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가장 소중한 것 (2)
아그네스의 목적지는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아그네스가 현관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병사는 무기를 거두고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서기관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마워요. 혹시 하룬 경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숙소에서 쉬고 계실 겁니다. 당분간은 업무에서 빠지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병사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지만, 아그네스는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기사단 숙소로 몸을 돌렸다.
기사단 숙소는 저택 옆에 딸린 작은 가건물이었다.
저택의 부지가 좁아 따로 기사단원들의 전용 공간이 없기 때문에 휴게실을 겸해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쉬고 있던 몇몇 기사들이 반색하며 아그네스를 맞았다.
“오, 서기관님 오셨습니까? 여기에는 어쩐 일로?”
“아레스 각하의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이거 기념 파티를 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제 서기관님의 명성이 왕도에 널리 퍼지게 생겼는데 말이죠.”
“과찬이세요.”
아그네스는 수줍게 웃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기사단원들의 칭찬에 부끄러워졌다.
보기와는 달리 아그네스는 루치아보다 인기가 많았다.
단순히 외모가 귀엽고 예뻐서가 아니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씨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기사들이 대부분 누아 마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아그네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두 감사해요. 이게 모두 제가 왕도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여러분들께서 애써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다 영주님과 서기관님의 공이죠.”
“맞아. 그렇지.”
“서기관님은 지나치게 겸손하시다니까? 하하핫.”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환한 미소를 보인 아그네스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근데 하룬 경은 방에 있나요?”
“아아. 예. 위에서 쉬고 있습니다. 자꾸 나가려는 걸 붙잡아 뒀지요.”
“그렇군요.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아그네스는 가볍게 묵례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한 층 올라가 하룬의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건방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그네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나른하게 하품을 하던 하룬이 화들짝 놀랐다.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실화냐?”
“왜?”
“아, 아니. 네가 여기에 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마 처음이지?”
“난 또 뭐라고. 그게 뭐가 중요하니?”
하룬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아그네스가 말렸다.
“가만 누워 있어. 손님 대접 받으려고 온 거 아니니까.”
“그럼 왜 왔는데?”
“상처가 심해졌다며. 오전에 출근할 때 폴링 경에게 들었어.”
“이런.”
그녀의 시선이 하룬의 오른손에 닿았다. 붕대에 감겨 있었는데 겉으로 봐도 붓기가 상당했다.
하룬은 괜히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전에 아그네스에게 치료를 받은 상처인데, 염증이 다시 재발했다. 컨디션도 많이 떨어져 현재 근무에서 빠지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다음부터는 다치면 꼼꼼히 치료받도록 해. 살짝 스쳤다고 방심하지 말고.”
“알았다고. 어휴, 그냥 잔소리는 우리 엄마를 꼭 닮았네.”
“몸을 좀 소중하게 여기란 말이야. 상처가 심해지고 나서 후회하면 뭐하니?”
아그네스의 잔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하룬이 입을 삐죽대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바로 미안한 마음.
하룬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가벼운 상처라고 둘러댄 것이고, 아그네스는 치유사임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미안한 마음이 서로 툴툴거리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친구라서.
“아무튼 붕대 풀고 좀 볼게. 아파도 참아.”
“살살 좀.”
“하여간 엄살은 알아 줘야 한다니까.”
아그네스가 조심스레 붕대를 풀었다. 새빨갛게 부어 있던 상처가 검게 변해 가고 있었다. 염증이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그네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상태가 안 좋네. 파상풍 같은데? 약도 같이 먹어야 할 것 같아.”
“아, 먹는 약은 딱 질색인데. 좀 봐주라. 어?”
“우습게 볼 게 아니야.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해. 혹시 몸살 기운이 있거나 하진 않니?”
“괜찮아. 그냥 손만 좀 욱신거릴 뿐이야.”
아직 병이 크게 진행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빠르게 치료하는 게 중요하다. 아그네스는 그 자리에서 바로 약초 배합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하룬이 정신을 퍼뜩 차리고 손가락으로 코를 슥 문질렀다.
“바쁘지 않아? 공개 진료 잘 끝났다고 들었어.”
“바쁘지. 안 그래도 오는 길에 붙잡힐 뻔했다구.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해. 친구가 다쳤다는데.”
문득 하룬은 아그네스의 배합 솜씨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준의 배합 기술을 보는 것 같았다.
약초를 가루로 낸 아그네스는 탕약으로 만들지 않고 바로 먹게 했다. 하룬은 코를 잡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약을 삼켰다.
“으윽. 이거 언제까지 먹어야 하냐?”
“손 부은 거 다 나을 때까지.”
“지독하네.”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란다.”
이어서 아그네스는 마나 요법을 전개했다. 부어 있던 하룬의 손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염증이 심해 바로 원래의 모습을 찾진 못했다.
그래도 아그네스는 포기하지 않고 꼼꼼히 마나를 쏟아부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마나를 많이 사용한 탓에 이마에 땀이 맺혔다. 하룬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었다.
“열심이군. 나 너무 좋아하지 마라. 나쁜 남자니까. 후우. 이놈의 인기란.”
찰싹!
