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가장 소중한 것 (1)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준은 마나를 거두고 치료를 마쳤다. 표적치료가 모두 끝난 것이다.
“자, 이제 스캐너로 다시 한번 환부를 살펴볼 거다. 암 조직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지.”
“시간이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아직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나도 처음 시도하는 치료법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래서 확인해 봐야겠지.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두가 긴장했다.
암 치료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학생들은 은연중 실망할 것이고, 가문 사람들은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시킬 수도 있다.
지금 준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지는 다음 공개 진료 시간에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준은 정공법을 택했다.
“아그네스 선생. 스캐너로 간을 비춰 봐.”
“알겠습니다.”
아그네스가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자 스캐너 모니터에 아레스 공작의 간이 비췄다.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군.”
“정말이다!”
“진짜 줄어들었어!”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놀라는 학생들도 있었고,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도 있었다. 준이 그중 엔도버를 지목했다.
“자네가 보기에 효과가 있는 것 같나?”
“암 조직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한 시간 만에 이 정도라면 대단한데요? 기적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그게 정말이냐?”
알프하이겐 가문의 장남이 끼어들었다. 엔도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아마 이 자리에 오지 못한 학생들은 땅을 치고 후회할걸요?”
장남이 턱짓으로 가문의 주치의에게 지시하자, 주치의가 모니터를 직접 확인했다. 영상을 판독하던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어떤가?”
“조직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장기도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각도와 시점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준의 업적을 깎아내리려고 애를 쓰는 그였다. 피식 웃은 준이 아그네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정도였다.
“각도와 시점이 다르다면 스캐너를 직접 조작해 보시지요.”
“그러지.”
가문의 주치의는 직접 폐 쪽으로 스캐너를 조작했다. 곧 영상이 바뀌고 흐릿한 폐의 음영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를 향했다.
웅성거리던 학생들 사이로 큰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폐의 암도 줄어들었습니다!”
“정말 굉장한데요? 믿을 수가 없어요!”
학생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눈앞에서 기적이 펼쳐진 것이니까.
가문의 주치의도 두 눈을 비비며 다시 영상을 확인했다. 확실히 폐를 침범한 암 조직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는 끝까지 준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위에 전이된 암 조직까지 줄어든 것을 확인하고는 백기를 들었다.
각도와 시점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스캐너를 조작한 것은 본인이었으니까. 오히려 준의 실력을 더욱 드러내는 짓을 해 버린 것이다.
“슬슬 진료를 마무리해도 될 것 같군. 고생했어. 아그네스 선생.”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아그네스가 멋쩍게 웃었고, 준은 학생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준은 문득 자신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에는 존경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렇게 빨리 바뀔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첫 공개 진료는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다. 각하의 상태는 호전되었어. 이대로 보존적 치료를 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겠지.”
“교수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질문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런 방법을 고안하신 겁니까?”
“간단해. 다른 사람들처럼 안 된다고 단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게 아닙니까?”
“조금 다른 문제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치유사라면 어느 상황에서든 쉽게 포기해서는 안 돼. 너희들에겐 이상론처럼 들릴 거다. 맞아. 이상론이지. 우리는 앞으로 인간의 목숨을 다루는 일을 해야 해. 수많은 이상론을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목숨의 무게를 견딜 수 있거든.”
목숨의 무게.
그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침상에서 옷을 고쳐 입던 아레스 공작도 은근한 눈으로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가슴에 와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생각해 볼 문제지.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건지 함께 탐구해 보자고. 강의실에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준은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 아레스 공작을 향해 박수를 쳤다. 덕분에 주인공이 아레스 공작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학생들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아레스 공작에게 예를 올렸다.
의례적인 말들이 오갔지만, 준과 아그네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환담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치하의 말을 마친 아레스 공작은 두 번째 공개 진료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대성공이에요. 선생님. 기대 이상인데요?”
“그래. 운이 좋았군.”
“운이 아니라 선생님 실력이죠.”
“거기엔 네 실력도 포함이다.”
“당연하죠. 그럼 우리 하이파이브 한번 해요. 네?”
아그네스가 오른손을 들자 준이 웃으며 손을 들어 주었다. 짝, 두 사람은 힘차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공개 진료는 성공했다. 완벽하게.
* * *
다음 날, 준은 여전히 같은 시간에 연구실로 출근했다. 전날과는 출근 풍경이 달랐다. 의학부 학생들이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늦게 연구실에 도착하고 말았다.
“교수님. 지각이네요.”
“학칙에 따른 출근 시간은 아직 10분 전인데?”
“강준 타임으로는 30분 지각입니다. 정확히는 31분이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오다가 학생을 몇 명 만났다. 이야기 좀 하느라 늦었지.”
“하긴. 어제 대단했죠. 하지만 대단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교 브로콜린이 서류 한 장을 들고 자신만만하게 다가왔다. 외투를 벗고 자리에 앉은 준은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게 뭔데?”
“미리 말씀드리면 재미없잖아요. 직접 보시죠.”
준은 내용을 확인했다.
자신의 교수 임용을 반대하는 청원서의 철회서였다. 어제 공개 진료에 참여했던 학생은 물론, 그 소식을 들은 다른 학생들의 이름과 서명이 적혀 있었다.
수를 세어 보니 과반수가 넘었다.
많은 학생들이 마음을 돌렸다. ‘로열 클럽’에서 추진하던 음모가 보기 좋게 무산된 것이다.
