금 카이엔의 패에서 10♠만 나오면 완성된다.
그럴 가능성은 컸다. 자신이 들고 있는 패 중에 10♠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게 카드 더미에 있을 확률도 있지만, 카이엔의 손에 들어가 있을 확률도 있었다.
카이엔이 다시 채근했다.
“네가 선이다.”
볼카누스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표정에서 다 드러났다. 2 원페어를 쥐고 있지만 상대의 패가 너무 강력했다.
말 그대로 개패였다.
히든카드를 확인했지만 결국 2 원페어로 끝나 버렸으니까.
하지만 유물급 아이템을 휙휙 던진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몇 차례 피 튀기는 베팅이 오갔고, 어느새 테이블엔 아이템이 수북이 쌓였다.
그사이 볼카누스가 준비한 아이템도 모두 떨어져 버렸다.
“더 이상 베팅할 게 없으면 그냥 죽어야지?”
“기다려 봐!”
결국 마음을 정한 볼카누스가 손을 뻗었다. 다시 아공간 창고가 열렸고, 마지막 남은 아이템 하나가 손에 들려 나왔다.
마지막 베팅인 만큼 확실한 아이템을 던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습을 드러낸 건 평범한 목도리였다.
겨울이 지나고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어 소중히 아공간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볼카누스가 보란 듯이 베팅 테이블에 목도리를 내려놓았다.
“이 정도라면?”
“정말 좋은 패를 잡은 모양이군.”
카이엔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카누스가 베팅한 아이템은 다름 아닌 아그네스가 직접 손으로 뜬 목도리였던 것이다.
아그네스를 끔찍이도 아끼는 볼카누스였다.
그런 그에게 목도리는 어떤 아이템보다도 소중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 패로 죽을 수는 없지. 콜.”
카이엔이 손을 움직였다. ‘마신의 유골 조각’이 베팅 테이블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