결국 매를 번 하룬이었다. 등짝을 때린 아그네스가 무서운 눈으로 하룬을 노려보았다.
“아우, 왜 환자를 패고 그래?”
“헛소리하지 말고 이따 저녁에 다시 치료받으러 와.”
“손 매운 것도 우리 엄마랑 똑같네. 근데 왜 내가 가야 해? 다시 와 주는 거 아니었어?”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오기가 싫어졌어.”
“허, 그렇게 감정적으로 환자를 대해도 되는 겁니까? 아그네스 선생님?”
“내 맘이야.”
치료를 모두 끝낸 아그네스가 방을 나섰다. 피식 웃은 하룬은 오른손을 쥐었다가 다시 펴 보았다. 확실히 움직이기가 편했다.
바로 그때, 정원을 거닐던 준이 미소를 지었다. 창문 너머로 옥신각신하는 두 제자의 모습을 우연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절로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너무 소홀했나? 지금쯤 혼자 진료소에서 고생하고 있을 텐데.’
루치아의 쓴소리가 왕도까지 들리는 듯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전서 하나 보내지 않았으니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준은 그 길로 상업지구로 향했다.
왕도의 상업지구는 웬만한 도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상당했다. 그런데도 준은 길을 헤매지 않고 단번에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 새로 오픈한 ‘엘누아르’라는 상점이었다. 보석과 장신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휘황찬란한 귀금속들이 사방에 전시돼 있었다.
준은 흡족한 표정으로 매장을 살폈다. 손님이 많았다. 폴링의 사업 수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직원이 다가왔다. 그녀는 준이 이 상점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업무를 보고 있는 건 폴링이었으니까.
준은 굳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범한 손님인 척했다.
“목걸이를 선물하려고 하는데, 좀 둘러볼 수 있습니까?”
“그럼요. 이쪽으로 오셔요. 마침 신상품이 나왔는데 잘 오셨네요. 실례지만 어떤 분에게 선물하실 건가요?”
뜻하지 않은 질문에 준은 잠시 머뭇거렸다. 매장 점원은 대강 눈치를 채고 싱긋 웃었다.
“소중한 분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데엔 보석만 한 게 없죠. 이건 어떠실까요? 사파이어로 장식된 금목걸이에요. 요즘 젊은 분들께 인기가 많죠.”
“예쁘군요.”
준이 목걸이를 보며 담담히 소감을 표했다. 이후로도 준은 여러 목걸이를 살펴보았다. 결국엔 처음 봤던 사파이어 장식 목걸이를 선택했다.
계산을 하고 나온 준은 바로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누아 마을에 도착했다.
천천히 걸어 진료소에 도착했다. 마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워프 게이트가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와 있었을 것이다.
“오셨어요?”
“그래. 별일 없었지?”
마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고양이도 야옹 울었다. 준은 고양이를 한번 쓰다듬어 주곤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진료가 끝난 시간이라 견습들이 내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준의 등장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준은 미소로 화답하고는 루치아의 진료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기력이 다했는지 팔을 축 늘어트린 채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많이 힘든 모양이군.”
“그걸 아는 사람이 이제야 나타나요? 양심이 있으면 진료 시작 전에 나타나야지. 휴우.”
루치아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준은 살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야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살 빠진 거 같은데?”
“실례예요. 빠질 살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얼굴이 좀 야윈 것 같아.”
“가뜩이나 환자가 많은 진료소에서 치유사가 둘이나 빠져 버리니 당연한 결과죠. 노동력 착취라고요.”
루치아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준의 방문에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겸사겸사 와 봤어. 볼카누스와 카이엔에게 조사를 부탁한 것도 있고 해서 말이지. 결과가 궁금한데 연락이 안 오네.”
“나 보러 왔다는 얘기는 끝까지 안 하시네.”
준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것을 본 루치아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상자였고, 준이 상자를 열자 찬란히 빛나는 사파이어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
루치아의 얼굴에서 투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설마…… 그거 나 주려고 사 온 거예요?”
“그래.”
“정말? 당신이?”
루치아는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선물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예쁜 목걸이를 받는다는 건 역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니까.
준이 목걸이를 꺼내 루치아에게 건넸다.
하지만 루치아는 그것을 거절했다.
준은 살짝 당황했다.
“왜?”
“센스 없게 그냥 주는 게 어디 있어요? 직접 걸어 줘야지.”
루치아가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묶었다.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준은 마치 그녀와 포옹하듯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었다.
목걸이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와 잘 어울리기도 했고. 물론 그녀의 외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루치아는 매우 만족했다.
금이 아니라 구리로 만든 목걸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물건의 가치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준의 마음이 좋았던 거니까.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런데 나는 뭐 해 줄 게 없는데. 어쩌죠?”
“괜찮아. 진료소를 지켜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언제 돌아가요?”
“볼카누스와 카이엔을 만나고 바로.”
“그래도 워프 게이트가 있어서 편하긴 하네요. 다음에는 시간 내서 하룻밤 자고 가요. 알았죠?”
루치아는 준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준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녀와 잠시 환담을 나눈 준은 바로 진료소를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볼카누스의 레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