“그거 사본입니다. 원본은 학장실로 전달됐어요. 아직 철회하지 않은 학생도 몇 명 있는 것 같은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몇몇 꼴통들 빼고 다 서명 철회를 할 거 같습니다.”
“꼴통이라면?”
“아시잖아요? 로열 클럽. 그놈들은 자존심이 세서 절대 철회 안 할 겁니다. 이 기회에 참교육을 시전하시죠.”
브로콜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전공임에도 그들에게 피해를 받은 적이 있는지 처벌을 원하는 것 같았다.
준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곧 그가 브로콜린에게 물었다.
“학칙을 따져 봤을 때 이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 수 있지?”
“항명이나 다름없으니까 제적을 당해도 할 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부모님을 호출한다거나 하면 일이 좀 복잡해지겠죠. 켈빈 그놈이 수저 하나는 제대로 물고 태어났거든요.”
“힐데브란트 가문이라고 했던가…….”
“예. 왕가의 일원이자 왕국의 재상을 수도 없이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죠.”
준이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준의 고민이 깊어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브로콜린이 그 사이에 차를 준비했다. 찻물이 향긋하게 우러난 이후에도 준이 같은 자세로 고민을 하고 있자 브로콜린이 말했다.
“아직도 고민하고 계세요? 찝찝하시면 그냥 넘어가세요. 어차피 많은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일을 크게 벌릴 필요도 없죠.”
“아니. 브런치로 뭘 먹으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고 있었지. 가볍게 샌드위치로 배를 채워야겠군.”
“하, 교수님께도 이런 면모가 있으셨군요.”
“학장님께서 최종 결정을 하실 테니 기다려 보지. 아레스 각하의 치료가 순조로우니, 학장님도 그대로 덮어 두고 갈 수는 없을 거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공부나 하고 있을게요.”
준은 도망가려는 브로콜린을 붙잡아 자신의 맞은편에 앉혔다. 그리고 물었다.
“공개 진료 소감은?”
“전 의학 전공이 아니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겠더라고요.”
“뭔데?”
“스캐너 화질이 엉망이었어요. 그거 대체 어떻게 판독하는 겁니까? 장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던데요.”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캐너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누구나 봐도 모양을 뚜렷이 알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보겠다고요.”
“좋아. 지원이 필요하면 뭐든 말해라.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도록 하지.”
의외의 제안에 브로콜린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수상한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교수 월급으로는 감당이 안 될 텐데요? 아카데미 교수직은 명예직에 가까워서 봉급이 별로 많지 않잖아요.”
“우리 가문의 주력 사업이 뭔지 아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엘누아르 가문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금광업과 귀금속 공예야. 이제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아, 혹시 엘누아르라는 귀금속 브랜드가 교수님 가문의 것이었습니까? 요즘 엄청 인기라던데요.”
“맞아.”
준을 바라보는 브로콜린의 눈이 달라졌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준에게 예를 올렸다.
“그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이 미천한 종. 성심성의껏 교수님을 모시겠나이다.”
“하던 대로 해라. 닭살 돋는다.”
“하하하. 역시 그러는 게 낫겠죠? 그럼 전 하던 연구를 마저 하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잠시 묵혀 두셨다 이따 말씀해 주세요.”
브로콜린이 책상에 앉아 연구를 시작했다.
얼마나 그 일에 애착이 있는지는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브로콜린은 불러도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연구에 푹 빠져 있으니까.
준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꺼냈다.
그러다 문득 아그네스가 떠올랐다.
‘공개 진료 소식이 왕립 병원에도 갔을 텐데.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려나?’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 *
시골에서 올라온 보잘것없는 치유사지만, 그나마 마나를 다룰 줄 알아 써먹을 구석은 있는 소녀.
그게 왕립 병원에서 아그네스에게 내린 냉정한 평가였다.
왕립 병원의 치유사들은 모두가 마나 유저였다. 거기에 이론과 실전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아그네스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아그네스가 갖추고 있는 재능은 환자와의 유대감을 쌓는 건데, 대형 병원이다 보니 진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그네스는 왕립 병원 적응이 쉽지 않았다. 동료 평가도 거의 최하위였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했던 것은 이곳에서도 배울 게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누아 마을 진료소와는 다르게 정말 다양한 질병을 목격했고, 또 치료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힘들지만, 그 힘든 일이 지나면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아그네스 선생! 어디 갔었어? 한참을 찾았다고.”
복도를 걷던 아그네스가 몸을 돌렸다. 블론드의 젊은 남자 치유사 하나가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아그네스와 같은 내과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필스너라는 치유사였다. 아그네스보다 네 살 위인데, 그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저 회진 돌고 왔어요. 이제 퇴근하려고요. 혹시 급환이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어제 아레스 공작 공개 진료에 참여했다면서. 왜 말을 안 했어? 엄청난 일을 그렇게 비밀스럽게 하다니.”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났나요?”
“답답한 친구네. 어떻게 안 날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닌 아레스 각하의 진료인데. 성공적이었다면서? 다들 난리도 아니라고.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어.”
“왜요?”
“당연히 새로운 치료 방법을 배우고 싶으니까!”
아그네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준의 보조라고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따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죄송한데 저 일이 좀 있어서 가 봐야 해요. 다음에 말씀 나눠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네가 내과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다들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니까?”
“다음에요. 정말 죄송해요. 다른 분들껜 말씀 잘해 주세요.”
“이봐. 아그네스 선생!”
“저 먼저 가요.”
단호하게 말을 자른 아그네스는 짐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